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원고는 성북문화재단에서 진행된 '손바닥 문화예술교육 실험실 <나 좋자고 해봤니?>'를 마무리하며 작성되었습니다. (결과자료집 수록 원고)

 

 

 

 

 

 

손바닥 문화예술교육 실험실 <나 좋자고 해봤니?>

 

일정 : 2020. 07. 23. 09. 03 () 16-18, 6

장소 : 차라리 낭만(서울 성북구 아리랑로 120-10, 정릉역 1번 출구)

진행 : 남경순(마을온예술), 예술장돌뱅이, 최선영(창작그룹 비기자)

대상 : 문화예술교육에 관심 있는 분 누구나 (15명 내외)

내용

- 나의 입장에서 바라본 문화예술교육

- 나만의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기획 및 실험(프로그램 실행비 지원)

 

일정

구분

내용

7/23

OT

[오늘의 모양]

- 오리엔테이션, 인사하기

7/30

워크샵

[나 좋자고 해봤나 교육]

- , 개별성, 다양성에 대한 탐구

8/6

워크샵&토크

[나 좋자고 해보는 교육]

- 예술과 딴짓 사이에서 발견한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대화

- 예술가/예술강사의 삶과 재미를 위한 교육 상상하기

8/13

체험

[예술장돌뱅이] 체험

- 예술가들의 1:1 프로그램 맛보기

8/20

실험

[다른 사람도 좋을까]

- 참여자별 소규모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기획

9/3

결과공유회

[함께 좋을 수 있을까]

- 참여자별 프로그램 발표

 

 

미래에도 나를 기다릴 질문 “나 좋자고 해봤니?”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대표, 성북문화재단 자치구 예술교육 활성화 지원사업 PM

 

 

오늘도 급박하게 기획된 문화예술교육 현장에 강사로 다녀왔다. 오랜만에 포근했던 주말,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싶었지만 무거운 재료 가방을 들고 지하철을 탔다. 아침도 거르고 2시간 꼬박 걸려서 낯선 장소에 도착, 여느 때처럼 자연스럽게 짐을 풀고 별일 없이 프로그램을 마쳤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그곳에 온 참여자들과 함께. 이마저도 익숙한 일이라 나는 당황도 하지 않았다. 남겨진 다과를 야무지게 챙겨 먹고 함께 한 동료와 주말에 애썼다며 서로 다독이고 집으로 돌아왔다. 14년째 이렇게 누군가의 시간 혹은 사업을 채워주고 나의 공간으로 도망치듯 되돌아가는 것이 그저 살아감의 고단함인지, 그럼에도 감사한 활동의 기회인지, 혹은 문화예술교육이라는 것인지 여전히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은 이제 나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단지,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들으며 평온해지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내일은 무얼 하며 쉴까 짧은 고민을 할 뿐이다.

 

이런 날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럼에도 문화예술교육과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는 이유는, 현실적인 이유도 크지만 오늘처럼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의 기운 때문이다. 누군가가 열심히 다정하게 참여‘해줘서’ 고맙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보통 ‘참여자’로 불리는 그 사람들의 경험이나 변화, 그들과의 소통 자체에 문화예술교육의 의미나 가치가 너무 쏠려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참여자들과 다양한 경험을 나누면, 문화예술교육을 기획하거나 진행한 사람에게도 활동에 대한 지속적인 의미와 동력이 생길까? 나도 오늘 진행한 프로그램에서는 참여자들과 적극적이고 다채로운 교감을 나누었는데, 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 활동을 언제까지 해야 할지 생각에 빠졌을까? 이젠 적당하고 무난한 문화예술교육 현장을 만드는 것에 큰 어려움도 없고 참여자들은 나에게 고맙다, 재미있다 소감을 남기기도 한다. 그럼에도 왜.

