안녕하세요.
창작그룹 비기자입니다.
 
비기자는 최근 몇년간 장애 예술, 장애인 예술교육, 장애문화예술교육 과 관련하여
강의, 자문, 교육, 연구 등의 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공공기관에서 발행하는 웹진, 월간지 등에 글을 기고하고 있습니다.
 
비록 비기자가 추구하는 방향성이 주축이 되는 내용이지만
이러한 주제와 관련하여 국내에 소개된 자료가 많지 않기에
그동안 쓴 글 등을 모아 공유합니다.
 
그러나 이 자료들은 모두 몇가지 방법론을 제시,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확고하게 정리된 개념과 매뉴얼로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 활동을 계획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비기자는
본 자료가 현장에서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계신 분들에게 
확장된 질문을 발생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관련 내용에 대해 궁금하신 점이 있으신 경우
아래로 문의주시기 바랍니다.
대표 최선영
voslss@hanmail.net
010.8504.1077 
 
*2021년부터의 자료는 아래 홈페이지에 업로드합니다.
https://uugoorichoi.tistory.com
 
 
 
 
◈ 장애예술기획자 양성과정 <서론이 길다> 과정기록집(파일) 공유
bigija.tistory.com/161

장애예술기획자양성과정 <서론이 길다> 과정기록집(파일) 공유합니다

장애예술기획자양성과정 <서론이 길다> 과정기록집(파일) 공유합니다. *책자 파일 다운받기 drive.google.com/file/d/1NlxiScQ6wI-CGoKsKnXo6deasmQn6aBj/view?usp=sharing 2020 장애예술기획자 양성과정_서론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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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 '큰배미곳아트센터' 모델링 워크숍을 마치며 
bigija.tistory.com/189

2020 '큰배미곳아트센터’ 모델링 워크숍을 마치며

사단법인 로아트가 운영하는 대야미스튜디오에서 모두를 위한 문화예술공간 ‘큰배미곳아트센터’ 모델링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대야미스튜디오에서 작업하고 있는 발달장애 창작자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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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 장애인 예술 매개자 양성과정 <렛잇 비 Let it be> 결과자료집 
bigija.tistory.com/181

2020 장애인 예술 매개자 양성과정 <렛잇비 Let it be> 결과자료집

2020년 충북문화재단에서 진행한 장애인 예술 매개자 양성과정 <렛잇 비 Let it be> 결과자료집을 공유합니다. 장애인 예술 매개자 양성과정 <렛잇비 Let it be> - 책임 프로젝트 매니저 / PM 김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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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 장애와 비장애가 공존하는 문화예술 오픈포럼 "같이잇는가치" 발제문 <같이 좀 모르자>

bigija.tistory.com/167

장애와 비장애가 공존하는 문화예술 오픈포럼 "2020 같이잇는가치" 발제문 <같이 좀 모르자>

장애와 비장애가 공존하는 문화예술 오픈포럼 "2020 같이잇는가치"에 함께 했습니다. 자세히 보기 및 사전신청 : 소개 같이 잇는 가치 문화예술 오픈포럼 10.16.(금) 오후 5시 / 10.17.(토) 오후 6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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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 군포시 발달장애 예술인 지원방안 모색을 위한 연구모임 아카데미 "스튜디오 그리고 무엇이 필요한가" 
bigija.tistory.com/171

2020 군포시 발달장애 예술인 지원방안 모색을 위한 연구모임 아카데미

"군포시 발달장애 예술인 지원방안 모색을 위한 연구모임" 대표의원: 신금자, 연구의원: 장경민, 홍경호, 이우천 협력단체: 사단법인 로아트 "스튜디오 그리고 무엇이 필요한가"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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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 '큰배미곳아트센터' 모델링 워크숍
bigija.tistory.com/168

2020 '큰배미곳아트센터’ 모델링 워크숍

사단법인 로아트가 운영하는 대야미스튜디오에서 모두를 위한 문화예술공간 ‘큰배미곳아트센터’ 모델링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대야미스튜디오에서 작업하고 있는 발달장애인 창작자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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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 예술 매개 온라인 포럼_ 매개자의 자기질문 : 어디서부터 무엇을 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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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장애 예술 매개 온라인 포럼

2020 장애 예술 매개 온라인 포럼 매개자의 자기 질문 "어디서부터 무엇을 할 수 있나?" ◎ 일시 : 2020. 9. 22. 2시 ◎ 참여방식 : 온라인 포럼 진행동안 실시간 채팅 참여를 통한 질의응답 및 의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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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인 자녀의 '예술하기'가 앞서나가기 전에 / 부모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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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자녀의 ‘예술하기’가 앞서나가기 전에

*본 글은 사단법인 로아트의 내부강의를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장애인 자녀의 ‘예술하기’가 앞서나가기 전에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대표 1. 나의 부모는 나의 ‘예술하기’를 사실상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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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라인 강의] 장애문화예술교육 / 부모교육 
bigija.tistory.com/157

[온라인 강의] 장애문화예술교육

2020년 6월에 '함께해서신나는문화예술협동조합 틈'에서 진행한 장애문화예술교육 관련 강의가 '틈teum' 유튜브 채널에 공유되었습니다. 1편_기대하지 않고 표현으로 만나기 www.youtube.com/watch?v=d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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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재단 잠실창작스튜디오 전문가 매칭 프로그램 사전 간담회 발제문 '흔들리는 언어를 쌓아올리는 일'
https://bigija.tistory.com/155

[발제문] 흔들리는 언어를 쌓아 올리는 일

* 본 원고는 서울문화재단의 '잠실창작스튜디오 전문가 매칭 프로그램' 사전 간담회를 위한 발제문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흔들리는 언어를 쌓아 올리는 일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다른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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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2019 꿈틔움 예술창작소 1:1멘토링지원사업'  결과자료집 원고 : 해석의 근거, 참조의 흔적 
https://bigija.tistory.com/153

해석의 근거, 참조의 흔적

*본 원고는 서울시 '2019 꿈틔움 예술창작소 1:1멘토링지원사업' 결과자료집에 실린 글입니다. *본 사업은 <장애인문화예술판>이 총괄 운영하였습니다. *예술창작소는 서울시에 거주하는 장애청년(만19세이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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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 장애인의 생활예술 활동지원 및 FA 역량 개발방안 연구
https://bigija.tistory.com/m/148

2019  장애인의 생활예술 활동지원 및 FA 역량 개발방안 연구보고서

비기자가 운영하는 '짓거리연구소' 이름으로 참여했던 서울문화재단의 [2019 장애인의 생활예술 활동지원 및 FA 역량 개발방안 연구] 보고서가 발간되었습니다. 서울시 생활문화 활성화 사업을 중심으로 장애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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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 충북문화재단 '장애인 예술 매개자 양성 프로젝트 <렛잇비:Let it be> 결과자료집 원고 : 실천을 망설이던 순간에, 나의 삶으로부터
https://bigija.tistory.com/151

실천을 망설이던 순간에, 나의 삶으로부터

*본 원고는 충북문화재단의 '2019 장애인 예술 매개자 양성과정 프로젝트 <렛잇비 : Let it be>' 결과자료집에 실린 글입니다. 실천을 망설이던 순간에, 나의 삶으로부터 창작그룹 비기자 / 최선영 첫날부터 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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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서울문화재단 '2019 서울형 장애 아동, 청소년 예술교육사업' 아카이빙북 원고 : 장애예술교육, 특수성을 넘어 개별성으로
https://bigija.tistory.com/138

장애예술교육, 특수성을 넘어 개별성으로

*본 원고는 서울문화재단의 '2019 서울형 장애 아동, 청소년 예술교육사업' 아카이빙북에 실린 글입니다. 장애예술교육, 특수성을 넘어 개별성으로 창작그룹 비기자 / 최선영 먼저 질문을 하고 싶다. A에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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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서울문화재단 웹진 [연극in] 좌담회_장애예술 매개자 편
https://bigija.tistory.com/136

서울문화재단 웹진 '연극in' 좌담회

일시:2019. 10. 27. 일. 오전 11시 장소: 서울문화재단 대학로연습실 다목적실 참석: 성수연(배우), 신원정(다이애나밴드), 정소은(독립기획자), 최선영(창작그룹 비기자) 진행:문영민(장애예술 연구자) 정리: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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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발제문] 장애-예술-공동체 : 분리된 채로 연결된 
https://bigija.tistory.com/135

[발제문] 장애-예술-공동체 : 분리된 채로 연결된

공동체로 살아가기 2019.11.01. (금) 14:30~17:00 청년일자리센터 다목적홀 장애-예술-공동체 : 분리된 채로 연결된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예술가(예술 작품을 창작하거나 표현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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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장애예술인 창작 활성화 연구 최종보고서 
http://www.i-eum.or.kr/u2/index.busan?contentId=29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음

공지사항 korea disability arts & culture center 소통/참여 공지사항

www.i-eum.or.kr

 
 
 
 
 2019 장애인 문화예술교육 방향성 및 교보재 연구 보고서 '기대하지 않고 표현으로 만나기'

 

2019 장애인 문화예술교육 방향성 및 교보재 연구 보고서 '기대하지 않고 표현으로 만나기'

장애인 문화예술교육 방향성 및 교보재 연구 보고서 기대하지 않고 표현으로 만나기 본 연구는 문화예술교육 안에서 장애인의 표현활동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영역을 다시 바라봅니다. 그 순간이 누구에게, 왜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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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 서울문화재단 월간지 [문화+서울]
장애 예술,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 : 다급함의 문제는 문화나 예술로 해결되지 않는다

 

장애 예술,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 : 다급함의 문제는 문화나 예술로 해결되지 않는다

테마토크 장애 예술,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 magazine.sfac.or.kr 서울문화재단 월간지 [문화+서울]에 기고했습니다. 장애 예술,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 : 다급함의 문제는 문화나 예술로 해결되지 않는다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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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 장애-비장애가 공존하는 문화예술포럼 <같이 잇는 가치> 발제문

 

2019 장애-비장애가 공존하는 문화예술포럼 <같이 잇는 가치> 발제문

2019 장애-비장애가 공존하는 문화예술포럼 <같이 잇는 가치> 발제문 장애예술이라는 영역을 어떻게 만날지 고민하는 분들에게 / 창작그룹 비기자 최선영 사례 소개를 위한 긴 서론 장애예술이라는 타이틀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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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 장애인 문화예술교육 <도시놀이본부>

 

2019 장애인 문화예술교육 <도시놀이본부>

비언어적인 놀이의 가능성 : <도시놀이본부> 프로그램을 마치며 본 프로그램에 참여한 장애인 청소년 10여 명 대부분은 언어적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비기자는 이러한 상태를 문제로 전제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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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 웹진 '이음' 좌담회 : 장애인 예술과 예술교육

 

웹진 '이음' 좌담회 : 장애인 예술과 예술교육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웹진 [이음]을 통해 '장애인 예술과 예술교육'에 대한 좌담회에 참여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들을 수 있는 자리"가 많아지길 바랍니다. *좌담회 내용보기 : http://ieumzine.kr/arch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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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경기 문화예술교육 비평웹진 <지지봄봄> 26호 '누구와 무엇으로 어떻게 만날까'

 

2019 경기 문화예술교육 비평웹진 <지지봄봄> 26호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의 문화예술교육 비평웹진 <지지봄봄> 26호가 발행되었습니다. 비기자는 이번호에 기획과 편집에 참여했습니다. "누구와 무엇으로 어떻게 만날까" http://ggarte.ggcf.kr/?p=23 경기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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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 잠실창작스튜디오 <잠실,잠시> 오픈스튜디오 자료

 

2018 잠실창작스튜디오 <잠실,잠시> 오픈스튜디오 자료

2018년도에 비기자가 발제자로 참여했던 잠실창작스튜디오의 '장애인 문화예술 창작공간' 관련 오픈테이블 자료를 공유합니다. 자료 정리해주신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2018 잠실창작스튜디오 <잠실,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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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웹진 <이음> 2호_장애 예술인 역량강화 : 교류와 협력 '우리는 만나려 하는가'  

 

우리는 만나려 하는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웹진 [이음] 2호_장애 예술인 역량강화 : 교류와 협력 장애 예술인 창작 역량 강화를 둘러싼 질문들 우리는 만나려 하는가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장애 예술이 장애인의 사회참여 또는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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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 수원시평생학습관 웹진 [와] 166호_일본의 사회문화예술교육 사례
장소를 만드는 사람들 ① 일본 야마나미 공방

 

장소를 만드는 사람들 ① 일본 야마나미 공방

수원시평생학습관 웹진 [와] 166호_일본의 사회문화예술교육 사례 장소를 만드는 사람들 ① 일본 야마나미 공방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여기가 누구나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아틀리에입니다.” 13평짜리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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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 수원시평생학습관 웹진 [와] 166호_일본의 사회문화예술교육 사례
장소를 만드는 사람들 ② Swing

 

장소를 만드는 사람들 ② Swing

수원시평생학습관 웹진 [와] 166호_일본의 사회문화예술교육 사례 장소를 만드는 사람들 ② Swing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은 흔든다는 것이다. 흔든다는 것은 변한다는 것이며 변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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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 수원시평생학습관 웹진 [와] 166호_일본의 사회문화예술교육 사례
장소를 만드는 사람들 ③ 아틀리에 코나스

 

장소를 만드는 사람들 ③ 아틀리에 코나스

수원시평생학습관 웹진 [와] 166호_일본의 사회문화예술교육 사례 장소를 만드는 사람들 ③ 아틀리에 코나스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일본의 예술단체나 기관을 답사하며 사회문화예술교육 관련 조사를 한 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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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 수원시평생학습관 웹진 [와] 166호_일본의 사회문화예술교육 사례
장소를 만드는 사람들 ④ 코코룸

 

장소를 만드는 사람들 ④ 코코룸

수원시평생학습관 웹진 [와] 166호_일본의 사회문화예술교육 사례 장소를 만드는 사람들 ④ 코코룸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이렇게 운영이 어려워지는데 왜 이런 활동을 계속하려고 하나요?” 나에게 매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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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다름의 가치로 만나기> 프로젝트

 

2016 <다름의 가치로 만나기> 프로젝트

비기자는 2016년도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불가사의한 자율학습모임&프로젝트’ 지원사업에 프로젝트 팀으로 선정되어 '다름의 가치로 만나기'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장애문화예술교육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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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놀이창작물 제작 프로젝트 '다른 시간'

 

2015 놀이창작물 제작 프로젝트 '다른 시간'

2015 놀이창작물 제작 프로젝트 '다른 시간' (인천문화재단 '바로 그 지원' 지원사업 선정) 국내의 발달장애인법은 최근 제정되어 2015년 11월 21일부터 발의되었다. 그러나 법률은 물론 발달장애에 대한 사회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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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원고는 부천문화재단 정책웹진 '10,000(만)' 2020년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아깝지만. 다행히도. 그럼에도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대표

 

 

 

그동안 해온 것들이 아깝지만 내려놓아야 한다.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라고 충분히 표현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번에는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오랜 시간 준비했고 많은 자원과 자본을 쏟아부었고 여러 사람이 마음을 담았지만 그럼에도. 코로나19로 인한 갑작스러운 상황 안에서 우리는 무기력하고 허무해지기도 하지만 많은 부분에 있어서 ‘아깝다’는 생각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그동안 해온 것들 없이 불쑥 튀어나오는 아쉬움은 아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많은 것들을 준비해왔을까를 생각하면 그것은 개인적 차원에서부터 국가적 차원까지 너무나 아쉽고 또한 아깝다. 그 시간의 시작점이 몇 년 전, 몇십 년 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감정은 우리에게 더 큰 무게로 다가온다.

 

그런데 우리가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보다 솔직하게 무엇일까. 올봄에 하반기를 기대하며 놓지 못했던 것, 그리고 현재도 2021년과 그 이후를 상상하며 놓지 못하고 있는 것. 그것은 한 명의 창작 과정, 작은 대화, 보이지 않는 교감, 멈추거나 쉬어보는 시간, 느린 움직임 같은 것일까. 아니면 몇 차시 프로그램, 수백 명이 참여하는 행사, 올해 끝내야 하는 사업, 여러 사람들이 게시물을 조회했다는 근거, 생산된 결과물 같은 것들일까. 전자와 후자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한쪽의 가치만을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보다 단호하게 우리에게 질문을 던져보고 싶기는 하다.

 

나 역시 코로나 상황에도 많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자 노력했고 들쭉날쭉한 행사 일정에 불안해했다. 하지만 문득 작업의 진행 여부나 결과물을 중심으로 올해의 활동 의미를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이 들었다. 큰 프로젝트가 상반기부터 무산되었고 여름에 진행하려던 행사는 밀리고 밀려 급박하게 가을에 진행되었는데 그것의 진행 여부가 과정에서의 다양한 만남과 의미보다 중요하게 전제되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어떻게든 하기라도 하면 다행이었으니까. 안 하고 넘어가기엔 아까운 것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그런데 다시 천천히 생각해보면 급히 진행한 사업 혹은 작업들 안에서 더 시간을 두고 들여다보고 싶었던 대화나 소통의 순간들이 있었다. 그것은 길고 깊은 대화일 때도 있었고 일시적인 교감일 때도 있었는데 오히려 다수가 모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예전보다 더욱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그 순간에 대해 다시 생각을 정리하려고 하면 그것은 이 다급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느리고 미련한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미루거나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더 급박한 일정들을 소화해야 했으니까. 그렇게라도 해내는 것이 올해는 현실적으로도 중요하고 감사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내년부터는 어떨까. 불특정 다수를 향한 제안보다 나에 대한 계획을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데, 나는 ‘아까움’을 이유로 내려놓지 못하는 것들을 좀 더 내려놓고자 한다. 이것은 환경적 요인 때문에 앞으로의 계획을 바꿔야겠다는 판단이라기보다 그동안 미뤄왔던 질문을 마주해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내년에도 비대면 활동이 많아질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에 그에 적절한 활동 방식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은 규모의 대면 활동에서도 충분히 들여다보지 못했던 순간들을 더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은 세계적인 환경 변화에 대한 문화예술 분야에서의 빠른 대처 능력 마련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렇게 발 빠른 대응, 혁신적인 계획 수립, 대응체계 마련, 새로운 소통 방식의 개발 등 기획 및 생산의 패러다임으로부터 더욱 거리를 두고자 한다. 왜냐하면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도 예측하기 어려웠던 상황이 전 세계를 덮쳤고 문화예술계 역시 그동안의 이슈들과 맞물려 그 상황을 직면했다. 그런데 어떻게 몇 개월 만에 바로 내년, 혹은 몇 년 후의 삶의 태도나 방식을 고민할 수 있을까. 시간이 필요하다. 느리게 사유하고 싶다. 그동안 바쁜 사회의 흐름이 오히려 자연스럽고 일반적인 속도라고 여기며 달려왔기 때문에 이 상황을 마주한 것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다시 빠르게 대응책을 제시하려 한다면 우리는 비슷한 어려움을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른다.

 

그때 그 사람과 충분히 대화했을까, 프로젝트 운영을 위해 누군가의 창작행위를 이용하려고만 했던 것은 아닐까, 시민 대상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전제했던 시민의 개념이 너무 피상적이지는 않았을까, 작고 느린 시도들 안에서 인간은 어떤 속도를 지켜낼 수 있을까, 큰 행사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면 그 과정에서 쓰레기는 얼마나 덜 발생할까 등등. 천천히 사유하고 성찰하는 과정을 이번에는 미루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문화적, 예술적 과정은 사회의 지배적인 흐름과 달리 효율적이고 확실한 답변을 마련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문화예술 분야에서의 사유와 성찰은 지금 가능한 질문과 태도를 발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우리는 어느샌가 불확실함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사회 안에 와있다. 무언가에 의해 떠밀려 온 것인지 우리 스스로 그런 사회를 열심히 만들어낸 것인지에 대한 질문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온 방식, 문화와 예술을 해석하거나 기획하거나 확장해온 방식 안에 우리의 긴 역사와 노력이 담겨있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을 되짚어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은 다른 계획이 아닌 다른 방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앞이 아니라 뒤로 가보며 성찰하는 것, 혹은 각자 안으로 깊이 들어가 미뤄왔던 질문을 꺼내어 보는 것. 당연히 오래 걸릴 수밖에 없는 그 시간을 확보해 보는 것. 정책이나 제도 역시 문화예술계의 어려움에 빠르게 답변하고 대응책을 마련해 주는 것만으로 사회적 역할을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수에게 닥친 불안과 불확실함 안에서 지금 필요한 태도를 신호처럼 보여주는 것도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꺼내어 볼 질문과 경험이 많다. 외면하고 지나온 실수도 많다. 그래서 지금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실천도 많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다’는 구호보다 희망적인 신호가 아닐까. 하지만 그 신호는 저 멀리 우뚝 선 등대가 아니라 이제는 사방에 흩어져있는 파편화된 무언가일 것이다. 지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잠시 멈춰 서서 과연 저 멀리 빛나던 것이 등대였는지, 다른 불빛은 없는지, 어디로 먼저 가볼 수 있을지 각자의 시간을 가져 보아야 한다.

 

 

사단법인 로아트가 운영하는 대야미스튜디오에서 모두를 위한 문화예술공간 ‘큰배미곳아트센터’ 모델링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대야미스튜디오에서 작업하고 있는 발달장애 창작자들과 각자가 상상하는 아트센터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공간을 모형으로 만들어보았습니다. 본 원고는 그 과정을 마친 후 쓴 글입니다.

 

 

 

2020 '큰배미곳아트센터’ 모델링 워크숍

 

총괄. 이지혜
진행. Alpha.lee, 조영환
사진. 양승욱
기록. 고륜호
자문. 김성화(건축사사무소 연화)
지원. 이설희
협력. 창작그룹 비기자

 

 

 

 

 

게임, 팔굽혀펴기, 어린이 노래, 수안보, 예방접종, 순대곱창, 동물의 숲의 공존?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대표

 

 

‘모두의’ 공간이란 무엇을 전제할까. 최근 ‘모두’에게 열린 기획들이 문화예술 분야에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큰배미곳 아트센터> 모델링 워크숍 역시 ‘모두의’ 공간을 전제로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장애인을 사용자의 중심에 두었던 건축적 요소, 공간적 특성 등으로부터 벗어나 발달장애인 창작자도 편안하게 오고 갈 수 있는. 그런데 이것은 막연하게 더 다양한 사람들이 올 수 있는 공동의 공간, 모두의 공간을 상정하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의 필요와 욕구가 동시에 반영될 수 있는. 이러한 관점은 사회적 의미와 공공성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 유니버설 디자인도 이와 같은 측면에서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공동의 가치가 대두되고 있고 실제로 그것이 중요함에도 매우 개인적인 취향, 욕구, 필요, 가치관, 관심사 등이 동등하게 등장할 수 있는 환경이란 사실상 쉽지 않다. 그럼에도 본 워크숍은 이와 같은 어려움을 적극 끌어안고 진행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진행자가 워크숍 내내 참여자들의 개인적인 의견이나 일상을 집요하게 묻고 확인했던 과정을 통해 드러난다.

특히 첫 시간에는 참여자들이 대야미스튜디오로 오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진행자는 놀이카드를 이용해 일상적인 동선을 세세히 들여다보고 기록했다.

 

 

 

- 진행자 : 각자 몇 장의 카드를 나눠드릴 거예요. 카드에다가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여기, 로아트에 오기까지 어떤 것을 했는지 알려주세요.

- 참여자1 : 저는 이렇게 썼어요. 어제 있었던 일이긴 한데 매일 이렇게 반복돼요. 제 패턴이에요. 오기 전에 게임을 했어요. 컴퓨터 게임이요. 그림 그리러 오기 전에 게임하고 왔어요.

- 진행자 : 게임 말고는 뭘 했어요? 게임밖에 안 했어요?

- 참여자1 : 점심 먹었어요. 점심. (점심을 먹었다는 내용을 계속 적는다.) 밥 먹고 나서 휴식을 취하고 게임을 해요. 게임. 쉬는 시간에 게임을 해요.

- 참여자2 : 저는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노래도 하고 싶었어요. 제목은 <어린이 노래>. 집에서 잘 놀고 있었어요. 재미있었어요. 병원에도 가요.

- 진행자 : 노래는 집에서 부르는 거예요?

- 참여자3 : 집에서 노래를 해요.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노래를 불러요. 두 팔 벌려 하늘 높이... 잠을 잡니다. 마무리입니다.

 

진행자는 발달장애가 있는 참여자들이 혹시나 답변하기를 어려워할까 봐 질문을 조금만 하거나 단순하게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참여자들이 스스로 더 자세하게 생각하고 표현하도록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두 번째 시간에는 워크숍이 끝난 후의 일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 진행자 : OO씨는 로아트가 끝나고 나서는 하고 싶은 게 뭔가요?

- 참여자4 : 팔굽혀펴기 하고 싶어요. 집 가서 운동해야 해요.

- 진행자 : 어떤 팔굽혀펴기를 몇 번 하고 싶어요? 팔굽혀펴기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잖아요. 그것도 한번 생각해봐요.

- 참여자4 : 50번 할 거예요. 팔굽혀펴기.

 

- 참여자5 : 로아트 끝나고 수안보 가고 싶어요. 수안보.

- 진행자 : 수안보가 어디에 있어요?

- 참여자5 : 상록수역에 수안보. 상록수역 옆에 수안보가 있어요.

 

- 진행자 : **씨는 예방주사를 맞고 싶어요? 예방주사는 어디서 맞아요?

- 참여자6 : 병원에서. 끝나고 병원 가요. 순대볶음 만들고 싶어요.

 

- 진행자 : @@씨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적었네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어떻게 그리고 싶어요? 그런 것도 자세히 적어줘요. (생략) 애니메이션도 보고 싶고 닌텐도 게임도 하고 싶다고 적었네요. ‘동물의 숲’ 할 거죠? 그러면 ‘동물의 숲’에서 뭘 하고 싶어요?”

- 참여자7 : 어떻게 아셨지? 저는 ‘동물의 숲’에서 자연 친화적인 대도시를 만들 거예요.

 

여기에는 참여자들이 발달장애인이라 하더라도 각자의 언어와 방식으로 답변할 것이라는, 그리고 세세한 답변도 해봐야 한다는 진행자의 생각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큰배미곳 아트센터를 상상하는 데에 어떤 역할을 할까.

 

한 개인의 일상을 쪼개어 살펴보는 것은 공동의 공간에 대한 접근을 개별적 삶으로부터 시작해보려는 의도와도 연관된다. 이것은 각기 다른 일상으로부터 공통점을 도출하기 위함이 아니라 각자의 삶이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를 주목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모두의 공간, 공동의 공간을 상상해보는 것에 있어서 개별성의 영역을 가장 중요하게 살피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빠르고 효율적으로 공간을 설계하는 과정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접근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상의 공간을 함께 그려본다는 워크숍의 취지를 전제할 때, 이러한 과정은 문화적, 예술적 의미에서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기도 했다. 실제화하기 적절한 규모와 시설을 판단하기 위해서 본 워크숍이 기획되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워크숍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개별성과 다양성이 확보될 수 있는 공간이자 장소에 있어서 우리가 무엇을 들여다볼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비장애인의) 예상보다 발달장애인이 한 공간을 사이좋게 나눠 쓰거나 공존을 꿈꾸지는 않는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참여자들은 혼자 좋아하는 것에 집중해보고 싶어 했고 그 시간이 집 밖에서의 공간에서도 조금이라도 확보되기를 바라기도 했다.

 

문득 ’모두의‘ 공간은 모두의 ‘무엇까지’ 포함할 수 있는 공간일지 질문이 생긴다. ‘모두’라는 말도 ‘매우 다른 개별자들’이라고 풀어서 표현해보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매우 다른 개별자들의 무엇까지 우리는 고려하고 있었을까. 낯설거나 익숙하지 않은 취향, 반복적인 행위, 매우 큰 혹은 작은 목소리, 생각을 읽기 어려운 침묵, 비언어적인 표현 등도 그 ‘무엇’ 안에 적극적으로 포함되어 존중받을 수 있을까. 그것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난 후에 개별성의 스펙트럼이 너무 넓어서 난감해진다 하더라도.

 

 

 

 

구체적인 구조물, 동선, 규모, 재질까지도 떠오르게 했던 건축 관련 워크숍에서 우리는 어디로 얼마나 뻗어나갈지 모를, 그래서 매우 인간적인 요소들을 확인했다. 이제 그 요소들이 안전함과 안정감을 위해 각자의 특성을 적당히 제어하는 일 없이 불쑥불쑥 등장할 수 있는 공간을 생각해본다. 이것은 몸이 불편한 사람이 잘 이동할 수 있고 편리하게 생활하게 되는 것과는 다른 차원으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기도 하다. 사람은 불편함을 줄이는 것만으로 삶의 의미를 갖게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본 워크숍은 누가 누군가의 불편함, 불평등을 해소해주기 위해서 기획, 진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서 우리가 함께 시간을 보내고 각자의 일상을 각자의 목소리로 애써 표현해보았을까.

 

공간 혹은 장소는 이러한 의미를 구체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적절한 주제였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동시에 언제든지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논리로 흐를 수 있는 주제이기도 했다. 필요한 것을 만들(어주)면 된다는 생각이 우리에게는 더욱 익숙하니까. 하지만 우리는 실제적 계획이 당장 필요하지 않은 불명확함 안에서 이 워크숍을 진행했고 그렇기에 더욱 실험하고 사유할 수 있었다. 더 많이 물어보고 더 빗나가게 답변할 수 있었다. 많이 자주 빗나가서 그 간극이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발생하는지도 살필 수 있었다. 이제는 우리가 집중했던 것들과 현실과의 연계 지점을 찾아볼 것인지, 혹은 조금 더 뻗어나가 질문해볼 것인지 또 다른 시작점에 서 있다. 현재 충분하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지금 여기에서 보게 된 것을 다시 보자.

 

*본 원고는 성북문화재단에서 진행된 '손바닥 문화예술교육 실험실 <나 좋자고 해봤니?>'를 마무리하며 작성되었습니다. (결과자료집 수록 원고)

 

 

 

 

 

 

손바닥 문화예술교육 실험실 <나 좋자고 해봤니?>

 

일정 : 2020. 07. 23. 09. 03 () 16-18, 6

장소 : 차라리 낭만(서울 성북구 아리랑로 120-10, 정릉역 1번 출구)

진행 : 남경순(마을온예술), 예술장돌뱅이, 최선영(창작그룹 비기자)

대상 : 문화예술교육에 관심 있는 분 누구나 (15명 내외)

내용

- 나의 입장에서 바라본 문화예술교육

- 나만의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기획 및 실험(프로그램 실행비 지원)

 

일정

구분

내용

7/23

OT

[오늘의 모양]

- 오리엔테이션, 인사하기

7/30

워크샵

[나 좋자고 해봤나 교육]

- , 개별성, 다양성에 대한 탐구

8/6

워크샵&토크

[나 좋자고 해보는 교육]

- 예술과 딴짓 사이에서 발견한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대화

- 예술가/예술강사의 삶과 재미를 위한 교육 상상하기

8/13

체험

[예술장돌뱅이] 체험

- 예술가들의 1:1 프로그램 맛보기

8/20

실험

[다른 사람도 좋을까]

- 참여자별 소규모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기획

9/3

결과공유회

[함께 좋을 수 있을까]

- 참여자별 프로그램 발표

 

 

미래에도 나를 기다릴 질문 “나 좋자고 해봤니?”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대표, 성북문화재단 자치구 예술교육 활성화 지원사업 PM

 

 

오늘도 급박하게 기획된 문화예술교육 현장에 강사로 다녀왔다. 오랜만에 포근했던 주말,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싶었지만 무거운 재료 가방을 들고 지하철을 탔다. 아침도 거르고 2시간 꼬박 걸려서 낯선 장소에 도착, 여느 때처럼 자연스럽게 짐을 풀고 별일 없이 프로그램을 마쳤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그곳에 온 참여자들과 함께. 이마저도 익숙한 일이라 나는 당황도 하지 않았다. 남겨진 다과를 야무지게 챙겨 먹고 함께 한 동료와 주말에 애썼다며 서로 다독이고 집으로 돌아왔다. 14년째 이렇게 누군가의 시간 혹은 사업을 채워주고 나의 공간으로 도망치듯 되돌아가는 것이 그저 살아감의 고단함인지, 그럼에도 감사한 활동의 기회인지, 혹은 문화예술교육이라는 것인지 여전히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은 이제 나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단지,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들으며 평온해지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내일은 무얼 하며 쉴까 짧은 고민을 할 뿐이다.

 

이런 날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럼에도 문화예술교육과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는 이유는, 현실적인 이유도 크지만 오늘처럼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의 기운 때문이다. 누군가가 열심히 다정하게 참여‘해줘서’ 고맙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보통 ‘참여자’로 불리는 그 사람들의 경험이나 변화, 그들과의 소통 자체에 문화예술교육의 의미나 가치가 너무 쏠려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참여자들과 다양한 경험을 나누면, 문화예술교육을 기획하거나 진행한 사람에게도 활동에 대한 지속적인 의미와 동력이 생길까? 나도 오늘 진행한 프로그램에서는 참여자들과 적극적이고 다채로운 교감을 나누었는데, 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 활동을 언제까지 해야 할지 생각에 빠졌을까? 이젠 적당하고 무난한 문화예술교육 현장을 만드는 것에 큰 어려움도 없고 참여자들은 나에게 고맙다, 재미있다 소감을 남기기도 한다. 그럼에도 왜.

 

 

혼자 들고 다니는 재료 가방

 

 

손바닥 문화예술교육 실험실 ‘나 좋자고 해봤니?’는 이런 경험과 혼잣말 속에서 기획된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이 질문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질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참여자 신청을 받으며 확인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신청자가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후 온라인 예술교육의 방법론을 이야기하거나 미래 예술교육을 탐색하는 것이 문화예술교육 현장에는 더욱 다급한 주제일 수도 있을 텐데, 마음속에서 툭 던져진 듯한 이 질문에 공감하며 정성스러운 신청서를 쓴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 이야기를 계속해볼 수 있겠다’는 힘을 얻기도 했다. 실험실의 바로 첫 시간에 특히 그런 인상을 크게 받았는데 그 이유는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동기나 이유를 참여자들이 한 명씩 이야기하던 순간 때문이었다.

