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 전문가 매칭 프로그램 중 김기정 작가 비평문

 

 

 

언제나 열릴 수는 없다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대표

 

 

그림을 마주한 사람은 그림이니까, 그림이라서, 그림 안에 무엇이 그려졌는지를 보려고 한다. 이곳에 나무를 그렸구나, 나무들을 채워 넣어 숲을 그렸구나, 숲을 통해 어떤 주제를 표현하려고 했구나 라는 서사적 해석도 시도한다. 그림을 그린 사람을 ‘예술가’ 혹은 ‘작가’로 호명하기 위해서는 서사나 주제, 혹은 그림 속 형상이 너무 단순하거나 평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필요성도 느낀다. 회화를 다르게 인식하고자 하는 의지보다 회화를 회화답게 인식해야 할 필요성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또한 독특한 표현기법은 주제를 뒷받침해주는 적절한 요소로 배치되기를 바란다. 주제보다 표현기법이 두드러진 작품의 경우, 창작자가 ‘할 말’을 치열하게 찾는 대신 화려한 표현기술을 보여주려 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야기나 주제를 보여주는 화면으로서의 그림 혹은 회화. 창작자에게 “무엇을 그렸는지”, “왜 그렸는지”를 주로 묻게 될 때 전제되는 관점. 그 안에는, 그림 속 맥락과 의미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 그런 기대 혹은 전제를 안고 김기정 작가의 작품을 보면 질문이 많아진다. 나무나 꽃, 동물, 풍경 등 매우 구체적인 형상들이 화면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작품은 일반적인 ‘그림’의 요소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 어떤 주제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왜 그렸는지 작가에게 질문하게 된다. 그런데 한편으로 그림에서 점점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려낸 이미지가 아니라 무언가를 그려내는 표현방식이다. 새의 깃털 사이로 보이는 겹겹이 쌓인 붓 자국, 손톱만 한 꽃잎을 여러 색으로 쪼개어 채워 넣은 흔적, 한 가지 색을 한 획씩 그어 만들어낸 넓은 하늘. 이것은 효율적인 작품 완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길고 느린 시간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을 기준으로 ‘느린’을 판단할지 주춤하게 된다. 왜냐하면 작업의 속도는 창작자에게 매우 개별적인 방식이나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기정 작가의 작품 위에 드러난 또렷한 형상 대신 켜켜이 쌓인 어떤 속도를 먼저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작품을 보는 방식이 고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채워진 이미지 이전에 이미지를 채우는 속도를 들여다보는 접근도 가능할 것이다.

사실 다르게 보기의 필요성을 말하는 이유는, 필자가 작가를 몇 차례 만나 대화를 나눴던 순간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 많은 대화를 하지 않았다. 작가는 먼저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설명하려 하지 않았고 나는 그것을 듣기 위한 질문을 미리 계획하지 않았다. 마치 작가가, 정해놓은 색깔을 고르는 대신 화면이 흘러가는 대로 다음 붓질을 하듯 각자의 발화 속에서 연결할 문장을 찾아보았다. 그중 흥미로웠던 대화는 작가가 무엇을 왜 그렸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닌, 아예 다른 것이었다.

 

김기정 : 열렸어요. 억지로 강요하지 않아서 마음이 편안하고 좋아졌어요.

최선영 : 그러면 지금은 열린 거예요?

김기정 : 조금 열린 것 같아요.

최선영 : 원래 작가님은 다 말할 수 있었군요. (나는 작가가 말을 많이 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제했었음을 고백했다.)

김기정 : 아무한테나 다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최선영 : 작가의 그림은 열려있나요?

김기정 : 열렸다가 닫혔다가.

최선영 : (스튜디오 안에서) 이 중에 가장 열린 그림은 뭔가요?

김기정 : (작가가 한 그림의 제목을 말한다.)

최선영 : 그럼 이 중에 가장 닫힌 그림은 뭔가요?

김기정 : (작가가 다른 그림의 제목을 말한다.)

 

나의 어떤 질문에 작가는 목적어 없이 ‘열렸어요’라고 답했다. 작가가 목적어를 빼먹은 것인지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나는 그 목적어를 알아내는 대신 무언가가 열렸다고 표현하는 것 자체에 집중했다. 모호할 수 있는 표현을 답변의 맨 앞에 위치시킨 이유를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했다. 열리고 있거나 열린 것, 그것은 한 가지만이 아닐 수 있다. 여러 차원으로 혹은 여러 사람에게 열릴 수 있는 무언가가 작가에게 있고 동시에 닫힐 수 있는 무엇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살피려고 했다. 그리고 “열렸어요”라는 답변 이후 우리의 대화는 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표현의 질문들을 할 수 있었다. 그 질문들은 작가를 만나기 전, 포트폴리오나 전시경력을 참고해서 마련할 수 있었던 질문들이 아니었다.

 

“그림을 그릴 때는 열리나요?”

“이 그림에서 어느 부분이 가장 열렸나요?”

“어떤 일이 생기면 그림을 그릴 때도 닫혀버릴까요?”

