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 불가사의한 힌트들로 나를 채우는 시간

 

2016.10.3.

 

 

 

 “이 놀이의 목적이 뭐죠?”

 아리송한 문장 한 줄이 제시되고 밑도 끝도 없는 수수께끼 놀이가 시작되자, 누군가 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진다.

 “일단 한번 해보시죠.”

 수수께끼를 던진 진행자가 대답한다. 하지만 목표와 방법이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 어떤 놀이에 대해 누군가는 계속해서 불안함, 혹은 의구심을 품는다. ‘비기자는 이런 놀이의 기획과 진행을 자주 해오고 있고 그것의 목적을 묻는 사람들도 자주 만나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위에서 노를 젓는 상황도 아닌데, 그렇게 위험하고 막막한 일이 아니라면 한번 생각의 노를 저어보자고 하고 싶은데, 사람들은 단지 책상에 앉아 질문을 던지는 것에도 불안함, 내지는 불편함을 드러낸다. 그래도, 혹은 그래서, 한 번 해보자고 제안한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를 개발시키는 것에 익숙한 우리가, 같이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불가사의한 놀이, 혹은 무언가에 대해 목적을 확인하기 전에, 그것이 무엇일지 같이 찾아보자고 이야기하고 싶다.

 

 

 

불가사의한 놀이의 흔적

 

 

 

 누군가와 논다는 것은 공동의 경험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공동의 경험은 다른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교육, 노동, 싸움, 연애, 시험, 결혼, 조직생활, 그리고 일상...그러면 이 모든 걸 어떻게 놀 듯이 해볼 수 있을지 고민의 흐름이 옮겨간다. 그리고 누구와, 어디서, 무엇으로 어떻게 놀 지를 상상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의 삶의 태도를 움직이게 한다. 동시에, 소수의 가치가 지배적인 사회 안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방법을 좀 더 유연하게 찾게 한다. 기획된 활동의 놀이, 그 이전에 놀아보려는 태도가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놀이는 몇 가지 가능성을 품게 된다.

 

하나, 누군가의 가치관이 삐져나오고 들통나고 확인되게 한다.

, 누군가가 게으름을 피우고 방관하고 묻어갈 수 있게 한다.

, 누군가의 역사가 떠오르고 발산되고 섞일 수 있게 한다.

, 누군가가 스스로를 발견하고 부끄러워하고 궁금해 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다섯,

 

놀이/놀아보려는 태도는 (    )/(    )/를 지배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비기자는 이 문장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들을 몇 가지 제시한다. 우리의 생각대로 선을 그어보자. 이 놀이에 규칙이 없다고 전제할 때, 우린 어떻게 선을 그어 생각을 이어볼 수 있을까.

 

 

사회가

 

경험한 것을

관념이

나를

가득한 것이

개인을

당연한 것이

즉흥적인 것을

분명한 것이

현실을

경계가

느슨한 것을

선입견이

사람을

학습된 것이

새로운 것을

알려진 것이

궁금한 것을

익숙한 것이

살아있는 것을

타인이

삶을

계획된 것이

현장을

진리가

불가사의한 것을

(    )/

(    )/

(    )/

(    )/

(    )/

(    )/

 

 

혹시 이 놀이에 힌트가 필요하다면 아래 글을 첨부한다.

2010년 여름, 비기자는 재래시장에서 먹고 자는 어린이 문화예술캠프를 진행하였다. 문화예술교육, 예술프로젝트, 혹은 지역프로그램의 형태로 이 캠프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캠프에서 만난 한 아이의 세레모니는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놀아보려는 태도에 대한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회색티! 너 싸움 잘해?"

초등학생들과의 시장여름캠프 2기가 시작되었다. 재래시장에서 열리고 있는 이 캠프 프로그램은 공공예술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나는 공동 기획자이자자 진행 강사로 참여하고 있다. 이번 캠프는 참가자 10명 중 8명이 남학생이라서 그런지 초반부터 기싸움이 만만치 않다. 새벽까지 잠도 안자고 시답잖은 농담을 뱉어내는 꼬맹이들이 상대의 싸움 수준을 견제하며 눈빛을 교환하고 있는 사이 하루 종일 그 녀석들에게 잔소리를 하느라 지친 나는 눈을 감고 그 현장을 듣는다. 하루 만에 힘의 우두머리로 확인된 한 녀석이 노래도 잘하고 아는 것도 많은 또 다른 녀석에게 이름 대신 "회색티"라는 호칭으로 기선 제압을 시도한다. 하지만 회색티는 "그걸 지금 왜 묻는데?!" 역시 똑똑하게 질문의 정당성을 되묻는다.