 

내가 나를 아는 것은 쉽지 않지만 알고자 하는 노력, 혹은 나를 향하며 살아보려는 시도 없이 ‘삶’에 대한 문화예술교육을 하는 것은 가능할까? 나의 ‘삶’을 담아내든 누군가의 ‘삶’을 향하거나 궁금해하든. 문화예술교육을 고민하는 사람들도 어떤 분야의 활동가, 전문가 이전에 각자의 살아냄 안에 있는 ‘사람’인데 이들이 스스로 자기 삶을 충분히 바라볼 수 있을지, 그러한 기회가 공동의 주제로 다뤄지거나 모색된 시간이 있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자신의 삶에 대해 마주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나와 타인의 ‘삶’도 문화예술교육 안에서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자신의 삶을 마주한다는 것은 결국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기도 했고 이러한 긴 고민을 조금 도발적인 질문으로 표현한 것이 ‘나 좋자고 해봤니?’였다. 현실적으로는 문화예술교육(뿐만 아니라 여러 일이나 활동)을 나 좋자고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질문은 ‘나 좋자고만 해보자’는 이기적이거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라 ‘이따금 나도 나를 돌아보며 해봐야 하지 않을까?’라는 물음이자 제안이었다. 또한 이러한 성찰은 누군가에 의해 혹은 제도나 사업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우리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살펴야 한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어딘가로 흘러가버리기도 하는 것이 삶이고, 생활이니까. 문화예술교육 활동도 그 일부이기에, 정책적으로 이 영역이 점점 고도화될수록 개개인은 자신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나는 그 흐름이나 움직임을 원했던 것인지, 나는 어디로 흘러가려고 하는지 돌아볼 필요도 있다. 거창해 보이는 이런 문제의식은 오늘의 나에게도 유효하지만 미래에도 변함없이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왜냐하면 미래에도 문화예술교육이 동시대에 다뤄야 하는 주제, 지속되어야 하는 사회적 의미나 맥락, 확장될 수 있는 방안, 이와 관련한 다양한 주체들의 역할이나 역량 등에 사회적 관심이 쏠릴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매우 개인적인 관점에서 그렇게 예상한다.) 문화예술교육과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지점에서 자신이 소진된다고 느끼는지, 어떤 순간에 외로움이나 우울감을 겪는지, 어떤 변화나 학습, 성찰의 기회를 원하는지, 이와 같은 접근이 실제로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사회적 의미나 관점을 어떻게 확장시킬지는 지금처럼 미래에도 폭넓게 다뤄지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혹시 문화예술교육에서 다뤄지거나 언급되는 ‘삶’은 주로 참여자들로 인해 드러나거나 발화되는 부분에만 집중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도 든다. 이것은 특히 다양한 문화예술교육 현장을 관찰하거나 경험하면서 나에게 구체화되었는데, 예술강사로 잘 기능하게 되는 사람은 늘어나는 반면, 바로 자기 자신으로 예술을 드러내거나 나누거나 예술에 대해 함께 질문하려는 ‘사람’은 더욱 만나기 어려워졌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문화나 예술의 중요한 가치는 ‘다양성’이기도 한데 그 다양성을 구현할 ‘개별성’이 문화예술교육의 주체들로부터 사라져간다고 느꼈던 것이다.

문화예술교육도 누군가에는 안정적이고 매끄럽게 잘 해내야 하는 ‘분야’로 인식되기도 하고 사회적 분위기나 정책적 구조도 그러한 방향성으로 흐르다 보니 좀 부족하거나 흔들리거나 촌스럽거나 망설이는 사람보다는 일정한 시간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활동의 기회를 갖게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렇게도 부족함 없는 존재일까? 좋아하는 일에 열광도 했다가 힘든 순간에 엉엉 울었다가 난감한 순간에 말문도 막혔다가 처음 하는 일에는 실패도 하게 되는 사람에 대해 먼저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대부분 그리 완벽하지도 효율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못한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이 들쭉날쭉한 각자의 감정, 경험, 특성, 관점, 관심사, 관계, 기억, 시도 등이 지금의 문화예술교육 안에서 충분히 등장하고 있을까? 혹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을까? 만약 사라지고 있다면 그 자리는 무엇으로 채워지고 있을까?

 

인간은 효율적으로만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문화예술교육이 특히 사업이나 담론 차원에서 고도화되면서 자기 이야기가 아닌 비슷비슷한 콘텐츠나 주제들이 안정성 위주로 다뤄지고 있는 듯하고 그 순간에 문화예술교육의 주체들은 자신의 역량을 효율적으로 발휘하여 정해진 시간을 채워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프로그램 자체는 세련되고 트랜디한데 어떤 ‘사람’이 고민하거나 실천하고 있다는 느낌은 줄어드는 것 같다. 그렇다면, 과연 참여자들도 그 ‘사람’을 느낄 수 있을까? ‘사람’이 아니라 프로그램이나 주제가 더 두드러져 보이거나 느껴진다면 그건 어떤 맥락에서 문화예술교육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까? 이러한 관점에서 ‘나 좋자고 해봤니?’는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관심 갖고 있는 것,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 결국 나에 대한 것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는 짧은 시도였다. 문화예술교육을 하는 사람이 프로그램 운영을 위한 기능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고자 하는 시간이 마련되어야 그 과정과 시도들이 타인에게도 ‘사람’의 기운으로 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나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거대한 이야기다. 이것은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무거운 숙제로 들린다. 하지만 예술이나 문화예술교육 이전에 그것이 가닿고자 하는 ‘삶’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이 숙제는 우리가 건너뛸 수 없는 중요한 질문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질문이 너무 부담스럽기 때문에 ‘나 좋자고 해봤니?’라고 완곡하게 표현해본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질문은 다른 표현으로도 생각해볼 수 있다. ‘나 살자고 해봤니?’, ‘나는 어떻게 살아내고 있을까?’,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을까?’ 등등. 그 질문에 참여자들은 여러 생각을 꺼내놓았고 그것은 짧은 프로그램 과정에 비해 매우 솔직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좋아하는 것을 해보거나 궁금한 것을 들춰보며 나로부터의 시작을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면 자신에 대해서도 더 애정을 가질 수 있게 되고 그제야 비로소 타인에 대한 관심을 넓혀갈 수 있을 것이다. 나 자신이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곳을 스스로 찾을 수 있어야 그 장소에 타인도 초대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장소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지속되기를 스스로 바라고 있는지 알아야 외부의 요구나 기대 때문에 그 영역이 위태로워질 때, 지켜낼 수 있는 힘도 발휘될 수 있을 것이다.

 

‘나 좋자고 해봤니?’라는 질문은 미래에도 다른 표현으로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을 만큼 삶은 녹록지 않을 것이고 문화예술교육은 나와는 먼 곳에서 어떤 기대에 응답하려 하고 있을지 모른다. 바로 그때, 훌륭한 문화예술교육을 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풀썩 주저앉지 않기 위해 우리는 잠시 서로에게 질문을 해봤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뿐이지만 그것은 각자에게 어떤 경험이 되었을까? 그동안 우리가 그것을 거의 해보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과연 그것은 제도나 사업이 어떤 역할을 못했기 때문일까? 그 시작점이 외부로부터 제안되기를 기다리기 전에 우리 스스로 성찰을 해보는 것, 그것이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필요하다.

 

 

 

손바닥 문화예술교육 실험실 과정공유회 <나 좋자고 해봤더니>

 

손바닥 문화예술교육 실험실 과정공유회 "나 좋자고 해봤더니"

손바닥 문화예술교육 실험실 과정공유회 나 좋자고 해봤더니 한 번쯤은 '나 좋자고' 해보는 교육도 필요하지 않을까 혼잣말 같던 질문이 만들어낸 다양한 가능성을 공유합니다. ○ 일정 : 2020. 09

bigija.tistory.com

 

 

 

장애와 비장애가 공존하는 문화예술 오픈포럼 "2020 같이잇는가치"에 함께 했습니다.

자세히 보기 및 사전신청 :

 

서울문화재단>예술공간>잠실창작스튜디오>주요사업

장애∙비장애 동행 프로젝트 <같이 잇는 가치> 소개 같이 잇는 가치 문화예술 오픈포럼 10.16.(금) 오후 5시 / 10.17.(토) 오후 6시 ※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하여 온라인 사전 신청자에 한해 입장 가

www.sfac.or.kr

 

 

 

포럼 다시보기

www.youtube.com/playlist?list=PLF6OVRH0Mb0R31QJAawBZZ-kQ2jJ1sqZk

 

[2020 같이 잇는가치] 오픈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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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문

 

 

같이 좀 모르자

 

창작그룹 비기자 대표 최선영

 

 

내가 왜 지금까지 장애인의 창작활동이나 삶을 궁금해하며 이야기를 듣고 정리하고 다시 말하고 있는지 나도 모르겠다. 장애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장애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데 그럼 무엇을 더 말하고 싶은지 나도 정확하지는 않다. 그런데 내가 하고 있는 말, 혹은 내가 하는 활동은 타인에 의해 분명하게 해석되기도 한다. 사회적이거나 정의롭거나 선한 것으로 말이다. 누군가는 나의 활동을 이야기할 때 기특하다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나에게도 분명하지 않은 동기와 의지, 혹은 목적이 ‘장애’라는 이름과 만나 누군가에게 분명해질 때 나는 의아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판단하기 전에 같이 궁금해할 수는 없을까. 어쩌면 그 단서는 장애라는 주제 밖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13년 전, 장애인 문화예술교육을 우연히 접한 후로 궁금한 것, 모르는 것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어쩌면 그 범위가 점점 커져 가기만 해서 기획도 해보고 워크샵도 해보고 해외사례도 찾아보고 낯선 형태의 연구보고서도 써보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서 내가 인식하기 어려운 이야기나 삶, 그리고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는 그 과정의 끝에서 구체적인 무언가를 알고 싶지 않다. 오히려 누군가가 함부로 ‘안다고 할 수 없는 어려움과 복잡함’을 더 자주 만나왔기 때문이다. 장애, 거기다 예술까지 덧붙여진 무언가에 있어서. 그래서 이 끝없는 어둠인지 공기인지 시간인지, 그것이 가득찬 터널을 같이 갈 사람을 만나고 싶다. 불확실한 길의 끝을 또렷하게 그려내는 사람 대신 그 길을 나와는 다른 방식과 속도로 걸어가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내가 해결사가 되고 싶은 것도, 해결사들을 조직하고 싶은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반듯한 길을 가다가도 가파른 동굴 속으로 때굴때굴 굴러가버리는 예술도 함께 쫓고 싶으니까.

 

 

 

낯선 형태의 연구보고서로 마무리된 질문들

(2018 장애인 문화예술교육 방향성 및 교보재 연구보고서

⌜기대하지 않고 표현으로 만나기⌟ 연구원_김지영, 신원정, 신재, 유선, 최선영)

 

 

 

여기에 내가 아직도 알지 못하는 것들을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고자 한다. 모르는 것들이 이렇게 많으니 앞으로만 나아가지 말고 같이 좀 뒤로도 가고 옆으로도 가고 바닥 깊숙이도 내려가 보자. 외롭지 않게 같이 좀 모르자. 이것은 장애에 대해 알아가자는 주장이 아니라 장애를 포함한 어떤 세계, 그러나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세계에 대해 같이 궁금해하자는 외침이다.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는 왜 장애인의 예술하기를 기대하거나 지원하고 있을까”

 

“정책적 대상으로서의 장애인이라는 용어가 일반화되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멀어져 다른 말과 관점을 마련하고자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

 

“우리는 장애인의 특수성이 아닌 인간의 개별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사람들의 창작활동을 살펴보려는 시도를 충분히 해봤을까”

 

“누가 누군가를, 혹은 사회가 누군가를 포용하기 위해 예술을 활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술은 정말 그것을 가능하게 할까. 가능 여부를 고려할 때 전제된 ‘예술’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 양상, 모습을 띄고 있을까”

 

“(인간의 삶이 아름답지만은 않은데) 나는 왜 장애인의 어둡거나 기괴하거나 더럽거나 모호하거나 처참하거나 우울한 창작활동은 충분히 만나지 못하고 있을까. 또한 그러한 창작활동을 이어가는 장애인의 삶을 지지할 수 있는 관점과 언어는 마련되어 있을까”

 

“내가 장애인의 창작 활성화를 위한 프로그램 개발 연구에 참여했을 때, 왜 10년 전 특수학교에서 만났던 3년간 끈만 흔들던 OOO를 자꾸 떠올리게 되었을까. 나는 왜 곧바로 프로그램 개발에 집중하지 못하고 ‘장애인의 창작이 활성화되는 상태’라는 게 무엇일지 고민하게 되었을까”

 

“긍정적인 삶의 경험을 토대로만 창작활동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장애인에게는 상처받거나 실패할 수 있는 권리가 얼마나 있을까”

 

“장애인의 표현 및 창작활동이 활성화되는 것과 더불어,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은 어떻게 활성화될 수 있을까”

 

“왜 계속 질문을 하다 보면 그 내용이 꼭 장애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까”

 

그리고

“나는 대안을 말해야 할 것 같은 자리에서도 왜 아직도 질문만 하고 있을까”

 

그런데 언제부턴가 대안을 먼저 말하지 않는 것의 필요성, 혹은 대안을 말하는 것의 어려움에 공감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장애인이라고 뭉뚱그려진 존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내가 계속 질문할 수 있으려면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니까. 나는 나를 위한 질문을 찾고 있을 뿐이다. 그런 측면에서 같이 모르자는 말은 (장애인, 비장애인 모두를 포함한) 질문하는 주체들을 위한 제안이다. 각기 다른 사람들은 서로의 삶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다양한 삶이 혼재된 세계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궁금해할 수 있는 것은 넘치고 또 넘친다. 만약 사람 간에 서로 동등하게 모를 수 있다면 궁금함이 전제된 다양한 만남이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예술’이 그 만남의 방식이나 언어가 된다면 궁금함의 영역은 끝도 없이 넓어지거나 혹은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기에 예술 근처에서 서성이며 질문하고자 한다. 예술은 어떤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공식은 되기 어렵지만 우리가 맴맴 돌며 떠나지 않게 만드는 장소는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득 내가 언제부터 여기에서 서성이고 있었나 떠올려보다가 몇 장의 흔적을 발견했다. 10년 전 특수학교 방과후 강사 시절, 산속에 덩그러니 있던 학교 주변으로 공사장 펜스가 쳐졌는데 나는 그 앞을 오가다 혼자 시를 썼었다. 나는 왜 수업준비를 해도 모자를 시간에 펜스 위에 덧씌워진 거짓말 같은 꽃들을 사진으로 찍고 그 위에 글을 쓰고 있었을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혼잣말 같은 질문들이 결국 ‘여전히 모르겠다’는 오늘의 고백과 ‘같이 좀 모르자’는 외침만 남기게 되었는데.

 

 

 

 

*잠실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 전문가 매칭 프로그램 중 김기정 작가 비평문

 

 

 

언제나 열릴 수는 없다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대표

 

 

그림을 마주한 사람은 그림이니까, 그림이라서, 그림 안에 무엇이 그려졌는지를 보려고 한다. 이곳에 나무를 그렸구나, 나무들을 채워 넣어 숲을 그렸구나, 숲을 통해 어떤 주제를 표현하려고 했구나 라는 서사적 해석도 시도한다. 그림을 그린 사람을 ‘예술가’ 혹은 ‘작가’로 호명하기 위해서는 서사나 주제, 혹은 그림 속 형상이 너무 단순하거나 평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필요성도 느낀다. 회화를 다르게 인식하고자 하는 의지보다 회화를 회화답게 인식해야 할 필요성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또한 독특한 표현기법은 주제를 뒷받침해주는 적절한 요소로 배치되기를 바란다. 주제보다 표현기법이 두드러진 작품의 경우, 창작자가 ‘할 말’을 치열하게 찾는 대신 화려한 표현기술을 보여주려 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야기나 주제를 보여주는 화면으로서의 그림 혹은 회화. 창작자에게 “무엇을 그렸는지”, “왜 그렸는지”를 주로 묻게 될 때 전제되는 관점. 그 안에는, 그림 속 맥락과 의미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 그런 기대 혹은 전제를 안고 김기정 작가의 작품을 보면 질문이 많아진다. 나무나 꽃, 동물, 풍경 등 매우 구체적인 형상들이 화면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작품은 일반적인 ‘그림’의 요소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 어떤 주제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왜 그렸는지 작가에게 질문하게 된다. 그런데 한편으로 그림에서 점점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려낸 이미지가 아니라 무언가를 그려내는 표현방식이다. 새의 깃털 사이로 보이는 겹겹이 쌓인 붓 자국, 손톱만 한 꽃잎을 여러 색으로 쪼개어 채워 넣은 흔적, 한 가지 색을 한 획씩 그어 만들어낸 넓은 하늘. 이것은 효율적인 작품 완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길고 느린 시간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을 기준으로 ‘느린’을 판단할지 주춤하게 된다. 왜냐하면 작업의 속도는 창작자에게 매우 개별적인 방식이나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기정 작가의 작품 위에 드러난 또렷한 형상 대신 켜켜이 쌓인 어떤 속도를 먼저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작품을 보는 방식이 고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채워진 이미지 이전에 이미지를 채우는 속도를 들여다보는 접근도 가능할 것이다.

사실 다르게 보기의 필요성을 말하는 이유는, 필자가 작가를 몇 차례 만나 대화를 나눴던 순간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 많은 대화를 하지 않았다. 작가는 먼저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설명하려 하지 않았고 나는 그것을 듣기 위한 질문을 미리 계획하지 않았다. 마치 작가가, 정해놓은 색깔을 고르는 대신 화면이 흘러가는 대로 다음 붓질을 하듯 각자의 발화 속에서 연결할 문장을 찾아보았다. 그중 흥미로웠던 대화는 작가가 무엇을 왜 그렸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닌, 아예 다른 것이었다.

 

김기정 : 열렸어요. 억지로 강요하지 않아서 마음이 편안하고 좋아졌어요.

최선영 : 그러면 지금은 열린 거예요?

김기정 : 조금 열린 것 같아요.

최선영 : 원래 작가님은 다 말할 수 있었군요. (나는 작가가 말을 많이 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제했었음을 고백했다.)

김기정 : 아무한테나 다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최선영 : 작가의 그림은 열려있나요?

김기정 : 열렸다가 닫혔다가.

최선영 : (스튜디오 안에서) 이 중에 가장 열린 그림은 뭔가요?

김기정 : (작가가 한 그림의 제목을 말한다.)

최선영 : 그럼 이 중에 가장 닫힌 그림은 뭔가요?

김기정 : (작가가 다른 그림의 제목을 말한다.)

 

나의 어떤 질문에 작가는 목적어 없이 ‘열렸어요’라고 답했다. 작가가 목적어를 빼먹은 것인지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나는 그 목적어를 알아내는 대신 무언가가 열렸다고 표현하는 것 자체에 집중했다. 모호할 수 있는 표현을 답변의 맨 앞에 위치시킨 이유를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했다. 열리고 있거나 열린 것, 그것은 한 가지만이 아닐 수 있다. 여러 차원으로 혹은 여러 사람에게 열릴 수 있는 무언가가 작가에게 있고 동시에 닫힐 수 있는 무엇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살피려고 했다. 그리고 “열렸어요”라는 답변 이후 우리의 대화는 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표현의 질문들을 할 수 있었다. 그 질문들은 작가를 만나기 전, 포트폴리오나 전시경력을 참고해서 마련할 수 있었던 질문들이 아니었다.

 

“그림을 그릴 때는 열리나요?”

“이 그림에서 어느 부분이 가장 열렸나요?”

“어떤 일이 생기면 그림을 그릴 때도 닫혀버릴까요?”

“누구에게 가장 열려있나요?”

“열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작가는 질문마다 천천히 공을 들여 답변을 하였다. 그 답변을 여기에 적지 않는 이유는 무엇을 답변했는지보다 그 답변을 하기 위해 작가가 입을 떼는 순간까지의 시간이 더 솔직한 답변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시간은 답변마다 당연히 달랐다. 답변의 속도가 달랐다고도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림이 완성되어가는 속도가 다르듯이 말이다. 나는 묻고 싶었던 마지막 질문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열리고 싶나요?”


이것은 작가의 그림 앞에 선 나를 포함한 누군가에게 남겨져야 할 질문일 수 있었다. ‘작가는 어떻게 열리려고 하는가.’ 현재 내가 ‘예측하는’ 답변은 예쁘거나 아름답거나 안전하게 열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그것을 정말 원하고 있을까. 작품의 표면 뒤로 숨지 않는 작가를 찾아 헤맬 때 애타게 외치는 그 질문을 여기에서도 남겨두었다. 왜냐하면 매 순간 솔직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현재를 드러낼 수 있는 인간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이상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의 작품이 ‘열렸다가 닫혔다가’ 한다고 표현한 작가의 답변이 솔직해 보인다. 그렇다면 김기정 작가만이 아니라 인간은 왜 ‘언제나’ 열리지 않을까, 혹은 왜 이따금 닫힐까. 이러한 질문은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이나 자연물,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화면 속 서사나 주제를 분명하게 알아내는 데에 큰 도움은 되지 않으나 작가가 그 형상들을 선택하여 화면을 채우고 있는 상황을 상상해보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인간에 대한 보편적 질문으로 ‘왜 계속 열리지 않는지’를 생각하다가 점점 김기정이라는 사람에게 집중하게 된다면 말이다.

 

이쯤에서 등장하는 것이 작가의 일상 혹은 삶이다. 작가가 가지고 있는 발달장애라는 요소보다 그 장애를 둘러싸고 있는 시선이나 개입, 혹은 그것과 애써 연관 지을 필요 없는 하루의 일과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작가는 왜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할까” 라는 질문을 “당신은 왜 일상적 관계나 대화를 열려고 하지 않나요?”라고 단정해서 던지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작가의 삶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삶의 속도와, 속도를 주변의 속도와 맞추기 위해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는 작가의 노력도 자연스럽다. 그것은 김기정 작가에게만 특별하게 해석되어야 할 자연스러움은 아닐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과 다른 방향, 속도, 온도, 강도, 밀도, 생각, 사람,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한다.

 

 

전망 좋은 방, 캔버스에 아크릴, 53x65.1, 2020

 

 

그러다 문득 스튜디오에 걸린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의 그림들이 눈에 들어온다. 작가가 언제나 열리는 것은 아닐 텐데 왜 그림들은 표면적으로 아름답고 화려할까. 마치 활짝 열린 것처럼. 작가는 왜 닫힐 때에도 열린 것처럼 그림을 그릴까. “이 중에 가장 닫힌 그림은 뭔가요?”라는 나의 질문에 작가가 매우 장식적이고 화려한 그림을 가리켰던 순간을 떠올려본다. 작가는 김기정이라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을 향한 대응으로 닫힌 그림도 열린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작가는 매우 사회적인 관계를 고민하며 대응하고 있는 창작자일지 모른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 대응을 친절하고 상호적인 언어적 반응으로 해내고 있으나 작가는 자신만의 방식이자 노력으로 자신의 ‘열림’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작가의 장애 특성만을 이유로 작가가 그림을 통해 열렸다, 비로소 예술이 작가를 열리게 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그 노력을 보지 않는 판단일 수 있다. 작가도, 작가의 그림도 매번 열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작가는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예쁘게 닫기도 하고 화려하게 닫아버리기도 하면서. 그래야만 자신이 그림 안에서 안전하게 열릴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그러나 예술은 창작자의 닫힘을 가리거나 대체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어렵고 이따금 매정하다. 그렇기에 그림을 안전하게 닫으려는 순간이 많아질수록 창작자는 외롭게 열리며 스스로를 지키고 서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아름다운 작품의 표면 대신 위풍당당하지 않아도 되는 솔직함이 창작자를 지켜줄 수 있을지 창작자도 그 사람을 지켜보는 사람들도 불안하고 모호하다. 한편,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예술을 분명한 형상, 섬세한 표현기법, 화려한 색감으로만 전제할 경우, 그것만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예술의 영역을 (작가를 포함한) 우리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김기정 작가의 ‘입이 열리고 닫히는 것’에만 집중하면 작가가 현재 무엇을 향해 무엇을 어떻게 열려고 하는지 혹은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듯이 말이다. 한 점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몇 개월의 시간을 들이는 작가는 이미 (그림을 포함한) 답변을 들고 질문을 기다리고 있다. 작가가 애써 예쁜 답변을 꺼내놓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그때 작가의 열린 목소리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들릴 것이다.

 

 

엄마와 봄나들이, 캔버스에 아크릴, 51x97cm, 2019

(본 글은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2020년 지역특성화지원사업 <발달장애 보호자를 위한 문화예술워크숍 ‘갈치살롱’> 연구모임의 결과물로 작성되었습니다.)

 

 

 

장애인 자녀의 ‘예술하기’가 앞서나가기 전에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대표

 

 

1. 나의 부모는 나의 ‘예술하기’를 사실상 반대하는데

 

그런데 장애인의 부모는 왜 자녀의 ‘예술하기’를 응원하는 경우가 더 많을까. 이것이 나의 솔직한 질문이다. 예술은 멋지고 환상적인 말이지만 현실에서는 발 디딜 곳 없는 붕 뜬 무엇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예술하기’ 그 자체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데에 어려움이 생길 때도 많다. 그래서 예술인 관련 복지제도나 지원제도의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현장에서 이어지고 있고 불안정한 생계 때문에 창작활동을 그만두는 사람들도 많다. 이것은 인간의 ‘예술하기’가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지속되는 것의 한계 및 어려움을 보여준다. 그런데, (모두는 아니지만) 장애인의 부모는 왜 자녀의 ‘예술하기’를 응원하고 있을까. 하루라도 더 자녀를 취업 프로그램에 참여시키는 것이 시대적 흐름에 맞을 텐데 말이다. 바로 이 순간, 꼭 그렇게 무언가를 생산하거나 돈을 벌기 위해서만 자녀가 예술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답변이 돌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그 외에 어떤 의미에 동의하는 것일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에 동의하느냐와 다르다. 추후 자녀의 ‘예술하기’가 어떤 가치나 상태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는 의미다. 비효율적이거나 미련하게 ‘가능성’보다 ‘의미’를 우선적으로 생각해보는 것이 예술일 수 있기 때문이다.

 

2.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예술하기’의 형태는 어떤 모습으로 전제되는가

 

그 ‘의미’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술하기’가 무엇일 수 있을지 논의가 필요하다. 무엇을 하는 것이 ‘예술하기’로 전제되는가. 그림 그리기? 악기 연주하기? 도자기 만들기? 소설이나 시 쓰기? 무대 위에서 연기하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예술하기’의 형태들 외에 생각해볼 수 있는 상태나 상황, 행위는 무엇이 있을까. 이와 관련한 논의가 풍성하게 이루어져야 그것을 통해 ‘예술하기’의 ‘의미’를 이야기나눌 수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장애인, 장애인 부모, 그리고 장애인의 ‘예술하기’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예술하기’의 다양한 양상을 얼마나 전제하고 있는지, 그 다양성 안에 존재하는 관점의 차이를 얼마나 인정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조금 다르게 질문을 해보고자 한다.

 

3. 만약 나의 자녀가 똥이나 오줌을 10년 넘게 정성스럽게 그리고 만든다면?

 

이것은 ‘예술하기’가 될 수 있을까? 조금 더 나아가 자녀의 탐구 및 실천이 일상화, 구체화되면서 자녀가 자주 똥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오줌 색깔이 잘 나타나는 물감 섞기를 실험하며 이와 관련한 대화를 주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시도한다면 그것 자체도 ‘예술하기’가 될 수 있을까? 이때 가장 중요한 전제는, 이러한 행위가 자본이나 사회적 기회를 생산해내지 못하고 있을 때라는 것이다. 이것은 극단적인 예시 같지만 모든 인간이 아름답거나 깨끗하거나 따뜻한 것에만 집중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매우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예술하기’의 일부로 충분히 언급 가능하다.

여기에서 묻고 싶은 것은 ‘예술하기’를 정의하는 것에 있어서, ‘그래도 이래야 한다’ 혹은 ‘적어도 이것은 안 했으면 좋겠다’는 어떤 시선의 개입 가능성이다. 우리는 이러한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채로 (장애 여부를 떠나) 누군가의 ‘예술하기’를 바라보고 그것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런데 더러운 오물 덩어리에 대한 것이 아니더라도 죽음, 폭력, 혐오, 소외, 차별, 가난, 파괴, 공포 등과 관련한 무겁거나 우울하거나 반갑지 않은 이야기는 예술 안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다뤄지고 있다. 또한 이것을 예술적으로 구체화하는 방식도 익숙하지 않거나 해석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술하기’에 대한 내용적, 과정적, 행위적, 정서적 관점은 다양해질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예술하기’와 낯설거나 버거운 ‘예술하기’가 동등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예술하기’의 의미가 사회적 의미 외에 비사회적 의미, 비효율성의 의미, 무거움의 의미, 해석되기 어려움의 의미 등으로 확장될 수 있고 그 안에서 (장애 여부를 떠나) 다양한 존재가 자기표현의 자리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자녀의 어떤 표현행위 혹은 ‘예술하기’는 부모의 동의나 긍정을 기다리는 수동적 위치에서, 질문을 주고받을 수 있는 능동적 위치로 옮겨갈 수 있다.

 

4. 능동적* 위치가 전제된 상호적 질문

*능동적 : 더불어 능동적이라는 표현이 갖는 여러 한계와 더 넓어져야 할 의미를 강조하고 싶다. 누군가는 능동적인 상태를 갖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매우 적극적이거나 활발한 상태로서의 능동적태도만 전제될 경우 그 범위에 들어오기 어려운 사람도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특히 장애인의 경우, 자신의 욕구가 있는 상태, 그것을 작은 눈빛이나 신체 근육의 일부로 전달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상태 등도 능동적인 상태 안에 포함될 필요가 있다.

 

자녀와 부모의 대화가 궁금함으로 시작되기를 바란다. 자녀의 질문이 “나의 부모는 나에게 무엇이 궁금할까?”이기를. 부모의 질문이 “나의 자녀는 왜 그것을 할까?”이기를.

그런데 부모가 “나의 자녀는 왜 그것을 할까?”하고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그 과정도 지난할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이 급해진다. 자녀의 ‘예술하기’를 지지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그렸던 미래의 상(狀)과 점점 멀어지는 게 아닌가 불안해지기도 한다. ‘예술하기’의 다양한 형태와 찰나를 인정해버리면 ‘예술을 함으로써 사회와 오히려 멀어질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도무지 어디로 가야 할지, 혹은 다시 반대로 갈 수는 있을지 걱정도 앞선다.

 

5. 이제, 장애인 부모는 앞으로의 자녀의 삶을 어떻게 그려볼 수 있을까?

 

다급함과 불안함, 모호함이 주변을 감쌀 때 이제야 ‘예술하기’의 본모습이 우리 곁에 왔다고 나는 이야기하고 싶다. 그것이 나의 부모가 나의 ‘예술하기’를 사실상 반대하는 이유라고도 말할 수 있다. 자, 그럼 이제, 장애인 부모는 앞으로의 자녀의 삶을 ‘예술하기’와 같이 어떻게 그려볼 것인가. 이 질문은 “장애인이 ‘예술하기’를 통해 미래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아니다. ‘예술하기’는 장애인의 삶 혹은 생활이나 생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으며 혹은 낯설거나 불편한 영향만 미칠 수 있다. 또는 다수가 바라는 것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장애인의 삶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그래서 질문이 다르게 필요하다. “장애인의 삶을 ‘예술하기’와 같이 어떻게 그려볼 것인가”. 역시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하기’에 대한, 그리고 자녀의 삶에 대한 다양한 상(狀)이다. 솔직해져야 하는 순간이다. 그 상(狀)은 자녀의 상(狀)과 비슷한가. 달라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기다렸다는 듯이 현실의 문제들, 안정적이어야 할 미래가 언급될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예술하기’는 그것과 거리가 있는 경우가 오히려 많다. 그래서 더욱 솔직해져야 하는 것이다. 혹은 더욱 냉정해지면서도 치열해져야 하거나.

 

6. 처음으로 돌아가

 

사실 나는 ‘예술하기’를 하고 있다. 단지 나의 부모가 궁금해하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나는 모호한 생각들을 종이에 적고 팔리지 않는 노래를 만들고 흩어져버리는 전시나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나의 활동은 종종 동시대 문화예술 관계자에게도 ‘예술하기’로 해석된다. 그러나 그뿐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나도 그뿐이면 충분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모두 나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와 다른 사람만이 ‘예술하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듯 우리는 ‘예술하기’를 제각각 다르게 전제하거나 상상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점이나 문제는 아니다. 이것은 정의하거나 유형화할 수 없다는 예술의 큰 특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특히 장애인의 ‘예술하기’ 혹은 창작활동은 분명하게 유형화되거나 타인에 의해 정의되곤 한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근대적인 예술가의 상(狀)이 존재한다. (나의 부모가 휴대폰에 나를 ‘피카소’로 저장해두었듯이 말이다.) 개인의 고유성을 바탕으로 자기표현에 몰두하며 이따금 작품 발표회를 통해 결과를 사회적으로 드러내고 인정받는. 그러다 어떤 결과물이 자본의 가치로 환원이 되기도 하고 그러한 일련의 과정이 성사되면 누군가는 그 사람을 ‘예술가’로 부를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동시대 예술가의 삶, 활동방식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는 점에서 장애인의 ‘예술하기’가 몇 가지 유형으로만 전제되는 것에는 관점의 한계가 있다.

또한 부모 개개인별로 전제하는 자녀의 창작활동과 이를 통한 궁극적 삶의 상(狀)이 각기 다름에도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 뜨거운 논의로 이어지는 일은 많지 않다. 예술이나 창작 등이 갖는 모호함에 대해 폭넓은 대화를 하기에는 각자의 경험과 인식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각자의 상(狀)이 적당히 비슷할 것이라는 추측과 기대는 지속되는데 현실 속 대화와 선택들 안에서 그 관점들은 보기 좋게 서로를 빗겨나가곤 한다. 그 엇갈림의 이유, 그리고 엇갈림에도 같이 가기 위한 태도에 대해 부모들과의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엇갈리지 않는 하나의 상(狀)을 도출해내는 것이 대화의 목적은 아니다.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를 인정하면, 언젠가 만나기를 바라는 대신 만나지 못함 사이의 거리가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거리를 만들어낸 각자의 이유, 관계의 이유를 들여다보려고 하면 (서로에게 바라던) 존중이 조금씩 가능할 수 있다.

 

7. 그래서, 부모들 간의 거리를 인정한다면

 

서로에게 요구되어야 할 것은 변화가 아니라 공감일 수 있다. 장애인 자녀를 낳고 키워온 부모의 삶이 모두 슬프고 고되게 해석될 필요는 없으나 사회와 가정 안에서 타인이 장애인과 그 가족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장애인의 부모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개인 이전에 장애인의 보호자로서 호명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렇게 10년, 20년 시간이 쌓이고 생활이 이어지고 감정도 생기고 난 이후의 부모에게 이제 자녀의 ‘예술하기’에 대한 동시대적 관점을 익히고 열린 태도와 평안한 마음을 유지하라고 하는 것은 너무 일방적인 태도다. 부모들 간에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장애인의 부모’이기만 한 채로 비슷하게 살아온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더 넉넉하게 살았고 누군가는 더 정신없이 살았고 누군가는 오로지 버티면서 살았다. 그건 그 자체만으로 공감받아야 하고 그 삶 안에서 생성된 경험과 관점과 지식의 차이도 존중되어야 한다. 이제 한 명씩 말해보자. 자녀의 ‘예술하기’에 대해 부모는 무엇을 전제하고 있는지, 혹은 전제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는지. 각자의 삶에서 가능한 ‘예술하기’가 있을 수 있으므로 우리는 모두 나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외면할 수 없는 오늘로서의 ‘삶’에 낯선 ‘예술하기’까지 더해져 모호한 토론이 시작되기 전에 오늘의 내가 자녀와 함께 살아감에 있어서 어떤 상(狀)을 그리고 있는지 이제 이야기를 나눠보자.