 

 

혼자 들고 다니는 재료 가방

 

 

손바닥 문화예술교육 실험실 ‘나 좋자고 해봤니?’는 이런 경험과 혼잣말 속에서 기획된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이 질문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질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참여자 신청을 받으며 확인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신청자가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후 온라인 예술교육의 방법론을 이야기하거나 미래 예술교육을 탐색하는 것이 문화예술교육 현장에는 더욱 다급한 주제일 수도 있을 텐데, 마음속에서 툭 던져진 듯한 이 질문에 공감하며 정성스러운 신청서를 쓴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 이야기를 계속해볼 수 있겠다’는 힘을 얻기도 했다. 실험실의 바로 첫 시간에 특히 그런 인상을 크게 받았는데 그 이유는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동기나 이유를 참여자들이 한 명씩 이야기하던 순간 때문이었다.

 

내가 나를 아는 것은 쉽지 않지만 알고자 하는 노력, 혹은 나를 향하며 살아보려는 시도 없이 ‘삶’에 대한 문화예술교육을 하는 것은 가능할까? 나의 ‘삶’을 담아내든 누군가의 ‘삶’을 향하거나 궁금해하든. 문화예술교육을 고민하는 사람들도 어떤 분야의 활동가, 전문가 이전에 각자의 살아냄 안에 있는 ‘사람’인데 이들이 스스로 자기 삶을 충분히 바라볼 수 있을지, 그러한 기회가 공동의 주제로 다뤄지거나 모색된 시간이 있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자신의 삶에 대해 마주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나와 타인의 ‘삶’도 문화예술교육 안에서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자신의 삶을 마주한다는 것은 결국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기도 했고 이러한 긴 고민을 조금 도발적인 질문으로 표현한 것이 ‘나 좋자고 해봤니?’였다. 현실적으로는 문화예술교육(뿐만 아니라 여러 일이나 활동)을 나 좋자고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질문은 ‘나 좋자고만 해보자’는 이기적이거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라 ‘이따금 나도 나를 돌아보며 해봐야 하지 않을까?’라는 물음이자 제안이었다. 또한 이러한 성찰은 누군가에 의해 혹은 제도나 사업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우리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살펴야 한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어딘가로 흘러가버리기도 하는 것이 삶이고, 생활이니까. 문화예술교육 활동도 그 일부이기에, 정책적으로 이 영역이 점점 고도화될수록 개개인은 자신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나는 그 흐름이나 움직임을 원했던 것인지, 나는 어디로 흘러가려고 하는지 돌아볼 필요도 있다. 거창해 보이는 이런 문제의식은 오늘의 나에게도 유효하지만 미래에도 변함없이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왜냐하면 미래에도 문화예술교육이 동시대에 다뤄야 하는 주제, 지속되어야 하는 사회적 의미나 맥락, 확장될 수 있는 방안, 이와 관련한 다양한 주체들의 역할이나 역량 등에 사회적 관심이 쏠릴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매우 개인적인 관점에서 그렇게 예상한다.) 문화예술교육과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지점에서 자신이 소진된다고 느끼는지, 어떤 순간에 외로움이나 우울감을 겪는지, 어떤 변화나 학습, 성찰의 기회를 원하는지, 이와 같은 접근이 실제로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사회적 의미나 관점을 어떻게 확장시킬지는 지금처럼 미래에도 폭넓게 다뤄지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혹시 문화예술교육에서 다뤄지거나 언급되는 ‘삶’은 주로 참여자들로 인해 드러나거나 발화되는 부분에만 집중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도 든다. 이것은 특히 다양한 문화예술교육 현장을 관찰하거나 경험하면서 나에게 구체화되었는데, 예술강사로 잘 기능하게 되는 사람은 늘어나는 반면, 바로 자기 자신으로 예술을 드러내거나 나누거나 예술에 대해 함께 질문하려는 ‘사람’은 더욱 만나기 어려워졌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문화나 예술의 중요한 가치는 ‘다양성’이기도 한데 그 다양성을 구현할 ‘개별성’이 문화예술교육의 주체들로부터 사라져간다고 느꼈던 것이다.

