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원고는 서울문화재단의 '잠실창작스튜디오 전문가 매칭 프로그램' 사전 간담회를 위한 발제문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잠실창작스튜디오에서 바라본 하늘

 

흔들리는 언어를 쌓아 올리는 일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다른 이름을 향하는 질문

 

‘장애예술’이라고 범주화된 개념 자체를 해체하거나 다른 개념으로 재정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강력한 정책용어와 사업명들이 매 순간 작동하고 있으며 에이블아트, 포용적예술, 아르브뤼, 아웃사이더 아트 등의 이름들은 시대에 따라 국내의 상황을 담지 못한채 재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양성이 마련되어야 할 예술 영역에서 ‘장애예술’을 ‘장애예술’로만 도저히 호명할 수 없게 만드는 이유과 사례, 구체적 언어를 만드는 것이다. 비평은 그 지점에서 필요하다. 새로운 이름의 등장이나 명명보다는, 존재했으나 인식되지 않았던 관점의 드러냄과 확장된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한 측면에서 최근 정책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포용적 예술inclusive art’에 대한 비판적 관점도 필요하다. 누가/무엇이 누구를/무엇을 포용/포함한다는 전제에 대한 질문도 요구된다. 이 용어를 대표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영국에서의 장애 창작자에 대한 인식과 국내의 그것이 갖는 교차지점이 과연 넓은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복잡함의 화면

 

국내 장애인이 삶 안에서 경험하거나 마주해야 하는 교육, 복지, 문화 관련 이슈, 혹은 문제는 당연한 말이지만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래서 예술 이외의 영역에서 그것은 ‘복잡함’ 자체로 문제시되거나 장애운동에서 제거의 대상으로 놓인다. 그래서 장애와 관련한 사회적 논의는 차별, 철폐, 가난, 부양, 의무, 책임, 보호, 인권 등으로 이어지곤 한다. 이것은 장애인의 인간다운 삶과 관련성이 높기에 현실적으로 매우 중요한 논의 안에 있다. 그러나 예술 영역에서는 그 ‘복잡함’을 복잡함 자체, 사회적 문제의 드러냄으로만 마주하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예술교육의 기회를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얻을 수 없었던 장애 예술인의 작품은 교육적 차별을 드러내는 근거자료가 아니라 교육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표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서 장애 예술인도, 협력자, 지원기관, 보호자(가족)인 비장애인도 예술적 해석보다 앞서는 사회구조적 문제, 개인의 경험이나 감정에 더욱 집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범하게 함께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든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비장애인은 주로 배려, 보호의 대상으로 인식되어온 장애인에 대한 스스로의 관점도 성찰해야 하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자연스러울 정도로 분리시켜온 사회구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또한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예술 영역에서 집중할 수 있는 표현의 이유/이면, 표현된 표면, 그 표현이 의도하지 않았으나 드러내는 무언가를 향해 멘토링과 비평이 역할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멘토링과 비평이, 장애 예술인에게 따뜻한 다독임이 되지 않을 수 있으며, 장애인이 사용하는 재료와 표현언어에 대한 비장애인의 호기심1)을 넘어설 수 있다. 동시에 차가울 정도의 정확함(명료한 해석이 아닌 멘토, 비평가로서의 역할에의 충실함)이 서로의 활동 지속을 위해 필요할 수 있다.

 

 

감각과 장애특성을 가로지르는 개별성

 

한편, 장애 예술인의 창작과정이나 결과물이 신체적 감각을 중심으로만 해석되거나 비평되는 것은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 역시 비장애인 중심의 사고라고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시각장애인에게 있어서 잘 보지 못함, 볼 수 없음, 혹은 다르게 볼 수 있음이 창작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제, 청각장애인에게 있어서 잘 듣지 못함, 들을 수 없음, 혹은 다르게 들을 수 있음이 창작의 출발점일 것이라는 전제 등이 그러하다. 이것은 특정 장애유형이나 특성이 작품을 구성하는 대표적이거나 핵심적인 요소일 것이라고 보는 것인데 이것은 장애인이라는 존재를 장애 자체와 동일시하는 것과 비슷하다. 또한 복합장애나 넓은 장애 스팩트럼 등을 고려했을 때에도 장애특성을 중심으로 창작을 바라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 물론 장애특성이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창작자 스스로도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장애특성, 그것과 쉽게 연결되는 신체적 감각을 중심에 둔 접근은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는 개별성, 개별적 삶이나 표현에 대한 촘촘한 층위들을 놓치게 만들기도 한다. 또한 매우 현실적으로, 유사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장애인간에도 소득수준, 사회적 지위, 생활환경, 교육수준 등에 따른 삶의 차이가 존재한다. 특히 장애 예술인에 대한 비평의 언어들이 자칫 장애유형별 작품 특성 및 분석으로 재생산될 수 있음2)을 고려할 때, 2020년을 살아가고 있는 존재로서의 창작자의 그 무언가를 개별화된 언어들로 살피는 과정이 필요하다.