* 본 원고는 서울문화재단의 '잠실창작스튜디오 전문가 매칭 프로그램' 사전 간담회를 위한 발제문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잠실창작스튜디오에서 바라본 하늘

 

흔들리는 언어를 쌓아 올리는 일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다른 이름을 향하는 질문

 

‘장애예술’이라고 범주화된 개념 자체를 해체하거나 다른 개념으로 재정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강력한 정책용어와 사업명들이 매 순간 작동하고 있으며 에이블아트, 포용적예술, 아르브뤼, 아웃사이더 아트 등의 이름들은 시대에 따라 국내의 상황을 담지 못한채 재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양성이 마련되어야 할 예술 영역에서 ‘장애예술’을 ‘장애예술’로만 도저히 호명할 수 없게 만드는 이유과 사례, 구체적 언어를 만드는 것이다. 비평은 그 지점에서 필요하다. 새로운 이름의 등장이나 명명보다는, 존재했으나 인식되지 않았던 관점의 드러냄과 확장된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한 측면에서 최근 정책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포용적 예술inclusive art’에 대한 비판적 관점도 필요하다. 누가/무엇이 누구를/무엇을 포용/포함한다는 전제에 대한 질문도 요구된다. 이 용어를 대표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영국에서의 장애 창작자에 대한 인식과 국내의 그것이 갖는 교차지점이 과연 넓은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복잡함의 화면

 

국내 장애인이 삶 안에서 경험하거나 마주해야 하는 교육, 복지, 문화 관련 이슈, 혹은 문제는 당연한 말이지만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래서 예술 이외의 영역에서 그것은 ‘복잡함’ 자체로 문제시되거나 장애운동에서 제거의 대상으로 놓인다. 그래서 장애와 관련한 사회적 논의는 차별, 철폐, 가난, 부양, 의무, 책임, 보호, 인권 등으로 이어지곤 한다. 이것은 장애인의 인간다운 삶과 관련성이 높기에 현실적으로 매우 중요한 논의 안에 있다. 그러나 예술 영역에서는 그 ‘복잡함’을 복잡함 자체, 사회적 문제의 드러냄으로만 마주하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예술교육의 기회를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얻을 수 없었던 장애 예술인의 작품은 교육적 차별을 드러내는 근거자료가 아니라 교육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표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서 장애 예술인도, 협력자, 지원기관, 보호자(가족)인 비장애인도 예술적 해석보다 앞서는 사회구조적 문제, 개인의 경험이나 감정에 더욱 집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범하게 함께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든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비장애인은 주로 배려, 보호의 대상으로 인식되어온 장애인에 대한 스스로의 관점도 성찰해야 하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자연스러울 정도로 분리시켜온 사회구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또한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예술 영역에서 집중할 수 있는 표현의 이유/이면, 표현된 표면, 그 표현이 의도하지 않았으나 드러내는 무언가를 향해 멘토링과 비평이 역할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멘토링과 비평이, 장애 예술인에게 따뜻한 다독임이 되지 않을 수 있으며, 장애인이 사용하는 재료와 표현언어에 대한 비장애인의 호기심1)을 넘어설 수 있다. 동시에 차가울 정도의 정확함(명료한 해석이 아닌 멘토, 비평가로서의 역할에의 충실함)이 서로의 활동 지속을 위해 필요할 수 있다.

 

 

감각과 장애특성을 가로지르는 개별성

 

한편, 장애 예술인의 창작과정이나 결과물이 신체적 감각을 중심으로만 해석되거나 비평되는 것은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 역시 비장애인 중심의 사고라고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시각장애인에게 있어서 잘 보지 못함, 볼 수 없음, 혹은 다르게 볼 수 있음이 창작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제, 청각장애인에게 있어서 잘 듣지 못함, 들을 수 없음, 혹은 다르게 들을 수 있음이 창작의 출발점일 것이라는 전제 등이 그러하다. 이것은 특정 장애유형이나 특성이 작품을 구성하는 대표적이거나 핵심적인 요소일 것이라고 보는 것인데 이것은 장애인이라는 존재를 장애 자체와 동일시하는 것과 비슷하다. 또한 복합장애나 넓은 장애 스팩트럼 등을 고려했을 때에도 장애특성을 중심으로 창작을 바라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 물론 장애특성이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창작자 스스로도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장애특성, 그것과 쉽게 연결되는 신체적 감각을 중심에 둔 접근은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는 개별성, 개별적 삶이나 표현에 대한 촘촘한 층위들을 놓치게 만들기도 한다. 또한 매우 현실적으로, 유사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장애인간에도 소득수준, 사회적 지위, 생활환경, 교육수준 등에 따른 삶의 차이가 존재한다. 특히 장애 예술인에 대한 비평의 언어들이 자칫 장애유형별 작품 특성 및 분석으로 재생산될 수 있음2)을 고려할 때, 2020년을 살아가고 있는 존재로서의 창작자의 그 무언가를 개별화된 언어들로 살피는 과정이 필요하다.

 

 

각자의 흔들림으로부터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2007년부터 장애인과의 창작활동을 여러 현장에서 해왔다. 그러나 나의 관점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다. 비장애인 중심으로 당연하게 설계되거나 인식되었던 사회, 예술, 창작, 개념의 전반을 성찰하거나 재배치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의 작업실에 앉아 다음 전시를 준비하는 장애 예술인을 볼 때마다 오래전 특수학교에서 만났던 중증장애인이나 부모가 없는 장애아동을 떠올리며 예술에 대한 논의 이전에 인간의 삶에 대한 우울한 환기를 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더욱 내가 그 과정에서 정확해야만 하는 순간을 만나기도 한다. 내가, 혹은 내 관점이 흔들리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매 순간 (멘토링이든, 기획이든, 해석이든) 정확할 필요성이 동시에 마련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흔들릴 필요 없는 분명함을 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가 장애, 장애인, 장애예술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만이 아니라 평범성, 일반성으로 범주화된 영역에서 오랫동안 사고하고 학습해왔기 때문이다. 그 영역을 만들고 범주화해온 언어들로부터 벗어나는 시도는 우리를 충분히 흔들어 놓는다. 그리고 (별로 논리적이지는 못하지만) 오히려 흔들리는 개인들이 장애예술과 관련한 언어를 마련하는 데에 장기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장애인 중심의) 기존 언어나 인식의 흐름으로부터 예속화되지 않으려는 움직임은 그 자체로 우리를 흔들 수 있는데 그것을 계속 마주하는 과정 자체가 장애예술에 대한 질문을 만드는 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애예술과 관련하여 정책은 흔들림 없는 새로운 이름과 비젼 정도를 원하지만 현장3)에는 확장된 담론과 흔들리는 언어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언어들은 소수의 재능인으로서의 장애 예술인의 사회참여에만 기여하지 않아야 한다.4) 동시에 그 언어들이 장애예술 관련 사회적 성과나 의미를 작동시키는 간편한 장치가 될 수도 있다는 것도 재고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복잡함의 표면을 미련하게 읽어내고 지지하는 시도가 필요하다. 공든 탑은 계속 무너진다. 비장애인이든 장애인이든 우리의 삶과 창작은 그러하다. 그렇기에 튼튼한 탑을 쌓는 대신, 흔들리는 탑의 나약함을 받아들이는 다른 출발이 필요하다.

 

 

 

1) 호기심이 생길 때는 다른 나라의 장애 예술인의 창작물을 살펴볼 필요도 있다. 한편으로 국가, 지역과 상관없이 비슷한 양상이나 표현기법이 발견되기도 한다.

(참고 : http://a-yamanami.jp)

 

2) 특히 이번 전문가 매칭 프로그램은 잠실창작스튜디오의 기획 사업으로 외부에 소개, 공유된다는 점에서 장애예술 관련 현장에 강력한 레퍼런스로 작용할 수 있다.

 

3) 창작활동을 지속하고자 하는 장애인과 그 가족의 일상, 장애 관련 창작 및 기획활동의 시도, 장애 예술인을 지원하는 기관의 사업들, 장애예술 관련 사례를 통해 사회를 재해석하고자 하는 개별화된 시도 등

 

4) "장애 예술인이 ‘창작이 활성화 되는 상태’를 작품발표의 기회 확대 및 전업예술가로서의 자리매김으로만 해석하지 않아야 창작의 지속을 위한 환경과 역량을 스스로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다. 장애인에 대한 기본적인 복지제도가 안정화되어있지 않아 장애 예술인의 생계유지 및 사회참여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는 더욱 ‘창작’ 자체, 혹은 ‘창작이 활성화되는 상태’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들이 장애 예술인과 비장애 예술인의 예술활동 안에서 문제의식으로 작동되고 가시화될 때 장애예술의 의미도 국내 상황과 부합되는 독창적인 맥락으로 나아갈 수 있다.” (주윤정 외, 2018, “장애예술인 창작 활성화 프로그램 개발연구”,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p.119)

*본 원고는 서울시 '2019 꿈틔움 예술창작소 1:1멘토링지원사업' 결과자료집에 실린 글입니다.

 

*본 사업은 <장애인문화예술판>이 총괄 운영하였습니다.

 

*예술창작소는 서울시에 거주하는 장애청년(만19세이상에서 만29세이하)들의 창작역량을 강화하고 창작활동을 모색할 수 있도록 문화예술 전문가를 1:1로 매칭하는 사업입니다. 20명의 장애청년과 20명의 문화예술전문가가 멘티와 멘토가 되어 서로의 성장을 돕고 지원하는 관계맺음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멘토의 20%는 장애예술인이 참여했습니다.

 

*사업공고문 자세히보기 :

 

장애청년을 위한 꿈틔움 예술 창작소 1:1멘토링 지원사업 멘토 및 멘티 모집 공고

사업개요    사 업 명 : 장애청년을 위한 꿈틔움 예술 창작소    사업기간 : 선정 일부터 ~ 11월30일까지          지원자격 : *멘티 : 서울에 거주하는 만19세 이상, 만29세 이하의 장애청년 중 문화예술교육 및 활동에 경험이 있으면서 예술창작활동(연극, 무용, 영화, 미술, 음악)에 욕구가 있는 사람. (5월~11월까지의 창작활동에 성실히 참여 가능한 사람) *멘토 : 장애청년예술가 양성에 관심이 있는 전문예술인으로서 문화예술 활

www.artpan.net

 

*결과자료집 및 사업 관련 문의 : <장애인문화예술판> / 420pan@naver.com / 02-745-4208  

 

 

 

 

 

 

 

 

 

 

 

해석의 근거, 참조의 흔적

 

창작그룹 비기자 / 최선영

 

 

1.

경력의 많고 적음을 떠나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두 사람이 몇 개월간 스물다섯 번을 만난다는 것은 서로에게 어떤 경험으로 남을까. 멘토, 멘티로 참여한 40명의 인터뷰를 정리한 나는, 이들이 집중된 만남 안에서 타인에 대한 각자의 관점을 어떻게 발견해나가는지 들어보고자 했다. 사업공고문에 등장하는 ‘장애’ 혹은 ‘장애인’이라는 개념, 관념, 혹은 존재는 여러 만남 안에서 변하거나 사라지거나 도드라지기도 했는데 그 과정을 이끄는 각자의 생각들도 궁금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이 사업의 이야기를 기록, 정리했던 것은, ‘장애’에 집중되는 사업적 관점을 흐트러트리고자 했던 개인적인 의지와도 관련이 깊다. 나는 공동창작 혹은 멘토링에 대한 다른 해석의 여지를 찾고 싶었다. 멘티의 장애특성에만 집중하지 않는 멘토의 관점, 각자의 개인성을 발견해나가는 창작활동, 사람과 사람의 관계 자체로 해석 가능한 시간들. 이러한 것들이 사업 참여자, 실무자, 관찰자 그리고 제3자에게까지 공동의 질문으로 확장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장애유형의 사람에게는 어떤 멘토링 방식이 효과적인지 분석하기 위한 자료를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2.

실제로 인터뷰를 정리하고 중간워크숍 등에서 멘토들을 만나면서 멘토와 멘티의 만남에 영향을 주는 몇 가지 요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 글에서는 그것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첫 번째, 멘토의 예술관이다. 이 사업은 협업보다는 멘토링의 방식으로 창작자간 만남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멘토가 전반적인 흐름을 끌고 가거나 설계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멘토가 예술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창작자라는 존재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가 멘토링 방향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창작자의 주체적인 표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멘토는, 멘티의 평소 관심사에 기반을 두고 그가 표현을 더욱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환경을 고민하였다. 한편 창작자의 역량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멘토는, 멘티가 다양한 것을 배우고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과정을 설계하였다. 물론 멘토들이 이러한 두 가지 방향으로만 나뉘어 멘토링을 했던 것은 아니나, 예술에 대한 각자의 상(想)을 토대로 멘티의 활동 방식을 고민하곤 했다. 이것은 멘토가 가지고 있는 예술에 대한 학습의 경험, 삶의 기억 등과도 연관되어 보였다.

 

두 번째, 멘티의 적극성이다. 몇몇 멘토들은 멘티가 적극적이지 않았다면 사업이 전반적으로 매우 힘들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것은 결국 멘티라는 창작자가 자신의 창작적 근거, 주제, 동기를 스스로 고민하거나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멘토링이 자칫 멘토의 적극성, 전문성에 기대어 이루어질 수 있는데 그보다 먼저 멘티의 태도 혹은 관심사가 멘토링 전반에서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멘티가 자신이 원래 하던 것만 하는 경우는 그것을 적극적 태도로 해석해야 할지 논의의 여지가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멘티의 적극성을 받아들이거나, 반대로 파고드는 멘토의 또 다른 적극성이 요구되기도 했다.

 

세 번째, 1:1 만남의 구조적 특성이다. 많은 멘토, 멘티들이 1:1 만남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을 보였지만 활동 전반을 멘토가 끌고 가야 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도 언급했다. 장애인 창작활동에 대한 전문적인 의견을 들어봐야 하는 것인지, 멘토링이나 예술교육에 대한 방법론을 더 알아야 하는 것인지 등에 대한 개인적인 고민을 하고 있었다. 특히 멘티가 멘토의 제안이나 행동에 많은 부분 의지하게 되는 상황에서는 멘토들의 고민이 가중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이것은 개별 창작자들의 특성에 집중할 수 있는 1:1 멘토링의 장점과 달리 현실적으로 보완책이 필요한 부분으로 읽히기도 했다. 상황에 따라서는 멘티가 다수 안에 묻어가기도 하고 여러 관계 안에서 자극을 받는 등의 기회가 필요해 보였다. 1:1 만남이 사업적 특성으로만 부각되지 않고 창작자들의 상황과 장르적 특성에 따라 변동 가능한 형식 중 일부로 기획될 필요도 있어 보인다.

 

네 번째, 만남의 시기다. 사실 대부분의 멘토, 멘티들은 이번 사업을 통해 처음 관계를 형성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떤 장애유형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을 집중적으로 만났기 때문에 서로에게 호기심이나 관심을 가지기 수월한 상황에 있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궁금함, 창작방식에 대한 관심으로도 이어져 멘토링 과정에 더욱 상호적인 영향을 미쳤다. 반면, 이미 오래전부터 1:1 만남을 이어온 멘토, 멘티의 경우는 호기심과는 다른 관심을 기반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이 사업을 앞으로도 이어질 만남 중 일부의 시간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한편, 사업 이후에는 자연스러운 만남이 쉽지 않다는 것을 예감한 멘토, 멘티의 경우, 어떻게 이번 만남을 의미 있게 마무리 지을지 고심하기도 했다. 결국, 만남 자체도 중요하지만, 각기 다른 만남의 시기가 멘토링의 에너지를 여러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게 했다고 볼 수 있다.

 

다섯 번째, 창작의 확장 가능성이다. 이와 관련하여 인터뷰에서는 “멘티와의 만남이 멘토에게 어떤 영감이나 자극을 주는지” 공통적으로 질문을 했었다. 이것은, 멘토가 멘티만을 위해 기능하는 사람으로 전제되지 않기를 바라며 던진 질문이었다. 결국 멘토도 창작자,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멘토가 이 사업에서 본인의 창작에 대한 확장 가능성을 발견해야 스스로 참여의 의미를 고민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대부분의 멘토들이 각자 발견한 창작적 자극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한 부분이 특히 흥미로웠다. 멘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계속 생각하다 보니 정작 멘토 본인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생각하게 되었다는 답변도 기억에 남는다. 예술적 행위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더라도 결국 사람에 대한 내밀한 관심이 다른 창작을 발생시킬 수 있을 거란 생각도 할 수 있었다.

 

 

3.

멘토, 멘티의 비언어적 교감의 순간들을 대화 안에 모두 담을 수는 없지만 이 기록들이 장애를 빗겨 가거나 관통하는, 사람에 대한 다양한 접근들로 읽히기를 바란다. 장애특성을 넘어서는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개개인에 대한 관심으로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그 스펙트럼의 폭을 (분명하지 않은) 일반성, 정상성을 전제로 매우 좁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이 사업을 매우 다양한 사람들간의 만남으로 전제한다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더 보일까. 어긋나는 대화, 쉽게 전달되지 못하는 표현기법, 불쑥 튀어나온 솔직함, 변함없는 고집스러움도 만남의 일부로 해석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 해석적 근거는 전문적인 자료도 논리적인 연구결과도 아닌, 다양한 사람들의 등장과 구체적인 대화들로 가능할 것이다.

 

여러 멘토들이 ‘내가 이렇게 멘토링을 하는게 맞는지 모르겠다’는 불안감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에 대해 우리가 당연히 알 수 없다, 그래서 만나보고 함께 시간을 보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했다면, 그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들도 불확실하지만 더듬어보려 했던 시간들이 오히려 구체적인 참조가 되어 다음의 만남을 상상하게 하고 각자의 창작으로 뻗어 나가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참조들은 결코 표준값을 마련하기 위해 기록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수도 없이 개별화된 참조들은 ‘사람에 대해서 쉽게 알 수 없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미련한 근거들로 남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방법 대신 참조의 흔적을 남긴 멘토, 멘티의 대화를 통해, 사람과 사람이 효율적으로, 혹은 효과적으로 만나지 않는 것에 대한 의미까지도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

서울연극센터 웹진 연극in 에 얼마전 참여한 "성평등 예술지원정책 제3차 오픈 테이블" 관련 글이 실렸습니다.

 

서울연극센터 연극인 - 연극인

 

www.sfac.or.kr

 

 

경력단절을 읽는 새로운 시선_성평등 예술지원정책 제3차 오픈 테이블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7년 전 젖먹이 아들을 재우고 새벽마다 화장실에서 목소리를 녹음해 MC.mama라는 이름으로 출산, 육아에 대한 음악을 만들었다. 집 안에 앉아 집 밖을 향해 정리되지 못한 말들을 토해내던 그때, 나는 내 안에서도 예술계 안에서도 사라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슬픈 서사로 재생산하고 싶지는 않았다. 개인의 이야기를 너무 개인적이지만은 않게 공유해야겠다고 다짐하며, 그렇게 오픈 테이블에 참여했다.

지난 1월 9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의 ‘예술가의 집’에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예술위) 성평등예술지원소위원회 주관으로 성평등 예술지원정책 제3차 오픈 테이블 “경력단절을 읽는 새로운 시선”이 열렸다. 출산과 육아, 그리고 경력단절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여성 예술인 4명이 각자의 사례를 공유하였고, 이어서 한국여성과학기술지원센터의 차은지 팀장이 과학기술분야의 경력단절 여성들을 위한 ‘여성과학기술인 R&D 경력복귀 지원사업’ 사례에 대해 발제하였다. 마지막으로는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최유진 실장이 ‘여성예술인, 경력 유지와 복귀 활성화를 위해 고려해봐야 하는 것들’을 주제로 발제하였고 이어 객석에 있던 참여자들과도 자유토론을 진행하였다. 4시간 동안 진행된 이번 오픈 테이블에서, 나는 경력단절에 대한 개인적 경험과 의견을 말하는 여성 예술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였다.

 

 

출산 전, 나는 시각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며 전시나 프로젝트에 참여해왔다. 같은 분야의 예술인과 20대 중반에 결혼을 했고, 3년 후 출산을 했다. 육아에 대한 정보나 지식이 전혀 없던 상태에서 삶의 변화를 맞이하게 되면서 사람을 키워내는 게 이 정도로 힘들고 외로운 일인지 매일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만의 시간을 갖거나 기존에 내가 해오던 작업방식을 지속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체감했다.

오픈 테이블에서는 영상, 연극, 시각 분야의 여성 예술인들이 이러한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결코 즐겁고 희망적인 경험들은 아니었다. 나를 포함하여 모두가 지금까지도 무리를 하고 있었다. 창작 현장에 아이를 업고 가서 작업을 하거나 친정, 시댁을 오가며 도움을 요청하고 여기저기 죄송하다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들로 살고 있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노트에 적으며 나의 발제를 준비하던 그 시각에도, 내 아들에게서는 엄마 언제오냐는 문자가 오고 있었다. 여느 자리에서처럼 한쪽 신경은 ‘엄마’라는 역할이 잡아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날 강조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출산으로 인한 여성 예술인의 활동에서 오는 어려움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 어려움이 이 사회/세계에 대한 확장된 시선을 지속적으로 발생시킨다는 것에 큰 감사함이 있다. 내가 대학에서 공부한 예술이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출산 전에는 체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고 할 수 없게 된 창작활동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던 생계활동도 있었다. 남편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술이고 뭐고 일단 매일 매일의 밥값을 마련하고 사계절을 보내는 데 주력했다. 그러고 나서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삶이 보였다. 동시에 그들의 삶을 이용하거나 비판하기에 급급한 예술의 사례도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기존의 예술관과 창작방식을 바꿔야 했다. 무엇이 옳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현재 우리가 마주한 세계를 외면하지 않는 탐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림을 그렸던 내가 가사를 썼고, 함께 그림을 그렸던 남편이 음악을 만들었다. 새로운 예술을 구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흘러내리는 삶을 야무지게 기억하기 위해서. 생활은 힘들었지만 여전히 무리해가면 그 돈도 안 되는 작업을 했던 경험이, 우리 부부에게는 창작자로서의 큰 전환점이었다. 기존의 관점과 방식을 버릴 수 있었던 기회였기 때문이다.

경력단절의 경험을 말하는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애써 했던 이유는, 우리가 활동하고 발언하고 있는 자리가 창작과 예술의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힘든 시기를 잘 버텨낸 후 전공했던 예술을 활용하여 사회참여 기회를 마련하거나 일자리를 갖는 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할까. 그것은 ‘예술이 무엇인가’라는 논의와 이어질 수밖에 없다.

삶의 변화를 극복하고 장르 중심의 작품 제작 및 발표의 기회를 지속하는 것만이 예술인의 삶으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공부하고 연마했던 작품 제작 방식을 우선으로 두지 않고 현재의 관점을 담아 표현행위를 하는 것, 혹을 할 수밖에 없는 것도 예술일 수 있다. 이것은 예술 이전에 삶 자체, 혹은 그 안에서의 실천으로도 해석된다.

그런 차원에서 오픈 테이블에서의 논의가 궁극적으로는 경력단절 여성 예술인을 위한 제도 마련을 넘어, 다양한 삶의 유입을 고려한 정책적 전환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출산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에서는 창작이나 사회적 활동을 단절, 변화시키는 많은 사건과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성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출산과 육아도 남성의 삶에 영향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계에서 일반화된 밀도와 규모, 속도로 작품을 제작하지 못하거나 않는 사람들의 다양한 창작방식도 정책 안에서 고려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예술이 갖고 있는 핵심 요소인 다양성 회복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또한 제도가, 복잡한 삶의 문제, 사회적 이슈를 해결하는 만능 요소로 전제되지 않기를 기대한다. 여성의 경력단절은 오래전부터 축적된 일상적, 사회적 문제와 무관하지 않으며 제도 개선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다양한 제도들의 기획과 실행만큼이나, 삶에서의 실천을 예술의 영역과도 연결하여 이어가는 개개인들을 더욱 만나고 싶다. 이것은 작품 활동도 멋지게 해내는 슈퍼맘들의 등장이 아니라 삶의 질문을 끌어당겨 예술의 질문으로 확장하는 개별자들의 실천이다. 그들의 활동이 다양한 해석의 근거를 마련할 때 제도도 여러 사람의 삶을 함께 살피며 변화해나갈 것이다.

 

 

[사진제공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본 원고는 충북문화재단의 '2019 장애인 예술 매개자 양성과정 프로젝트 <렛잇비 : Let it be>' 결과자료집에 실린 글입니다.

 

 

 

실천을 망설이던 순간에, 나의 삶으로부터

 

창작그룹 비기자 / 최선영



첫날부터 무거운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참여자들이 경험하거나 목격한 장애, 삶 속에서 포착되거나 흘러가는 예술, 슬프거나 답답한 심정, 각자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장애’와 서로가 모르고 있다고 여기는 ‘장애’. 그것은 때론 첨예한 대화로 이어졌고 반복되기도 했다.

멘토인 나는 불안하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살아있는 감정과 표현들이 그 어떤 논의보다 흥미로웠다. 참여자들의 다양한 관점을 발견했고 그것이 뒤섞이는 과정을 함께 해서 의미가 있었다. 때론 멘토링이 무의미한 순간도 있었다. 그럴 때는 다른 각도에서 질문을 추가하는 정도로 역할을 했다. 프로젝트의 결과보다 매회의 대화가 궁금했다. 이렇게 해서는 장애인 예술 매개자가 ‘양성’될지 누구도 쉽게 예측할 수 없었지만 우리는 렛.잇.비. 그대로 두기로 했다. 미리 말해두자면, 사실 이것은 무엇을 가르치고 덧씌우고 개발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적어도 그 점을 잊지 않으려고 했다. 물론 프로젝트 과정을 계획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우리가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는지 내버려 두며 함께 가보고자 했다. 설사, 누군가는 예술이나 사람에 대한 기존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더라도. 멘토링은 부지런한 가이드가 아니라 재촉하지 않는 기다림, 빈틈을 비추는 질문 던지기일지 모르니까.

그리고 질문 던지기는 언제나 나를 포함한 참여자 모두를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프로젝트 이후에 현재까지 나에게 남아있는 질문은 ‘우리가 무엇과 무엇을 매개하려고 하는가’ 이다. 사업명에서 쉽게 답을 찾는다면 예술과 장애인을 매개하려는 것이겠지만 이건 좀 모호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예술이 무엇인지 (여기저기에서 배우고 들었음에도) 여전히 모르겠고 장애인을 어떤 존재로 정의할지도 사회적, 인문학적, 철학적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논의를 프로젝트의 끝까지 계속 이어갔다. 오히려 프로젝트가 끝난 후에 이 고민은 (다행히도) 더욱 커졌다. 그래서 예술도 궁금해지고 장애, 장애인도 불확실해졌다면 반가운 일이다. 그러다 우리가 예술과, ‘다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매개하려는 것은 아닐지 생각도 든다. 또한 장애인을 ‘사람’으로 전제해서 생각하는 데에 애써 여러 이유와 시간을 들여야 했던 것은 아닐지 되돌아보게 된다.

 

 

 

문득, 우리는 장애인 이전에 ‘사람’, ‘나와 다른 사람’, ‘타인’에게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도 생각하게 된다. 혹은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 우리가 예술과 사람을 매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그러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다시 질문이 이어진다. 우리는 혹시 각자가 가지고 있는 예술에 대한 가치나 의미를 타인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이 누군가에게 필요하다고, 그래서 전달 가능하다고 전제하면서. 그렇다면 우리는 매개의 방식을 다양하게 상상하고 있었을까. 혹시 그것을 프로그램이나 사업, 봉사나 나눔으로만 한정한 것은 아닐까. ‘실천연구’의 방식도.

그렇다면 내가 예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내가 ‘사람’에 대해 얼마만큼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가 ‘매개’의 방식도 결정짓게 했던 것은 아닐까. 결국 내가 전제한 ‘예술’과 내가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매개라면, 우리는 과연 이 매개의 중심에 있는 ‘나’에 대해 얼마나 생각해보았을까.

예술에 대해 별로 생각해보지 않은 나, 예술을 하는 나, 예술이 궁금한 나, 예술이 어려운 나, 예술이 친숙한 나, 예술이 삶과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는 나, 예술과 삶은 공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

그리고,

장애인을 잘 돕는 나, 장애인을 잘 모르는 나, 장애인을 싫어하는 나, 장애인이 되고 싶지 않은 나, 장애가 있는 나, 장애인을 만나보지 못한 나, 장애인이 익숙한 나, 장애인에 대해 공부해야겠다고 느끼는 나...

우리는 그런 ‘나’를 얼마나 들여다보려고 했을까. ‘나’라는 ‘사람’을 마주하려 하지 않은 채로 다른 ‘사람’을 무엇과 매개하는 것이 가능할까. 내가 나를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프로젝트 중반부터 내게 이런 질문들이 확장됐던 것은,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동시에 솔직해질까 말까 고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프로젝트는 어떤 삶 속의 내가, 예술과 사람 사이의 ‘나’와 얼마나 자연스럽게 매개하게 되는지를 살피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장애인이라는 타자를 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우리에게는 결국 (쉽지 않더라도) 본인 스스로를 발견하고 만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실천연구’도 낯설고 어려웠던 것이다. 결국 나의 자발적 고민, 능동적 실천, 일상적 연결이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이 실천연구에 관심이 있는가, 내가 정말 이것을 하려고 하는가, 내가 스스로 이것을 고민하고 있는가.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스스로를 외면했다가도 다시 마주해야 했다. 게다가 멘토들은 그 만남, 혹은 매개의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이거 하고 싶으세요?” 라는 질문을 주로 했다.

이렇게 낯설고 미련한 멘토링, 혹은 프로젝트는 참여자들에게도 익숙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장애인 예술 관련이라면 장애 유형별 교육 방법, 매개 방식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줘도 모자랄 것 같은데, 열심히 실천연구 계획서를 써온 사람에게 그 사람을 향하는 질문만 이어갔으니 참여자들은 대체 이게 무엇을 염두에 둔 매개인지 모호했을 것이다.

 

 

그러나 프로젝트의 후반부로 갈수록 나에게 ‘실천연구’는 나름의 구체적 의미로 해석되었다. 참여자 각자의 ‘삶’이 경험적 근거로 작동하는 연구. 스스로를 마주하려는 과정 없이 부지런히 실행만 하는 것과는 다른 실천. 매개의 방법을 상상하기 위해 각자의 삶의 흔적을 찾는 시간.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자의 삶이었다. 프로젝트 과정에서 장애인과 예술에 대한 여러 강의가 있었지만 그것은 단지 우리 삶 속에 숨어있던 의미나 문제의식을 끄집어내는 연결고리였다. 강의 내용에 따라 나를 바꾸거나, 내 삶과 별개로 ‘장애인 예술 매개’라는 영역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이 사회적으로 불평등한 상황 안에 놓인다는 것을 자주 발견할 때, 누군가는 우선적으로 선하고 따뜻한 조력자가 되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러나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우리는 사람에 대한 접근이 다양할 수 있음을 전제해야 한다. 그것을 상상하는 데에는 각자의 삶이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삶을 스스로 마주할 용기도 필요하다. 실천은 그 용기를 드러내는 어떤 시작점일지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렛잇비’는 실천을 해보거나 망설이는 시간을 응원했다고 생각했다. 어서 빨리 실천하라며 재촉하지 않고 같이 더듬어나가보자고. 참여자들에게 이 방식이 좀 어색했더라도 고민의 기회로 작동되었기를 바란다.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당연히 명쾌할리 없으니까. 앞으로 우리가 예술과 사람을, 혹은 사람과 사람을 매개하는 순간이 온다면, 너무 따뜻하지만은 않기를 기대하며, 끝까지 각자의 속도로 함께 해주신 참여자분들께 깊은 감사를 전한다.

 

 

 

 

2019 장애인 예술 매개자 양성과정 프로젝트 <렛잇비 : Let it be> 자세히 보기

http://www.cbfc.or.kr/mobile/sub.php?menukey=115&mod=view&no=5265&search=Y&kwd=%EB%A0%9B%EC%9E%87%EB%B9%84

 

충북문화재단 모바일 > 재단소식 > 공지/공고

 

www.cbfc.or.kr

 

지역문화협치 컨퍼런스 '공존 공유  공생'

 

2019.12.12 - 12.13.

 

 

 

 

 

예술의 사회적 가치와 예술가의 역할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모든 것이 허용되는 예술은 이따금 작가의 의도라는 말로 알맹이 없이 그 정당성을 고집부리곤 한다. 그리고 붓을 든 모든 이를 예술가라 부르고 그 사람의 모든 붓질을 의도라 부르는 예술세계에서는 넘쳐나는 해석과 비평이 기꺼이 그것의 날개가 된다. 그리고 누군가는 오늘도 예술의 애매모호함이 '원래 그러한' 것이라 여기며 팔짱을 끼고 눈에 힘을 준 채 무언가를 읽어내려고 한다.

그 이상야릇한 현장에서 어떤 이는 심지어 소통을 '꿈꾼다.' 그리고 적지 않은 관객이 작품 건너편 예술가의 생각을 간결하게 찾아내고 싶어 한다. 다시 팔짱을 끼고. 눈에 힘을 주고. 그리고 예술가는 그 놈의 소통을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요구받고 있으며 그것이 가능하고 의미 있는지를 매순간 고민한다.

소통을 원하는 누군가와 그것의 정당성을 되묻는 누군가, 그 사이에 인쇄된 알 수 없는 문장들이 내가 체험하고 있는 예술세계다. '말'이 되지 않는 문장과 '말'을 기다리는 이의 희망과 '말'에 기대려는 작품 같은 무엇이 파닥거릴 때 슬그머니 걸어 나와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 그것이 예술이다.”

 

미대를 졸업한 내가 10년 전 혼자 끄적인 글 안에는 예술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가 가득하다. 예술이라 불리던 것의 근처 현실속에는, 캔버스 뒤에 숨어 비평 언어에만 집중하던 내가 있었고 후배들을 시켜 자기 작품을 완성하는 선배가 있었으며 포트폴리오와 작가노트 위주로 작품을 이해하는 유통구조가 있었다. 물론 그시절 나는 전시장에 놓인 미술 작품에 한정하여 ‘예술’을 이야기했지만 다양한 형태의 창작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지금도 생각은 크게 다르지않다.

그래서 이 발제문의 시작을 어떻게 해야할지 망설여졌다. 예술은 무엇일까. 그것의 사회적 가치를 이야기 하기에 앞서 나는 이 글에서 전제하는 예술에 대해 매우 개인적인 정의를 먼저 시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내가 경험했던 것들로부터 가능한데, 적어도 예술대학을 나온 사람들의 사회활동으로만 예술을 전제하고 싶지 않은 의도도 있다.

