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2020년 지역특성화지원사업 <발달장애 보호자를 위한 문화예술워크숍 ‘갈치살롱’> 연구모임의 결과물로 작성되었습니다.)

 

 

 

장애인 자녀의 ‘예술하기’가 앞서나가기 전에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대표

 

 

1. 나의 부모는 나의 ‘예술하기’를 사실상 반대하는데

 

그런데 장애인의 부모는 왜 자녀의 ‘예술하기’를 응원하는 경우가 더 많을까. 이것이 나의 솔직한 질문이다. 예술은 멋지고 환상적인 말이지만 현실에서는 발 디딜 곳 없는 붕 뜬 무엇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예술하기’ 그 자체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데에 어려움이 생길 때도 많다. 그래서 예술인 관련 복지제도나 지원제도의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현장에서 이어지고 있고 불안정한 생계 때문에 창작활동을 그만두는 사람들도 많다. 이것은 인간의 ‘예술하기’가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지속되는 것의 한계 및 어려움을 보여준다. 그런데, (모두는 아니지만) 장애인의 부모는 왜 자녀의 ‘예술하기’를 응원하고 있을까. 하루라도 더 자녀를 취업 프로그램에 참여시키는 것이 시대적 흐름에 맞을 텐데 말이다. 바로 이 순간, 꼭 그렇게 무언가를 생산하거나 돈을 벌기 위해서만 자녀가 예술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답변이 돌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그 외에 어떤 의미에 동의하는 것일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에 동의하느냐와 다르다. 추후 자녀의 ‘예술하기’가 어떤 가치나 상태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는 의미다. 비효율적이거나 미련하게 ‘가능성’보다 ‘의미’를 우선적으로 생각해보는 것이 예술일 수 있기 때문이다.

 

2.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예술하기’의 형태는 어떤 모습으로 전제되는가

 

그 ‘의미’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술하기’가 무엇일 수 있을지 논의가 필요하다. 무엇을 하는 것이 ‘예술하기’로 전제되는가. 그림 그리기? 악기 연주하기? 도자기 만들기? 소설이나 시 쓰기? 무대 위에서 연기하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예술하기’의 형태들 외에 생각해볼 수 있는 상태나 상황, 행위는 무엇이 있을까. 이와 관련한 논의가 풍성하게 이루어져야 그것을 통해 ‘예술하기’의 ‘의미’를 이야기나눌 수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장애인, 장애인 부모, 그리고 장애인의 ‘예술하기’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예술하기’의 다양한 양상을 얼마나 전제하고 있는지, 그 다양성 안에 존재하는 관점의 차이를 얼마나 인정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조금 다르게 질문을 해보고자 한다.

 

3. 만약 나의 자녀가 똥이나 오줌을 10년 넘게 정성스럽게 그리고 만든다면?

 

이것은 ‘예술하기’가 될 수 있을까? 조금 더 나아가 자녀의 탐구 및 실천이 일상화, 구체화되면서 자녀가 자주 똥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오줌 색깔이 잘 나타나는 물감 섞기를 실험하며 이와 관련한 대화를 주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시도한다면 그것 자체도 ‘예술하기’가 될 수 있을까? 이때 가장 중요한 전제는, 이러한 행위가 자본이나 사회적 기회를 생산해내지 못하고 있을 때라는 것이다. 이것은 극단적인 예시 같지만 모든 인간이 아름답거나 깨끗하거나 따뜻한 것에만 집중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매우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예술하기’의 일부로 충분히 언급 가능하다.

