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비기자>의 최근 활동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글입니다.

 

 

견고한 이름의 곁을 맴도는

 

 

 

우주에서 날아온 보따리

라고 하니 조금 궁금하지 않나요?

차별’, ‘인권’, ‘사회문제’, ‘환경’, ‘인문학이라는 이름보다 더 말입니다.

 

지난 해 <비기자>는 여러 예술가들과 함께 우주보따리라는 공연을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 무엇보다 차별’, ‘인권’, ‘사회문제’, ‘환경’, ‘인문학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의 다른 이름을 붙여보았습니다. ‘우주’, 혹은 우주보따리라고요. 왜 그랬을까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직설적으로 해도 전달이 될까 말까 하는데 말입니다.

이전에는 차별’, ‘인권’, ‘사회문제’, ‘환경’,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외치며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움찔움찔 놀라기도 하고 헛웃음을 보이며 뒷걸음을 치기도 했습니다. 그건 우리의 관심사 혹은 문제아니라며 말입니다.

그래서 말걸기의 방식을 여러모로 고민해보았습니다. 같이 놀기, 먹기, 움직이기 등의 방식으로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같이할 그 무언가를 어쨌든 소개하고 제안해야했습니다. 그때마다 원래 우리가 부르던 차별’, ‘인권’, ‘사회문제’, ‘환경’, ‘인문학같은 이름을 슬며시 빼고 다른 말들을 선택하거나 그것을 상상하게 할 짓거리들을 해봤습니다. 그래서 우주가 등장하기도 했고 다른 활동들도 여러 표현들로 소개되었습니다. 청년들의 복지를 말하기 위해 상상캠퍼스에 흥 오르니 짓거리가 절로 난다라는 긴 이름을 가져오기도 하고 미세먼지 문제를 말하기 위해 숨정화기라는 이상한 말을 지어내기도 했습니다. 스펙만 강조하는 세상에 대해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고자 짓거리 투어라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고 견고한 예술의 아우라를 깨기 위해 모여서 비기자라는 연말맞춤형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습니다.

 

 

 

'우주보따리' 공연 현장. 공연장에 설치되어있던 그림 중에는 비장애인 예술가의 작품과 장애인 초,중학생의 작품이 섞여 있었습니다.

어떤 것을 예술작품으로 볼지, 혹은 그림마다의 다른점을 얼마나 부각시켜 볼지는 관객의 몫이었으며 공연에서는 이러한 부분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사진_우에타 지로)

 

 

하지만 기존의 이름들을 대신하는 그 표현들은 우리의 고민을 함께 나누기 위한 말걸기의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 낯선 표현들을 의미적으로 채울 수 있는 짓거리들을 상상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이미 우리 삶에서 지속되고 있으나 일반적인 이름이나 의미를 찾지 못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어떤 활동 혹은 행위였습니다. <비기자>가 그것을 어떤 표현으로 불러봤던 것은 그것을 보다 일상적인 인식의 차원으로 소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행위들은 자체로 이미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차별’, ‘인권’, ‘사회문제’, ‘환경’, ‘인문학이라 부르는 것들은 그 견고한 이름의 테두리 때문에 우리의 일상과 가까워지기 힘들고, 낯선 행위들은 모호한 이름도 갖추기 힘들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과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며, <비기자>는 후자의 그것을 잠시 사윳이라고 이름 붙여 이 글에서나마 불러보려 합니다.

 

당신이 알고 있거나 하고 있는 사윳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왜 더 익숙하거나 대중적인 이름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은 사윳이 무엇일지 전혀 상상되지 않습니까?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비기자>는 올해도 원래 하고 있던 사윳에 이런 저런 이름 혹은 표현을 붙여 그것의 가치나 재미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윳을 표현하는 방식이 기획이자 창작이라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잊지 않고 싶습니다. 그것은 사윳이 각자의 힘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순간들입니다. 미련하고 느리고 비효율적이고 애매하고 쓸모를 알 수 없는 그 순간들 말입니다. <비기자>는 획기적인 사윳을 위해 그 순간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지양합니다. 그보다는 스스로의 가치를 만들어나가고 있는 기존의 사윳을 찾고 응원하고, 좀 더 오지랖을 떨어서 널리 퍼트리기도 하며 활동을 지속하고 싶습니다.

 

당신에게는 사윳이 있습니까?”

그것이 정확히 뭐냐고 다시 묻고 싶으시다면, 그 질문은 스스로에게 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기자>는 고작 그동안 봐왔던 것들에 사윳이라는 임시적 이름을 붙이는 정도로 대답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힌트를 드리자면, 반대적 질문을 던져볼 수는 있을 것 같군요.

 

당신에게는 사윳이 없습니까?”

이 질문은, 왜 당신의 삶이 모두 정확한 이름과 표현들로만 구성되어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그 이름들은 스스로 지은 것이 아닌 경우가 더 많은데 말입니다. 타인이나 사회가 일컫는 이름 안에서만 당신의 삶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그건 스스로에게 힘이 나는 일일지 궁금합니다.

 

 

2018.2.24.

 

창작그룹 <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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