 

‘기존의 관습이나 인식에 질문을 던지는 구체적인 활동, 언어로 설명되기 어려우며 마주함의 경험을 통해서만 전해질 수 있는 현장의 무엇, 학습이 아닌 실험을 통해 스스로에게도 드러나는 삶의 흔적. 혹은 시간과 함께 쌓인 찰나의 결과물

 

분명 얼마 후에는 위의 정의가 불충분하거나 과하다고 후회하는 순간이 오겠지만 오늘은 위의 맥락에서 예술의 사회적 가치, 그것을 하고 있는 누군가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예술은 매우 구체적인 행위를 동반한다. 그리는 것, 노래하는 것, 움직이는 것, 만드는 것, 쓰는 것, 소리내는 것, 표현하는 것 등. 이것은 행위 자체로 존재하며 의미를 갖는다. 즉 쓸모나 기능을 최종 목표로 두지 않는 현재의 행위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 벌어지는지도 중요하다. 돈을 버는 것이 필요한 상황에서, 자신을 사회적으로 알리는 것이 다급한 상황에서, 밀린 집안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앞으로의 진로를 계획해야 하는 상황에서, 몹시 피곤한 상황에서, 누군가를 도와줘야 하는 상황에서, 사회적인 이슈가 대두되는 상황에서 등. 그 상황을 모면하거나 해결하는 데에 별 기능을 하지 못하는 행위를 하는 것, 심지어 그것을 계속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그것이 예술의 사회적 가치를 살필 수 있는 힌트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상황과의 팽팽한 싸움이자 자신을 지켜내는 고집 혹은 선택으로도 보인다. 그리고 외부적 요인이나 일반적 기준으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으려 할수록 그것은 두터운 시간과 함께 자신의 삶 자체로 쌓인다. 나는 그런 삶을 버텨내거나 그저 살아가거나 혹은 즐기는 누군가를 아주 가끔 만나는데 그들은 (적어도 나에게는) 분명한 예술가다. 몇장의 포트폴리오로 그들의 활동을 소개할 수 없으며 유명한 철학자들의 말을 빌려와도 그들의 삶을 설명하기 부족하다. 분명하지는 않아도 강력한 힘이 그들의 삶과 창작활동을 채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자발적인 선택이 계속되기를 응원한다. 심지어 그들의 삶이 더 힘들어지더라도 그 과정과 결말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과 같은 주제로 그들의 활동이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되어야 할 때도 있다. 요즘은 사회적 예술, 예술의 사회적 개입, 사회문화운동 등의 표현과 함께 그 순간들을 자주 접한다. 이러한 현상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예술이 사회적 의미로 해석되는 층위가 어떤 관점을 전제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래서 모호한 생각들을 그림으로 표현해보았다. 어떤 기준에 의해 한 개인의 예술 행위, 혹은 삶의 일부가 사회적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더불어 그 기준이 발생된 이유, 기준의 위치, 기준과 연관된 사회적 요소 등도 궁금하다. 예술이 사회를 바꾸고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고 인간을 치유한다는 정책적 주문이 울려퍼지면 대체 왜 그런 기대를 갖는지, 그에 따라 어떤 뉘앙스의 예술을 주로 보려고 하는지 알고 싶어지기도 한다. 명쾌하고 쾌활하고 따듯한 예술도 물론 있지만 불안하고 흐리멍텅하고 우울하고 냉소적인 예술도 있기 때문이다. 예술이 어떤 뉘앙스를 띄든 각기 다른 맥락의 사회적 가치를 가질 수 있다. 그 가치를 폭넓게 살피기 위해서는 다양한 삶의 기준에서 예술을 해석하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예술, 혹은 예술가의 삶을 구체적 활동의 시간, 깊이, 고민의 두께로 읽어내는 과정도 요구된다. 그때 예술의 단면을 향하던 시선은 더 많은 요소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예술의 두께를 바라보게 된다.

 

 

 

예를 들어, <비기자>가 2017년 진행했던 공기청정기 제작 프로젝트 ‘숨정화기 playing Zine & Kit 제작’을 살펴보자. 심지어 이 프로젝트는 서울문화재단의 ‘서울을 바꾸는 예술’ 지원사업 안에서 진행되었다. <비기자>는 시민들이 간편하게 만들 수 있도록 우유박스를 이용한 공기청정기 제작방식을 매뉴얼화하고 워크숍과 책자를 통해 그 과정을 외부에 소개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위 그림에서, 기준면 위에 드러난 특정활동들이다. 예술가가 개발한 공기정청기, 시민들과 문화적 경험을 나누며 진행한 워크숍, 예술가의 실험 과정이 담긴 책자 등이 그안에 포함된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와 연관된 잠재적 활동이 없었다면 이 공식적 프로젝트는 시작조차 될 수 없었다.

 

 

2017 ‘숨정화기 playing Zine & Kit 제작’ 프로젝트에서 소개한 우유박스형 공기청정기(좌)와 시민워크숍 현장(우)

 

 

<비기자>의 멤버인 한 예술가는 어린시절부터 물건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것을 좋아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가전제품을 뜯어보고 버려진 물건을 주워와 작동원리를 탐구했다. 그것이 예술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예술가 역시 그것이 예술이라 주장하지 않으며 예술이 되어야 할 이유를 애써 찾지 않는다. 단지, 관심이 있는 것을 계속 할 뿐이다. 누군가는 뭐하러 그런 행위를 계속하냐고, 현실에 도움이 되냐고, 그런 기술을 생계수단으로 활용해보라고 하지만 그는 그 말에 답변을 하는 대신 나사를 풀고 전동장치의 성능을 실험한다. 그런 시간이 30년 이상 이어지는 가운데 그는 공기청정기의 내부구조가 그리 복잡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중고가구와 환풍기를 이용해 공기청정기를 만들었다. 오렌지 껍질을 그 위에 올려두면 향기가 은은하게 퍼진다는 것도 발견했다. 프로젝트가 기획되기 전부터. 지원사업이 설계되기 전부터. 여전히 이것이 예술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흥미로운 것을 계속 했다.

 

 

한 예술가가 중고가구를 잘라 공기청정기를 만들었던 과정

 

 

그러다 <비기자>가 지원사업에 참여하면서 그가 만들었던 공기청정기의 재료와 제작방식을 보다 간편하게 정리해 프로젝트로 소개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프로젝트에서 드러나지 않는, 드러날 수 없는 누군가의 경험 혹은 행위를 우리는 어떻게 읽어낼 수 있을까. 물론 그것을 모두 드러내 예술의 사회적 가치로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꼭 그럴 필요도 없다. 단지, 개인 삶의 일부처럼 보이는 순간들을 예술의 사회적 가치와 연결해 총체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시선을 갖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많은 것을,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예술의 사회적 가치가 발생되는 상황과 층위에 대해 폭넓은 접근이 필요하다.

그러나 예술이 더욱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 차별화된 아이디어와 추진력을 갖추기를 기대하는 시선도 있다. 위의 프로젝트를 예로 들자면 “공기청정기의 종류를 다양하게 제작해보면 좋겠다”, “환경단체와 협력해서 프로젝트를 확장하면 좋겠다”, “공기청정기 외에 미세먼지와 관련한 시리즈 작업을 이어가면 좋겠다” 등의 의견으로 그 시선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마치 아래 두 그림과 같은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말들은 분명 애정을 담고 있지만, 예술의 보이지 않는 속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아이디어들로 읽히곤 한다. 그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가늠할 수 없는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혹은 이기적인 선택이나 비효율적인 실천도.

그렇다면 누군가는, 혹은 사회는 왜 예술가들이 창작의 시간을 쌓도록 응원하는 것보다, 드러난 성과나 결과를 확대해나가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예술가라는 개인의 삶, 혹은 예술의 지난한 과정보다 예술이 사회적 가치를 증명해내는 다양한 현장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예술을 이해해보려는 질긴 질문이 그리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나는 질문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답답함을 마주하지 않은 채 명쾌한 예술활동의 유형들로 예술의 사회적 의미와 관련한 논의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 나는 여전히 예술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그 모르겠음이 예술가들의 삶에 대한 궁금함으로 이어지지 못함이 더 아쉽다.

그렇다면 이 예술가들의 역할은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요즘은 정책화된 기획사업 안에서 예술가의 역할을 몇가지 문장들로 만난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지역의 이슈를 발굴하고 커뮤니티를 활성화하는. 하지만 인간을 향해 명시된 그 구체적인 기대들의 오히려 반대편에서 예술가의 역할을 상상하게 된다. 사회가 무엇을 문제화하는 관점에 질문을 던지는 것, 무언가가 사회적 이슈로 가시화되는 과정을 살피는 것, 커뮤니티에서 소외되는 개인성을 들여다보는 것, 그리고 미련하게 자신의 선택을 해나가는 것. 현실적 상황들이 그 선택을 방해하거나 망설이게 만들더라도. 교육기관에서 학습한 예술로 사회적 이슈와 관련한 해결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앞선 프로젝트 사례에서라면, 예술가의 역할은, 공기청정기를 시리즈로 만들어 환경문제와 메이커스 문화를 연결하는 활동을 가속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공기청정기가 되든 아무것도 되지 않든 계속 물건을 줍고 해체하고 다시 조립해보는 것이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어떤 가치인지,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함께 해보기 위해서는 어떤 장치와 과정이 설계되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실행해야 하는 것은 기획자나 매개자의 역할이다.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이 자신의 태도이자 일상을 지켜내는 구체적인 행위 외에 다른 것이라고 나는 기대하지 않는다. 자신의 목소리를 삼킨 채 번뜩이는 아이디어나 경력을 증명해내는 것이 다급한 사회 안에서, 자발적 관점과 재미를 지속시키려는 개개인들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사회적이다. 예술가로 불리기 이전의 개인, 그들이 각자의 관심과 의지를 지속시키며 존재하는 것 자체가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삶의 방식과는 다른 방향성으로 그들이 팽팽한 힘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술가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것과 다르다. 예술가는 사회적 변화를 위한 기능인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방향성을 지속하는 존재로서 중요하다. 사회가 급하게만 나아가지 않게, 누군가가 소외되는 인식구조가 익숙해지지 않게 그들은 각자의 개인성을 놓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소리를 모으고 쓸모없는 무언가를 만들고 흩어지기 좋은 이야기를 애써 주워담으며. 그것을 하고싶어 하는 본인 스스로에게 생활의 속도도 맞추며.

 

 

 

 

예술이 사회적 의미로 해석되는 기준 아래에 묵직하게 자리잡고 있는 어떤 시간들을 보자. 이것은 어떤 관점에서 포착되지 못하는 개개인의 삶이자 예술적 가능성이 아닐까. 이것은 사회를 알록달록하게 꾸미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기 다른 삶의 두께를 보여주기 위해 존재한다. 예술의 사회적 가치는 이 시간들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축적될 수 있는 환경 안에서 불쑥 혹은 필연적으로 솟아오를 수 있다. 그러나 솟아오르기를 기대하지 않는 어떤 시간도 있다. 그것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깊은 흐름을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일반적인 기준 위로 솟아올라 모두에게 보이는 가치로움이 아니라 가늠할 수 없을만큼 두꺼워진 누군가의 시간이다. 그곳에 예술의 또 다른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가 그곳을 바라보는 이유는, 그것을 알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본 원고는 서울문화재단의 '2019 서울형 장애 아동, 청소년 예술교육사업' 아카이빙북에 실린 글입니다.

 

 

 

 

 

장애예술교육, 특수성을 넘어 개별성으로

 

창작그룹 비기자 / 최선영

 

 

먼저 질문을 하고 싶다.

A에서 설명하는 사람을 바탕으로 B에 제시된 교육대상을 연결할 수 있을까.

 

 

A

 

 

 

B

 

 

 

 

날씨에 따라

기분이 변하는 사람

지적장애인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보지 못한 사람

눈앞에 무언가를

또렷하게 볼 수 없는 사람

시각장애인

무엇을 하는가보다

누구와 하는지가 중요한 사람

익숙하지 않은 재료는

만지고 싶지 않은 사람

청각장애인

잘하지 못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

5분 간격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

지체장애인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사람

다른 사람의 생각이

궁금하지 않은 사람

칭찬이 꼭 필요한 사람

정신장애인

쉬고 싶은 사람

타인의 이야기에

길게 집중하기 힘든 사람

자폐성장애인

타인의 선택으로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

말을 할 수 없는 사람

뇌병변장애인

몸의 근육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사람

 

 

우리는 큰 망설임 없이 A와 B를 연결할 수 있을까.

아마도 우리는 함부로 사람을 유형화할 수 없음에 불편해하기도 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장애유형별 특수성이 A에서 언급되지 않아서 망설일지도 모른다. 또는 A에서 언급된 부분이 꼭 장애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인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A에 언급한 사람들은 내가 교육현장에서 만났던 다양한 장애인 혹은 비장애인이다. 그 안에는 이번 장애아동예술교육 지원사업의 모니터링 과정에서 만났던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다. 물론 A에서 장애 특성을 드러내지 않게 설명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것은 한편으로 장애예술교육이 어떠한 관점으로 시도되고 있는지 되묻기 위한 설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장애예술교육이 주로 B에서 A로 접근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B 자체에만 집중하는 것은 아닌지 묻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관점, 방향성이 더 옳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의 관점으로만 사람을 바라보고 만나게 될 경우 다양한 소통은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A와 B의 위치를 바꿔보면 어떨까. 우리는 조금 더 쉽게 양쪽을 연결할 수 있을까.

물론 장애유형별 특성은 분명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람을 구성하는 중심요소가 되지 못할 때도 많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장애인은 예술교육 안에서 참여자 이전에 장애인이 된다. 우리가 장애 자체에 대해, 장애유형별 특성에 대해, 그 특성이 담아내지 못하는 개별성에 대해 잘 모름에도 말이다. 어쩌면 ‘장애’라는 단어, 혹은 개념은 비장애인 중심의 예술교육에 대한 반성적 의미로 획득된 사업적 용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사업 안에서 얼마나 다양한 개인들을 만나고 있는가. 그 다양함은 장애와 관련된 특수성이 아니라 사람마다의 개별성으로 인식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본 지원사업의 전반을 참여하고 모니터링하면서 개인적으로는 이해가 부족했던 청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을 만났다. 이들은 표현이나 소통방식에 있어서 비장애인과 차이가 있기에 프로그램 진행과 관련해 준비하거나 고려해야 했던 장치들이 분명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개별성은 몇 가지 장애 특성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만큼 사소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대부분의 예술강사, 기획자들이 “장애와 관계없이 그냥 아이들이에요. 별로 특별하지 않아요”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애예술교육에 대한 다른 관점‘도’ 생각해볼 수 있다. 장애가 아니라 개별성에서부터. 이것은 장애 이해도에 대한 부담감을 줄이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 더 큰 어려움을 전제하기도 한다. 그것은 첫째, ‘장애’에 대한 관념화된 요소들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점, 둘째, 특성별로 예측 가능한 장애인이라서가 아니라 가늠할 수 없는 사람이라서 결국 사람에 대한 관심이 더욱 깊고 예민해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개별성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예술교육이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과도 연결된다. 쉽게 예측하거나 파악하기 어려운 사람들과 정해진 시간 동안 무언가를 해보기 위해서는 결국 그 사람들의 개별화된 다양성을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장애, 비장애를 떠나) 예술교육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사람들의 상태를 얼마나 참여의 범위로 끌어안을 수 있을지가 중요하다.

이와 관련해, 위의 A,B 설정에서 우리의 관점을 두 가지로 나눠서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교육현장에서 B를 만난다고 전제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A를 만난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장애와 관련한 예술교육을 사업적으로 기획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시선으로, 후자의 경우는 교육현장을 어느 정도 만나면서 발견한 구체적인 강사나 기획자의 시선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두 가지 관점은 그것이 요구되는 상황에 따라 각각의 의미를 갖는다. 단지, 우리가 사업을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결국 ‘사람’을 만나 어떤 경험을 나누기 위해서 예술교육, 혹은 어떤 현장을 만들기 때문에 두 관점의 균형을 생각해야만 한다. 어떤 순간에 어떤 관점을 더욱 고려해야 할지 말이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질문을 해보고 싶다. 우리는 장애예술교육에서 B를 통해 A를 발견했든, 처음부터 A를 만났든, 다시 A를 B로 연결하려고 하고 있지는 않을까. 어쩌면 비장애인 중심의 예술교육에서는 B라는 필터 혹은 분류가 필요하지 않은데 우리는 B의 과정을 통해서만 효과적이고 차별화된 장애예술교육을 설명하려고 하고 있지는 않을까. 정책적, 사업적 교육대상으로 사람을 분류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그 틀이 교육현장에까지 이어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장애예술교육이 개별성과 유연성을 모색한다는 것은, 개별적 장애 특성에 따라 교육적 처세를 능숙하게 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개별성을 참여로 이끌어낼 수 있는 열린 관점과 태도를 갖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장애유형별 특성을 잘 파악하고 그에 따른 노하우가 있는 경력자만이 교육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낯설 정도로 구체적인 개별성을 염두에 두고 존중하려는 유연한 사람들이 앞으로 장애예술교육의 방향성을 함께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로 살아가기

 

2019.11.01. (금) 14:30~17:00

청년일자리센터 다목적홀

 

 

 

 

장애-예술-공동체 : 분리된 채로 연결된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예술가(예술 작품을 창작하거나 표현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는 매우 소수라고 생각한다. 시대에 따라 예술가를 정의하는 맥락과 범위가 변하고 있고 요즘은 더욱 ‘당신도 예술가, 모두가 예술가’라는 구호가 퍼지고 있지만 그럴수록 예술가는 더욱 소수가 되어가고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은 그 자체로 유통에 용이한 상품이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술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 사람이 살아나가기 힘든 사회 덕분에 예술가는 소수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나는 예술가는 아니다. 단지 예술프로젝트나 일반적인 작품 발표방식인 전시에 이따금 참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 발제를 할 수 있는 이유는, 오히려 내가 예술가는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예술가들의 삶에 관심이 있는 기획자, 활동가에 가깝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나의 경험을 나누기에 좀 더 수월한 입장에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예술가가, 공동체와 밀접하게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말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덜 사회적이고, 즉흥적이고, 자기세계에 몰입하며, 집단적 활동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캐릭터화된 예술가상에 대해 동의하거나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한국에서의 공동체가 특히 조직화, 집단화를 전제하는 경우에 더욱 예술가의 삶의 방식을 끌어안기 어렵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왜냐하면 예술가가 창작을 하는 과정, 살아가는 방식이 공동체 안에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하는 창작활동은 뚜렷한 하나의 목적을 향해 계획된 일을 해내는 것과 거리가 있다. 그러나 단체나 조직을 지속적으로 운영해야 하는 공동체의 경우는 (그것이 느슨하더라도) 운영 목표를 설정하고 그에 필요한 과정을 설계한다. 그러나 예술가는 살아가며, 해나가며 방향성을 찾는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선택하거나 전제한 목표와 방법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갖고 그 질문 던지기 자체를 통해 참여 혹은 창작의 의미를 찾는다. 공동체를 ‘공통의 가치와 유사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으로 전제할 경우, 예술가는 ‘우리가 공통적일 수 있는가’, ‘유사할 수 있는가’, 혹은 ‘왜 그래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가며 계속해서 ‘공동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고민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공동체와 결합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태도, 혹은 삶의 방식이 공동체의 방해요소가 아닌 다양성의 일부로 인식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쉽지 않다. 보통의 현실 속에서 공동체는 예술가가 질문의 생산자가 아닌 예술적 경험의 생산자로 기능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문을 하긴 하지만 공동체가 바라는 예술적 경험을 기획활동을 통해 어느 정도 수행하고 있는 나는 (언제나 자연스럽고 편안했던 것은 아니지만) 공동체와 연결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의 활동은 예술가의 공동체 활동 사례로 온전히 소개될 수 없다. 나는 예술가적 삶에 관심은 있으나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으며 예술가라고 스스로 소개하기에도 실제 활동과 맞닿지 않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서론이 매우 길었다. 이제부터 나의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나는 공공예술프로젝트나 문화예술교육 등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10년 넘게 이곳저곳에서 만나오고 있다.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켜 보호감시 기관에 있는 청소년들, 가족들의 눈치를 보며 매일 다리 밑에 나와 장기와 바둑을 두는 할아버지들, 경력단절이 된 여성들, 불안감이나 우울감이 큰 청년들, 그리고 장애인과 그 가족들. 그중 장애인과 만나거나 함께 창작활동을 했던 시간이 다른 활동에 비해 많았는데 그것은 비영리예술단체 내에서의 활동이나 특수학교에서의 예술교육으로 설명 가능하다. 그런데 나는 (공동체의 대표적 유형으로 볼 수 있는) 단체 관련 활동을 넘어서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데 그 이유는 결국 모든 활동이 각각의 의미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단체 외의 활동은 공동체에 대한 개인적 문제의식을 재설정할 수 있는 기회로 작동되기 때문에 또 다른 가치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장애와 관련된 활동을, 각각의 무게로 내 삶에 영향을 주고 있는 여러 유형의 공동체, 그것들 간의 상호성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여러 공동체와 연결된 나의 활동 범위

 

 

 위의 그림처럼 나는 여러 공동체에 관여하거나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그중에는 장애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나는 오랜 시간 다양한 현장이나 사회적 현상을 마주하면서 오히려 이것들이 빈부 격차나 도시생활의 일반화, 불안사회 등과 같은 공통된 이슈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는 장애, 비장애를 떠나, 삶에 대한 다층적인 경험을 나누고자 여러 단체나 모임 혹은 일시적 공동체 등에 참여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내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며 내 주변 사람들, 혹은 구체적인 어떤 공동체의 일원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활동 범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예술가는 아니지만) 나의 예술적 경험이나 과정이 다른 삶과 연결될 때에는 이러한 활동 범위가 갖는 위치와 규모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즉, 예술 자체가 공동체나 구성원의 삶에 구체적인 영향을 준다기보다는, 어떤 가치나 의미를 중심으로 활동의 범위를 기획하고 만들어나가는 개인의 삶이, 그것과 연결된 타인의 삶에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이다. 단지 예술적 경험이 그 활동 범위에서 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질 경우 우리는 예술에 대해 조금 더 집중해서 그 현상을 해석해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술이 장르로서의 예술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고 볼 때, 이것은 미술이나 문학, 연극, 음악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넘어서는 관점을 필요로 한다. 내가 어떤 공동체에 ‘가서’, 혹은 어떤 자리에 ‘참석해서’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기 때문에’ 무언가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삶이 불안정하고 이따금 오락가락한 마음 상태를 가진 사람이기에 타인이나 사회와의 관계를 탐색하기 위해 공동체를 포함한 여러 현장에서 예술적 행위를 시도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좀 더 흥미롭기도 하고 나를 표현하기에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시나 예술을 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내 개인적 활동 범위를 만들어나간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리고 예술가는, 혹은 나와 같은 또 다른 기획자나 활동가는 저마다의 활동 범위가 있을 것이고 그것을 스스로 범주화해나가는 맥락과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 활동 범위가 어느 정도 겹치는 사람, 혹은 동료들을 알고 있다. 이들과의 만남은 나에게 그 무엇보다 편안한 일시적 공동체가 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각자의 관심사를 바탕으로 자발적으로 활동하고 있기에 서로의 적극성을 기대하거나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비슷한 순간에, 같은 장소에 가서 각자의 방향성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서로에게 힘을 준다. 나에게 무언가 도움을 주거나 내가 누군가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비슷한 고민을 놓지 않고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에서 삶에 대한 힘을 얻는다.

  그리고 이들은 (나와는 다른) 예술가인 경우가 많다. (오로지 개인적 경험을 근거로) 나는 이들의 활동 범위가 갖는 의미, 그 안에서 발생되는 힘이 예술적 영향력을 보여줄 수 있다고 여긴다. 동시에 예술 자체가 공동체나 삶에 영향을 준다고 보는 것은, 비현실적인 설정 같기도 하고 예술이 발생되는 전반적인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각자의 삶을 영위하며 살아나가고 있는 사람들의 어떤 실천들이 타인에게도 의미나 가치로 전해지는 것이라고 본다.

 

여러 사람들의 활동 범위가 겹치는 양상

 

 

 

2019년 10월 5일 활동범위가 겹치는 사람들과 대학로에서 만나 일시적 공동체를 이뤘다.

장애인의 삶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목소리를 내며 퍼레이드를 하였다.

장애인을 차별하지 말자고 말하는 대신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이름을 외치고 좋아하는 노래를 불렀다.

(퍼레이드 진진진 : 중증장애인을 포함한 사회적 소수자들이

스스로를 드러내고 말하기를 예술의 방식으로 보여주려는 프로젝트)

*사진 출처 : 퍼레이드 진진진 페이스북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예술의 힘 이전에 사람의 힘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힘은 누군가에게 치유가 되기도 하고 자극이 되기도 하고 낯설음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예술은 마냥 긍정적인 요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치유든 자극이든 낯설음이든 시기적절한 슬픔이든 혹은 그 무엇이든 그 양상이나 파급력도 다양하다. 중요한 것은 일반적인 효율성이나 성과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예술의 이러한 속성에 관심이 많다. 왜냐하면 그것이 현재의 사회적 흐름과 다른 방향성을 띄기 때문이며 그래서 다수를 설득하기에는 힘들지만 그 자체로 방향전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기능과 쓸모를 끊임없이 개발하고 증명해야 하는 사회는 빠른 속도와 효율적인 생산성을 추구하지만 예술은 쓸모를 알 수 없는 질문, 속도를 늦추는 실험을 지속한다. 적어도 내가 정의하는 예술은 그런 측면에서 관계적 미학,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특히 현실적 운영이 필요한 공동체에서 이러한 예술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나는 공동체 안에서 예술이 어떻게 기능할지보다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어떤 역할을 예술가가 해내는 것은 예술적 삶의 방식과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가가 예술적 효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기능인으로 인식될 경우 예술가로서의 개인적 삶 자체를 존중받는 것은 어려워진다. 그런 측면에서 공동체와 예술의 관계성에 대한 논의는, 예술이 공동체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넘어, 예술가의 삶 혹은 예술적 삶의 방식이 공동체와 공존하기 위해 서로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의 다른 속성, 지향점, 삶의 방식을 존중하거나 학습하려는 태도를 필요로 한다. 이 과정에는 예술가가 얼마나 특이하거나 덜 사회적인지를 확인하려 하지 않는 것, 공동체가 예술가라는 개인에게 어떤 측면에서 필요한지 살피는 것, 다양한 양상의 공동체를 상상하는 것 등이 필요하다.

  공동체도 결국 ‘함께 살아나가려는 구체적 의지’로 읽힌다. 그런데 예술도 다르지 않다. (개인의 정치를 해내기 위한 창작 행위나 결과물은 적어도 나에겐 예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예술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자원을 마련하고 방법을 설계하고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이지 않는 관점이나 의미를 추구한다. 그럼에도 삶에서 효율적 기능을 해내는 것 안에 예술 같은 것이 감지된다면 그것은 예술이라기보다는 예술적 요소가 들어간 어떤 방법론 혹은 콘텐츠일 것이다. 그 차이를 구분해낼 수 있을 때 예술과 함께 살아나가는 방식을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난 예술가가 아니지만 나를 포함한 몇몇 사람을 예술가로 인식하고 존중해주신 분의 글을 마지막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내가 2012년부터 4년간 함께 했던 (여러 공동체 중 하나인) 비영리예술단체에서의 활동을, 장애인 창작자의 부모가 최근에 이렇게 회상하였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예술은 장애와 관련된 현실의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으나 타인의 삶에 어떤 흔적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참 미련하고 답답하지만 나는 언제나 ‘그러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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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젊은 예술가는 이것이야말로 예술가가 꼭 갖추어야 할 것이라며 부러워하였고, 일군의 그들은 지금까지 장애라 써 놓은 것을 미덕이라 읽어 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도 그(장애인 창작자)의 세계에 첨벙 뛰어들 수는 없다. 그저 그의 세계를 기웃거리고, 그의 주변을 서성이며 불현듯 조우하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들의 예술 세계와 그의 미덕 있는 세계가 크로스오버 되는 어느 지점을 찾아 헤매며 우주를 유영하는 막막함. 이 두 아웃사이더 그룹의 만남은 그래서 좀 뿌옇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과연 그들은 만나기나 할까? 만난다면 불꽃이 튀기는 튈까? 어느 세월에? 처음엔 그랬다. 처음에는.

아마도 내가 생각한 예술은 영감이 불꽃처럼 튀어 오르고, 모두가 우러러 마지않는 걸작을 만드는 것이었나 보다. 그러나 이 생각은 그 예술가들을 만나서 같이 기웃거리고 서성이고 대화하면서 바뀌어 갔다. 그들은 조급하지 않았고 아니 조급증을 낼 무슨 결과를 기다리지 않았다. 스파크 따위 안 터지면 뭐 어떤가? 설사 만나지 못하고 이렇게 계속 유영만 한대도 저기 어딘가에는 나처럼 우주를 떠다니는 유목민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 기쁘지 아니한가? 너도나도 이 세상에 태어난 한 인간일 따름이라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고방식과 태도. 예술은 걸작으로 남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예술의 껍데기라는 것. 예술의 알맹이는 지금 우리의 태도에 있다는 것. 이 태도를 나는 중년이 되어 어린 예술가들에게서 배운 것이다. 그것은 행운이었다.

 

2019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웹진 이음 5호

[젊은 예술가의 태도가 일깨운 삶에 관하여 “재미를 보기에 희망을 가진다”]

고혜실 로사이드 정진호 창작자 어머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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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원고는 2016년 성북문화재단 <평등한 입장, 턱없는 극장>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본 원고는 2019년 오로민경 개인전 <영인과 나비>의 연계프로그램 '공감각 운동회'에서의 발제문으로 공유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턱을 만날 때 보이는 것들 / 최선영

 

 

“생후 1년 된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한 엄마가 극장으로 들어선다. 그녀는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 그녀가 아이를 데리고 극장으로 들어가서 편안하게 영화를 볼 수는 없을까?”

 

이 질문은 나에게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나 역시 아들을 태운 유모차를 끌고 동네 길가의 턱을 넘으며 장을 보고 놀이터를 오가던 시절이 있었기에, 아이 엄마들이 편히 갈 수 있는 문화공간이나, 그것을 위한 시설에 대해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내 아들은 6살이 되었고 내 손을 잡고 여기저기를 오가지만 아이와 함께 갈 수 있는 공간, 그 중에서도 문화공간은 많지 않다. 왜 그럴까. 이번 ‘평등합 입장, 턱없는 극장’ 사업의 초반에는, 그것이 어떤 시설들의 부족 때문이라는 전제로 필요한 장치들을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그 ‘아이’의 범위는 아직 걷지 못하는 갓난아기부터, 7살 정도의 아이까지로 정했다. 내 아들과의 6년간 시간을 돌이켜보며 모유수유를 하고 있는 엄마, 아이에게 정해진 시간에 이유식을 먹여야 하는 엄마, 엄마와 잘 떨어지지는 않는 아이를 가진 엄마의 입장으로, 영화관에 무엇이 필요할지 생각해보았다. 사업 초반에 정리한 필요 시설물은 아래와 같았다.

 

넓은 자동 출입문

• 유모차와 함께 여닫이문을 통과하려면 누군가가 문을 잡아주거나 엄마가 한 손으로 문의 손잡이를 잡은 채 유모차를 밀어야 한다.

• 출입문의 통과 너비가 좁으면 유모차가 지나가기 힘들다. 또한 엄마가 어린 아이와 손을 잡고 함께 통과하기에도 쉽지 않다.

 

턱이 없는 인테리어

• 조금이라도 바닥에 턱이 있으면 유모차를 밀어서 통과하기가 쉽지 않다. 턱이 높거나 유모차가 무거우면 여성 혼자서 유모차를 옮기기도 버겁다.

• 이제 막 걷기 시작하는 아이는 턱을 잘 넘지 못한다. 서너 살 아이들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에 턱을 잘 살피지 못하고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엘레베이터

• 엘리베이터가 없는 상태에서 유모차와 함께 한 층이라도 이동하는 것은 신체적으로 매우 힘든 일이다.

• 단지 어린아이와 손을 잡고 1,2층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쉽지 않다. 아이는 계단 하나하나를 어른보다 높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이와 함께 다니면 엄마가 들어야 할 기본적인 짐들이 많은데 이것과 함께 계단을 사용할 경우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놀이방

• 영화 상영시간을 기다리는 잠깐의 시간도 아이에게는 길고 지루하다. 그럴 때 놀이방이 있으면 어른들이 아이에게 얌전히 기다리라는 주의를 주는 대신 아이들이 즐겁게 놀 수 있다.

• 만약 아이를 잠시 누군가에게 맡기고 엄마가 영화를 보러 갈 경우, 놀이방이 있으면 아이도 좀 더 즐겁게 시간을 보내며 엄마를 기다릴 수 있다.

 

수유실

• 모유수유를 하고 있는 엄마에게 수유실은 반드시 필요하다. 수유실이 없으면 엄마는 공중 화장실 변기에 앉아 불편한 자세로 수유를 해야 할 수도 있다.

 

탕비실

• 아이에게 이유식이나 분유를 먹여야 하는 엄마에게는 탕비실이 필요하다. 이유식을 전자렌지에 데우거나 분유를 탈 공간이 있어야 제 시간에 아이에게 영양분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배고픈 시간에 음식을 먹지 못하면 크게 울거나 보채곤 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시설들이 잘 갖춰진다면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극장 혹은 어떤 문화공간에 자주 가게 될까? 이상하게도 ‘그렇다’ 라는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는다. ‘내가 꼭 아이와 극장에 가고 싶은가’, 라는 물음도 들고 ‘내가 꼭 극장까지 아이를 데리고 가야 하는 건가’ 라는 생각도 든다. 나의 문화생활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난 더더욱 아이와 떨어져서 나의 시간을 누리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문화공간의 시설, 공간, 시스템에 대한 접근이 조금씩 다른 방향의 질문들을 만들었다. 아니, 그 질문은 이제야 내 안에서 생성되어가는 듯했다. 그래서 주변의 아이엄마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인터뷰라는 이름을 빌려, 동네 카페, 집, 키즈 카페에서 여유로울 수 없는 수다를 떨며 만났다. 한 아이가 울고 다른 아이가 물을 엎지르고 그 두 아이가 싸우는 현장 바로 옆에서, 저녁 반찬거리를 걱정하고 내일 어린이집 준비물을 챙기며 이야기를 나눴다. 한두 시간의 대화도 이렇게 쉽지 않은데 그 사이에 문화, 혹은 문화생활이라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지 나는 엄마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질문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뷰 현장

 

 

 

나를 포함한 엄마들은 사실 문화공간의 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도 가지 않는 이유들이 많았다. 그 이유들은 푸념 같은 말들로 쏟아졌고 나는 그것을 키워드들고 정리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여기에 담고자 한다.

 

시간이 어딨어요.”

• 예를 들어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는 엄마의 경우, 대략적으로 오전 10시에서 오후 3시까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긴다. 하지만 엄마들에게는 기본적으로 가사노동의 부담이 있고 실제로 그것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오전 10시부터 대략 1시간 정도 청소나 빨래를 하고 나면 점심을 먹는다. 그럼 어느덧 오후 1시가 훌쩍 지난다. 세탁소를 다녀오거나 동네 마트에 다녀오고 나면 잠깐 차 한 잔 마실 시간 정도가 남는다.

• 직장을 다니는 엄마의 경우는 평일 낮에 개인 시간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며 주말에는 집안 모임에 참여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것이 더 우선시되곤 한다.

 

몸이 힘들어요.”

• 아이엄마가 낮이나 밤에 영화관 등을 다녀온 후에 오후에 육아를 하기에는 체력적으로 힘들다. 집이 휴식 공간이기 전에 엄마에게는 가사노동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나 영화보고 오겠다고 애 맡기기엔 좀 미안하고 눈치 보여요.”

•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게 사치가 된 것 같다고 느끼는 엄마들이 많다. 주변에서 그렇게 말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런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에 엄마 스스로 부담감을 가진다.

• 문화생활에 대한 관심이 있는 집안(친정이든 시댁이든)이 아니면, 엄마의 문화생활은 공감받기 힘들다.

• 엄마들은 가정의 살림살이를 하면서 본인의 문화생활을 위해 돈을 쓰는 것 보다 그 돈으로 다른 가족 구성원에게 뭔가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애랑 편히 갈 수 있는 분위기면 가겠어요.”

• 만약 엄마가 영화관에 아이들과 가면 애들이 발로 앞좌석을 차거나 소리를 내기도 한다. 그래서 억지로 구석 자리를 잡는다. 아이들이 중간에 나가겠다고 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같은 돈을 내지만 안 좋은 자리에서 온갖 신경을 쓰며 영화를 보는 것이다.

• 아이들을 반기지 않는 사회적 인식이 많아지면서 엄마들이 아이를 공공장소에 잘 데리고 나가지 않게 된다. 대중교통에서 다른 사람들이 자리도 잘 양보해주지 않고, 엄마가 운전을 할 줄도 모르고, 어디가나 아이에게 조용하라고 해야 할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게 된다. 엄마들은 도시에서 어디를 나가는 것 자체가 꺼려지는 부분이 크다고 말한다.

