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을 망설이던 순간에, 나의 삶으로부터

artist-artist 2020. 1. 23. 09:56

*본 원고는 충북문화재단의 '2019 장애인 예술 매개자 양성과정 프로젝트 <렛잇비 : Let it be>' 결과자료집에 실린 글입니다.

 

 

 

실천을 망설이던 순간에, 나의 삶으로부터

 

창작그룹 비기자 / 최선영



첫날부터 무거운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참여자들이 경험하거나 목격한 장애, 삶 속에서 포착되거나 흘러가는 예술, 슬프거나 답답한 심정, 각자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장애’와 서로가 모르고 있다고 여기는 ‘장애’. 그것은 때론 첨예한 대화로 이어졌고 반복되기도 했다.

멘토인 나는 불안하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살아있는 감정과 표현들이 그 어떤 논의보다 흥미로웠다. 참여자들의 다양한 관점을 발견했고 그것이 뒤섞이는 과정을 함께 해서 의미가 있었다. 때론 멘토링이 무의미한 순간도 있었다. 그럴 때는 다른 각도에서 질문을 추가하는 정도로 역할을 했다. 프로젝트의 결과보다 매회의 대화가 궁금했다. 이렇게 해서는 장애인 예술 매개자가 ‘양성’될지 누구도 쉽게 예측할 수 없었지만 우리는 렛.잇.비. 그대로 두기로 했다. 미리 말해두자면, 사실 이것은 무엇을 가르치고 덧씌우고 개발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적어도 그 점을 잊지 않으려고 했다. 물론 프로젝트 과정을 계획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우리가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는지 내버려 두며 함께 가보고자 했다. 설사, 누군가는 예술이나 사람에 대한 기존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더라도. 멘토링은 부지런한 가이드가 아니라 재촉하지 않는 기다림, 빈틈을 비추는 질문 던지기일지 모르니까.

그리고 질문 던지기는 언제나 나를 포함한 참여자 모두를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프로젝트 이후에 현재까지 나에게 남아있는 질문은 ‘우리가 무엇과 무엇을 매개하려고 하는가’ 이다. 사업명에서 쉽게 답을 찾는다면 예술과 장애인을 매개하려는 것이겠지만 이건 좀 모호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예술이 무엇인지 (여기저기에서 배우고 들었음에도) 여전히 모르겠고 장애인을 어떤 존재로 정의할지도 사회적, 인문학적, 철학적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논의를 프로젝트의 끝까지 계속 이어갔다. 오히려 프로젝트가 끝난 후에 이 고민은 (다행히도) 더욱 커졌다. 그래서 예술도 궁금해지고 장애, 장애인도 불확실해졌다면 반가운 일이다. 그러다 우리가 예술과, ‘다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매개하려는 것은 아닐지 생각도 든다. 또한 장애인을 ‘사람’으로 전제해서 생각하는 데에 애써 여러 이유와 시간을 들여야 했던 것은 아닐지 되돌아보게 된다.

 

 

 

문득, 우리는 장애인 이전에 ‘사람’, ‘나와 다른 사람’, ‘타인’에게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도 생각하게 된다. 혹은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 우리가 예술과 사람을 매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그러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다시 질문이 이어진다. 우리는 혹시 각자가 가지고 있는 예술에 대한 가치나 의미를 타인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이 누군가에게 필요하다고, 그래서 전달 가능하다고 전제하면서. 그렇다면 우리는 매개의 방식을 다양하게 상상하고 있었을까. 혹시 그것을 프로그램이나 사업, 봉사나 나눔으로만 한정한 것은 아닐까. ‘실천연구’의 방식도.

그렇다면 내가 예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내가 ‘사람’에 대해 얼마만큼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가 ‘매개’의 방식도 결정짓게 했던 것은 아닐까. 결국 내가 전제한 ‘예술’과 내가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매개라면, 우리는 과연 이 매개의 중심에 있는 ‘나’에 대해 얼마나 생각해보았을까.