 

 

각자의 흔들림으로부터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2007년부터 장애인과의 창작활동을 여러 현장에서 해왔다. 그러나 나의 관점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다. 비장애인 중심으로 당연하게 설계되거나 인식되었던 사회, 예술, 창작, 개념의 전반을 성찰하거나 재배치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의 작업실에 앉아 다음 전시를 준비하는 장애 예술인을 볼 때마다 오래전 특수학교에서 만났던 중증장애인이나 부모가 없는 장애아동을 떠올리며 예술에 대한 논의 이전에 인간의 삶에 대한 우울한 환기를 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더욱 내가 그 과정에서 정확해야만 하는 순간을 만나기도 한다. 내가, 혹은 내 관점이 흔들리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매 순간 (멘토링이든, 기획이든, 해석이든) 정확할 필요성이 동시에 마련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흔들릴 필요 없는 분명함을 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가 장애, 장애인, 장애예술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만이 아니라 평범성, 일반성으로 범주화된 영역에서 오랫동안 사고하고 학습해왔기 때문이다. 그 영역을 만들고 범주화해온 언어들로부터 벗어나는 시도는 우리를 충분히 흔들어 놓는다. 그리고 (별로 논리적이지는 못하지만) 오히려 흔들리는 개인들이 장애예술과 관련한 언어를 마련하는 데에 장기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장애인 중심의) 기존 언어나 인식의 흐름으로부터 예속화되지 않으려는 움직임은 그 자체로 우리를 흔들 수 있는데 그것을 계속 마주하는 과정 자체가 장애예술에 대한 질문을 만드는 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애예술과 관련하여 정책은 흔들림 없는 새로운 이름과 비젼 정도를 원하지만 현장3)에는 확장된 담론과 흔들리는 언어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언어들은 소수의 재능인으로서의 장애 예술인의 사회참여에만 기여하지 않아야 한다.4) 동시에 그 언어들이 장애예술 관련 사회적 성과나 의미를 작동시키는 간편한 장치가 될 수도 있다는 것도 재고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복잡함의 표면을 미련하게 읽어내고 지지하는 시도가 필요하다. 공든 탑은 계속 무너진다. 비장애인이든 장애인이든 우리의 삶과 창작은 그러하다. 그렇기에 튼튼한 탑을 쌓는 대신, 흔들리는 탑의 나약함을 받아들이는 다른 출발이 필요하다.

 

 

 

1) 호기심이 생길 때는 다른 나라의 장애 예술인의 창작물을 살펴볼 필요도 있다. 한편으로 국가, 지역과 상관없이 비슷한 양상이나 표현기법이 발견되기도 한다.

(참고 : http://a-yamanami.jp)

 

2) 특히 이번 전문가 매칭 프로그램은 잠실창작스튜디오의 기획 사업으로 외부에 소개, 공유된다는 점에서 장애예술 관련 현장에 강력한 레퍼런스로 작용할 수 있다.

 

3) 창작활동을 지속하고자 하는 장애인과 그 가족의 일상, 장애 관련 창작 및 기획활동의 시도, 장애 예술인을 지원하는 기관의 사업들, 장애예술 관련 사례를 통해 사회를 재해석하고자 하는 개별화된 시도 등

 

4) "장애 예술인이 ‘창작이 활성화 되는 상태’를 작품발표의 기회 확대 및 전업예술가로서의 자리매김으로만 해석하지 않아야 창작의 지속을 위한 환경과 역량을 스스로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다. 장애인에 대한 기본적인 복지제도가 안정화되어있지 않아 장애 예술인의 생계유지 및 사회참여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는 더욱 ‘창작’ 자체, 혹은 ‘창작이 활성화되는 상태’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들이 장애 예술인과 비장애 예술인의 예술활동 안에서 문제의식으로 작동되고 가시화될 때 장애예술의 의미도 국내 상황과 부합되는 독창적인 맥락으로 나아갈 수 있다.” (주윤정 외, 2018, “장애예술인 창작 활성화 프로그램 개발연구”,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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