 

그냥 혼자 차나 마시고 싶어요.”

• 내가 그냥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나의 문화생활이라고 여기는 아이엄마들도 많다. 어떤 공연이나 영화를 보는 것만이 문화생활이 아니라, 혼자 편히 쉬거나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것이 문화생활이라고 느끼곤 한다.

 

여유롭게 혼자 좀 즐겨야 그게 문화생활인데...언제나 전 비상대기 상태인걸요.”

• 갑자기 어린이집에서 전화가 올 수도 있고 아이가 아플 수도 있어서 엄마는 항상 비상대기상태다. 집안에 어떤 일이 생기면 공연이든 약속이든 취소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어떤 모임에 들어가거나 개인적 약속을 잡아도 자신은 자주 그 약속을 변경해야 하는 사람이 되니 그것이 연속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혼자 다운받아서 영화보고 그런 게 맘 편해요.”

• 엄마 스스로 주변의 시선이나 현실적 제약들을 하나하나 신경 쓰면서 문화공간에 다녀오느니, 혼자만의 공간에서 문화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기도 한다.

• 영화관에서 조용히 영화는 보는 성향의 아이가 있다고 해도 한 번씩 “엄마, 무서워”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 민폐이기 때문에 요즘은 집에서 영화나 음악을 다운 받아서 가족과 같이 즐기는 엄마들도 늘고 있다.

 

이러한 의견들을 통해 엄마들은 시설과 무관하게 사회적 인식이나 현실적 한계 때문에 문화생활을 하기 힘들거나 혹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 발견된다. 동시에 아이엄마들과의 문화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이러한 정서적, 심리적, 현실적 요소들을 파악할 필요성도 확인한다. 그렇다면, 처음에 이 프로젝트에서 던졌던 질문을 다시 살펴보자.

 

“생후 1년 된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한 엄마가 극장으로 들어선다. 그녀는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 그녀가 아이를 데리고 극장으로 들어가서 편안하게 영화를 볼 수는 없을까?”

 

매우 구체적인 이 상황적 질문은 사실 아이엄마에 대한 관념적인 전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판단이 든다. 그걸 하나씩 쪼개어 열거해보자면 아래와 같다.

 

• 어린아이 중에는 유모차를 거부하는 아이도 있다. 엄마들이 허리가 아파도 아기띠로 아이를 메고 이동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모차는 아이엄마의 모습을 상징하는 요소지만 사실 어떤 연령, 어떤 기질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에게만 해당되는 이동수단이다.

• 엄마는 아이와 함께 극장에 오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아이를 맡길 곳이 없거나 아이가 엄마와 떨어지지 않아서 부득이하게 함께 온 것일지 모른다. 엄마는 어딜 가든 자신의 아이를 돌보고 책임져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이러한 전제를 만든 것은 아닐지 생각하게 된다.

• 아이엄마는 보고 싶은 영화가 없을 수도 있고 혹은 영화를 집에서 다운 받아서 보는 것이 더 편할 수 있다. 극장은 문화를 향유하는 공간을 의미하지만, ‘문화’를 여유로운 개인의 취미 활동으로 해석할 경우, 극장에 가는 것 자체가 버거운 엄마에게는, 극장으로의 외출에 동기부여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아이엄마가 극장으로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서 영화를 보게 되는 것만으로, 그녀는 스스로가 문화를 즐겼다고 느낄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길고,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어떤 상황을 아래와 같이 한 번 상상해본다.

 

전업주부 OO는 생후 1년 된 아들과 내일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가려 한다. OO는 1시에 시작하는 영화에 도전하려 한다. 사실은 아침 9시와 저녁 6시에 하는 영화를 더 보고 싶지만 이른 아침은 남편 출근을 도운 후 움직이기에 빠듯하고, 저녁 4시쯤엔 집에 돌아와야 밀린 빨래를 하고 저녁밥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1시에 하는 영화를 보려는 것이다. 사실 영화관에 아주 가고 싶다기보다는, 어제는 길 건너 쇼핑몰에, 저번 주에는 옆 동네 대형마트에 아들과 무리 없이 다녀오는 데에 성공해서 이번에는 다른 곳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크다. 이러한 공간들 외에 운전을 하지 못하는 OO가 도시에서 아이와 갈 수 있는 공간이 많지 않기도 하다.

OO는 1시 영화를 보기 위해 보통 오후 2시인 아들의 낮잠 시간을 1시간 당겨야겠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전날 밤에 평소보다 일찍 아들을 재웠다. 아들은 자지 않으려 했지만 OO은 온 집안에 불을 끄고 아들에게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허리가 안 좋으신 친정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영화를 보러 가기에는 도저히 마음이 편하지 않기에 OO는 혼자 계획을 세우고 도전을 하고 있다.

OO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지만 아들은 여전히 자고 있다. 도통 일어나려 하지 않는 아들을 결국 울리며 깨운 후 남편의 아침을 준비하고 어제 널어놓은 빨래를 정리한다. 아들은 잠을 푹 못자서 OO의 다리를 붙잡고 칭얼대고 남편은 오늘 야근을 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남긴 채 현관문을 나간다.

OO는 1시 영화를 보기 위해 아들의 이유식을 만들어 포장하고 이른 점심을 챙겨 먹는다. 12시 20분쯤 아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집을 나선다. 극장까지 20여분 걸어가야 하는데 그 사이에 만나는 턱은 30개쯤 있다. 유모차에는 이유식, 기저귀, 물티슈, 아들의 여벌 옷, 물병 등이 가득 담겨 있어 무겁다. 곧 도착인데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아들이 잠이 들려고 한다. 잠이 들면 자칫 영화 중간에 깨서 울 수 있기 때문에 OO는 아들에게 과자를 꺼내주며 눈을 뜨라고 말한다. 아들이 과자를 먹는 시간 동안 OO는 끊임없이 말을 걸고 노래를 부른다. 지나가는 차를 보며 감탄사를 하고, 나무가 멋지다고 말해주고, 유모차도 이리저리 흔들어본다.

다행히 아들은 잠들지 않았지만 비몽사몽으로 극장에 도착했다. 정신없이 극장까지 온 OO는 땀을 닦으며 아들의 물건이 가득한 가방을 뒤져서 지갑을 꺼낸다. 아들이 중간에 혹시나 소리를 낼지도 모르기 때문에 OO는 영화관 구석진 자리의 티켓을 산다. 이제 영화 시작 10분 전이기 때문에 아들이 푹 잠이 들어야 한다. 극장 로비의 구석으로 가서 OO는 유모차를 천천히 밀며 자장가를 부른다. 제발 아들이 10분 만에 잠들기를 빌며.

 

아직 영화는 시작되지 않았다. OO는 무사히 영화를 볼 수 있을까. 그리고 영화를 편안히 볼 수 있을까. 그의 아들은 기적처럼 2시간을 조용히 잘까. OO는 영화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서 영화의 내용을 여유롭게 떠올려보며 쉴 수 있을까.

위의 상황은 나의 경험담, 그리고 이번 인터뷰에서 만난 아이엄마들의 이야기를 섞은 것이다. 즉, 매일매일 벌어지는 상황이자 특별히 과장된 내용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이엄마에게 ‘문화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보통 ‘문화생활’이라고 말하는 공연, 전시, 영화 관람이,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삶이나 그 흐름을 소외시키며 해내야 하는 활동으로 전제될 경우, 그 사람은 그 활동을 해야 할 이유를 스스로 찾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문화, 혹은 문화생활은 무엇일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문화는 사회적, 공식적 활동만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것을 못하는 사람은 소외감이 들고, 그것의 내용과 무관하게 그것을 해보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거나 스스로를 실험해보게 되기도 한다. 이번 인터뷰 중, 오늘은 영화관, 내일은 쇼핑몰, 그 다음 날은 또 어디를 가보는 것이 마치 스스로의 미션 같다는, 한 아이엄마의 말도 떠오른다.

그리고 개인이 자신의 삶의 범위와 조건 안에서 해볼 수 있는 문화, 혹은 문화생활은 사실 우리 안에서도 거의 고려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바느질, 독서, 수다모임 같은 것은 너무 소소하거나 일상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문화라는 사회적 개념보다 덜 의미 있거나 혹은 덜 생산적인 것으로. 실제로 개인이 그 덜 생산적이라 여겨지는 활동에 오히려 더 관심과 동기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이건 너무 소소한 것이 아닐까’ 라는 스스로의 의심이 생길 정도로.

그렇다면 기존의 문화에 대한 개념이나 관점 대신, 아이엄마에게 의미화 될 수 있는 문화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시설의 확보만이 그 충분조건이 될 수 없음을 확인할 때 우리는 아이엄마의 일상 안에 담긴 사회적 인식과 가사노동의 현실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그것을 한 번에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들을 드러내고 공감하는 시간은 필요하다. 그것은 어쩌면 매우 정서적인 관계나 소소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될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문화 콘텐츠의 기획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와 엄마, 그리고 그 주변의 삶을 소외시키지 않는 문화적 실천 현장을 위해서 필요하다.

누군가에게는 익숙한 문화생활이 누군가에게는 일상적 부담이 되곤 한다. 그 순간들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사회적 ‘턱’ 앞에 선 한 사람에게 알아서, 시끄럽지 않게 ‘턱’을 넘으라고 말한다. 혹은 눈에 보이는 ‘턱’들은 없앴으니 이제 괜찮은 게 아니냐고 묻는다. 그 사람은 정말 괜찮을까. 각기 다른 상황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괜찮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을 염두에 두려는 타인, 혹은 사회의 의지가, 보이지 않는 ‘턱’의 높이를 조금씩 낮출 것이다. 우리는 그 ‘턱’의 높이가 얼마나 높은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그 ‘턱’의 높이를 얼마나 많이 낮출 수 있을지도 아직 모른다.

 

 

<서울 청년예술인 정책 포럼> 

□ 일시 : 2019년 9월 23일(월) 오후 2시
□ 장소 : (구)대학로 동숭아트센터 2층 대회의실 (서울 종로구 동숭길 122)

□ 구성
사회 : 라도삼(서울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주제발표 01

/ 청년정책의 흐름과 방향_서복경(서강대학교 현대정치연구소 청년정책센터장)
- 주제발표 02

/ 청년예술(인) 개념과 정책 방향_박소현(서울과학기술대학교 IT정책전문대학원 교수)
- 주제발표 03

/ 청년예술인의 실태와 정책 방향_최선영(창작그룹 비기자 대표)


- 종합토론 / 좌 장: 박도빈(동네형들 공동대표)
토론자: 성연주(문화사회학 연구자)
옥민아(공공연희 단장)
전수환(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정진세(극작가, 비평가)


주최 서울문화재단, 서울연구원
주관 서울청년예술인캠프준비위원회

* 발제문 : https://www.sfac.or.kr/opensquare/notice/notice_list.do?cbIdx=955&bcIdx=106049&type=

 

테마토크

장애 예술,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

magazine.sfac.or.kr

 

 

서울문화재단 월간지 [문화+서울]에 기고했습니다.

 

 

 

 

 

 

장애 예술,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 :
다급함의 문제는 문화나 예술로 해결되지 않는다

 

 

 

해결하려는 욕구로부터 멀어지기

장애 예술가의 창작 및 향유지원에 관해 발언의 기회가 생길 때마다 효율적인 방법을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한 망설임이 있다. 이미 장애 관련 이슈는 차별과 소외의 맥락으로 전제되어 사회적인 ‘문제’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결’을 효율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장애인이 차별받고 있다’는 문제로 현재 상황을 바라볼 경우, 그것은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는’ 해결 방안을 마련하는 것으로 논의가 진행된다. 그런데 이것은 ‘다름’을 ‘다양성’으로 수용하고 재발견할 수 있는 문화나 예술 영역에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관점인지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아름답지는 않더라도 조금 다른 방향성, 혹은 조금 다른 공존을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장애 관련 이슈나 상황을 문제로 전제하고 해결된 상태를 목표로 두기보다 오히려 문화예술적인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것으로 예술의 사회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호한 해결점을 목표로 우수한 국내외 사례를 참고하는 것에 앞서, 현재 국내의 상황을 우리가 얼마나 알고자 하는지 되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장애를 바라보는 관념화된 시선의 파악

장애인은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이유로 사회적으로 격리, 보호되기보다 사회적 생산성을 높이기 힘든 존재로 전제되어 비장애인과 다른 공간, 환경에서 생활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단지 숨을 쉬고 있는 사람, 일을 하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 천천히 일을 하는 사람은 일반화된 몸을 움직여 일반화된 속도로 일반화된 생산력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과 분리되어 살아간다. 이에 따라 삶의 기회에 있어서 비장애인과의 차이가 존재한다. 그 안에는 교육 참여나 문화향유의 기회도 포함된다. 그리고 일반적인 생산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사회 안에서 함께 살아가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인식 속에서 그들은 보통 보호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사회적 시스템 일부를 개선한다고 해도 쉽게 바뀔 수 없는 사안이지만 우리가 이런 인식을 얼마나 당연하게 갖게 되었는지를 살피는 것은 필요하다.
이는 우리가 장애인을 뭉뚱그려진 관념적 존재로 상상하고 있다는데서 출발할 수 있다. 휠체어를 탄 사람, 지팡이를 짚고 걷는 맹인, 영화 <말아톤>의 주인공 정도로 그려지는 장애인은 사실 장애 유형별로 특성이 매우 다르다. 또한 사회적인 요소나 어떤 사건으로 인해 후천적으로 장애를 갖게 된 사람도 많기 때문에 장애는 어떤 면에서 충분히 상상하고 경험 가능한 영역 안에 있기도 하다. 하지만 보통 ‘장애’는 관념화된 사회적 이슈로 인식되고, ‘장애인’은 도움이 필요한 소외계층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장애인 당사자나 그 가족, 그리고 비장애인도 장애, 비장애가 구분된 삶의 환경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장애-비장애의 공존을 문화예술이 해낼 수 있을지는 여전히 모호하지만, 먼저 우리가 얼마나 분리된 삶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는 있다. 그리고 ‘대체 왜 그럴까’라는 물음이 지속적으로 제기될 때,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현재 우리가 시도 가능한 공존 방식을 상상할 수 있다.

 

현재 가능하지 않은 목표나 방식에 대한 의심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파악 없이 장애인이 차별받거나 소외받는 상황을 오로지 해결하기 위해 문화나 예술을 활용할 경우, 어떤 차원의 공존도 불가능하다. 오히려 차별의 문제를 해결할 것만 같은, 혹은 부분적으로 해결의 순간을 만드는 소수만이 그 성과를 가져가게 된다. 그럼에도 구체적 근거 없이 모호한 목표나 방식을 공식화하고 그것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존재한다. 왜냐하면 사회적 약자로 전제되어 있던 장애인의 삶에 그것은 반가운 ‘희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더욱 쉬운 논리의 사회적 인식이 우리들 일상에도 작동되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업이나 활동이 정말 가능한 목표나 방식을 취하고 있는지, 혹시 그것이 다른 목적을 위해 작동되고 있거나 (누군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렇게 작동될 여지가 있는지를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그리고 공공기관일수록 이러한 태도를 더욱 공식화된 언어로 고민해야한다.

 

모호한 희망 대신 가능한 시도부터

그런 맥락으로 서울문화재단이 올해 시도하고 있는 사업이나 행사의 방향성도 살펴볼 수 있다. 5월 31일부터 6월 1일까지 양일간 동대문디자인플라자 크레아(DDP CREA)에서 진행된 ‘장애와 비장애가 공존하는 문화예술의 미래 포럼 <같이 잇는 가치>’의 경우 장애인의 창작 활동과 관련한 우수 사례를 콘텐츠 중심으로 열거하지 않고 다양한 현장의 목소리를 장애인 당사자 중심으로 소개했다. 이러한 공론의 장이 지속될 경우 장애인을 ‘위한’ 제도의 설계를 넘어 장애-비장애의 공존 방식을 다채롭게 모색하는 시도가 힘을 얻을 것이다.
잠실창작스튜디오는 ‘서울형 장애아동·청소년 예술교육 운영단체지원사업’을 새롭게 진행했는데, 6월 3일 참여단체를 선정, 발표했다. 이 사업은 교육 대상자를 장애아동·청소년으로 한정지었다. 이러한 시도가 장애, 비장애를 구분 짓지 않으면서도 예술교육에 대한 생산적 논의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선정된 단체뿐만 아니라 재단의 역할도 중요할 것이다.
또한 잠실창작스튜디오, 금천예술공장, 신당창작아케이드의 입주 작가들이 참여하는 상호티칭워크숍도 진행되고 있다. 장애 예술가를 위한 지원이 아니라 다른 감각 간의 교류와 만남을 지원하는 이러한 시도가 사업적 성과를 넘어 문화예술 분야에 확장된 질문을 던지기를 바란다.
예술 현장에서는 비장애인 관람객 중심으로 발표되던 공연을 배리어프리 방식으로 진행하는 시도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구체적인 사업이나 행사를 단체나 기관이 주도할 경우 사회적 파급력이 커지고 정치적으로 활용될 여지가 많다. 따라서 불편하지 않은 목표를 설정하고 익숙한 방식을 선택하기보다 재단이나 개별 단체, 기획자들이 낯설더라도 ‘현재 가능한 시도’가 무엇일지를 지속적으로 살펴야 할 것이다.

 

장애 예술가의 창작에 대해

한편으로 공공과 민간 영역에서 장애 예술가의 활동을 다양화하고 장애-비장애인의 경계를 줄이는 문화예술 현장을 만들려면 어떤 방향성을 추구해야 할까. 이 광범위한 질문에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술이 장애 예술가의 사회 참여 기회로만 기능하지 않아야한다. 장애인이 사회적으로 소외된 채 살아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힘든 삶에 대한 해결책으로 예술이 기능할 경우, 장애인은 예술 영역 안에서 더욱 고립되거나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머물 것이며 비장애인 중심의 예술 영역은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또한 예술에 대한 확장된 의미와 가치를 실험해보는 기회가 더욱 축소될 것이다.
둘째, 장애 예술가의 창작 활동이 몇 가지 유형으로만 고정되지 않아야 한다. 특히 최근 장애 예술가의 창작은 사회나 타인과의 관계성보다 개인의 고유성에 집중하거나, 몇 가지 매체를 주로 다루는 방식으로 유형화되고 있다. 타 분야와의 컬래버레이션이나 새로운 매체에의 탐구가 지속되는 동시대 예술 안에서 이러한 현상은 자칫 누군가의 창작을 장애의 관점으로만 해석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셋째, 장애-비장애, 장애인-창작 활동, 장애-사회 등을 매개하는 사람들의 활동이 단절되지 않아야 한다. 기존에 이러한 역할을 해왔거나 현재 하고 있는 사람들의 활동은 ‘장애인이나 사회를 위해 필요한 활동’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이들의 활동이 예술적 실험으로 나아가거나 전문화될수록 오히려 사회적으로 이것을 설명할 언어가 부족해지기도 한다. 때문에 이들은 스스로의 활동 근거를 마련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개별 경험을 통해 전문적 역량을 보유한 매개자이자 창작자이자 기획자인 이들의 역할은 장기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이들의 기회가 단절되지 않을 공식화된 장치가 필요하다.
넷째, 장애의 요소를 사회적인 주제로 만나는 기회만 마련되지 않아야 한다. 장애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사회적인 주제에 관심을 갖는 것으로 쉽게 해석된다. 그러나 장애는 우리의 일상과 그리 특별하지 않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하기에 장애를 특별한 주제로 부각시키는 문화적 기획을 늘리는 대신 서로의 삶이 얼마나 다층적으로 연결돼 있는지를 살피는 기회가 마련되어야 한다.
앞의 네 가지 의견은 대부분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 이전에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는 어떤 목표를 이룰 것 같은 희망과 더욱 거리를 두기 위함이자,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우리에게 더욱 어렵고도 필요한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장애에 대한 관심을 넘어 문화 다양성의 맥락으로

이 모든 것은 장애인의 창작 및 문화향유 기회를 위해서라기보다 문화 다양성의 실현을 위해 필요하다. 어떤 대상을 위한 문화가 아니라, 문화 자체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장애인‘도’, 장애에 대해 관심을 가진 ‘누구든지’ 각자의 문화적 경험을 만들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예술이 장애인에 대한 사회 참여 기회로 기능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또다시 연결된다.
그리고 문화가 다양해지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전략 수립과 실행 이전에 우리의 인식이나 태도가 더욱 중요함을 발견해야 한다. 이것은 효율성을 전제로 접근 가능한 영역이 아니다. ‘효율적’이라는 것은 ‘들인 노력에 비해 얻는 결과가 큰’ 것을 의미하는데 그렇다면 더욱 문화예술적인 방식과 거리가 있다. 우리는 효율적인 방안이 다급한 상황 안에 있지만 그렇다고 비효율적인 실험을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장애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장애, 비장애,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들이 공존하는 문화적 다양성을 위해 우리는 효율적일 수 없는 방식을 찾아보아야 한다. 문화나 예술은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돌파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렇게 불안하고 바쁜 상황에서도 다른 속도로 서로를 만나며 다른 시선을 찾는 순간에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문화와 예술이 시작될 것이다.

2019 장애-비장애가 공존하는 문화예술포럼 <같이 잇는 가치> 발제문

 


장애예술이라는 영역을 어떻게 만날지 고민하는 분들에게
/ 창작그룹 비기자 최선영

 

 

사례 소개를 위한 긴 서론

장애예술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매우 사회적인 주제로 보인다. 어떤 부분에서는 그렇지만 장애예술을 사회적 성격이 강한 대주제로 전제하면, 개인은 시대적 흐름에 의해서 그것을 ‘공부하거나 관심을 가져야 하는’ 과제로 인식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서는 무엇보다 매우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놓고자 한다. 나는 장애예술이라 불리는 영역을 ‘장애예술’로 만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장애예술을 다른 관점으로, 혹은 다른 이름으로 바라보고 해석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나는 나를 위해서 장애예술이라 불리는 영역을 계속해서 만나고 싶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좋아했다. 하지만 미대 입시를 준비하면서 정형화된 표현방법을 오랜 시간 연습했고 그 과정에서 그림에 대한 흥미를 오히려 잃어버렸다. 미대에 합격 후 빈 캔버스를 채우는 것은 더욱 두렵고 힘든 일이 되었다. 내가 정말 자기표현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혹은 표현활동에 훈련되기 쉬운 사람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15년 전 그때, 우연히 장 뒤뷔페가 쓴 ‘아웃사이더 아트’ (1972년 로저 카디널이 아르 브뤼트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아르 브뤼트란 가공되지 않은, 순수 그대로의 예술이라는 뜻의 프랑스어이다. 장 뒤뷔페가 1945년 정신 질환을 앓는 환자들의 창작 작품을 조사하다 알게 된, 그들의 작품을 지칭한 말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이들이 미술제도 바깥에서 창작을 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 되었다.  *출처 : 네이버 책소개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32812 )라는 책을 발견했다.

 

 

이 책은 2003년에 발간되었으나 지금은 절판되었다. 나는 ‘장애’의 관점으로 이 책을 보지 않았다. 나와 달리 미술을 학습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표현활동 자체와 그 에너지, 그것이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특별하게만 조명 받는 맥락에 관심이 있었다. 이것은 내가 ‘장애예술’을 ‘장애’의 관점으로 만나지 않았던 시작점이며 지금의 고민과도 이어지는 부분이다.
그렇게 혼자 책을 보고 인터넷 자료를 뒤지다가 대학교를 졸업한 후 돈을 벌기위해 지역의 문화예술단체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나는 문화예술교육 수업 촬영을 아르바이트처럼 시작하게 되었는데, 우연히도 그 수업은 모두 장애인 청소년들과의 미술수업이었다. 그때는 내 삶에서 ‘장애’와 관련한 구체적 현장을 처음으로 만났던 시기지만 ‘장애인’에 초점을 둔 예술교육에 관심을 두고 그 일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일을 하면서는 장애인의 삶에 대해, 교육적 기회에 대해, 예술표현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무엇보다 제도권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의 표현에 더 깊은 관심이 있었다. 앞을 잘 보지 못하는 한 학생은 장애 때문에 미술학원을 다닐 수 없었지만(미술학원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내 관점에서는 독특한 시각 표현을 하고 있었다. 언어적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발달장애인은 크레파스가 부러지도록 도화지의 일부분을 집중적으로 칠했지만, 그는 흰 종이를 두려워하던 나와 너무도 다르다고 느꼈다. 누군가에게는 서툴고 거친 표현일지 몰라도 손이 이끄는 대로, 덕지덕지 칠하고 붙이는, 혹은 마음속에 떠다니는 말들을 그림처럼 도화지에 채우는 장애 학생들의 표현이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색다른 표현활동 이면에,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격리되어온 장애인의 삶을 알아가게 되었다. 장애인의 개성적인 표현을 응원하는 것이 한 편에서는 장애의 증상을 부추기는 것일 수 있다는 것, 장애인이 공공 교육을 받기 위해 부모들이 교육청과 긴 싸움을 해야 했다는 것, 후천적 장애의 증상은 사회적이거나 개인적인 요인들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 특수학교가 지역 사회와 자연스럽게 어울려 운영되기에 어려운 점도 있다는 것, 장애인의 예술표현이 일상화되기 위해서는 장애인의 복지제도가 함께 변화해야 한다는 것, 장애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생산성과 관련되어 재정의 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 그래서 장애는 사회문화적 흐름과 그 인식에 따라 논의되는 지점이 변한다는 것 등. 그렇게 독특한 표현활동과 관련한 나의 고민은 더 넓은 영역에 대한 관심으로 퍼져나갔다. 장애인의 미술표현을 마주하면서 ‘다양한 존재와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세계를 인식하고 개별화된 창작언어를 찾는 나/예술가에게 매우 감사한 일이었다. 단순히 ‘장애’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창작활동에 도움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예술은 결국 ‘다양성’의 실험과 발견이기 때문에 내가 모르던 삶이나 문제를 발견하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자극이 되었다. 사회나 개인이 장애인을 포함한 ‘일반적이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살피는 것은 나에게 창작의 관점을 되짚어 보게 만들었다. 누군가를 소외시키거나 격리시키거나 관리하려는 사회적 인식, 제도, 그 안에 길들여진 개개인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소중한 기회였다.
최근까지 내가 어떤 단체의 소속으로, 혹은 개인으로 하고 있는 활동들은 그 기회들을 좀 더 공식화된 언어로 풀어내는 과정이다. 장애인과의 1:1 창작활동, 장애인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연구, 일본의 장애인 창작활동 사례조사, 장애예술 관련 문화예술 기획활동 등이 그것이다. 단지 그 타이틀에 ‘장애’가 등장하지만 이것은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개인적 관심과 고민이 공통된 주제와 만나 드러난 것이다. 학습된 예술에 대한 개인의 문제의식은 이런 저런 이유와 삶의 우연적 요소를 만나 복지제도의 한계, 장애인의 삶, 다양한 존재, 사회문화적 현상 등으로 뻗어나갔을 뿐이다. 그렇기에 더욱 중요한 것은 ‘개인의 관심’이다. 이것은 개개인이 장애예술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복잡한 삶의 문제와 사회적 요소들은 연결되어 있기에, 사람에 대한 관심이 깊으면 장애와 장애예술을 더 넓은 관점으로 만날 수 있다. 새롭게 대두되는 사회적 주제로 만나지 않고 말이다. 장애예술이라는 주제를 오랫동안 언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자의 삶의 주제를 장애예술과 관련한 관점에서 혹은 또 다른 관점에서 지속적으로 고민하기 위해서 우리는 각자의 관심이 어디를 향하는지, 혹시 그것이 좁은 시야 안에서만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

 

본론이 될 수 없는 사례

그래서 장애예술과 관련한 사례 소개는 그 자체로 중요하다고 강조하기에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장애예술을 ‘잘’ 드러내거나 담아낸 사례라는 것은 자칫 하나의 관점으로만 어떤 현장을 읽어내고 재생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사례가 어떤 내용을 어떻게 담아내는지 이전에, 그 사례가 발생될 수 있었던 배경, 특히 함께 움직였던 사람들의 개별적 관심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내가 2012년부터 2016년까지 함께 활동했던 비영리단체 ‘로사이드’의 사례도 그러하다. 장애인 창작자와 비장애인 창작자의 공동창작 방식인 ‘1:1 아트링크’는 미술, 음악, 영화,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을 로사이드의 창작자(장애인 창작자)와 1:1로 연결, 그들의 공동창작을 지원한다. 로사이드 창작자와 공동창작자는 예술 작업으로 교감하고 영향을 주고 받는, 새로운 관계 맺기를 시도한다.(출처 : 로사이드 홈페이지 http://rawside.kr )
사례가 외부에 많이 소개되었는데 이 활동의 운영구조를 참조하는 것 이전에 이 활동에 함께 했던 사람들의 참여 동기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누가 누구와 어떻게 1:1로 만나게 되느냐가 결국 이 활동의 방향성과 의미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애나 장애인에 대해 잘 알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이 이 활동에 참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개별 창작을 하고 있던 비장애인 창작자들이 장애 유형이나 특성에 따라서가 아니라, 장애인 창작자와 작업 과정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바탕으로 공동창작을 시작했다. 나 역시 이전 단체의 문화예술교육 사업을 통해서 3년 정도 만남을 이어오던 장애인 창작자와 다시 만나(내가 그 창작자의 그림 속 이야기와 화면구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공동창작을 했다.(이것은 ‘로사이드’를 알기 전부터 비공식적으로 하던 활동이었다) 또한 자신이 재구성한 내용을 말로 끊임없이 쏟아내는 장애인 창작자와는, 이야기 하는 퍼포먼스에 관심이 있었던 내가 공동창작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1:1아트링크’에 참여했던 입장에서 이 활동 방식은 ‘창작을 하는’ 두 사람이 만나기 때문에 다른 방식의 소통을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행위를 되도록 장애의 증상이 아니라 창작의 맥락으로 바라보려는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만남이 중요했던 것이다.
일본의 사례 역시 장애예술에 대한 것 이전에, 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만나려고 하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심지어 내가 만났던 일본의 단체 관계자들은 대부분 ‘예술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 활동이 예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장애예술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오히려 일본은 장애인이 지역사회 안에서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 모색하는 과정에서 예술적 표현 및 소통방식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었다. 비영리법인단체 <Swing>과 아틀리에 <코나스>가 특히 그러했다.

 

<Swing>
교토에 위치한 <Swing>은 장애인이 문화예술을 매개로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비영리법인단체로 2006년에 설립되었다.
이곳은 예술단체가 아니라 장애인종합지원법에 따른 장애인 복지서비스사업을 하는 시민단체이다. 이곳의 대표적인 활동은 “Oyss 프로젝트”로 뮤지션 Cocco의 ‘쓰레기 제로 대작전'에서 영감을 받아 2008년 10월부터 시작한 활동이다. "아름다운 교토를 더 아름답게”를 슬로건으로, 겨울이나 여름에도 교토 가모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 활동은 돈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이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모두 파란색 옷을 입고 동네 청소를 한다. 한 달에 1회씩 진행해 현재 115번째 진행되었으며, 약 10년째 해오고 있다.

 

‘Oyss 프로젝트’ 활동모습 (출처 : <Swing> 블로그)

 

<Swing>은 쓰레기 줍기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재미있어 보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며, 이 활동을 재미있어 보이도록 여러 가지를 하고 있다. 청소부대 명함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눠주거나, 이 활동에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Swing>과 상관없는 사람도 함께 할 수 있다. 예전에는 동네 아이들이 무서워서 울고 도망갔으나 지금은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고 아이들과의 사이도 좋아졌다. 처음에는 이들이 위험한 사람인 줄 알고 경찰이 와서 심문을 했다. 지금은 이 활동에 참여하는 <Swing> 멤버들이 귀중품을 주워 경찰서에 전달하기도 하기도 해 그들과도 친해졌다. 이들은 경찰이 찾아오는 등의 반응에 대해 ‘균열내기가 진짜 예술인 것 같다’는 맥락으로 이해한다. 또한 이 활동을 다른 지역에 가서 하기도 한다. 기업, 복지시설, 사무실 등에 청소부대 지부가 15개 있으며(2017년 4월 기준) 베트남에도 지부가 생겼다.


<코나스>
1993년에 설립된 아틀리에 <코나스>는 장애인의 어머니들이 모여 만든 지적 장애인 생활보호 시설로, 현재 20명에 가까운 장애인과 6명의 운영진 및 서포터즈가 함께 활동하고 있다. 이곳은 일반 가정집을 개조한 공간에서 공동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국내의 장애인 그룹홈과 비슷한 부분이 있지만 장애인이 거주 하지는 않고 주 5일 이곳에 나와서 창작활동을 포함한 일상생활을 함께 한다.
<코나스>의 운영진은 장애인이 특별히 창작을 잘 하도록 가르치기보다 사람마다의 속도와 특징을 존중하려고 한다. 그래서 1년에 한 작품을 완성하는 사람도 있고 하루에 두 작품을 완성하는 사람도 있다. 그림을 그리다가 멍하니 앉아있는 사람도 있고 재료의 냄새를 하나씩 맡아보는 사람도 있다. <코나스>의 운영진은 그런 시간과 방식을 그대로 둔다.
대표 시라이와는 “중요한 것은 예술 자체가 아니라 이 지역에 이러한 활동을 알리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예술 작업은 <코나스> 활동의 30%라고 한다. 그 외에는 동네 청소도 하고 쿠키를 만들어서 주변에 판매하기도 한다. 다른 지역을 다녀오면 이웃사람들에게 꼭 선물을 사서 나누어주기도 한다. 그리고 <코나스>의 활동이 소개된 잡지를 카피해서 동네에 나누어주기도 하는데 지역 사람들이 그런 활동을 알게 된 후 격려를 해주기도 한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삶에서 필요한 활동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코나스>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본론이 될 수 없는 사례 소개 이후에,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시대적 흐름과 함께 ‘알아가야 할 주제’로 장애예술을 접하는 것과, 삶의 어디에선가부터 시작된 개별적 관심이 장애예술을 만나게 되는 것 중 어떤 것이 우리의 자발적 관심을 더 오래 지속시킬까.


결론은 우리에게 있다

나는 여전히 나에게, 우리 모두에게 궁금하다. 우리는 만날 수 있는가. 우리는 만나려 하는가. 우리는 현재 무엇에 관심이 있는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장애는 이미 사회의 여러 문제들과 복잡하고 미묘하게, 그리고 깊게 연관되어 있다. 단지 그 문제들을 장애와 연결해서 논의하려했던 자리가 부족했을 뿐이다.
세계는 이미 충분하게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며 불평등하기에 우리는 장애와 만날 수 있고 장애예술에 대해서도 방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 고민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공동창작의 시작이자 지속을 위한 동력이 될 것이다. 각자의 삶에서 시작된 문제의식들이 장애예술이라 불리는 영역 안에서 더욱 다양하게 교차되며 덜 외롭게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오늘과 같은 논의 자리가 그 만남을 함께 이어갈 잠재적 동료를 만드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장애예술에 대해 스스로가 너무 모른다고 생각하여 망설이고 있는 분들에게 말하고 싶다. ‘장애예술’이라는 주제를 향해 급작스레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려 하지 말고 이미 우리 삶에 넘치는 문제를 바라보자.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포럼 영상 보러가기

 

http://bitly.kr/248Qmw

 

 

 

 

 

 

 

포럼 소개

 

*이 글은 2019년 4월에 쓴 글입니다.