", 브릿지 맨! 놀지 말고 너도 청소해."

다음날, 힘의 우두머리가 이번엔 같은 조 동생을 가르친다. 머리에 듬성듬성 브릿지를 넣은 3학년 꼬맹이는 그렇게 23일간 형아들의 '브릿지맨'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한 명, 언젠가부터 우두머리 옆에 붙어 브릿지맨을 더 큰 소리로 부르는 동갑내기 꼬맹이가 있다. 하얀 피부와 귀여운 눈매를 가진 도련님 포스의 아이다. 첫째날 저녁 식사 때 앞니가 튀어나온 브릿지맨이 형들에게 재미있는 얘기를 너무 열심히 하느라 씹고 있던 밥풀 하나를 도련님 밥그릇에 튀기고 말았는데 그 순간부터 브릿지맨을 부르는 형들의 목소리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안경을 코 중간까지 내려 걸치고 멍하게 앞니를 드러내고 있는 브릿지맨은 그렇게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잃었다.

회색티과 브릿지맨은 사촌 사이다. 회색티는 캠프 첫날 민요를 배우는 시간에 몸을 꼬며 고통스러워하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꾸부정한 등에 힘을 주고 독창을 선보이던 아이다. 똘똘한 손자를 흐믓하게 바라보는 듯한 민요 선생님께 회색티는 예전에 일본 합창단과 함께 공연을 했다고 자랑을 하기도 했다. 이어서 학교에서 배운 "늴리리아"를 걸쭉하게 뽑아내며 선생님의 칭찬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어떻게 저럴 수 있나 하는 눈빛으로 회색티의 무대를 바라보던 우두머리와 도련님은 분위기가 썰렁해졌다며 돋지도 않은 닭살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회색티는 누가 봐도 노래를 잘 불렀고 심지어 그림그리기 시간에 용도 빼어나게 잘 그렸다.

그렇게 회색티는 부지런히 자신을 드러냈고 그 방식과 결과가 너무나 당당하여 다른 이들이 호불호를 떠나 그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브릿지맨은 브릿지 외에는 튈만한 무언가가 없는 아이였다. 설상가상으로 캠프 둘째 날 목까지 쉬어 선생님들도 브릿지맨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게 되었다. 우두머리, 도련님, 브릿지맨으로 구성된 1조는 언젠가부터 2:1로 나뉘게 되었고 외로운 브릿지맨은 "찬물도 위아래가 있지, 비켜!" 5센티 더 큰 형들의 말에 편한 의자도 내주어야 했다.

캠프 중반부터는 우두머리와 도련님이 여학생 두 명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게 되었다. 자기표현이 확실하고 농담도 잘하며 주어진 과제까지 성실하게 해내는 우두머리와 무엇보다 곱상한 외모를 가진 도련님은 그녀들의 질문에 일일이 응답해주곤 했다. 이상형을 말해보라는 한 여자애의 간단한 주문에도 도련님은 "머리 한 쪽에 젤을 바르고 반대쪽으로 이렇게 넘긴 게 좋아, , 그리고 머리카락은 연한 노란색이어야 해." 참 구체적으로 대답해줬다. 어제 처음으로 만난 남학생의 이상형이 뭐 그리 중요한지 질문을 한 여학생은 자신의 수첩에 그 헤어스타일을 받아쓰기하듯 그려 넣었다.