문화예술교육도 누군가에는 안정적이고 매끄럽게 잘 해내야 하는 ‘분야’로 인식되기도 하고 사회적 분위기나 정책적 구조도 그러한 방향성으로 흐르다 보니 좀 부족하거나 흔들리거나 촌스럽거나 망설이는 사람보다는 일정한 시간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활동의 기회를 갖게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렇게도 부족함 없는 존재일까? 좋아하는 일에 열광도 했다가 힘든 순간에 엉엉 울었다가 난감한 순간에 말문도 막혔다가 처음 하는 일에는 실패도 하게 되는 사람에 대해 먼저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대부분 그리 완벽하지도 효율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못한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이 들쭉날쭉한 각자의 감정, 경험, 특성, 관점, 관심사, 관계, 기억, 시도 등이 지금의 문화예술교육 안에서 충분히 등장하고 있을까? 혹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을까? 만약 사라지고 있다면 그 자리는 무엇으로 채워지고 있을까?

 

인간은 효율적으로만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문화예술교육이 특히 사업이나 담론 차원에서 고도화되면서 자기 이야기가 아닌 비슷비슷한 콘텐츠나 주제들이 안정성 위주로 다뤄지고 있는 듯하고 그 순간에 문화예술교육의 주체들은 자신의 역량을 효율적으로 발휘하여 정해진 시간을 채워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프로그램 자체는 세련되고 트랜디한데 어떤 ‘사람’이 고민하거나 실천하고 있다는 느낌은 줄어드는 것 같다. 그렇다면, 과연 참여자들도 그 ‘사람’을 느낄 수 있을까? ‘사람’이 아니라 프로그램이나 주제가 더 두드러져 보이거나 느껴진다면 그건 어떤 맥락에서 문화예술교육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까? 이러한 관점에서 ‘나 좋자고 해봤니?’는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관심 갖고 있는 것,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 결국 나에 대한 것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는 짧은 시도였다. 문화예술교육을 하는 사람이 프로그램 운영을 위한 기능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고자 하는 시간이 마련되어야 그 과정과 시도들이 타인에게도 ‘사람’의 기운으로 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나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거대한 이야기다. 이것은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무거운 숙제로 들린다. 하지만 예술이나 문화예술교육 이전에 그것이 가닿고자 하는 ‘삶’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이 숙제는 우리가 건너뛸 수 없는 중요한 질문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질문이 너무 부담스럽기 때문에 ‘나 좋자고 해봤니?’라고 완곡하게 표현해본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질문은 다른 표현으로도 생각해볼 수 있다. ‘나 살자고 해봤니?’, ‘나는 어떻게 살아내고 있을까?’,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을까?’ 등등. 그 질문에 참여자들은 여러 생각을 꺼내놓았고 그것은 짧은 프로그램 과정에 비해 매우 솔직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좋아하는 것을 해보거나 궁금한 것을 들춰보며 나로부터의 시작을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면 자신에 대해서도 더 애정을 가질 수 있게 되고 그제야 비로소 타인에 대한 관심을 넓혀갈 수 있을 것이다. 나 자신이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곳을 스스로 찾을 수 있어야 그 장소에 타인도 초대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장소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지속되기를 스스로 바라고 있는지 알아야 외부의 요구나 기대 때문에 그 영역이 위태로워질 때, 지켜낼 수 있는 힘도 발휘될 수 있을 것이다.

 

‘나 좋자고 해봤니?’라는 질문은 미래에도 다른 표현으로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을 만큼 삶은 녹록지 않을 것이고 문화예술교육은 나와는 먼 곳에서 어떤 기대에 응답하려 하고 있을지 모른다. 바로 그때, 훌륭한 문화예술교육을 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풀썩 주저앉지 않기 위해 우리는 잠시 서로에게 질문을 해봤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뿐이지만 그것은 각자에게 어떤 경험이 되었을까? 그동안 우리가 그것을 거의 해보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과연 그것은 제도나 사업이 어떤 역할을 못했기 때문일까? 그 시작점이 외부로부터 제안되기를 기다리기 전에 우리 스스로 성찰을 해보는 것, 그것이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필요하다.

 

 

 

손바닥 문화예술교육 실험실 과정공유회 <나 좋자고 해봤더니>

 

손바닥 문화예술교육 실험실 과정공유회 "나 좋자고 해봤더니"

손바닥 문화예술교육 실험실 과정공유회 나 좋자고 해봤더니 한 번쯤은 '나 좋자고' 해보는 교육도 필요하지 않을까 혼잣말 같던 질문이 만들어낸 다양한 가능성을 공유합니다. ○ 일정 : 2020.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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