예술에 대해 별로 생각해보지 않은 나, 예술을 하는 나, 예술이 궁금한 나, 예술이 어려운 나, 예술이 친숙한 나, 예술이 삶과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는 나, 예술과 삶은 공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

그리고,

장애인을 잘 돕는 나, 장애인을 잘 모르는 나, 장애인을 싫어하는 나, 장애인이 되고 싶지 않은 나, 장애가 있는 나, 장애인을 만나보지 못한 나, 장애인이 익숙한 나, 장애인에 대해 공부해야겠다고 느끼는 나...

우리는 그런 ‘나’를 얼마나 들여다보려고 했을까. ‘나’라는 ‘사람’을 마주하려 하지 않은 채로 다른 ‘사람’을 무엇과 매개하는 것이 가능할까. 내가 나를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프로젝트 중반부터 내게 이런 질문들이 확장됐던 것은,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동시에 솔직해질까 말까 고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프로젝트는 어떤 삶 속의 내가, 예술과 사람 사이의 ‘나’와 얼마나 자연스럽게 매개하게 되는지를 살피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장애인이라는 타자를 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우리에게는 결국 (쉽지 않더라도) 본인 스스로를 발견하고 만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실천연구’도 낯설고 어려웠던 것이다. 결국 나의 자발적 고민, 능동적 실천, 일상적 연결이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이 실천연구에 관심이 있는가, 내가 정말 이것을 하려고 하는가, 내가 스스로 이것을 고민하고 있는가.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스스로를 외면했다가도 다시 마주해야 했다. 게다가 멘토들은 그 만남, 혹은 매개의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이거 하고 싶으세요?” 라는 질문을 주로 했다.

이렇게 낯설고 미련한 멘토링, 혹은 프로젝트는 참여자들에게도 익숙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장애인 예술 관련이라면 장애 유형별 교육 방법, 매개 방식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줘도 모자랄 것 같은데, 열심히 실천연구 계획서를 써온 사람에게 그 사람을 향하는 질문만 이어갔으니 참여자들은 대체 이게 무엇을 염두에 둔 매개인지 모호했을 것이다.

 

 

그러나 프로젝트의 후반부로 갈수록 나에게 ‘실천연구’는 나름의 구체적 의미로 해석되었다. 참여자 각자의 ‘삶’이 경험적 근거로 작동하는 연구. 스스로를 마주하려는 과정 없이 부지런히 실행만 하는 것과는 다른 실천. 매개의 방법을 상상하기 위해 각자의 삶의 흔적을 찾는 시간.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자의 삶이었다. 프로젝트 과정에서 장애인과 예술에 대한 여러 강의가 있었지만 그것은 단지 우리 삶 속에 숨어있던 의미나 문제의식을 끄집어내는 연결고리였다. 강의 내용에 따라 나를 바꾸거나, 내 삶과 별개로 ‘장애인 예술 매개’라는 영역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이 사회적으로 불평등한 상황 안에 놓인다는 것을 자주 발견할 때, 누군가는 우선적으로 선하고 따뜻한 조력자가 되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러나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우리는 사람에 대한 접근이 다양할 수 있음을 전제해야 한다. 그것을 상상하는 데에는 각자의 삶이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삶을 스스로 마주할 용기도 필요하다. 실천은 그 용기를 드러내는 어떤 시작점일지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렛잇비’는 실천을 해보거나 망설이는 시간을 응원했다고 생각했다. 어서 빨리 실천하라며 재촉하지 않고 같이 더듬어나가보자고. 참여자들에게 이 방식이 좀 어색했더라도 고민의 기회로 작동되었기를 바란다.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당연히 명쾌할리 없으니까. 앞으로 우리가 예술과 사람을, 혹은 사람과 사람을 매개하는 순간이 온다면, 너무 따뜻하지만은 않기를 기대하며, 끝까지 각자의 속도로 함께 해주신 참여자분들께 깊은 감사를 전한다.

 

 

 

 

2019 장애인 예술 매개자 양성과정 프로젝트 <렛잇비 : Let it be>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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