 

 

 

예술가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창작그룹 비기자 최선영

 

 

 

이미 알거나 알지 못하는 이야기부터

 

4월 4일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18년 예술인 실태조사’ 결과 예술가 개인이 예술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연수입은 평균 1천281만원(2015년 1255만원)이고 100만원 미만의 비중은 72.7%(2015년 72.5%)로 집계됐다. 지역의 문화든, 개인의 창작이든, 사회적 예술이든 그것의 토대가 될 창작활동이 단지 지속되는 데에도 이렇게 현실적 어려움이 있다. 하나도 새롭지 않은 소식이다.

 

 

이와 관련한 개인적 경험을 그야말로 ‘토로’하는 것은 가능하나 힘이 나는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말해본다.

 

나는 12년 전 서울의 미대를 졸업했고 함께 졸업한 사람과 10년 전 결혼했다. 함께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우리 부부는 많은 지원사업과 창작지원금을 받았고 의존도 하고 있다. 함께 졸업을 한 100명 정도의 동기들 중 현재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은 5명 내외이다. 나머지 중 대부분은 소식을 모르고 일부는 미술학원이나 벽화업체나 예고에서 일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창작활동을 하던 일부는 출산 후 작업을 멈췄다. 예술단체를 운영하며 이따금 개인 창작을 하고 문화예술교육과 예술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우리 부부는 매우 특이한 케이스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전혀 안정되어 있지 않다. 낮은 소득 덕분에 주거, 육아, 보육에 있어서 모두 복지제도 안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당장 내년의 활동이나 수익도 예상할 수 없다. 내가 1년 후에, 3년 후에 어디에서 무엇을 할지 모른 채로 사는 것은 절대 흥미진진하지 않다. 그리고 비슷한 고민을 가진 주변의 예술가, 기획자, 예술단체 관계자 등을 만날 때마다 “대체 어떻게 먹고 살아요?”, “올해는 괜찮아요?”라는 질문을 주고받는다.

우리에게는 9살 아들이 있다. 나는 출산 후 모유수유를 하면서 회의를 하고 새벽까지 전시 설치를 하고 방과후 강사를 하고 주기적으로 링거를 맞으며 버텼다. 남편은 하고 싶던 작업도 멈추고 놀이공원의 외벽을 칠하러 다녔다. 이런 과정은 절대 ‘창작을 이어가기 위해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상황이 아니다. 개개인이 스스로 어떻게든 용쓰지 않으면 경력이 단절될 수밖에 없고 생계도 힘들어진다는 것을 설명해줄 뿐이다. 이런 예술가들이 모두는 아니지만 적지 않다.

그리고 이렇게 하루하루 사는 와중에 예술가, 기획자, 단체는 매년 지원사업을 내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인건비는 1원도 책정할 수 없음에도 말이다. 매년 지원서를 쓰고 마음을 졸이며 한두 달을 기다리고 몇 년간 해오던 작품을 몇 분간 PT하고 질의응답하며. 그 정도는 징징대지 말고 열심히 준비해서 해내야 살 수 있지 않냐, 예술가/기획자가 자기 작업에 대해서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냐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징징대지 않고 열심히 13년째 살고 있는 나 같은 삶이 ‘과연 제대로 된 삶이 맞냐’고 다시 묻고 싶다. 1년에 10여 개의 기획서를 쓰고 면접을 다니고 있는 내가. 작업에 대한 아카이빙도 매달 하고 창작도 하고 사회적 예술이라 불리는 활동도 하고 단체 운영도 하고 예술교육도 하고 그것을 행정언어로 매일 증명도 하고 보고서도 늦지 않게 제출하고 e나라도움도 마스터한 내가. 그래서 주변 예술가들에게 ‘대단하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 같다’는 말을 듣는 내가. 이런 예술가는 과연 창작활동과 자신의 삶을 소외시키지 않으며 잘 살고 있는 것일까. 매년 지원사업을 해야 하는 것에 어려움을 토로하고 기획서도 잘 못 쓰고 면접도 잘 못보고 행정언어도 잘 모르고 정산도 힘들어하는 예술가들이 나처럼 되어버리는 것이 과연 자연스러운 일일까.

잠시 고백을 하자면 나는 최근 몇 년간 개인적 창작을 거의 못하고 있다. ‘안’ 하는 것과도 겹쳐 있지만 나는 위에서 말한 기획, 면접, 행정, 정산, 실무 등등을 모두 해내는 개인으로 살고 있다. 나는 현재 예술가로 불리지만 엄밀하게 보면 오늘의 나는 창작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있어야 하나의 단체가 지속되고 주변의 예술가들이 창작에 더 집중할 수 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일까.

 

그러나 현재의 지원사업들은 예술가, 예술단체, 문화기획자에게 ‘활동현장(순수예술 활동뿐만 아니라 지역활동, 모임활동, 프로젝트활동 등도 포함하는)’을 설득하고 증명하는 기획과 실무의 역할을 당연하게 요구한다. 그러한 역량까지 지원자가 모두 갖추면 활동이 더 풍부해질 때도 있지만 현재의 지원사업 구조가 현장활동에 집중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형태인지는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지원사업 안에서 ‘실무’가 포함된 활동현장을 지원자에게 기대하는 것은 더 정확히는 ‘사업적 운영에 대한 역량’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는 결국 ‘지원사업 안에서 인정하는 활동’의 범위를 한정 짓는다. 그래서 문화예술활동의 맥락이 깊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우려 이전에, 나는 좀 더 지원자 입장에서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원래 하고 있는 활동에 기반을 둔 세 가지 제안

 

아래 그림 중 주황색 부분은 ‘원래 하고 있는 활동, 또는 문화예술 현장’이다. 그리고 연두색 부분은 ‘지원사업 안에서 인정하는 활동’이다. 이 두 가지 영역이 당연히 일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에 비해 의 영역이 적어질수록 지원자들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1. 내가 하고 있는 활동을 있는 그대로 지원서에 써도 될까

2. 내가 하고 있는 활동은 요즘의 문화예술과 거리가 있는 걸까

3. 내가 하고 있는 것은 문화 혹은 예술이 아닐까

4. 나는 계속 이 활동을 해도 될까

 

즉, ‘사업적 운영에 대한 역량’을 기대하는 방향으로 지원사업이 지속될 경우, 지원자들이 현재 하고 있는 활동이나 고민에 대한 사회적 존중이 줄어들게 되고 지원자들의 활동은 위축되거나 사라지거나 혹은 지원기관이 원하는 유형으로 변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도 창작자만의, 기획자만의, 단체만의 활동 철학과 예술적 고집, 기백 같은 것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들이 자기 철학을 고집하기도 힘들게 된 상황에 대해 얼마나 알려고 했는지 되묻고 싶다.

지원자들은 먹고 살기 힘들기도 하지만 대부분 예술대학을 졸업한 이후에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해야 했다. 예술적 실험을 해보거나 자기 철학을 되돌아볼 기회도 충분하지 않았다. 고민의 기회도 알아서 만들어야 하고 작은 프로젝트에라도 참여하려면 기획적 역량이 있는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대학에서는 악기를 어떻게 다루는지, 캔버스를 어떻게 채우는지만 배웠는데 졸업을 하고 나니 갑자기 예술의 사회적 개입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하고 예술의 다양한 변신에 대해 고민하라고 한다. 대학 교육이 어떻든, 사회 분위기가 어떻든 창작자, 기획자라면 알아서 예술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진즉에 그런 고민을 해오고 있었어야 했던 걸까.

돌고 도는 질문 안에서 지원사업의 방향성 세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원래 하고 있는 활동’ 안에서 ‘지원사업을 통해 인정하는 활동’의 범위를 확대해 나가야 한다.

 

작품을 발표하거나 행사를 열거나 결과물을 제작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 안에도 문화예술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 특히 지원사업은 행정적 한계 때문에 결과나 방식에 대한 계획을 계속 묻고 증명을 요구하게 되는데 사실 ‘계획성 있는’ ‘문화예술’는 그 자체로 얼마나 모순적인가. 지원자 스스로가 아니라, 정책을 연구, 평가해왔던 전문가들이 넓은 범위의 활동이나 과정을 지원하는 행정언어의 발굴 및 기획을 해야 한다.

 

둘째, ‘원래 하고 있는 활동’이 아닌 앞으로 지원자가 고민해볼 필요가 있는 영역의 활동까지도 상상하고 시도할 수 있는 기회를 정책이 마련해 나가야 한다.

 

지원자들 대부분은 하나의 장르나 분야에서 자신이 하던 방식으로만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보통 예술 영역 안에서만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이 모두 사회적이거나 다른 분야와 연결되는 작업을 할 필요는 없지만 다른 이슈와 연결되거나 타인에 대해 생각해보거나 삶과 예술의 교집합에 대해 고민해보는 기회는 필요하다. 왜냐하면 많은 지원자들이 예술가나 기획자의 의도가 최우선인 활동 위주로 공부해왔지만 이런 방식은 동시대와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결과적으로 예술가를 더욱 고립시키고 가난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시장도, 시대적 흐름도, 소비 패턴도 끊임없이 변하는 상황 속에서 문화나 예술의 고유한 영역을 부각시키고 그에 대한 지원만을 늘리거나 개편하는 것은 대안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원래 하고 있지 않던 활동에 대한 기회 마련’은, ‘원래 하고 있는 활동’을 소외시키고 지원사업이 기대하는 ‘동시대 예술 또는 기획활동’을 새로이 해내야만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상황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언제나 지원의 우선순위는 ‘원래 하고 있는 활동’이어야 한다. 많은 지원정책들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예술가, 기획자, 단체 등은 스스로도 ‘원래 하고 있는 활동’을 공식화하지 못한 채 기획서에 넣어야 할 것 같은 말을 찾고 현장활동을 행정적 지침대로 실행하면서 활동적 고민을 확장하기보다 사업적 운영 역량을 다져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 사업적 운영 역량만 점점 커지고 있음을 스스로 발견하는 지원자들은 역시 이와 같은 질문에 다다르게 된다. 이것은 과연 자연스러운 일일까.

 

마지막으로 셋째, ‘원래 하고 있는 활동’이 축적된 사람 혹은 활동에 대한 미래적 역량강화의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현재의 정책들은 (시급한 불을 끄느라) 청년지원에 집중되어 있다. 그럼 그 힘든 청년이라는 시기를 지나왔거나 어느 정도 버텨내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사회가 얼마만큼의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청년 지원사업에서 우수한 사례를 만든 후 몇 년 사이에 사라져버리는 단체나 개인에 대해, 그 이유를 분석하는 시선이 있을까.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인 사람들에게는 문화예술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와도 교차되는 범위의 리서치, 연구, 자기학습, 해외교류 등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다음 세대를 응원하고 지원할 더욱 다채로운 전문가들이 양성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이 시기의 사람들은 알아서 타 분야의 지원사업을 알아보거나 자체적인 네트워킹을 통해 학습모임을 열고 있다. 물론 이러한 방식도 자연스럽지만 지원정책 안에서 다음 세대를 위한 시범적인 사업들도 공식화되어야 다양한 문화적 실험과 언어들이 이어질 수 있다.

 

 

다른 고민을 하고 싶다

 

나에게는 사실 이런 미련한 진심이 있다.

 

문화예술활동에 대해 공공지원을 받고 싶은 이유는, 물론 지원금 때문도 있지만 활동 자체가 사회적 존중과 응원을 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돈도 안 되고 몇 마디 말로 설명하기도 힘들고 그리 아름답지도 않은 어떤 활동을 이어가는 것 자체가 매우 외롭기 때문이다. 그걸 왜 하냐, 언제까지 할 거냐는 주변의 인식 속에서 이런 이름 없는 활동을 그래도 좀 더 오랫동안 해보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공식화된 응원이 가장 큰 힘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많은 지원사업을 했고 하고 있지만 활동에 대한 지원을 받아도 여전히 힘이 나지 않고 외로운 순간이 더 많다. 사업운영은 재촉하지만 현장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는 지원기관, 논의의 파트너가 아니라 찰나의 평가자로 만나게 되는 컨설턴트, 예술가나 단체의 장기적인 활동보다는 몇 개월 사업적 성과만 묻는 사업적 구조, 도대체 몇 년을 말해야 반영이 될지 알 수 없는 창작자의 인건비, 이런 내용을 또 쓰거나 그냥 쓰기를 포기하는 성과보고서. 그래서 올해도 작년과 같은 고민 안에 있다.

 

나는 계속 이 활동을 해도 될까

 

내 주변에는 여전히 미련하게 소리를 탐구하는 사람, 이상한 물건을 만들었다가 해체하는 사람,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 이야기를 수집하고 다니는 사람 혹은 예술가들이 있다. 기획서에 쓰기에 굉장히 모호한 방식으로 낯선 활동을 이어가는 기획자인지 지역활동가인지 문화운동가인지 모를 어떤 사람들도 있다. ‘계속 이 활동을 해도 될지’ 이들이 고민을 지속해야만 새로운 가치도 발생되겠지만 보다 현실적인 정책을 통해 이 고민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기를 바란다. 그런 맥락에서 앞으로의 정책이 ‘어떻게 현재의 활동을 응원하며 지속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현장에서의 고민이 ‘이 활동을 계속 해도 될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활동을 할까’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2018년도에 비기자가 발제자로 참여했던 잠실창작스튜디오의 '장애인 문화예술 창작공간' 관련 오픈테이블 자료를 공유합니다.

자료 정리해주신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2018 잠실창작스튜디오 <잠실,잠시> 오픈스튜디오의 라운드테이블 「우리가 바라는 장애인 문화예술 창작공간」 및 브런치토크「장애정체성과 예술」 발제 내용(온라인 배포용)

 

https://adobe.ly/2tOqNEH

 

 

 

 

 

 

 

 

수원시평생학습관 웹진 [와] 166호_일본의 사회문화예술교육 사례

 

 

장소를 만드는 사람들 ① 일본 야마나미 공방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여기가 누구나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아틀리에입니다.”

 

13평짜리 작은 공간의 한 쪽에 놓인 책상을 가리키며 일본인 스태프가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 학교 교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그 작은 책상이 아틀리에라니.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사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책상의 의미를 설명하던 스태프와 그 공간의 느낌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이것은 2008년 방문했던 요코하마의 공간 ‘아트 랩 오바(Art Lab Ova)’에 대한 이야기다. 이곳은 1996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비영리그룹으로 ‘13평의 아트센터’라고 불리며 장애인, 홈리스, 노인 등 다양한 사람들과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곳이다.

 

최근까지 일본의 사회문화예술교육 관련 현장을 답사하며 연구해오고 있는 나는, 일본의 쾌적하고 거대한 아트센터보다 그 13평의 공간을 기억하게 된 맥락을 이번 연재를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은 소박한 것의 아름다움 이전에 누군가의 태도를 전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태도는 사회 혹은 사회적인 것과 연결되고자 하는 문화예술교육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 사례들이 사람에 대한 관심과 태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내가 특히 장애예술과 관련한 일본의 사례를 연구해오긴 했으나 그것은 다양한 감각과 특징을 가진 사람들과의 활동으로 의미가 깊다. 그래서 앞으로의 글에서 장애에 대한 언급이 많겠지만 그것은 ‘다양한 존재’에 대한 맥락으로 읽히기를 기대한다. 또한 국내와 일본의 복지제도1), 문화정책, 교육, 역사적 문화적 차이가 크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우리가 함께 눈여겨 보아야할 부분은 사례 속 내용 이전에 철학이나 방향성일 것이다.

 

시가현에 위치한 ‘야마나미 공방’(이하 공방)은 1986년에 '산맥 공동 작업소'로 시작되었고 2008년도에 사회복지법인 산맥위원회가 운영하는 공간으로 변화하였다. 즉, 이곳은 예술 관련 단체가 아니라 장애인복지시설이며 현재 79명의 장애인(이용자)과 22명의 스태프가 있다. 그래서 수급자 증을 가지고 있는 장애인이 주요 이용자이며 이들은 일상적인 활동 외에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창작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이곳은 장애인이 여러 표현활동을 통해서 마음이 넉넉하게 성장하는 것, 그 사람이 그 사람답게 건강하고 활기차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공방은 평일 오전 8시 45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운영하며, 장애인이 활동하는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45분이다. 이러한 운영형태로 보았을 때에는 국내의 장애인자립생활센터나 보호작업장과 비슷한 구조라고 볼 수 있다.

이곳에 오는 장애인들은 아틀리에에서 매일 창작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산책을 하거나 드라이브 또는 운동을 하고 노래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하는 가운데 각자의 속도와 의욕에 맞게 생활하고 있다. 공방의 운영자는 장애인이 만들거나 전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끌어내어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흐름과 공간을 개개인에 맞게 만들어내려고 한다. 그리고 ‘무엇이 하고 싶은지,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같은 개개인의 생각과 서로의 관계를 소중히 하고 있다2).

이런 맥락으로 아래와 같은 5가지의 그룹 활동이 공방에서 이루어진다.

 

1) Atelier : 코로봇쿠루 점토와 회화를 중심으로 각자 하고 싶은 일이나 잘하는 일을 살린 다양한 창작 활동을 한다. 여러 가지 경험을 쌓기 때문에, 조리 실습이나 외출 행사 등도 한다.

2) Studio : 코튼 자수와 회화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과자 만들기와 요리 실습에도 매월 노력한다.

3) 프렌댐 : 기계 아키라 훈련을 중심으로 체력 만들기를 적극적으로 하고 다른 그림과 취향을 살린 제품 제작에 임한다.

4) 모락 모락 : 다양한 재료를 사용한 창작 활동을 중심으로 공공시설 등의 유지 보수 작업도 실시한다.

5) 타이어 : 차를 타고 지역을 떠나 폐지 회수나 페트병 뚜껑 회수를 실시한다. 또한 점토와 회화 작업, 과자 만들기 작업에도 노력한다.

 

이러한 활동들은 최소한의 형식을 갖춘 프로그램으로 해석 가능하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프로그램의 구체적인 내용보다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 그들의 표현활동을 바라보는 시선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원래 시설을 아트화하려는 생각도 없었고 시설에서 아트를 도입하겠다는 생각도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누가 시키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본인들의 자발성을 존중해서 풍부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들의 혼네(진짜 속마음)를 제대로 보는 것이다. 어떤 작품을 만드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말과 태도 그대로 자신을 표현하고 즐겁게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의 여러 표현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희망의 모양이다. “지금 저 분이 뭘 하고 싶을까?” “오늘 어떻게 지내고 싶은 걸까?” 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미 하고 싶은 것이 있을 텐데, 그것에 반하는 것을 스텝들이 시키면 안 된다. 스태프의 입장이 그들보다 더 위에 있다고 인식시키는 관계라면, 그들의 진짜 마음이 보이지 않게 된다. 자기표현의 의욕도 닫혀버리게 된다3).”

 

“알기 쉬운 그림과 도예만이 작품인 것은 아니다. 우리의 개념으로는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것 중에도 그 사람만의 것, 유일무이하게 빛나는 것이 있다. 표현활동이라는 것은 누구의 왜곡 없이 자신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야마나미 공방’의 전체 이용자에게는 각자의 표현이 존재한다. 그들의 표현은 여러 가지다. 하루 종일 어떤 특정한 일을 계속 하는 사람도 있고, 특정한 말을 계속 하는 사람도 있고, 그 중에 종이를 계속 찢는 것이나, 아무것도 안하는 것도 표현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들의 대다수는 일상의 행위나 표현이 아트인지 아닌지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중에서도 사회적인 가치나 칭찬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다. 모두 자신만을 위한 행위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가치나 개념을 가지고 그들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독특한 발상과 가치관의 곁에서 그 행위나 표현을 긍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책임이 아닐까 싶다. 틀려도 그들의 행위나 표현에 손대거나 말 걸거나, 자신의 가치를 강요해야 한다는 입장이 아닌 것임은 명확하다. 이용자 모두는 각자의 풍부한 표현과 가능성이 있다. 그들의 표현이 사회 속에서 예술로 평가되는지 아닌지, 비싼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 자기의 취향에 맞는지 아닌지, 그들 자신의 목적과 관계가 없는 가치 기준으로 우열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그들의 표현에 대한 존중이 있는가 없는가가 어떤 것보다도 더 중요하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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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나미 공방의 장애예술인 작품 (출처 : 야마나미 공방 홈페이지)

 

이곳이 예술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곳이 아님에도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장애인들의 작품은 국제적인 전시를 통해 활발하게 외부에 소개되고 있다. 2018년 1월부터 3월까지 이곳 장애예술인들이 참여하는 전시만 13개이다. 이들의 작품은 홈페이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모두 개별 표현 언어를 다양하게 취하고 있으며 재료나 표현방식, 시각적 완성도에서 예술성도 돋보인다.

그런데 여기에서 특이한 점은 이곳에 예술 관련 전문 인력이 배치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예술적인 교육을 하기 보다는 장애인이 본래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함으로써 그들의 창작이 자연스럽게 지속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야마나미 공방’의 이용자 중에는 원래 표현활동을 특별하게 잘해왔던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은 이곳에 와서 표현활동을 자발적으로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방 관계자들은 일상에서 그림 그리는 도구나 바느질 도구, 점토 등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소재를 충분하게 준비해둘 뿐이다. 하지만 그것을 쓰라고 강요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다. 눈앞에 있는 소재를 쓸지, 쓰지 않을지 어떻게 쓸 건지 모두 장애인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활용한다. 공방의 대표는 이러한 맥락에 대해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지금 이렇게 많은 작품들이 나오는 이유는 대단한 지도(가르침)가 있어서는 아니다. 설비가 좋아서도 아니다. 아티스트 서로와, 그리고 아티스트와 우리들의 강한 신뢰 관계가 생기고 외로워하지 않고 안심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공간이 있어서이다. 신뢰관계가 있기 때문에, 아티스트들은 서로의 존재나 표현에 영향을 받고 자신 안을 돌아보고 그것이 상승효과를 내어 많은 작품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표현활동의 현장에서 핵심적인 역할은 단 하나, 신뢰 관계이다. 아티스트와 스태프, 그리고 아티스트 서로가 어느 한쪽이 우위에 서지 않고 평등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개인의 빛이 열려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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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 카즈미의 작품 (출처 : 야마나미 공방 홈페이지)

 

 

사람들 간의 신뢰 관계가 쌓이고 각자 외로워하지 않고 안심할 수 있는 장소. 그 장소의 가치를 채우는 것은 시설이나 규모가 아니라 그 장소를 만들고 지속하려는 사람들의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문득, 그가 말하는 ‘장소’가 내가 10년 전 ‘아트 랩 오바’에서 마주했던 작은 책상과 오버랩되었다. 장소는 어쩌면 공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작거나 혹은 클 수도 있는 ‘자리’가 아닐까. 많은 사람들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 안에서 사실은 모두의 자리가 고려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발견할 때, 우리는 그 자리의 필요성과 의미를 다시 떠올려볼 수 있다.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닌, 자신의 존재 자체로 편안할 수 있는 자리, 혹은 장소. ‘아트 랩 오바’에서 보았던 자리와 ‘야마나미 공방’을 통해 떠올린 자리는 그래서 다른 듯 닮아있었다.

 

그동안 나는 사회문화예술교육과 관련한 일본의 현지 조사에서 여러 형태의 자리이자 장소를 발견했고 동시에 그 의미를 강조하는 운영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어떤 교육프로그램을 하고 있다, 그것의 성과는 무엇이다, 예술은 중요하다’고 강조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장소에 오는 사람들이 편안해야 한다, 존중받고 있다고 느껴야 한다’고 했다. 문화예술은 단지 그런 장소를 만들기 위한 매개체 혹은 촉매제였다. 이를 통해 일본의 관련 사례가, 어떤 예술 활동을 독립된 장르로 성장시키는 것보다 예술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의 지속적인 표현활동 및 사회참여를 모색하고 있다고 느꼈고 그런 측면에서 시민운동과도 연결되어 보였다. 이것은 내가 예술이나 예술교육과 관련해서 일본의 단체나 기관을 방문했을 때 오히려 예술 외의 다른 맥락을 발견했던 것과도 연관이 깊다. 어떤 경우에 단체의 대표는 (심지어 그가 예술가인 경우에도) “예술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말은, 역시나 예술가인 나에게 다시 질문을 던진다.

 

“하나의 의미나 방향성으로 고정시킬 수 없는 예술을 왜 우선순위로 두고 교육해야할까. 예술이나 예술교육이 사람에게 중요할 수 있는 맥락은 무엇일까.”

 

그런 측면에서 사회문화예술교육은 사회에서 자꾸 튕겨져 나가는 가치나 생각들을 놓치지 않기 위한 또 다른 모색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손끝이 가리키는 책상을 바라보기보다 그 책상을 ‘장소’로 만들어나가는 시간을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1) 예를 들어 장애인 연금의 경우, 장애유형이나 정도에 따라 국내는 월 23-30만원, 일본은 60-160만원이 장애인에게 지급되는 등 큰 차이가 있다.

2) 야마나미 공방 홈페이지 (http://a-yamanami.jp)

3) 2016 발제문 “Self-Taught가 태어나는 아틀리에의 일상에서부터야마시타 마사토(야마나미 공방 시설장), ソーシャルアート:障害のあるとアートで社会える, 学芸出版社

4) 2016 발제문 “Self-Taught가 태어나는 아틀리에의 일상에서부터야마시타 마사토(야마나미 공방 시설장), ソーシャルアート:障害のあるとアートで社会える, 学芸出版社

 

 

 

관련 연구

본 연구는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지원을 받아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가 수행하고 있는 <장애예술인 창작활성화 프로그램 개발> 연구의 일부이다. 

 

관련 링크

*‘아트 랩 오바’ 페이스북 페이지 : https://www.facebook.com/artlabova

*‘야마나미 공방’ 홈페이지 : http://a-yamanami.jp

 

 

 

 

*웹진 보러가기 : http://www.wasuwon.net/129293

 

 

수원시평생학습관 웹진 [와] 166호_일본의 사회문화예술교육 사례

 

 

장소를 만드는 사람들 ② Swing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Swing>은 흔든다는 것이다. 흔든다는 것은 변한다는 것이며 변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 변화를 위해서는 아웃당하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안전한 상태나 공간에서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약간 위험한 것이 좋다.

하지만 너무 벗어나면 잡혀간다.

약간 벗어나는 것을 하면서 그 범위를 조금씩 확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Swing>의 대표 키노토 마사유키(이하 마사유키)는 <Swing>의 의미를 어렵지 않으면서도 분명하게 설명했다. 잡혀가지 않을 정도로만 약간 위험하게 무언가를 흔들며 변화를 모색하는 것. 이것은 예술이자 교육이자 운동(movement, campaign)일 수 있지 않을까. 기존의 예술, 교육, 운동을 설명하는 말들과는 차이를 두지만 그것의 의미와 충분히 연결이 되는 그 소개말이 나에게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관심, 흥미, 심지어 재미까지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을 <Swing> 공간 곳곳에서, 그리고 활동내용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동시에 타인의 관심이나 참여를 다각도로 고민하며 실천하고 있는 지점들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떤 장소를 만들고 있을까? ‘무언가를 흔든다’는 운영철학이 어떤 활동으로 이어지고 있는지 들여다보자.


교토에 위치한 <Swing>은 장애인이 문화예술을 매개로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비영리법인단체로 2006년에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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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영리법인 <Swing> 간판


이곳은 예술단체가 아니라 장애인종합지원법에 따른 장애인 복지서비스사업을 하는 시민단체이다. 그래서 운영 면에서는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으며 상근직원이 8명 있고, 이 중 창작관련 전문 인력(전공자)은 3명이다.

이곳의 운영철학은 ‘Enjoy! Open !! Swing !!!’이다. 그래서 활동내용이 전반적으로 유머러스하고 지역사회와 소통하는 경향이 많다. 다음은 대표 마사유키가 인터뷰를 통해 소개한 <Swing>의 대표적인 활동 내용이다.



 shiki(박스) olioli(접기접기) : 박스 접기는 전국의 다양한 장애인복지시설에서 하고 있는 주요업무 중 하나인데 <Swing> 역시 공식적인 활동으로 이어가고 있다. <Swing>에서는 이런 활동 자체를 인정하고 재미있는 이름으로 소개하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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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ki(박스) olioli(접기접기)’ 작업공간(좌)과 일상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야외공간(우)



 우리는 표현족 :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그림·시·제조의 예술창작활동이다. 이 이름은 일본의 유명 TV 프로그램 '우리는 익살족'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내부에 작업공간이 있지만 사무실 한 쪽에 의자와 테이블을 마련해두고 작업을 하기도 한다. 메인 멤버(장애인)는 13명이며 이들은 매일 오기도 하고 일주일에 3번 정도 오기도 한다. 일주일에 1번 오거나 가끔 오는 사람도 있다. 9시부터 3시가 기본 활동 시간이며 멤버들은 그 안에서 자유롭게 오간다.



<Swing>은 창작활동을 통해 나온 결과물들을 전시를 통해 외부에 소개하기도 하는데 작품을 고르고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라, 전시장에서 여러 가지를 작업한다. 시를 낭독하고 박스 접기 같은 체험활동을 하거나 아틀리에가 전시장으로 옮겨진 것과 같은 개념으로 전시 공간에서 평소에 하던 창작활동을 하기도 한다. 장애인만 그 공간을 쓰는 것이 아니라 ‘같이 공간을 쓰고 있다’는 개념으로 이러한 활동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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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표현족’ 작업 공간



 Oyss 프로젝트 : 뮤지션 Cocco의 ‘쓰레기 제로 대작전'에서 영감을 받아 2008년 10월부터 시작한 활동이다. "아름다운 교토를 더 아름답게”를 슬로건으로, 겨울이나 여름에도 교토 가모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 활동은 돈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이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모두 파란색 옷을 입고 동네 청소를 한다. 한 달에 1회씩 진행해 현재 115번째 진행되었으며, 약 10년째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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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yss 프로젝트’ 활동모습 (출처 : <Swing> 블로그)


<Swing>은 쓰레기 줍기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재미있어 보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며, 이 활동을 재미있어 보이도록 여러 가지를 하고 있다. 청소부대 명함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눠주거나, 이 활동에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Swing>과 상관없는 사람도 함께 할 수 있다. 예전에는 동네 아이들이 무서워서 울고 도망갔으나 지금은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고 아이들과의 사이도 좋아졌다. 처음에는 이들이 위험한 사람인 줄 알고 경찰이 와서 심문을 했다. 지금은 이 활동에 참여하는 스윙 멤버들이 귀중품을 주워 경찰서에 전달하기도 하기도 해 그들과도 친해졌다. 이들은 경찰이 찾아오는 등의 반응에 대해 ‘균열내기가 진짜 예술인 것 같다’는 맥락으로 이해한다. 또한 이 활동을 다른 지역에 가서 하기도 한다. 기업, 복지시설, 사무실 등에 청소부대 지부가 15개 있으며(2017년 4월 기준) 베트남에도 지부가 생겼다.



 당신의 목적지를 알려드립니다 : 교토의 교통이 복잡한데 <Swing> 멤버들이 교통 관련 지식을 총동원하여 주로 외국인에게 길 안내를 한다. 한 달에 1회, 2시간~2시간 30분 정도 진행한다. 버스나 지하철 노선을 세세하게 기억하는 것은 일부 발달장애인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한데 <Swing>은 이것을 장애가 아닌 독특한 능력으로 해석해 활동으로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시민이나 관광객들은 자주 “왜 이런 옷을 입고 이런 것을 하고 있냐”고 수상하게 여긴다고 한다. 그 이유나 의미를 설명해도 “아, 그렇구나”하고 이해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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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목적지를 알려드립니다’ 프로젝트 활동모습 (출처 : <Swing> 블로그)


<Swing>의 활동은 특히 일본의 장애예술 관련 단체를 조사해온 내게 다르게 보이는 지점이 있었다. 그것은 첫째, 장애인의 일상이나 기존 업무와 연결된 활동을 예술적 기획으로 확장한다는 점, 둘째, 전시와 같은 작품 발표의 장소나 길거리에서도 장애인의 일상을 끊임없이 보여주고 자연스럽게 소개한다는 점, 셋째, 활동 전반에 유머와 즐거움의 요소를 잃지 않는다는 점, 넷째, 이러한 활동을 예술이라고 규정하기보다 장애인의 삶을 드러내는 시민운동의 일환으로 지속한다는 점 등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스윙의 대표 마사유키가 설명한 운영철학을 바탕으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장애인 개개인이 자기 자신으로서 편안한 마음으로 있을 수 있는 장소를 만드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것은 이전 글에서 소개한 ‘야마나미 공방’의 운영철학과도 중첩된다. 그러한 장소가 있으면 사람은 알아서 표현하게 된다고 그는 강조한다. 또한 그는 예술 관련 전공자가 장애인의 창작활동에 함께 하고 있지만 예술이라는 말을 <Swing> 안에서 쓰지는 않는다고 한다. 이들의 활동이 그 자체로 존중되기보다 예술이라서 중요해지거나 예술은 대단한 것이라고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술 혹은 예술교육에 대한 연구를 시작으로 만났던 일본의 단체들에서 내가 자주 발견하는 태도이다. 예술보다는 사람, 표현 그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는. 그 순간 나는 다시 오래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예술이 왜 우선시되지 않는가’가 아니라 ‘예술이란 것은 무엇을 위해 있는 걸까’, 그래서 ‘예술은 무엇일까’. 문득 <Swing>의 의미를 다시 떠올려본다.


‘잡혀가지 않을 정도로만 약간 위험하게 무언가를 흔들며 변화를 모색하는 것’


여전히 예술 혹은 예술교육이 무언인지는 모르겠지만 <Swing>이 흔들고자 하는 것, 흔들 수밖에 없는 이유, 그럼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것들을 하나씩 떠올리다보면 우리가 현재 스스로를 흔드는 질문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오히려 자신의 생각이 흔들리지 않도록 애쓰는 이유, 혹은 흔들릴까봐 불안한 마음이 더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누군가는 왜 이러한 강력한 의지들을 조금이라도 움직여보려고 하고 있을까. ‘예술이 중요해서’, ‘장애인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라는 이유들을 우선으로 두지 않을 때, 이들의 활동 맥락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일반적인 사회적 기준과 가치들이 머릿속에서 흔들릴 수 있는 시간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관련 연구

해당 내용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지원을 받아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가 수행하고 있는 <장애예술인 창작활성화 프로그램 개발> 연구의 일부이다. 


관련 링크

*<Swing> 홈페이지 : http://www.swing-npo.com

*<Swing> 블로그 : http://garden.swing-npo.com

 

 

 

 

*웹진 보러가기 : http://www.wasuwon.net/129728

수원시평생학습관 웹진 [와] 166호_일본의 사회문화예술교육 사례

 

 

장소를 만드는 사람들 아틀리에 코나스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일본의 예술단체나 기관을 답사하며 사회문화예술교육 관련 조사를 한 지 10년의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누군가의 문제의식이나 의지를 바탕으로 유지되고 있는 ‘장소’를 발견할수록 나에게 떠올랐던 것은 이전에 방과후학교 수업을 나갔던 국내의 특수학교들이었다. 번듯하게 지어진 그 학교들은 아파트 단지의 끄트머리, 혹은 외진 동네에 위치해 있었고 그래서 같은 지역에 수년간 살고 있던 나도 그 곳이 있었는지 모를 정도였다. 학교 수업을 시작하고 몇 달이 지나서야 동네를 오가던 특수학교 통학버스가 눈에 들어왔다. ‘아, 저기에 OO가 타있겠구나’ 하고 지나가는 버스를 바라보다가, 내가 어떤 사람들의 존재를 그동안은 왜 잘 알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두 발로 길을 걸을 수 있거나 말을 할 수 있거나 앞을 볼 수 있는 소위 ‘일반인’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은 외진 곳에 위치한 학교, 닫힌 건물 안에서만 생활하지 않는다. 그들이 사회 안에서 ‘존재하고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존재하고 있으나 ‘일반인’으로 쉽게 불리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왜 잘 알지 못할까. 그들이 탄 통학버스는 왜 모두의 삶 속이 아닌 닫힌 울타리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을까.

