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원고는 서울시 '2019 꿈틔움 예술창작소 1:1멘토링지원사업' 결과자료집에 실린 글입니다.

 

*본 사업은 <장애인문화예술판>이 총괄 운영하였습니다.

 

*예술창작소는 서울시에 거주하는 장애청년(만19세이상에서 만29세이하)들의 창작역량을 강화하고 창작활동을 모색할 수 있도록 문화예술 전문가를 1:1로 매칭하는 사업입니다. 20명의 장애청년과 20명의 문화예술전문가가 멘티와 멘토가 되어 서로의 성장을 돕고 지원하는 관계맺음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멘토의 20%는 장애예술인이 참여했습니다.

 

*사업공고문 자세히보기 :

 

장애청년을 위한 꿈틔움 예술 창작소 1:1멘토링 지원사업 멘토 및 멘티 모집 공고

사업개요    사 업 명 : 장애청년을 위한 꿈틔움 예술 창작소    사업기간 : 선정 일부터 ~ 11월30일까지          지원자격 : *멘티 : 서울에 거주하는 만19세 이상, 만29세 이하의 장애청년 중 문화예술교육 및 활동에 경험이 있으면서 예술창작활동(연극, 무용, 영화, 미술, 음악)에 욕구가 있는 사람. (5월~11월까지의 창작활동에 성실히 참여 가능한 사람) *멘토 : 장애청년예술가 양성에 관심이 있는 전문예술인으로서 문화예술 활

www.artpan.net

 

*결과자료집 및 사업 관련 문의 : <장애인문화예술판> / 420pan@naver.com / 02-745-4208  

 

 

 

 

 

 

 

 

 

 

 

해석의 근거, 참조의 흔적

 

창작그룹 비기자 / 최선영

 

 

1.

경력의 많고 적음을 떠나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두 사람이 몇 개월간 스물다섯 번을 만난다는 것은 서로에게 어떤 경험으로 남을까. 멘토, 멘티로 참여한 40명의 인터뷰를 정리한 나는, 이들이 집중된 만남 안에서 타인에 대한 각자의 관점을 어떻게 발견해나가는지 들어보고자 했다. 사업공고문에 등장하는 ‘장애’ 혹은 ‘장애인’이라는 개념, 관념, 혹은 존재는 여러 만남 안에서 변하거나 사라지거나 도드라지기도 했는데 그 과정을 이끄는 각자의 생각들도 궁금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이 사업의 이야기를 기록, 정리했던 것은, ‘장애’에 집중되는 사업적 관점을 흐트러트리고자 했던 개인적인 의지와도 관련이 깊다. 나는 공동창작 혹은 멘토링에 대한 다른 해석의 여지를 찾고 싶었다. 멘티의 장애특성에만 집중하지 않는 멘토의 관점, 각자의 개인성을 발견해나가는 창작활동, 사람과 사람의 관계 자체로 해석 가능한 시간들. 이러한 것들이 사업 참여자, 실무자, 관찰자 그리고 제3자에게까지 공동의 질문으로 확장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장애유형의 사람에게는 어떤 멘토링 방식이 효과적인지 분석하기 위한 자료를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2.

실제로 인터뷰를 정리하고 중간워크숍 등에서 멘토들을 만나면서 멘토와 멘티의 만남에 영향을 주는 몇 가지 요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 글에서는 그것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첫 번째, 멘토의 예술관이다. 이 사업은 협업보다는 멘토링의 방식으로 창작자간 만남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멘토가 전반적인 흐름을 끌고 가거나 설계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멘토가 예술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창작자라는 존재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가 멘토링 방향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창작자의 주체적인 표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멘토는, 멘티의 평소 관심사에 기반을 두고 그가 표현을 더욱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환경을 고민하였다. 한편 창작자의 역량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멘토는, 멘티가 다양한 것을 배우고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과정을 설계하였다. 물론 멘토들이 이러한 두 가지 방향으로만 나뉘어 멘토링을 했던 것은 아니나, 예술에 대한 각자의 상(想)을 토대로 멘티의 활동 방식을 고민하곤 했다. 이것은 멘토가 가지고 있는 예술에 대한 학습의 경험, 삶의 기억 등과도 연관되어 보였다.

 

두 번째, 멘티의 적극성이다. 몇몇 멘토들은 멘티가 적극적이지 않았다면 사업이 전반적으로 매우 힘들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것은 결국 멘티라는 창작자가 자신의 창작적 근거, 주제, 동기를 스스로 고민하거나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멘토링이 자칫 멘토의 적극성, 전문성에 기대어 이루어질 수 있는데 그보다 먼저 멘티의 태도 혹은 관심사가 멘토링 전반에서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멘티가 자신이 원래 하던 것만 하는 경우는 그것을 적극적 태도로 해석해야 할지 논의의 여지가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멘티의 적극성을 받아들이거나, 반대로 파고드는 멘토의 또 다른 적극성이 요구되기도 했다.