여기에서 묻고 싶은 것은 ‘예술하기’를 정의하는 것에 있어서, ‘그래도 이래야 한다’ 혹은 ‘적어도 이것은 안 했으면 좋겠다’는 어떤 시선의 개입 가능성이다. 우리는 이러한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채로 (장애 여부를 떠나) 누군가의 ‘예술하기’를 바라보고 그것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런데 더러운 오물 덩어리에 대한 것이 아니더라도 죽음, 폭력, 혐오, 소외, 차별, 가난, 파괴, 공포 등과 관련한 무겁거나 우울하거나 반갑지 않은 이야기는 예술 안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다뤄지고 있다. 또한 이것을 예술적으로 구체화하는 방식도 익숙하지 않거나 해석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술하기’에 대한 내용적, 과정적, 행위적, 정서적 관점은 다양해질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예술하기’와 낯설거나 버거운 ‘예술하기’가 동등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예술하기’의 의미가 사회적 의미 외에 비사회적 의미, 비효율성의 의미, 무거움의 의미, 해석되기 어려움의 의미 등으로 확장될 수 있고 그 안에서 (장애 여부를 떠나) 다양한 존재가 자기표현의 자리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자녀의 어떤 표현행위 혹은 ‘예술하기’는 부모의 동의나 긍정을 기다리는 수동적 위치에서, 질문을 주고받을 수 있는 능동적 위치로 옮겨갈 수 있다.

 

4. 능동적* 위치가 전제된 상호적 질문

*능동적 : 더불어 능동적이라는 표현이 갖는 여러 한계와 더 넓어져야 할 의미를 강조하고 싶다. 누군가는 능동적인 상태를 갖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매우 적극적이거나 활발한 상태로서의 능동적태도만 전제될 경우 그 범위에 들어오기 어려운 사람도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특히 장애인의 경우, 자신의 욕구가 있는 상태, 그것을 작은 눈빛이나 신체 근육의 일부로 전달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상태 등도 능동적인 상태 안에 포함될 필요가 있다.

 

자녀와 부모의 대화가 궁금함으로 시작되기를 바란다. 자녀의 질문이 “나의 부모는 나에게 무엇이 궁금할까?”이기를. 부모의 질문이 “나의 자녀는 왜 그것을 할까?”이기를.

그런데 부모가 “나의 자녀는 왜 그것을 할까?”하고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그 과정도 지난할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이 급해진다. 자녀의 ‘예술하기’를 지지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그렸던 미래의 상(狀)과 점점 멀어지는 게 아닌가 불안해지기도 한다. ‘예술하기’의 다양한 형태와 찰나를 인정해버리면 ‘예술을 함으로써 사회와 오히려 멀어질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도무지 어디로 가야 할지, 혹은 다시 반대로 갈 수는 있을지 걱정도 앞선다.

 

5. 이제, 장애인 부모는 앞으로의 자녀의 삶을 어떻게 그려볼 수 있을까?

 

다급함과 불안함, 모호함이 주변을 감쌀 때 이제야 ‘예술하기’의 본모습이 우리 곁에 왔다고 나는 이야기하고 싶다. 그것이 나의 부모가 나의 ‘예술하기’를 사실상 반대하는 이유라고도 말할 수 있다. 자, 그럼 이제, 장애인 부모는 앞으로의 자녀의 삶을 ‘예술하기’와 같이 어떻게 그려볼 것인가. 이 질문은 “장애인이 ‘예술하기’를 통해 미래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아니다. ‘예술하기’는 장애인의 삶 혹은 생활이나 생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으며 혹은 낯설거나 불편한 영향만 미칠 수 있다. 또는 다수가 바라는 것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장애인의 삶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그래서 질문이 다르게 필요하다. “장애인의 삶을 ‘예술하기’와 같이 어떻게 그려볼 것인가”. 역시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하기’에 대한, 그리고 자녀의 삶에 대한 다양한 상(狀)이다. 솔직해져야 하는 순간이다. 그 상(狀)은 자녀의 상(狀)과 비슷한가. 달라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기다렸다는 듯이 현실의 문제들, 안정적이어야 할 미래가 언급될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예술하기’는 그것과 거리가 있는 경우가 오히려 많다. 그래서 더욱 솔직해져야 하는 것이다. 혹은 더욱 냉정해지면서도 치열해져야 하거나.