 

길고 긴 질문들이 이어지던 2016년 가을, 나는 다시 일본을 방문했고 그때 답사했던 몇몇 단체 중 하나가 오사카에 위치한 아틀리에 코나스(이하 코나스)였다. 물론 나라마다 사회문화적 차이가 존재하기에 이들 역시 사회적 차별과 나름대로의 운영적 어려움 속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코나스는 사회가 요구하는 거시적인 의미나 목표를 우선으로 두지 않는 듯 했다. 그보다는 주변의 동네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지, 단체에 오는 개개인의 표현활동을 위한 편안한 장소를 어떻게 만들지 고민했다. 코나스의 대표 타카코 시라이와(이하 시라이와)는 그러한 태도가 개인의 삶 속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설명했다.

 

“내 딸이 중증 장애인입니다. 생후 3개월 동안 간질과 발작을 보였고 저는 그러한 상태가 나아질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 딸은 40세가 되었습니다.

일본의 장애인은 예전에는 숲이나 사회 변두리에 가둬져 부모나 할머니에 의해 몰래 키워졌습니다. 그런데 1981년, 내 딸이 4세 때 ‘정상화 원리(principle of normalization)’가 일본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어떤 장애도 사회에서 같이 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새로운 이념으로부터 희망을 얻기도 했지만 내 딸이 나아질 거란 환상이나 기대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딸의 장애는 우리의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삶의 사고방식을 결정하니 오히려 편해졌습니다. 장애인 보호자회를 만들고 아이들이 마을에서 같이 살 수 있는 방향을 모색했습니다. 하지만 곤란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제도나 보호 장치가 없었습니다. 바자회 등으로 지원금과 운영비를 마련하며 12년을 보냈는데 너무 어려워서 다른 사람들은 그만두고 저만 남았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시대가 변하고 이념도 생기면서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왔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1993년에 설립된 코나스는 장애인의 어머니들이 모여 만든 지적 장애인 생활보호 시설로, 현재 20명에 가까운 장애인과 6명의 운영진 및 서포터즈가 함께 활동하고 있다. 이곳은 일반 가정집을 개조한 공간에서 공동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국내의 장애인 그룹홈과 비슷한 부분이 있지만 장애인이 거주 하지는 않고 주 5일 이곳에 나와서 창작활동을 포함한 일상생활을 함께 한다.

80년 된 고가옥을 개조하여 지역 내 장애인을 위한 창작공간을 운영한다는 것만으로도 코나스의 첫인상은 무언가 평화로워보였다. 지역적, 건축적 문화가 쌓인 공간에서의 창작활동이라니, 내심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막연한 인상과 달리, 코나스의 대표 시라이와는 공간에 대한 중요한 의미를 이야기했다.

 

“보통 장애인들은 빌딩 같은 곳에 가두어져 있어 외부에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더 문을 열고 장애인들의 활동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동네 가옥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코나스가 ‘보통의 집’처럼 운영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웃의 소리도 들리는 그런 집 말입니다. 그래서 코나스라는 단체가 아니라 우리 가족이 여기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역에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다른 장애 시설도 ‘열린’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보통 문이 잠겨 있어서 장애인이 나가고 들어가기 힘든데 그런 곳과 차이를 두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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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나스 입구(좌)와 테라스 공간(우)

 

코나스가 처음 설립되었을 때 장애인들은 좁고 어두운 방에서 저임금을 받으며 우산못 조립을 했다. 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간단한 수작업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몇 년이 지났을 무렵, 코나스 운영진은 다른 기관(나라 시 소재, ‘하나아트센터’) 장애인의 회화 작품을 만나 에이블아트에 대해서 접하게 되었고 강한 충격을 받았다. 단순노동 형태의 부업 작업은 장애인 본래의 개성과 감성을 발휘할 수 없었기에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을 표현하는 예술 활동을 시작하고자 했다. 그래서 운영진은 2005년 오래된 가옥을 개축하여 아틀리에를 만들었다. 그곳에서의 작업은 붓으로 좋아하는 것을 그려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 후 아틀리에 공간에서 자유로운 예술 활동이 시작되었다. 놀라운 것은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쉽지 않았던 사람이 조용히 앉아 창작활동에 몰두하는 것이었다. 대표 시라이와는 지금까지의 10년과 다른, 미래의 무언가를 예감했다. 그리고 예술 활동 3년차에 멤버(코나스에 오는 장애인)들의 작품은 대외적으로도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장애인의 창작활동이 외부와 소통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코나스의 운영진은 얼마나 기쁘고 뿌듯했을까. 이후 이러한 상황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창작활동에 집중적 지원을 하지 않았을까 하고 나는 예상했다. 그러나 시라이와가 설명하는 운영철학을 들으며 그 예상이 틀렸다는 것을 확인했다.

 

“코나스에서는 장애인에게 창작활동에 대해 칭찬하지 않습니다. 칭찬받는 그림을 그리겠다는 가치관이 창작자에게 생기기 때문입니다. 코나스의 스태프들은 장애인이 현재 하고 있는 행위를 인정할 뿐입니다. ‘그리고 있구나, 그 모습이 좋아 보인다.’와 같은 말들로 말입니다. 그 외에 작품의 우수함이나 부족함에 대해 평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장애인들은 그동안 행동하는 것에 있어서 제약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하는 행위 자체가 그대로 수용되는 경우가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애인을 존재 자체로 인정, 수용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변화 이후, 오히려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는 장애인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코나스의 운영진은 장애인이 특별히 창작을 잘 하도록 가르치기보다 사람마다의 속도와 특징을 존중하려고 한다. 그래서 1년에 한 작품을 완성하는 사람도 있고 하루에 두 작품을 완성하는 사람도 있다. 그림을 그리다가 멍하니 앉아있는 사람도 있고 재료의 냄새를 하나씩 맡아보는 사람도 있다. 코나스의 운영진은 그런 시간과 방식을 그대로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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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 마코토 오카와가 2005년부터 지금까지 만든 170개의 마코토 인형 <출처 : 코나스 페이스북>

 

이러한 활동은 예술 자체에 목적을 두기보다 참여자 개개인의 표현 또는 편안함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로 보인다. 이것은 이전 글에서 소개했던 야마나미 공방이나 스윙의 사례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이다. 이들은 새롭거나 독특한 예술작품을 위해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인정받는 ‘장소’를 만들기 위해 창작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코나스에서 이러한 활동이 가능한 것은, 이곳이 케어의 역할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운영진들이 오랜 시간 장애인과 함께 생활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재료를 잘 쓸 수 있을지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창작공간 구성에 있어서도 드러난다. 자신의 작업에 집중해야 안정감을 찾는 자폐성 장애인의 경우, 칸막이로 개인공간을 만들어 자리를 마련해준다. 혹은 돌아다니거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작업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넓은 테이블에서 다른 사람과 같이 앉아서 작업하도록 한다. 작업을 하다가 잠시 바람을 쐬거나 돌아다녀야 스스로 진정이 되는 사람도 있어서 오래된 가옥의 옛날식 테라스 공간을 그대로 살려서 사용하기도 한다. 코나스는 창작활동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곳은 아니지만 개개인의 편안함을 위해서 창작환경을 세심하게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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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나스의 창작공간

 

그렇다면 창작 외에 코나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지역사회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대표 시라이와는 “중요한 것은 예술 자체가 아니라 이 지역에 이러한 활동을 알리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예술 작업은 코나스 활동의 30%라고 한다. 그 외에는 동네 청소도 하고 쿠키를 만들어서 주변에 판매하기도 한다. 다른 지역을 다녀오면 이웃사람들에게 꼭 선물을 사서 나누어주기도 한다. 그리고 코나스의 활동이 소개된 잡지를 카피해서 동네에 나누어주기도 하는데 지역 사람들이 그런 활동을 알게 된 후 격려를 해주기도 한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삶에서 필요한 활동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코나스의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일본의 사례를 살피다 다시 우리 동네 변두리에 위치한 특수학교를 떠올려보았다. 모든 특수학교가 도심과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것은 아니지만, 그 위치와 상관없이 학교 안과 밖의 거리감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결국 교육제도나 사회정책과 같은 시스템을 바꾸자고 외쳐야하는 문제인가, 나는 문화예술교육을 주제로 조사를 하다가 고민이 더 커졌다. 그런데 문득 코나스 운영진의 실천들은 그런 시스템과 별개로 시도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장애인의 작품에 대해 칭찬을 하지 않고 현재 하고 있는 행위 자체를 인정하는 것, 1년 동안 그림을 한 장 그리는 사람의 속도를 존중하는 것, 정기적으로 동네 청소를 함께 하는 것 등. 이것은 안정된 사회제도 안에서만 가능한 실천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혹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해외 사례를 언급하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럽지만 그 활동을 국내에서도 실행 가능한지 판단하는 것보다, 그 사례가 발생될 수 있는 태도가 우리에게도 있는지 되돌아보는 것이 더욱 중요해 보인다.

 

 

 

관련 연구

해당 내용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지원을 받아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가 수행하고 있는 <장애예술인 창작활성화 프로그램 개발> 연구의 일부이다. 

 

관련 링크

<아틀리에 코나스> 페이지 : http://corners-net.com

수원시평생학습관 웹진 [와] 166호_일본의 사회문화예술교육 사례

 

 

장소를 만드는 사람들 ④ 코코룸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이렇게 운영이 어려워지는데 왜 이런 활동을 계속하려고 하나요?”

 

나에게 매순간 하고 있는 질문을 코코룸 대표 카나요 우에다(이하 우에다)에게 물었다. 그녀는 단단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마을은 변하고 사회는 변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빈곤이나 사람들이 싫어하는 동네, 그 안에 살았던 사람들이 원래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것들을 원래부터 없었던 것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지금의 활동은 그 안의 한명 한명과의 만남이기도 하다. 어떤 순간에는 없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때 있었던 무엇, 사람, 기억, 시간 때문에 내가 다시 힘을 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녀의 대답은 긴 시간 속에서 쌓인 힘을 표현하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어떤 대안이 필요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외치지 않고 스스로로 하여금 이렇게 살아보려 한다고 다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시민활동이나 문화예술교육 관련 활동가의 자기 태도에 대해 내가 최근 들은 답변 중 가장 솔직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나는 힘이 났다. 그래, 우리는 지금 이순간의 활동이 미래에 어떤 쓸모나 목적을 위해 작동되기를 기대하는 것 외에, 그것의 다른 의미를 찾아볼 수도 있겠구나. 지금 힘들지만 나아질 앞날을 위해 버텨보자는 말보다 그것은 더 큰 힘을 주었다. 그런 생각들 때문에 내가 코코룸을 2016년에 이어 올해 다시 방문했던 것은 아닐까.

나는 2년 전에 일본의 사회문화예술교육을 조사하기 위해 비영리법인단체 코코룸을 방문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후에 다시 그곳을 찾아갔는데 이유는 연구 사업 외에 꼭 다시 가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단체가 우수하거나 독특한 활동 사례를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2년 전 나에게 푸짐한 밥상을 차려주던 스태프와, 단체의 운영이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활동에서의 재미도 느낀다고 말하던 스태프가, 바로 그 사람들이 아직도 그곳에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그들이 여전히 그곳에 있어주기를 바랐다.

다시 간 코코룸에 누군가는 있고 누군가는 없었다. 그 현장에 없는 이는 또 다른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 힘을 발휘하고 있지 않을까. 나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코코룸 마당에 앉아 그곳에 오는 사람들을 관찰하였다. 그곳의 프로그램을 분석하기보다 평소의 분위기나 지역과의 소통방식을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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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룸 입구(좌)와 카페, 마당 공간(우)

 

 

코코룸은 가마가사키라는 오사카의 빈민지역에서 홈리스, 일용직노동자 등 사회적으로 배제된 사람들과 시를 매개로 문화예술활동을 이어가는 단체다. 현재 게스트하우스, 카페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2002년 오사카시는 신세카이 Arts Park 사업을 시행하며, 지상 8층, 점포면적 57,000㎡의 빌딩 내부의 빈 점포를 활용한 예술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이 때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세 개의 비영리민간단체 중 하나가 지금의 코코룸이다. 그러나 2008년 건물의 매각과 동시에 사업도 중단되었다. 이후 코코룸은 근처의 상점가에 공간을 마련하고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코코룸이 위치한 지역은 치안이 좋지 않아 일본인이나 관광객이 드나들기를 꺼려하는 곳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코코룸 반경 300미터 내 지역 주민 3만 명 중 5천여 명이 노숙자라고 추측하는 시선도 있다. 정확한 수치가 아니라 추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주소부정의 일용직 노동자가 많고, 그 이유는 일본의 고도성장기인 1970년대 이곳에 간사이 최대의 인력시장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건설경기의 악화와 급격한 수요 감소로 일용직 노동자들이 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지방에서 일을 찾아 오사카로 온 사람들은 저렴한 숙소를 전전하다 노숙자가 되기도 했다.

실제로 내가 코코룸 마당에 하루 종일 앉아있다 보니 지역주민이나 일용직 노동자로 보이는 남성들이 이따금 들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딱히 어떤 프로그램에 참여하려고 온 것이 아니었고 동네의 익숙한 공간에 잠깐 들어와 앉았다 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가마가사키 지역과는 사뭇 다르게 예술적 분위기가 넘치고 타 지역의 사람들이 게스트 하우스의 손님으로 오가는 그 공간에 60대 이상의 남성이 별일 없이 드나들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또한 갈 곳이 없는 낮 시간에, 집을 나서서 잠시 이곳에 들를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배제하지 않았던 코코룸 사람들의 움직임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이곳에서 문화예술교육 관련 어떤 활동을 본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서 반드시 필요한, 인간을 대하는 태도를 느낄 수 있었다.

 

코코룸의 운영진들은 ‘예술’은 너무 추상적이라서 ‘표현’이라는 말을 더 자주 쓴다고 했다. 예술은 유복한 사람만 전문적 교육을 받아서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사람들은 예술보다 하루의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코코룸은 이들이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을 예술 자체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물론 전문가를 초빙하여 예술적 기술을 가르칠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의 힘과 특징을 잃지 않는 것, 기술과 그 특징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코코룸의 대표적 프로그램 ‘가마가사키 예술대학’(이하 예술대학)은 그러한 측면에서 ‘표현’의 의미와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술대학은 위에서 언급한 ‘표현’의 활동을 소소하고 다채롭게 담아내는 프로그램인데 이 프로그램에는 단체의 대표부터 지역사람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다. 예술대학은 코코룸 1층의 카페 공간과 주변의 마을회관, 노숙자 휴게소, 노숙자들을 위한 긴급 보호소, 삼각공원 등에서 이루어지며 노숙자였던 사람이나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 등 다양한 이들이 온다. 또 지역민이나 복지와 예술, 삶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오기도 한다. 한 강좌에 5명~50명 정도 참여하며 큰 발표를 하는 경우에는 300명이 오기도 한다.

올해 4월부터 9월까지 진행되는 예술대학 강좌는 아래와 같은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강사로는 전문가가 오기도 하지만 지역주민이 직접 참여하기도 한다.

 

미학 / 거리걷기 / 맥주캔으로 탑 모형 만들기 / 합창 / 책읽기 / 캘리그라피 / 세미나 / 타코야키 만들기 / 하이쿠 (짧은 시) / 시 / 생각하고 표현하기 / 과학소설 / 죽음 / 라디오 댄스 / 가마카사키 오페라 / 사운드 스케이프(소리와 공간의 디자인) / 천문학 / 남성과 여성의 사랑 / 학생자치, 일반적인 미팅 (학생들이 10년 후 가마가사키 예술대학에 대한 의견이나 아이디어를 말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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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가사키 예술대학, 맥주캔으로 탑 모형 만들기  <출처 : 코코룸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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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가사키 예술대학, 가마가사키 오페라  <출처 : 코코룸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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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가사키 페스티벌, 캘리그라피 쓰기  <출처 : 코코룸 페이스북>

 

 

예술대학을 기획할 때 고려하는 지점에 대해 우에다 대표는 3가지의 기준을 언급했다. 첫 번째, 아저씨(일용직 노동자였거나 장애가 있거나 노숙자였던 지역 주민을 우에다는 이렇게 통칭해서 부른다.)가 해달라고 하는 강좌를 만들거나 두 번째, 아저씨가 어떤 선생님을 불러 달라고 해서 강좌를 만들기도 하고 세 번째, 이런 내용이 있으면 여기 사는 사람들이 재미있어 할 것 같은 강좌를 기획한다. 그 외에 계절이나 상황의 밸런스를 생각하며 기획한다.

이렇듯 코코룸은 교육적 효과보다는 지역 사람들과 쌓아온 관계 안에서 발견되는 지점을 바탕으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행해 가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예술보다도 ‘표현’을 강조하면서 ‘장소’의 필요성을 언급하였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표현하는 장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스스로가 여기에 있어도 된다고 느낄 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거부당하는 곳에서는 누구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사람이 안심하고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장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런 측면에서 예술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힘이 중요한 것이다.”

 

그 말에 공감하면서도 사람의 힘이라는 건 쉽게 보이거나 드러나는 것이 아니니 그것의 가치나 의미를 확인하기는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미 보이는 것을 잘 보는 것도 쉽지 않기에 보이지 않던 것을 보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것을 나의 관심과 질문들을 통해 보는 것은 더욱 어렵다. 더 나아가 무언가를 잘 바라보고 나의 기억으로 남겨두었다가 우리의 삶으로 이어가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나도 그 어려움을 잠시 잊기 위해, 다양한 힘을 얻기 위해 다른 나라의 사례를 찾고 현장을 방문하는 것 같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내가 원했고 기대했던 답을 말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날 때 더 마음이 편안해지고 심지어 개운함까지 느껴진다는 것이다. 코코룸의 우에다도 그랬다. 그녀는 “여기는 카페인척 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카페 공간을 매개로 사람들과의 문화예술활동 사례를 물으려던 나는 나도 모르게 “아, 그렇구나!” 라고 외칠 뻔 했다. 카페로 보이지만 카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카페로라도 보일 필요만 있을 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카페든 뭐든 그것으로라도 보이게 하여 지속하고 지켜내려는 장소와 태도인 것이다. 그것은 설명으로 전달하기 힘들고 애써 보여주려 한다고 보이는 것도 아니다. 단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험되고 기억되어 다른 삶으로 퍼져나갈 뿐이다.

 

역시나 질문은 다시 우리에게로 향한다. 우리는 얼마나 보려고 알려고 하고 있을까. 카페인척 하는 장소가 사실은 어떤 장소를 모색하고 있는지, 그 힘은 무엇인지. 과연 그것을 좀 더 잘 들여다보려는 마음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있을까. 마지막으로 사회는 변하지만 그 안에 살았던 사람들이 원래 없었던 것은 아니며 그들을 원래부터 없었던 존재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우에다의 말을 되뇌어 본다.

 

 

 

 

 

관련 연구

해당 내용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지원을 받아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가 수행하고 있는 <장애예술인 창작활성화 프로그램 개발> 연구의 일부이다. 

 

 

관련 링크

-<코코룸> 페이지 : http://cocoroom.org

-<코코룸>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cocoroom

-관련 기사 야쿠자와 노숙자로 쇠락한 거리에 시민 커뮤니티 만든 시인

  http://www.jejusori.net/?mod=news&act=articleView&idxno=193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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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웹진 [이음] 2호_장애 예술인 역량강화 : 교류와 협력

 

 

 

장애 예술인 창작 역량 강화를 둘러싼 질문들 우리는 만나려 하는가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장애 예술이 장애인의 사회참여 또는 직업군 개발을 위주로 활성화되고 있지는 않은가. 

예술이 창작자 또는 그 주변 사람들에게 그러한 목적으로 전제될 때, 그 예술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까. 

우리는 왜 창작을 할까.

 

이것은 내가 올해 초 「장애 예술인 창작 활성화 프로그램 개발 연구」에 공동연구원으로 참여하며 혼자 노트에 적었던 질문들이다. 국내의 장애 예술은 다른 나라에 비해 창작의 시간이 오래 쌓이지 않았기에 이제야 그것의 가치와 방향을 논의하는 시점에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장애 예술인의 창작 활성화는, 장애인의 삶이나 몸의 속도와 어긋날 정도로 활발하게 공식 활동을 하는 것을 전제로 두곤 한다. 대학 교육만 봐도, 비장애 예술인 대부분은 예술 관련 전공자이지만 장애인은 대학 진학도 힘들고 기본적인 예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매우 적다. 따라서 장애 예술인의 창작은 일반적 시각에서의 ‘창작이 활성화되고 있는 상태’가 아닌 여러 차원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특히 그 상태가 ‘장애 예술인의 역량이 강화된 상태’와도 겹쳐서 인식된다는 점에서, 과연 그 상태는 어떤 사회적 기대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지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어떤 장애 예술인이 수차례 문화행사에 참여하고 작품도 유명해졌으나 개별 감각과 표현을 마주할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하고 있다면, 혹은 활발한 공식 활동을 그가 원치 않는다면, 그것은 어떤 상태일까. 장애인의 사회참여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창작활동이 그것의 돌파구로만 작용해서는 안 되며 우리 스스로 창작활동을 그 위험성 안에 놓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 순간 미련하도록 근본적인 질문이 이어지지 못하면 우리는 눈에 띄는 창작의 순간으로 우르르 뱃머리를 돌리고 그 상태를 활성화하기 위한 방법들만 기획 해나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질문을 찾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국내의 사례는 다양할까.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내에는 여러 논의를 끌어낼 만한 개별 시도들이 많지 않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관련 프로그램이 얼마나 여러 곳에서 많이 실행되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다양한 논의점을 담고 있느냐이다. 공공 지원 체계 내에서도 장애 예술인의 장애특성이나 개별 감각을 고려한 창작 프로그램은 다양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특히 장애 예술인의 창작 지원은 조금씩 늘고 있고 장애인의 문화 향수 지원도 이어지고 있지만 개별 창작을 내밀하게 살피거나 전통적인 창작 외의 다른 방식을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부족하다.

이렇듯 장애 예술인 대상의 창작 프로그램이 부족하다 보니, 비장애 예술인과 교류하거나 협업하는 활동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서로 다른 창작자들 간의 네트워크나 창작활동은 각자에게 기존의 자기 작업을 뒤흔들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함에도 말이다. 새로운 시선이나 표현을 경험하거나 배우며 따로 또 같이 무한한 실험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장애 예술인이 참여할 수 있는 창작 프로그램은 ‘다른’ 감각과 표현들 간의 ‘만남’을 다채롭게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장애인의 삶이 일반화된 사회로부터 오랜 시간 격리되고 보호, 관리되어 왔던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이젠 장애와 비장애가 만나는 현장마저도 기획되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예술은 이러한 상황의 부자연스러움, 부조리함을 소재화하거나 비판하는 것을 넘어 장애와 비장애가 만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했던 ‘장애 예술인의 창작 활성화’ 또는 ‘장애 예술인의 역량 강화’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접근해볼 수 있지 않을까.

 

장애 예술인과 비장애 예술인의 창작이 함께 활성화되는 것, 또는 역량이 함께 강화되는 것.

 

나는 무엇보다 서로가 만나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이것은 누가 누구를 만나주는 것이 아니다. 누가 누군가에게 배우기 위해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일단 서로의 생각이나 감각, 표현, 혹은 존재에 대해 자발적 관심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장애 예술인과 창작을 하는 비장애 예술인의 활동이 ‘착한’ 일로 평가되지 않아야 하며 비장애 예술인과 교류하는 장애 예술인이 ‘의지하는’ 태도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한다. 이러한 상태가 여러 현장에서 발생되고 다양한 장르 안에서 지속된다면 그것이 누구에게든 창작이 활성화되는 상태이자 역량이 강화되는 상태가 아닐까.

이러한 관점에서 국내의 여러 사례를 조사해보았을 때, 장애와 비장애가 만나는 장이 섬세한 기획 안에서 이루어진 사례는 많지 않았다. 그것이 지속되는 곳은 더욱 찾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사례를 언급하자면 ‘인포숍카페별꼴’에서 진행한 <에이아카이브: 소리(a-archive: sound)>(이하 ‘에이아카이브’)를 살펴볼 수 있다. 서울시 성북구에 위치한 인포숍카페별꼴(이하 ‘별꼴’)은 비영리단체 ‘장애인문화예술 판’이 운영하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우러지는 대안 공간으로 2011년에 문을 열었다. 매주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누구나 출입할 수 있는 카페로 운영 중이다. 도서관이나 서점에 두지 않은 책이나 진(ZINE, 개인이나 그룹이 이윤과 관계없이 자신의 힘으로 소규모 인쇄하는 출판물), 전단 등을 모은 아카이브가 있고, 소수 집단과 사회 운동, 서브 컬처에 관련된 전시, 영화 상영, 라이브, 워크숍 등을 하고 있다.

‘에이아카이브’는 2016년 성북문화재단의 문화다양성 사업 지원을 받아 참여자들이 자기를 표현하는 방식을 다 같이 생각해 보고, 자신만의 소리진(ZINE)을 만들어 전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장애인만을 참여대상으로 정해두고 기획하지 않았다는 점, 그렇기 때문에 장애인이 다양한 사람 중 일부로 참여하고 어울릴 수 있었다는 점이 에이아카이브의 큰 특징이다. 그러나 참여하는 사람 중에는 언어가 다른 사람,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을 하는 사람, 언어 장애가 있는 사람, 신체적인 장애로 기존의 악기나 도구를 다루는 것이 어려운 사람 등이 뒤섞여 있었다.

별꼴은 노들장애인야간학교(이하 ‘노들야학’)의 발달장애인 수업과 연계하고 미디어 아티스트 팀 다이애나밴드와 협력하여 에이아카이브를 진행하였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포함되어 13명의 참여자가 2개월 간 10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결과 전시회를 개최하고 영상작품을 상영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장애 예술 자체를 강조하기보다 문화다양성 담론 안에서 활동 맥락을 소개하였다.

자세한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다이애나밴드, 노들야학 교사가 함께 사전 회의를 통해 중증장애인 참여자 수요 조사를 진행했다. 집에서 이동이 쉽지 않은 중증장애인 참여자들을 만나기 위해 노들야학이나 집으로 찾아가 사전 연구 워크숍을 5회 진행했다. 이후 외부 참여자(주로 비장애인, 예술가, 연구자, 지역주민)를 모집했고, 사전 연구 워크숍에 참여한 중증장애인 참여자와 집중 워크숍을 5회 진행하고, 다 함께 전시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참여자들은 각자의 창작물(목소리나 주변의 소리를 녹음한 카세트테이프 작업물, 중증장애인이 연주할 수 있는 신시사이저, 점자를 이용한 사운드 인쇄물 등)을 만들었다.

이 활동은 장애 예술인이라고 불리거나 그러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참여했던 사례는 아니다. 장애 예술인만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기획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소리를 발견하고 표현해보려 했던 지점은 충분히 예술적 가능성을 갖는다. 오히려 이러한 사례가 장애 예술을 폭넓게 상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사례는 이러한 활동을 여러 형태로 지속하고 있는 별꼴의 활동 전반과 연결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별꼴은 2011년부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경계 없이 어울릴 수 있는 현장을 일상적, 문화적, 예술적, 사회적으로 만들어나가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와 맞물려 문화나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장애인이 보다 편하게 이곳을 방문하고 있으며 장애 여부를 떠나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만나고 소통하고 있다.

또한 이 사례는 장애와 비장애가 서로를 만날 수 있는 현장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장애 예술인과 비장애 예술인의 창작이 함께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만남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전의 장애 예술인 대상 역량강화 프로그램들이, 대부분 비장애 예술인의 예술 언어를 학습하고 경험하는 것으로 진행되었지만 이와는 다른 관점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언급했듯, 장애 예술인과 비장애 예술인 모두의 창작을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특히 장애 예술을 사회적으로 특별한 위치에 두지 않기 위해 이러한 모색은 더욱 필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왜 창작을 할까’라는 질문은 스스로이자 서로를 향한 질문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우리는 왜 함께 창작을 해야 할까.

 

그리고 ‘다른’ 감각들이 만나 함께 창작을 하기 위해서는 질문을 조금 바꿔볼 수 있다.

 

우리가 함께 창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함께 창작하고 싶어 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이 부족한 것일까.

어쩌면 창작 활성화 프로그램이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관심을 기획된 자리로라도 촉발시켜야만 하는 상황 때문이 아닐까.

 

우연한 만남이든 기획된 만남이든 우리는 그 자리에서 누군가의 창작역량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해볼 수 있는 것을 찾아보아야 한다. 창작, 혹은 예술은 기대했던 답을 찾게 된 상태. 그래서 사회적 존재 증명을 하게 된 상태. 예술가라고 불리게 된 상태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태가 될지 모른 채로 현재 가능한 것, 혹은 할 수밖에 없는 것을 해보는 그 순간에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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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아카이브: 소리> 전시 ⓒ 우에타 지로

 

 

 

* 「장애 예술인 창작 활성화 프로그램 개발 연구」(2018,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는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가 수행하였다. 

*이 글은 <비기자>의 최근 활동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글입니다.

 

 

견고한 이름의 곁을 맴도는

 

 

 

우주에서 날아온 보따리

라고 하니 조금 궁금하지 않나요?

차별’, ‘인권’, ‘사회문제’, ‘환경’, ‘인문학이라는 이름보다 더 말입니다.

 

지난 해 <비기자>는 여러 예술가들과 함께 우주보따리라는 공연을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 무엇보다 차별’, ‘인권’, ‘사회문제’, ‘환경’, ‘인문학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의 다른 이름을 붙여보았습니다. ‘우주’, 혹은 우주보따리라고요. 왜 그랬을까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직설적으로 해도 전달이 될까 말까 하는데 말입니다.

이전에는 차별’, ‘인권’, ‘사회문제’, ‘환경’,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외치며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움찔움찔 놀라기도 하고 헛웃음을 보이며 뒷걸음을 치기도 했습니다. 그건 우리의 관심사 혹은 문제아니라며 말입니다.

그래서 말걸기의 방식을 여러모로 고민해보았습니다. 같이 놀기, 먹기, 움직이기 등의 방식으로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같이할 그 무언가를 어쨌든 소개하고 제안해야했습니다. 그때마다 원래 우리가 부르던 차별’, ‘인권’, ‘사회문제’, ‘환경’, ‘인문학같은 이름을 슬며시 빼고 다른 말들을 선택하거나 그것을 상상하게 할 짓거리들을 해봤습니다. 그래서 우주가 등장하기도 했고 다른 활동들도 여러 표현들로 소개되었습니다. 청년들의 복지를 말하기 위해 상상캠퍼스에 흥 오르니 짓거리가 절로 난다라는 긴 이름을 가져오기도 하고 미세먼지 문제를 말하기 위해 숨정화기라는 이상한 말을 지어내기도 했습니다. 스펙만 강조하는 세상에 대해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고자 짓거리 투어라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고 견고한 예술의 아우라를 깨기 위해 모여서 비기자라는 연말맞춤형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습니다.

 

 

 

'우주보따리' 공연 현장. 공연장에 설치되어있던 그림 중에는 비장애인 예술가의 작품과 장애인 초,중학생의 작품이 섞여 있었습니다.

어떤 것을 예술작품으로 볼지, 혹은 그림마다의 다른점을 얼마나 부각시켜 볼지는 관객의 몫이었으며 공연에서는 이러한 부분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사진_우에타 지로)

 

 

하지만 기존의 이름들을 대신하는 그 표현들은 우리의 고민을 함께 나누기 위한 말걸기의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 낯선 표현들을 의미적으로 채울 수 있는 짓거리들을 상상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이미 우리 삶에서 지속되고 있으나 일반적인 이름이나 의미를 찾지 못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어떤 활동 혹은 행위였습니다. <비기자>가 그것을 어떤 표현으로 불러봤던 것은 그것을 보다 일상적인 인식의 차원으로 소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행위들은 자체로 이미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차별’, ‘인권’, ‘사회문제’, ‘환경’, ‘인문학이라 부르는 것들은 그 견고한 이름의 테두리 때문에 우리의 일상과 가까워지기 힘들고, 낯선 행위들은 모호한 이름도 갖추기 힘들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과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며, <비기자>는 후자의 그것을 잠시 사윳이라고 이름 붙여 이 글에서나마 불러보려 합니다.

 

당신이 알고 있거나 하고 있는 사윳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왜 더 익숙하거나 대중적인 이름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은 사윳이 무엇일지 전혀 상상되지 않습니까?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비기자>는 올해도 원래 하고 있던 사윳에 이런 저런 이름 혹은 표현을 붙여 그것의 가치나 재미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윳을 표현하는 방식이 기획이자 창작이라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잊지 않고 싶습니다. 그것은 사윳이 각자의 힘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순간들입니다. 미련하고 느리고 비효율적이고 애매하고 쓸모를 알 수 없는 그 순간들 말입니다. <비기자>는 획기적인 사윳을 위해 그 순간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지양합니다. 그보다는 스스로의 가치를 만들어나가고 있는 기존의 사윳을 찾고 응원하고, 좀 더 오지랖을 떨어서 널리 퍼트리기도 하며 활동을 지속하고 싶습니다.

 

당신에게는 사윳이 있습니까?”

그것이 정확히 뭐냐고 다시 묻고 싶으시다면, 그 질문은 스스로에게 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기자>는 고작 그동안 봐왔던 것들에 사윳이라는 임시적 이름을 붙이는 정도로 대답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힌트를 드리자면, 반대적 질문을 던져볼 수는 있을 것 같군요.

 

당신에게는 사윳이 없습니까?”

이 질문은, 왜 당신의 삶이 모두 정확한 이름과 표현들로만 구성되어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그 이름들은 스스로 지은 것이 아닌 경우가 더 많은데 말입니다. 타인이나 사회가 일컫는 이름 안에서만 당신의 삶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그건 스스로에게 힘이 나는 일일지 궁금합니다.

 

 

2018.2.24.

 

창작그룹 <비기자>

 

 

 

*이 글은 경기상상캠퍼스 청년 입주단체들과 함께 했던 <상상캠퍼스에 흥 오르니 짓거리가 절로 난다> 프로젝트에 대한 글입니다.

*이 글은 프로젝트 자료집인 "짓거리 연구 보고서"에 담겨있습니다.

*자료집 문의 및 프로젝트 자세히 보기 : http://bigija.tistory.com/51

 

 

 

속도를 늦추는 질문 / 창작그룹 <비기자> 최선영

 

 

 

각자가 살아내기 바쁩니다. 오늘 밀려온 일감을 해치우고 며칠 후 마감인 기획서를 쓰고 몇 달 후 다가올 평가를 준비하고 언제 불어 닥칠지 모를 생활의 변화를 대비해야 하니까요. 몇 개월, 몇 년, 시작이 기억나지 않는 바쁜 일상이 나를 삼켜버리고 나면 통장 잔고가 조금씩 채워지고 활동 기회가 이어져도 문득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라는 생각이 밀려옵니다.

근데 바로 그때쯤 우리에겐 조금 다른 에너지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엄청나게 바쁜데 딴청을 피울 여유가 생기고 밤을 새며 일을 해도 모자를 판인데 예전부터 미뤄두었던 수다 모임을 추진합니다. 그 기묘한 에너지에 당신은 어떤 이름을 붙이시겠습니까.