 

세 번째, 1:1 만남의 구조적 특성이다. 많은 멘토, 멘티들이 1:1 만남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을 보였지만 활동 전반을 멘토가 끌고 가야 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도 언급했다. 장애인 창작활동에 대한 전문적인 의견을 들어봐야 하는 것인지, 멘토링이나 예술교육에 대한 방법론을 더 알아야 하는 것인지 등에 대한 개인적인 고민을 하고 있었다. 특히 멘티가 멘토의 제안이나 행동에 많은 부분 의지하게 되는 상황에서는 멘토들의 고민이 가중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이것은 개별 창작자들의 특성에 집중할 수 있는 1:1 멘토링의 장점과 달리 현실적으로 보완책이 필요한 부분으로 읽히기도 했다. 상황에 따라서는 멘티가 다수 안에 묻어가기도 하고 여러 관계 안에서 자극을 받는 등의 기회가 필요해 보였다. 1:1 만남이 사업적 특성으로만 부각되지 않고 창작자들의 상황과 장르적 특성에 따라 변동 가능한 형식 중 일부로 기획될 필요도 있어 보인다.

 

네 번째, 만남의 시기다. 사실 대부분의 멘토, 멘티들은 이번 사업을 통해 처음 관계를 형성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떤 장애유형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을 집중적으로 만났기 때문에 서로에게 호기심이나 관심을 가지기 수월한 상황에 있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궁금함, 창작방식에 대한 관심으로도 이어져 멘토링 과정에 더욱 상호적인 영향을 미쳤다. 반면, 이미 오래전부터 1:1 만남을 이어온 멘토, 멘티의 경우는 호기심과는 다른 관심을 기반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이 사업을 앞으로도 이어질 만남 중 일부의 시간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한편, 사업 이후에는 자연스러운 만남이 쉽지 않다는 것을 예감한 멘토, 멘티의 경우, 어떻게 이번 만남을 의미 있게 마무리 지을지 고심하기도 했다. 결국, 만남 자체도 중요하지만, 각기 다른 만남의 시기가 멘토링의 에너지를 여러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게 했다고 볼 수 있다.

 

다섯 번째, 창작의 확장 가능성이다. 이와 관련하여 인터뷰에서는 “멘티와의 만남이 멘토에게 어떤 영감이나 자극을 주는지” 공통적으로 질문을 했었다. 이것은, 멘토가 멘티만을 위해 기능하는 사람으로 전제되지 않기를 바라며 던진 질문이었다. 결국 멘토도 창작자,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멘토가 이 사업에서 본인의 창작에 대한 확장 가능성을 발견해야 스스로 참여의 의미를 고민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대부분의 멘토들이 각자 발견한 창작적 자극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한 부분이 특히 흥미로웠다. 멘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계속 생각하다 보니 정작 멘토 본인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생각하게 되었다는 답변도 기억에 남는다. 예술적 행위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더라도 결국 사람에 대한 내밀한 관심이 다른 창작을 발생시킬 수 있을 거란 생각도 할 수 있었다.

 

 

3.

멘토, 멘티의 비언어적 교감의 순간들을 대화 안에 모두 담을 수는 없지만 이 기록들이 장애를 빗겨 가거나 관통하는, 사람에 대한 다양한 접근들로 읽히기를 바란다. 장애특성을 넘어서는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개개인에 대한 관심으로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그 스펙트럼의 폭을 (분명하지 않은) 일반성, 정상성을 전제로 매우 좁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이 사업을 매우 다양한 사람들간의 만남으로 전제한다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더 보일까. 어긋나는 대화, 쉽게 전달되지 못하는 표현기법, 불쑥 튀어나온 솔직함, 변함없는 고집스러움도 만남의 일부로 해석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 해석적 근거는 전문적인 자료도 논리적인 연구결과도 아닌, 다양한 사람들의 등장과 구체적인 대화들로 가능할 것이다.

 

여러 멘토들이 ‘내가 이렇게 멘토링을 하는게 맞는지 모르겠다’는 불안감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에 대해 우리가 당연히 알 수 없다, 그래서 만나보고 함께 시간을 보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했다면, 그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들도 불확실하지만 더듬어보려 했던 시간들이 오히려 구체적인 참조가 되어 다음의 만남을 상상하게 하고 각자의 창작으로 뻗어 나가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참조들은 결코 표준값을 마련하기 위해 기록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수도 없이 개별화된 참조들은 ‘사람에 대해서 쉽게 알 수 없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미련한 근거들로 남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방법 대신 참조의 흔적을 남긴 멘토, 멘티의 대화를 통해, 사람과 사람이 효율적으로, 혹은 효과적으로 만나지 않는 것에 대한 의미까지도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

*본 원고는 충북문화재단의 '2019 장애인 예술 매개자 양성과정 프로젝트 <렛잇비 : Let it be>' 결과자료집에 실린 글입니다.