“누구에게 가장 열려있나요?”

“열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작가는 질문마다 천천히 공을 들여 답변을 하였다. 그 답변을 여기에 적지 않는 이유는 무엇을 답변했는지보다 그 답변을 하기 위해 작가가 입을 떼는 순간까지의 시간이 더 솔직한 답변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시간은 답변마다 당연히 달랐다. 답변의 속도가 달랐다고도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림이 완성되어가는 속도가 다르듯이 말이다. 나는 묻고 싶었던 마지막 질문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열리고 싶나요?”


이것은 작가의 그림 앞에 선 나를 포함한 누군가에게 남겨져야 할 질문일 수 있었다. ‘작가는 어떻게 열리려고 하는가.’ 현재 내가 ‘예측하는’ 답변은 예쁘거나 아름답거나 안전하게 열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그것을 정말 원하고 있을까. 작품의 표면 뒤로 숨지 않는 작가를 찾아 헤맬 때 애타게 외치는 그 질문을 여기에서도 남겨두었다. 왜냐하면 매 순간 솔직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현재를 드러낼 수 있는 인간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이상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의 작품이 ‘열렸다가 닫혔다가’ 한다고 표현한 작가의 답변이 솔직해 보인다. 그렇다면 김기정 작가만이 아니라 인간은 왜 ‘언제나’ 열리지 않을까, 혹은 왜 이따금 닫힐까. 이러한 질문은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이나 자연물,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화면 속 서사나 주제를 분명하게 알아내는 데에 큰 도움은 되지 않으나 작가가 그 형상들을 선택하여 화면을 채우고 있는 상황을 상상해보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인간에 대한 보편적 질문으로 ‘왜 계속 열리지 않는지’를 생각하다가 점점 김기정이라는 사람에게 집중하게 된다면 말이다.

 

이쯤에서 등장하는 것이 작가의 일상 혹은 삶이다. 작가가 가지고 있는 발달장애라는 요소보다 그 장애를 둘러싸고 있는 시선이나 개입, 혹은 그것과 애써 연관 지을 필요 없는 하루의 일과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작가는 왜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할까” 라는 질문을 “당신은 왜 일상적 관계나 대화를 열려고 하지 않나요?”라고 단정해서 던지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작가의 삶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삶의 속도와, 속도를 주변의 속도와 맞추기 위해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는 작가의 노력도 자연스럽다. 그것은 김기정 작가에게만 특별하게 해석되어야 할 자연스러움은 아닐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과 다른 방향, 속도, 온도, 강도, 밀도, 생각, 사람,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한다.

 

 

전망 좋은 방, 캔버스에 아크릴, 53x65.1, 2020

 

 

그러다 문득 스튜디오에 걸린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의 그림들이 눈에 들어온다. 작가가 언제나 열리는 것은 아닐 텐데 왜 그림들은 표면적으로 아름답고 화려할까. 마치 활짝 열린 것처럼. 작가는 왜 닫힐 때에도 열린 것처럼 그림을 그릴까. “이 중에 가장 닫힌 그림은 뭔가요?”라는 나의 질문에 작가가 매우 장식적이고 화려한 그림을 가리켰던 순간을 떠올려본다. 작가는 김기정이라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을 향한 대응으로 닫힌 그림도 열린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작가는 매우 사회적인 관계를 고민하며 대응하고 있는 창작자일지 모른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 대응을 친절하고 상호적인 언어적 반응으로 해내고 있으나 작가는 자신만의 방식이자 노력으로 자신의 ‘열림’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작가의 장애 특성만을 이유로 작가가 그림을 통해 열렸다, 비로소 예술이 작가를 열리게 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그 노력을 보지 않는 판단일 수 있다. 작가도, 작가의 그림도 매번 열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작가는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예쁘게 닫기도 하고 화려하게 닫아버리기도 하면서. 그래야만 자신이 그림 안에서 안전하게 열릴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그러나 예술은 창작자의 닫힘을 가리거나 대체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어렵고 이따금 매정하다. 그렇기에 그림을 안전하게 닫으려는 순간이 많아질수록 창작자는 외롭게 열리며 스스로를 지키고 서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아름다운 작품의 표면 대신 위풍당당하지 않아도 되는 솔직함이 창작자를 지켜줄 수 있을지 창작자도 그 사람을 지켜보는 사람들도 불안하고 모호하다. 한편,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예술을 분명한 형상, 섬세한 표현기법, 화려한 색감으로만 전제할 경우, 그것만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예술의 영역을 (작가를 포함한) 우리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김기정 작가의 ‘입이 열리고 닫히는 것’에만 집중하면 작가가 현재 무엇을 향해 무엇을 어떻게 열려고 하는지 혹은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듯이 말이다. 한 점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몇 개월의 시간을 들이는 작가는 이미 (그림을 포함한) 답변을 들고 질문을 기다리고 있다. 작가가 애써 예쁜 답변을 꺼내놓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그때 작가의 열린 목소리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들릴 것이다.

 

 

엄마와 봄나들이, 캔버스에 아크릴, 51x97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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