 

6. 처음으로 돌아가

 

사실 나는 ‘예술하기’를 하고 있다. 단지 나의 부모가 궁금해하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나는 모호한 생각들을 종이에 적고 팔리지 않는 노래를 만들고 흩어져버리는 전시나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나의 활동은 종종 동시대 문화예술 관계자에게도 ‘예술하기’로 해석된다. 그러나 그뿐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나도 그뿐이면 충분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모두 나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와 다른 사람만이 ‘예술하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듯 우리는 ‘예술하기’를 제각각 다르게 전제하거나 상상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점이나 문제는 아니다. 이것은 정의하거나 유형화할 수 없다는 예술의 큰 특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특히 장애인의 ‘예술하기’ 혹은 창작활동은 분명하게 유형화되거나 타인에 의해 정의되곤 한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근대적인 예술가의 상(狀)이 존재한다. (나의 부모가 휴대폰에 나를 ‘피카소’로 저장해두었듯이 말이다.) 개인의 고유성을 바탕으로 자기표현에 몰두하며 이따금 작품 발표회를 통해 결과를 사회적으로 드러내고 인정받는. 그러다 어떤 결과물이 자본의 가치로 환원이 되기도 하고 그러한 일련의 과정이 성사되면 누군가는 그 사람을 ‘예술가’로 부를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동시대 예술가의 삶, 활동방식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는 점에서 장애인의 ‘예술하기’가 몇 가지 유형으로만 전제되는 것에는 관점의 한계가 있다.

또한 부모 개개인별로 전제하는 자녀의 창작활동과 이를 통한 궁극적 삶의 상(狀)이 각기 다름에도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 뜨거운 논의로 이어지는 일은 많지 않다. 예술이나 창작 등이 갖는 모호함에 대해 폭넓은 대화를 하기에는 각자의 경험과 인식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각자의 상(狀)이 적당히 비슷할 것이라는 추측과 기대는 지속되는데 현실 속 대화와 선택들 안에서 그 관점들은 보기 좋게 서로를 빗겨나가곤 한다. 그 엇갈림의 이유, 그리고 엇갈림에도 같이 가기 위한 태도에 대해 부모들과의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엇갈리지 않는 하나의 상(狀)을 도출해내는 것이 대화의 목적은 아니다.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를 인정하면, 언젠가 만나기를 바라는 대신 만나지 못함 사이의 거리가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거리를 만들어낸 각자의 이유, 관계의 이유를 들여다보려고 하면 (서로에게 바라던) 존중이 조금씩 가능할 수 있다.

 

7. 그래서, 부모들 간의 거리를 인정한다면

 

서로에게 요구되어야 할 것은 변화가 아니라 공감일 수 있다. 장애인 자녀를 낳고 키워온 부모의 삶이 모두 슬프고 고되게 해석될 필요는 없으나 사회와 가정 안에서 타인이 장애인과 그 가족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장애인의 부모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개인 이전에 장애인의 보호자로서 호명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렇게 10년, 20년 시간이 쌓이고 생활이 이어지고 감정도 생기고 난 이후의 부모에게 이제 자녀의 ‘예술하기’에 대한 동시대적 관점을 익히고 열린 태도와 평안한 마음을 유지하라고 하는 것은 너무 일방적인 태도다. 부모들 간에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장애인의 부모’이기만 한 채로 비슷하게 살아온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더 넉넉하게 살았고 누군가는 더 정신없이 살았고 누군가는 오로지 버티면서 살았다. 그건 그 자체만으로 공감받아야 하고 그 삶 안에서 생성된 경험과 관점과 지식의 차이도 존중되어야 한다. 이제 한 명씩 말해보자. 자녀의 ‘예술하기’에 대해 부모는 무엇을 전제하고 있는지, 혹은 전제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는지. 각자의 삶에서 가능한 ‘예술하기’가 있을 수 있으므로 우리는 모두 나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외면할 수 없는 오늘로서의 ‘삶’에 낯선 ‘예술하기’까지 더해져 모호한 토론이 시작되기 전에 오늘의 내가 자녀와 함께 살아감에 있어서 어떤 상(狀)을 그리고 있는지 이제 이야기를 나눠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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