그렇게 꼬맹이들은 불과 며칠 만에 서열을 결정하고 그룹을 조성했으며 동맹을 맺기도 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우두머리 그룹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서너 명의 아이들과 일찌감치 우두머리에게 무시되었음에도 그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부단히 노력하는 한 긍정적인 아이가 그 세계의 구조를 더욱 공고히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 유일하게 초인의 마음을 지닌 한 녀석이 있었으니 살짝 올라간 눈꼬리와 아이답지 않은 다크써클로 '저승사자'라는 별명을 갖게 된 남학생이었다. 다른 아이들 같으면 그 별명을 부정하며 씩씩댈 법도 한데 이 녀석은 건빵 같은 표정으로 그 호칭을 소화시켰다. 게다가 좋은 재료, 재미있는 과제를 먼저 선택하려고 기를 쓰는 아이들 사이에서 "뭘 그러냐~ 그냥 즐겨." 흘러가는 대로 두둥실 캠프를 만끽하기도 했고 심지어 "여유를 가지세요, 선생님." 나에게 한마디 툭 던지기도 했다. "너는 뭐하는 걸 제일 좋아하니?" 내 질문에, "추리하는 거요."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 가장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런저런 게임에서 상대를 이기려고 분주히 움직이는 아이들 뒤에서 두 팔을 하늘로 쭉 펴고 "기쁨의 세레모니!"라고 외치며 만화 주인공 같은 표정을 짓는 행동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세레모니가 누구에게도 득을 주거나 해를 입히지 않을 뿐 아니라 주변상황과 완전히 동떨어진 맥락에서 이루어져서인지 시장 한 복판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포즈를 취하는 저승사자에게 사람들은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회색티의 노래가 우두머리의 닭살을 자극하고 브짓지맨의 밥풀이 도련님의 밥그릇으로 골인하는 동안 저승사자 한 마리가 부지런히 세레모니를 날리며 그렇게 자신의 시간을 채워나갔다. 짜임새 있게 유쾌한 캠프를 마련하고 싶었던 나는 아이들과 허허 웃으면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지만 그 저승사자 덕에 이따금 픽 하고 숨을 고를 수가 있었다. 이유도 목적도 알 수 없는 그 세레모니는 예민한 세상 사이에서 그렇게 혼자 춤을 추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삶은, 뚜렷한 목적 대신 무수한 힌트를 품고 우리에게 온다. 내가 모르는 사건들로, 사람들로, 감정들로, 공격으로, 혹은 선물로. 그것을 발견하고 함께 놀아보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가 필요할까. 새로운 미션을 해결하는 능력,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대처하는 자세, 조직과 사회 속에서 어울리는 기술, 미래를 계획대로 개척해나가는 능력과는 다른 어떤.

 그리고 이것을 잘 해낸다는 것은 어떤 형태, 혹은 상태일까. 어쩌면 놀아보는 것은, 잘하지 않아도 된다는 전제를 갖을지 모른다. ‘잘 해내기라는 목적 이전에 일단 해보기라는 움직임을 바탕으로 우리는 놀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놀이는 잘 묻고 잘 대답하고 잘 해결하기 전에, 일단 물어보고 일단 표현해보고 일단 해보는 것으로 스스로를 무언가로부터 해방시키기 때문이다. 마치 의미를 알 수 없으나 활짝 자신을 펼쳐보는 저승사자의 세레모니처럼.

 해내야 하는 것으로 전제되었던 프로그램 혹은 인간관계 안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그 움직임은 신기하게도 긴장되어있던 주변을 유연하게 해주었다. 그것은 기존의 것들을 부수거나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장난스럽게 툭 건드리는 정도였는데, 그것은 정말 놀아보려는 태도에 대한 분명한 힌트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타인이나 그의 의견을 이김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그건 그거대로, 나는 나대로 이렇게 활짝! 혹은 툭! 일단 해본다는 존중과 의지가 담겨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싸우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있는 그대로 놀아보는 태도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잘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내가 마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설마 이것을 해도 될까싶은 바로 그것을 해보는 것. 잘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향해 몸을 움직여 보는 것. 불가사의하고 목적 없는 것에 궁금함을 가지는 것. 툭 건드려 보는 것. 교육, 예술, 학습, 인간관계, 심지어 삶도 잘 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제되어 있는 세계, 혹은 우리를 향해 이제 다시 한 문장의 놀이를 던진다.

 

놀이/놀아보려는 태도는 ( )/( )/를 지배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아마도 이 놀이가 강조하려는 것은 놀이자체가 아니라 내 스스로 채워내야 하는 빈 칸, 혹은 그것의 무한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주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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