라는 발전기를 돌리고 성과라는 결과물을 생산해내지도 못하는 그 에너지에게 말입니다. 짓거리 연구원들은 그것의 이름을 찾는 대신 일단 그것의 속성을 연구해보았습니다. 그것의 필요성도 실험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직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에너지를 연구하기 위해서 일단 몇 가지 짓거리를 시도해 보았습니다. 상상캠퍼스라는 곳에서 몇 개월의 활동을 이어갈 때쯤, 함께 공간을 채우는 사람들과도 어느 정도 관계가 생기고 같이 놀기도 좋아졌을 때쯤에 말입니다.

우리가 했던 짓거리들의 과정은 앞에 보고서에 자세하게 담겨있습니다. <사례품앗이>를 통해 서로의 현장에 품앗이를 해보기도 하고 <문화복지랩>을 통해 보이지 않는 정서나 고민을 나눠보기도 했습니다. 이건 어떤 의미나 성과가 있을까요? 그전에 질문을 조금 다르게, 그리고 길게 던져보고 싶습니다.

 

당신의 주변에는 많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 친구들은 어떤 측면에서 잘 살기도 하지만 힘들어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당신도, 친구들도 이 세계의 시스템과 규칙을 단번에 바꿀 수 없으며 그런 현실을 모른 척 해도 될 만큼의 엄청난 재화를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각자 하고픈 것을 펼칠 사회적 기회가 많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당장 몇 달 후, 몇 년 후에 당신과 친구들은 생활이 안정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누구의 요구 혹은 기대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래전부터 그렇게 느끼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자신과 친구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피차 서로 가진 것도 없는 지금 말입니다.”

 

이 질문에 니가 하는 거 나도 같이 해볼게했던 게 <사례품앗이>입니다. 사실 각자 할 일도 많고 시간도 없지만 친구에게는 어떤 기회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며 친구의 활동에 참여해 보았습니다.

또한 이 질문에 같이 오락기나 두들기자고 했던 게 <문화복지랩>입니다. 안 쓰는 물건들을 모아서 팔아보자고 했던 것도, 뾰족한 수도 없으면서 고민 상담을 시작했던 것도. 오락기 속 동전들을 긁어모아 누군가의 복지를 만들어냈던 것도.

이 얼마나 미련하고 부질없는 짓거리란 말입니까. 저렇게도 길고 답답한 질문에 이렇게도 헛도는 대답을 하다니.

 

 

<문화복지랩> 12월 문화복지주간에 그루버들과 함께 먹은 저녁밥상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서로에게 사업 기회를 마련해주거나 현금 다발을 준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부터 오늘 품앗이 하는 날혹은 복지, 복지, 복지가 최고라며 같이 무언가를 하는 것에 흥이 나고 있었습니다. <문화복지랩>에서 고작 3,000원쯤 되는 복지 혜택 쿠폰을 받았을 때에도, 어디다 팔아도 10원도 받을 수 없는 문화복지 트로피를 작업실 간판에 매달 때에도 우리는 신나있었습니다. 사실 이 연구를 처음 시작할 때에도 이런 현상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짓거리는 짓거리일 뿐 일거라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각자 살아내야 할 테고 이런 짓거리는 삶의 작은 이벤트 정도만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맞습니다. 우린 여전히 각자의 삶을 살아내고 있고 어느 순간에는 이런 짓거리들을 잊을지 모릅니다. 게다가 우리의 생활은 이 짓거리들로 인해 갑자기 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여기서 긴 질문을 던져봅니다.

 

이런 걸 해봤거나 해보려 했던 시간은 있었을까요? 나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기거나 실제로 현실적 도움을 타인에게 줄 수도 없을 때. 우리는 효과적이지 않아 보이는 시도라도 해봤을까요? 혹은 누군가 우리에게 그런 기회를 주려고 했던 적이 있었나요? 마음껏 딴짓하며 우리 스스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도록 하는. 혹은 나의 현재가 다급하긴 하지만 옆 사람의 고민에 관심을 가져보도록 하는. 그렇다면 지금의 짓거리는 나중에 정말 아무 의미 없이 잊혀 질까요? 혹은 이것은 어떻게 기억될까요? 그 기억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줄까요?”

 

이제 와서 저의 다른 기억을 결코 비장하지 않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제가 고3 때 모의고사를 앞두고 아파트 계단에서 목을 멘 옆 반 친구는 이름도 모르는 아이였습니다. 학교는 며칠 동안 뒤숭숭했고 학생들 중 몇몇은 그 친구 때문에 모의고사가 취소되었다고 푸념을 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죽고 싶을 만큼 견디기 힘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아무도 되짚어 주지 않았습니다. 교실은 굴러갔고 수능은 다가왔고 우리는 그런 채로 흘러갔습니다. 그때와 같은 속도로 삶이 흘러가는 요즘, 자주 그 친구를 떠올립니다. 누군가 그때 다급한 시험을 뒤로 하고 그 친구와 부질없는 짓거리를 하며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안부를 물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우린 누군가에게 큰 일이 나야 그제서야 그곳을 바라봅니다. 이미 그 사람은 오래전부터 우리 옆에 있었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현재를 같이 보내자고 말을 걸어왔을 텐데 말입니다.

우리는 요즘 청년이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청년문제 라는 말은 고유명사처럼 뉴스를 도배합니다. 우리 스스로도 그 고유명사를 매일 떠올립니다. 하지만 옆 사람의 절박한 신호는 쉽게 바라보지 못합니다. 우린 각자도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것, 그런 걸 해 볼만한 여유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정말 없을까요?”

 

이번 질문은 짧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길고 긴 대답을 기다립니다. 제도나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의 답도 기다립니다. 오래된 기다림이 더 이상 지루해지지 않도록 우리는 일단 여기에서 오늘도 어떤 짓거리를 해보고 있겠습니다.

 

*본 원고는 문화예술교육 비평웹진 '지지봄봄' 23호에 소개된,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저자 채효정)에 대한 서평입니다.

(웹진 바로가기 : http://gbom.net/344)

 

 

 

 

사람을 따라갈 때 보이는 좌표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이 글에서는 ‘중심’이라고 잠시 이름을 붙여볼까 한다. 강사, 기획자, 예술가, 실무자, 보조인력, 활동가 등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많은 개별 사람들에게. 그 ‘중심’이 본래의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로 쓰일지 혹은 다른 단어로 대체되어 쓰여도 무방할지 고민해 보는 것은 읽는 이의 몫이다.)

 

비기자 진행, 문화예술교육 현장



 만약 우리가 문화예술교육에 있어서 잘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고 가정해보자. 보통 그 ‘잘’은 ‘효과적으로’라는 의미로 일반화되어 쓰이곤 한다. 그렇다면 교육은 효과가 있어야 할까. 교육사업 기획서 후반부에는 ‘기대효과’를 최소 3가지씩 꼬박꼬박 적어 넣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효과를 실험할 수 있는 시간이나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얼마나 충분하고 명확한가. 기대효과를 내기 위한 현실적 지원이나 활용 가능한 자원은 누가, 어떻게, 얼마나 확보하고 지원해주고 있는가. 설마 몇 개월짜리 지원사업, 불안정한 고용상태, 실험보다는 실행이 다급한 상황 안에서 사람도 삶도 심지어 사회도 바뀌길 바라는 것은 아닐 테지. 설마. 

 혹은 문화예술교육의 효과를 핑계로 사회나 조직이, 또는 누군가가 ‘중심’들을 이용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의 교육은 같은 배를 끌고 있는 사람들 개개인도 충분히 살피지 못하면서 저 멀리 보이는 어떤 의미나 목적을 향해 전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문화예술이 무언가를 가르쳐야 하는 학문이 되니, 그 ‘무언가’와 ‘가르치는 목적’과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만 강조되어 그것을 행하는 ‘중심’들이 소진되고 있다. 문화예술은 사회적으로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라는 논리 안에서 이 ‘중심’들의 삶은 더더욱 소외된다. 좀 덜 임금을 받아도, 좀 덜 먹어도, 좀 더 일해도, 좀 덜 쉬어도.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해직 강사가 쓴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저자 채효정)’도 이러한 상황을 보여준다. 이 책은 (교육이든 삶의 현장이든) 어떤 활동의 주체들이, 자신이 속한 조직과, 그 조직이 표방하는 주제 안에서 소진, 소외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더욱 구체적으로는 대학이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대학이 누구를 위해, 누구와 함께 존재해야 하는지 묻는다. 그리고 단지 대학의 역할을 강조,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할을 해내기 위해서는 본질적으로 대학을 굴러가게 하는 모든 이들이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문화예술교육 현장으로 돌아와 ‘중심’들은 교육의 주인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관념적으로 들리기도 하는 이 질문을 좀 더 긴 예시로 풀어보자. 

 “지역문화재단의 문화예술교육사업에 참여하는 A는 2시간 수업에 44,000원의 강사료를 받는 보조강사이자 예술가이다. 1년간 정부지원을 받는 이 교육사업은 총 20회 진행되며 내년에 또 사업이 선정될지는 그때까지 알 수 없다. 
 A는 수업을 전반적으로 기획하지는 않지만, 재료를 준비하거나 자세한 활동내용을 계획하는 역할을 해야 하며 한 달에 1회 강사 회의에도 참여한다. 초등학생 10여 명과 진행하는 수업 안에서는 이리저리 뛰어다니거나 무기력하게 앉아있는 아이들에게 뭐라도 좀 같이 해보자고 다독인다. 
 수업이 진행되는 장소는 A가 사는 집에서 대중교통으로 1시간이 넘게 걸린다. 자동차가 없는 A는 매회 무거운 수업 재료를 들고 왕복 2시간이 넘는 거리를 오간다. 수업이 끝나고 허기를 달래기 위해 밥을 먹을 때에는 밥 먹는 모습이나 회의하는 사진을 따로 촬영하고 집에 돌아가 회의록을 작성한 후 정산보고서를 위해 영수증을 정리한다.”

 A에 대해 함께 질문을 던져보자. 

하나. A가 2시간 강사료로 44,000원을 받는 것은 합당할까.
둘. A는 보조강사 역할을 몇 건 정도 동시에 해내야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셋. 만약 A가 5건의 보조강사 역할을 하게 된다면 그는 그 역할에 모두 충실할 수 있을까.
넷. A가 교육현장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지 아닌지는 누구, 무엇에게 영향을 줄까.
다섯. A는 왜 수업을 위한 이동, 식사, 휴식을 알아서 해내거나 증명해야 할까.
여섯. A가 수업을 위해 해야 하는 일들은 수업 재료 준비와 수업 보조가 전부일까.
일곱. A는 내년에도 이런 활동을 할 수 있다고 믿거나 기대할 수 있을까.
여덟. A는 앞으로도 이런 활동을 하며 살아가는 것에 자발적 동기를 가질 수 있을까.
아홉. A는 현재 행복할까.
열. A는 자신이 문화예술교육의 주인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느끼고 있을까.

 이쯤에서 나에 대해 털어놓자면 난 A보다는 조금 더 강사료를 받는 주강사의 역할을 하며 10년째 살아오고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것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개인 창작을 하는 예술가이며 운 좋게 지원사업에 선정되면 문화예술교육이나 예술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기획자이자 강사이다. 출산 후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급격히 줄어들었을 때는 동네 학교에서 방과후 강사를 몇 년 하기도 했다.

 이런 나의 입장으로 위의 10가지 질문에 답변하자면 답변과 답변 사이에 한숨만 쏟아진다. 압축적으로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하자면 그건 분명하게 ‘아니다’이다. 그리고 이제는 대부분 사라진, 어디선가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중심’들의 답변도 어느 정도 상상이 된다고 감히 말해본다.

 후마니타스 칼리지에서 해직한 강사가 받았던 대우나 통보가 구체적으로 ‘중심’들이 받는 그것과 조금 다를 수는 있지만, 그러한 상황을 발생시키는 구조는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목적이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목적이 담론이거나 효과이거나 성과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손에 잡히지도 않고 숨을 헐떡대지도 않고 발을 동동 구르지도 않고 힘들다고 푸념하지도 않는 것들. 

 그러나 사람 그 자체를 목적으로 두면 피곤해지기 일쑤다. 이 사람 저 사람 사정 다 봐줄 수 없다. 사정이 다 다르니 그거 따라가다가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그 ‘어디로’를 정할 필요 없이 ‘사람 먼저’라고 하다간 요즘 같은 세상에 미련하거나 어리석다는 취급을 받는다. 

 그런데도 언제나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은 생계가 불안정하기도 하고, 배가 고프기도 하고, 몸이 아프기도 하고, 감정에 치우치기도 하고, 능력이 좀 부족하기도 하고, 일의 효과적 진행보다 마음이 쓰이는 것을 먼저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이 서로를 살피는 과정 안에서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삶에 대한 철학이 끊임없이 생겨난다. 그것은 문화도 되고 예술도 되고 교육도 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문화예술교육은 이러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보다 어떤 주제로 교육을 ‘한다’라는 것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상황이 연속되면 그 주제가 담고 있던 문제의식은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 ‘한다’, ‘안 한다’로 이분법화 되어 타자의 정치나 사회적 담론 안에서 간편하게 소모된다. 후마니타스 칼리지가 ‘전공 교육의 특수성과 전문성 이전에 먼저 인간의 삶을 배우고 읽어야 한다’는 보편적 교육의 이념을 담고 출발했으나 현장에서는 그 이념을 위해 함께 노력했던 사람들을 모두 주인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과 같이. 교과 개편을 이유로 100여 개의 강좌가 정리되어 수많은 강사가 갑자기 강의의 기회를 잃은 것처럼. 그럼에도 후마니타스칼리지가 보편적 교육의 가치를 표방 ‘한다’는 것은 마치 어떤 기업의 브랜드 마케팅처럼 변함이 없듯이. ‘하고 있다’라고 하면 실제로는 어떻든지 간에 그 자체로 우선적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어떤 주제를 ‘한다’고 스스로 말하기 전에, 그와 관련한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사람을 챙기고 활동을 채우는 사람, 사람, 사람, 그리고 ‘중심’들이 있다. 그들은 이따금 그 문제의식이 뒤늦게 만들어낸 공동의 테두리 안에서도 밀려나곤 한다. 어느새 지혜란, 각자의 문제의식을 도드라지게 드러내지 않으며 테두리 안에서 최소한의 자리 확보를 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쨌든 버텨내라’는 말을 애써 길게 쓰자면 말이다.

 그만큼 단지 버티는 것이 너무나 힘들다. A의 삶을 보라. 수많은 A들, ‘중심’들. 많은 삶의 영역들이 그러하지만, 문화예술교육 현장은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최우선으로 두는 경향 때문에 더더욱 ‘중심’들에게 힘든 장소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심’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을까. 정책이나 제도를 결정할 때, 예산지침이나 행정절차를 강조할 때, 현장이나 사업을 평가할 때, 교육의 의미를 논의할 때, 기획서를 쓸 때, 수업을 진행할 때, 그리고 교육현장과 직접 연결되어있다고 여겨지기 힘들지만 분명 연결된 삶의 매 순간. 그렇다면 우리가 그것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중심’들을 위해서일까. 

 마지막으로 내 주변에 분명하게 있는 ‘중심’들의 본래 이름들을 마음속으로 나열해본다. 그들이 사회적으로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되어 불리거나 여겨지든 우리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을까. 심지어 교육의 주제를 증명해내는 것보다 먼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예산을 투입‘했고’ 우수한 사업들을 ‘했다’는 답변은 정중히 사양한다. 이미 많은 ‘중심’들이 현장을 떠나거나 튕겨져 나가고 ‘있다’는 것을 지금부터 기억하자. 사람을 기억하고 챙기는 것에서 우리는 가장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본 원고는 2017 현대 생활문화 진단시리즈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기획의도를 소개하는 글입니다.

 

 

 

 

행사 개요

 

행 사 명 : 2017 현대 생활문화 진단 시리즈 <작지만 확실한 행복>

기 간 : 2017129, 16, 23() 2-5

장 소 : 경기상상캠퍼스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서둔로 166)

주 최 : 경기도, 경기문화재단

주 관 : 경기문화재단, 비기자

후 원 : 경기도

 

 

 

분명해지지 않을 시간을 향해

 

창작그룹 <비기자> 최선영

 

 

체험프로그램 레트로 게임진행 현장

 

 

 

 

방에 누워 뒹굴거리며 좋아하는 음악을 듣습니다.’

어릴 적 문구점 앞에서 하던 추억의 오락기를 길가에서 발견하고 신나게 오락 한판을 해봅니다.’

병에 물과 꿀을 붓고 며칠 동안 마음과 관심을 기울이며 그것이 술이 되는 날을 기다립니다.’

 

이런 시간, 혹은 행위는 무엇인가요?”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그 속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진단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져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꼭 무엇이어야만 하나요?”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 꼭 그렇지는 않지요.”라고 답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무엇이 되어야만 하거나 아닌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심심해서, 그냥 이것저것 하다가, 문득 생각나서 했던 것들에 이유와 필요가 붙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앞에서 언급했던 3가지 행위들은 이번 현대 생활문화 진단시리즈 <작지만 확실한 행복>’에서 우리가 해봤던 것들입니다. 생활문화를 진단해보는 3일간의 기획 행사에서 말이죠. 그래서 행사에 참여한 누군가는 , 이런 게 생활문화구나혹은 이런 건 생활문화가 아니구나라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행사는 진단이라는 타이틀을 함정처럼 달고 진단하지 말자는 의도를 해내려 노력했습니다. 단지 강연이나 체험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생활문화를 상상할 수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행사를 기획한 사람들은 생활문화의 개념이나 의미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비밀스럽게 숨기며 힌트를 찾아보라고 권했던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행사를 기획한 사람들도 생활문화에 대한 의미를 각자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상 속에 퍼져있거나 잠재되어 있는 것, 이미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 그래서 특별하게 해석해야만 하는 상황이 고민스러운 것, 그것이 이 알쏭달쏭한 생활문화의 길고 긴 부연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생활문화에 대해 좀 더 적극적인 상상을 해보려는 이유는 있습니다. 우리 삶과 동떨어진 곳에서 환상적으로 빛나고 있는 행복이 아니라, 생활과 연결되거나 그 자체로 생활이기도 한 어떤 행복을 발견하는 데에 이 모호한 힌트들은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생활직업, 생활혁신, 생활자본, 생활공부 같은 것도 아니고 생활문화라니! 그것은, 현재의 내가 애써 성취하거나 실현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 자고 입고 놀고 사는 것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무언가일 것이라는 강한 예감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다른 삶 안에서 충분히 찾아볼 수 있는 그 행복을 좀 어색한 형태이긴 하지만 며칠 모여서 같이 상상해보자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것이다, 저것은 이것이 아니다, 이런 분명한 구분과 판단을 할 수 없는 생활문화는 사실 의구심을 품게 만듭니다. 하지만 어떤 용어의 개념을 파악하기보다 우리 삶에 대해 궁금해 할 수 있다면, 알고 싶었던 것이 더욱 모호해질수록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삶의 태도를 고민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단 3일의 행사를 통해 무언가가 분명해지셨습니까? 그렇다면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뒹굴뒹굴거리는 시간을 추천해드립니다. 성인이 시도하기에는 용기마저 필요한 오락이나 놀이에 일단 몸을 맡겨보거나 물이 술이 되는 길고 긴 발효의 시간을 함께 해보시라고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각자의 시간 안에서 행복한 기운이 결코 거대하지 않게 생겨나길 바랍니다. 많은 것을 갖거나 해내거나 갖춰야만 확실한 행복이 올 것이라고 기대되는 요즘에 말입니다.

 

 

 

 

 

*본 원고는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매개자 역량강화 워크숍 <상상력의 징후>의 기록 활동을 기반으로 쓴 글로

문화예술교육 비평웹진 '지지봄봄' 22호에 소개되었습니다.

(웹진 바로가기 : http://gbom.net/327)

 

 

워크숍 개요

 

. 사 업 명 : 2017 경기문화예술교육 매개자 역량강화 워크숍 상상력의 징후

. 일 시 : 2017.09.06. () ~ 09.08. (), 3

. 참 여 자 : 문화예술교육가로의 전환을 희망하는 예술가 20여명

. 장 소 : 경기상상캠퍼스

. 주 최 : 문화체육관광부, 경기도

. 주 관 : 경기문화재단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사진_워크숍이 진행된 경기상상캠퍼스 주변 숲

 

 

 

 

 

 

안전하지 않은 상상에 대한 응원 / 창작그룹 비기자 최선영

 

 

 

 

아빠의 코 고는 소리를 녹음한다는 것은 교육이 될 수 있을까

경기문화예술교육 매개자 역량강화 워크숍 상상력의 징후중간에 이러한 이야기가 나왔다. 본 워크숍은 이러한 물음들을 뜬금없이 던지면서도 과연 그것이 정말 뜬금없는 것인지 또 다시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워크숍은 교육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교육만을 위한 상상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아빠의 코 고는 소리, 그것을 녹음해보고자 마음을 먹은 누군가의 고민, 녹음의 타이밍이 어긋나버리는 상황, 이 모든 것들이 교육을 위해서 기획된 것들은 아니지만 그것이 교육에 대한 조금 다른 해석을 가능하게 하듯이 말이다.

워크숍에서 중요했던 것은 무엇이 교육이 되고 무엇이 교육이 될 수 없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우리가 교육이라는 것을 얼마나 더 넓고 깊게 상상해볼 수 있을지가 중요했다. 또한 그 과정에 예술가의 개별 창작활동이 촉매제로 작용할 수 있을지, 그 방식과 범위는 얼마나 확장될 수 있을지를 살펴보았다. 창작 안에 존재하지만 쉽게 정리될 수 없는 상상력의 징후들이 그 실험의 단서들로 작용했다. 그래서 워크숍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부지런히 산으로 가기도 하고 근본적인 질문을 품기도 하고 제도와 행정에 대한 뒷담화로 흐르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너무 부질없거나 쓸모없는 논의로 치부되지 않고 그 자체로 끊임없이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야기든 감각이든 그 무엇이든 더 적극적으로 산으로 가도록 내버려두기 위해, 참여자들은 맨발로 주변의 숲을 걷기도 하고, 말없이 요가를 하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다시, “아빠의 코 고는 소리를 녹음한다는 것은 교육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워크숍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더 확장해본다.

 

맨발로 숲을 걸으며 개미를 만나는 것은 교육이 될 수 있을까

요가를 하는 것은 교육이 될 수 있을까

복싱을 하는 것은?’

재개발을 앞둔 아파트 옥상에서 볼링을 하는 것은?’

버려지는 물건들로 체스말을 만드는 것은?’

햇볕이 비추는 풍경의 일부를 오랜 시간 관찰하는 것은?’

오래된 이발소들을 찾아다니며 그 모습을 기록하는 것은?’

.......

 

‘( ) 하는 것은 교육이 될 수 있을까

 

본 워크숍은 이 빈칸에 특히 예술가의 창작에 관한 것들을 넣어보고자 했다. 워크숍의 기획의도에서 언급된, ‘예술가들이 창작을 하기 전에, 혹은 창작 중에 발생되거나 개입되는 다양한 신호나 행동, 사건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 빈칸을 채우고 있는 창작활동과 고민들을 안고 10여명의 예술가, 문화예술교육 실무자, 예술강사 등이 워크숍에 참여했고 5명의 모더레이터가 현장의 대화를 이끌었다.

그리고 이 대화는 더욱 구체적으로 흘러서,

 

‘( ) 하는 것의 ( )이 교육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이야기로 뻗어나갔다. 여기에서 두 번째 빈칸을 채우기 위해서는 예술가가 하고 있거나 생각하고 있는 무언가 안에 잠재되어 있는 신호, 징후, 가치, 의미, 가능성을 읽어 내거나 번역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예술가 스스로 그것을 해내는 것이 쉽지 않을 경우, 본 워크숍에서는 모더레이터의 적극적인 개입이 작동되기도 했다. 그것은 수많은 키워드들로 나열되었고 참여자들은 다시 그 키워드들로부터 교육에 대해 상상을 시도했다.

그래서 이것은 또 다른 질문을 만들었다.

 

‘( ) 하는 것의 ( )이 교육이 될 수 있는 방법들은 무엇일까

 

그런데, 빈칸에 넣을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고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고 해서, 과연 우리의 상상력은 확장될 수 있을까. 논의에 집중하는 시간과 에너지가 한참 많아지고 있을 때, 예술가이자 문화예술교육 기획자이자 예술강사이기도 한, 그래서 또 한 명의 워크숍 참여자일 수 있는 내 머릿속에 끊임없이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교육현장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만났던 참여자들이었다. 본 워크숍 현장과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교육 참여자들의 모습은 마치 평행하는 대화, 혹은 엇갈리는 외침처럼, 양쪽으로 나뉘어 허공에서 핑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만났던 참여자들이 유독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자연스러웠고 다양했다. 그 다양함들을 잠시 언급해본다.

 

남겨진 재료 몇 가지를 다른 사람보다 더 챙겨가고 싶은 사람,

도화지를 가로로 놓아야 할지 세로로 놓아야 할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사람,

타인의 이야기에 5분 이상 집중하기 힘든 사람,

연필을 스스로 쥐기에 손 근육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

작품을 완성하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

옆 사람의 생각이 궁금하지 않은 사람,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

칭찬이 꼭 필요한 사람,

일단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사람,

부모의 선택으로 수업에 참여한 사람,

쉬고 싶은 사람,

말을 할 수 없는 사람,

익숙하지 않은 재료는 만지고 싶지 않은 사람,

5분 간격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

무엇을 하는가보다 누구와 짝을 지어 하는 지가 중요한 사람,

기분이 좋지 않은 사람,

앞을 볼 수 없는 사람,

너무 외로워서 수업 참여보다는 자기 표출에 열을 올려야하는 사람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해보지 못한 사람,

잘하지 못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

다른 것을 하고 싶은 사람,

......

교육현장에서 무엇을 하든 능동적이고 다채롭게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은 사실 소수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와 같은 사람들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장에서 자연스러운 것은 더욱 많다. 그것은 본 워크숍 2일차에서 진행된 나쁜 예술과 나쁜 예술교육에 대한 불평시간에 언급된 것들과 겹치기도 한다. 제도적 한계, 행정의 경직성, 담당자나 실무자와의 의견 차이, 공간적 제약, 참여자 부모의 지나친 개입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워크숍 안에서 나쁜 것으로 전제되었지만 사실 그 나쁜 것들이 촘촘하고 복합적으로 얽힌 현장이 교육의 기본 테두리를 만들기 때문에, 어쩌면 어떤 상태, 혹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본 워크숍에서 말하는 상상력이라는 것은 이러한 자연스러운 것들을 전제하는 것일지, 혹은 자연스럽다고 도저히 말하고 싶지 않은 나쁜 것들 안에서 해볼 수 있는 것들을 전제하는 것일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일반적인 문화예술교육사업을 예로 든다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수 없고, 재료는 정해진 문구점에서만 일주일 전에 구입할 수 있고, 새로 세팅된 정산 시스템을 마스터해야하고, 교육 공간을 바꾸려면 서너 개의 서류와 승인이 필요하고, 보조강사의 인원은 부족하고, 강사나 기획자의 인건비는 10년 째 거의 오르지 않고, 그럼에도 진행하는 활동 안에서 참여자의 일부는 낮은 자존감 때문에 그 활동에 집중하기 힘들고, 몇몇 참여자는 자유로운 활동에 오히려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 때,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그 자체의 상태(condition)’로 두고 그것을 최대한 끌어안거나 건드리거나 혹은 그것과 부딪힐 수 있는 상상을 시도하고 있을까.

혹은 현실의 요소나 참여자의 상황을, 예술가의 주제가 다채롭게 펼쳐지지 못하게 만드는 나쁜 조건들로 상정해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할 수 있는, 혹은 시도해야할 상상을 고민하고 있을까.

문제점이 많다고 여기는 기존의 시스템이 견고해지고 유지되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가를 우리는 들여다보고 있을까. 그것을 문제시하기 전에 존중해보려는 순간은 충분히 있었을까. 누군가가 나름의 방식으로 버티며 지켜내고 있는 현장을, 우리의 상상력과 재미가 작동되기에는 너무 답답하거나 대안적이지 않은 것으로 폄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고민들은 참여자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는데 그 차이를 만드는 기준에 대해 한번 생각해볼 수 있다. 예술가/기획자/예술강사 등으로 불리는 사람을 A라고 칭한다면, A의 창작 주제가 타인에게도 주제화될 수 있는가, 더 구체적으로는 A라는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타인에게도 중요하게 의미화 될 수 있는가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교육이라는 것을 기획하거나 실행하는 A, 과연 자신의 창작 주제를 최우선으로 두지 않고 타인을 만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만약, A의 창작 주제가 최우선이 된다면 교육현장의 여러 요소 중에는 당연히 잘못되거나 느리거나 나쁜 것들의 범위가 넓어질 것이다. 반대로, A가 타인의 이야기나 상황을 부정적인 요소로 두지 않고 그 자체를 어떤 상태로 받아들이며 먼저 귀를 기울인다면 A의 창작 주제는 고민의 일부가 되고 심지어 재검토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본 워크숍에서 염두에 두었던 상상력혹은 그것의 징후는 어떤 범위에서 이루어졌을까. 이것은 참여자들 각자에게 얼마만큼의 의미로 물음을 던지고 있을까.

질문을 좀 바꿔보려 한다. 참여자들이 워크숍 기간 중 가장 오랜 시간 집중하고 언급했던 것은 자신의 창작 주제나 그것의 변주 가능성인가, 혹은 타인과의 연결이나 소통 가능성인가.

예술가는 끊임없이 스스로의 질문과 주제를 찾으며 작업을 한다. 그래서 예술가는 타인이나 사회를 바라보든 혹은 자신을 바라보든 스스로의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작업을 하기도 한다. 혹은 가라앉지 않은 채로 그저 살아내기 위해 작업을 하기도 한다. 그것이 창작이라면 창작에서 교육으로 넘어오는 순간, 예술가는 좀 더 적극적으로 누군가를 만나고, 리드하고, 보듬고, 챙겨야 할 수도 있다. 심지어 타인이 예술가보다 더 마음이 힘들어보여도, 혹은 예술가의 힘든 마음과 반대되는 가치로 행복이 충만해있어도. 그런 상황에서 예술가는 만감이 교차하지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자 노력해야하는 순간도 온다. 예술가가 작품과 1:1로 만나 침묵의 소통을 하는 것이 아니라, 파닥대는 개개인의 감정들과 제한된 시간 안에서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여러 참여자 중 누군가가 너무 마음이 쓰여 예술가 스스로도 가만히 그 사람과 그림을 그리거나 그저 어떤 음악을 듣고 싶어도, 뭐라도 진행을 해야 할 것 같고, 다른 참여자들도 챙겨야하는 것이 교육이다. 마냥 따뜻한 시간을 보낼 수도 없다.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것들을 긴 시간동안 그저 해보는 것이 쉽게 용인되지도 못한다. 모든 교육이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으나 많은 교육이 그러한 상태 안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우리는 부정하기 힘들다.

이렇게 사방으로 빽빽한 감정과 상황들 안에서 예술가는 자신의 창작에 관한 것들을 가지고 본 워크숍에 참여했다. 그 안에는 수년간 리서치하거나 실험하고 있는 작업들과 그것이 결코 담아낼 수 없는 길고 외로운 시간들이 있었다. 그것이 그 예술가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는 그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는 매우 소중할 수 있는 것이 교육 현장에서 타인에게 절대 소중하지 않은 것으로 전달될 수도 있다. 예술가는 이것을 견디거나 인정할 수 있을까. 예술가는 자신의 해석언어가 재미있지만 확고하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얼마나 유연해질 수 있을지가 교육, 혹은 상상의 가능성을 좌우한다. 워크숍에서 한 모더레이터는 그 확고함을 뚝심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혹시 그 뚝심이 타인의 반응이나 참여를 위해 남겨둘 수 있는 자리는 얼마나 있을까.

예술가는 사회적 이슈나 사안에 대해 접근하고 그것을 자신의 작업 소재로 다루기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어떤 사안을 그대로 마주하기보다 가치판단하거나 기존의 가치로 재생산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한 시선이 전제된 상태에서 교육의 언어를 찾게 되면 다양한 생각이나 입장들이(심지어 그것이 작가의 생각과 정반대라고 하더라도) 개입되고 표현되기 힘들다. 예술가는 뚝심도 있어야 하지만 그 뚝심이, 타인이 지향하는 가치와 다를 수도 있음을 언제나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워크숍에서 한 참여자가 수업 중에 내가 어떤 의견을 말하기도 하는데, 내가 과연 그러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위치인가 고민이 된다고 말한 부분도 이러한 맥락과 이어진다.

이렇게 끊임없이 판단을 유보하고 그 근거로 타인과 나와의 위치나 관계를 되짚어보려는 예술가의 태도는, 교육 활동에서 타인과의 공유를 위한 자리를 확보한다. 그리고 그 자리가 커질수록 각기 다른 성격, 가치관, 삶의 역사, 감각이 만나버리는 현장의 소통 가능성도,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는 범위도 커진다. 본 워크숍에서 말하는 상상력의 징후가 예술적 아이디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면, 예술가의 작업을 교육적 방법론화 하는 것 이외의 영역에 어떤 자리가 남겨져 있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예술가의 견고한 작업을 여러 형태로 변형할 수 있는 가능성과, 그 작업이 중요함에도 남겨둘 수 있는 소통의 여지’, 그 사이의 긴장감은 착하거나 아름답기 어렵다. 교육은 혼자만의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장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소통들로 가득해진다. 하지만 이것은 풍성한 상상의 시작점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예술가에게 상상력의 징후가 많을 수 있는 것은, 예술가가 독특한 아이디어가 넘쳐서라기보다는 남들은 쓸모없다고 여기거나 과하다고 여기는 것을 오랜 시간 해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비언어적이고 비합리적이고 좀 이상하기도 한 기운이 가득하다. 미련하고 부질없고 효과적이지 못한 행위와 공정도 넘쳐난다. 그럼에도, 가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본 워크숍은 그것이 교육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는가를 실험해보았다. 교육은 불완전한 정서와 불합리한 제도와 불편한 관계 안에서, 예민하게 흔들리고 있는 사람들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3일간의 워크숍이 끝났고 나를 포함한 참여자들은 다시 누군가를 만나는 현장으로 간다. 그것은 일반적인 문화예술교육사업일 수도 있고, 지역 프로젝트의 단발성 워크숍일 수도 있고, 어떤 기관이 기획해 놓은 주말 프로그램의 일부일 수도 있고, 혹은 친구와 마주 앉은 시간일 수도 있다. 우리는 워크숍 기간 동안 부지런히 논의하고 몸을 움직이고 생각을 환기했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상상하거나 조금 다른 교육을 해볼만하다고 느낄지 모른다. 그렇지만 워크숍에서의 경험들은 다시 어떤 현장에서 제도나 행정의 한계, 누군가의 개입이나 외로움 때문에 무력감으로 변할지 모른다. 그건 얼마나 우리를 또 힘들게 만들까.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교육, 혹은 사람간의 만남이 건강하게 살아있도록 만들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교육이라고 말하는 활동 안에서 선을 넘고 불편하고 부조리한 상상이 시작하도록 부추길 것이다. 이 워크숍은 안전하지는 않더라도 바로 그러한 상상을 응원하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 ) 하는 것은 교육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빈칸에 안전하지 않은 것, 예술가의 창작보다 중요할 수 있는 것, 타인과 함께 해볼 만한 것을 얼마나 여유롭게 상상해서 채워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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