 

 

 

실천을 망설이던 순간에, 나의 삶으로부터

 

창작그룹 비기자 / 최선영



첫날부터 무거운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참여자들이 경험하거나 목격한 장애, 삶 속에서 포착되거나 흘러가는 예술, 슬프거나 답답한 심정, 각자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장애’와 서로가 모르고 있다고 여기는 ‘장애’. 그것은 때론 첨예한 대화로 이어졌고 반복되기도 했다.

멘토인 나는 불안하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살아있는 감정과 표현들이 그 어떤 논의보다 흥미로웠다. 참여자들의 다양한 관점을 발견했고 그것이 뒤섞이는 과정을 함께 해서 의미가 있었다. 때론 멘토링이 무의미한 순간도 있었다. 그럴 때는 다른 각도에서 질문을 추가하는 정도로 역할을 했다. 프로젝트의 결과보다 매회의 대화가 궁금했다. 이렇게 해서는 장애인 예술 매개자가 ‘양성’될지 누구도 쉽게 예측할 수 없었지만 우리는 렛.잇.비. 그대로 두기로 했다. 미리 말해두자면, 사실 이것은 무엇을 가르치고 덧씌우고 개발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적어도 그 점을 잊지 않으려고 했다. 물론 프로젝트 과정을 계획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우리가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는지 내버려 두며 함께 가보고자 했다. 설사, 누군가는 예술이나 사람에 대한 기존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더라도. 멘토링은 부지런한 가이드가 아니라 재촉하지 않는 기다림, 빈틈을 비추는 질문 던지기일지 모르니까.

그리고 질문 던지기는 언제나 나를 포함한 참여자 모두를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프로젝트 이후에 현재까지 나에게 남아있는 질문은 ‘우리가 무엇과 무엇을 매개하려고 하는가’ 이다. 사업명에서 쉽게 답을 찾는다면 예술과 장애인을 매개하려는 것이겠지만 이건 좀 모호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예술이 무엇인지 (여기저기에서 배우고 들었음에도) 여전히 모르겠고 장애인을 어떤 존재로 정의할지도 사회적, 인문학적, 철학적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논의를 프로젝트의 끝까지 계속 이어갔다. 오히려 프로젝트가 끝난 후에 이 고민은 (다행히도) 더욱 커졌다. 그래서 예술도 궁금해지고 장애, 장애인도 불확실해졌다면 반가운 일이다. 그러다 우리가 예술과, ‘다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매개하려는 것은 아닐지 생각도 든다. 또한 장애인을 ‘사람’으로 전제해서 생각하는 데에 애써 여러 이유와 시간을 들여야 했던 것은 아닐지 되돌아보게 된다.

 

 

 

문득, 우리는 장애인 이전에 ‘사람’, ‘나와 다른 사람’, ‘타인’에게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도 생각하게 된다. 혹은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 우리가 예술과 사람을 매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그러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다시 질문이 이어진다. 우리는 혹시 각자가 가지고 있는 예술에 대한 가치나 의미를 타인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이 누군가에게 필요하다고, 그래서 전달 가능하다고 전제하면서. 그렇다면 우리는 매개의 방식을 다양하게 상상하고 있었을까. 혹시 그것을 프로그램이나 사업, 봉사나 나눔으로만 한정한 것은 아닐까. ‘실천연구’의 방식도.

그렇다면 내가 예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내가 ‘사람’에 대해 얼마만큼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가 ‘매개’의 방식도 결정짓게 했던 것은 아닐까. 결국 내가 전제한 ‘예술’과 내가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매개라면, 우리는 과연 이 매개의 중심에 있는 ‘나’에 대해 얼마나 생각해보았을까.

예술에 대해 별로 생각해보지 않은 나, 예술을 하는 나, 예술이 궁금한 나, 예술이 어려운 나, 예술이 친숙한 나, 예술이 삶과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는 나, 예술과 삶은 공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

그리고,

장애인을 잘 돕는 나, 장애인을 잘 모르는 나, 장애인을 싫어하는 나, 장애인이 되고 싶지 않은 나, 장애가 있는 나, 장애인을 만나보지 못한 나, 장애인이 익숙한 나, 장애인에 대해 공부해야겠다고 느끼는 나...

우리는 그런 ‘나’를 얼마나 들여다보려고 했을까. ‘나’라는 ‘사람’을 마주하려 하지 않은 채로 다른 ‘사람’을 무엇과 매개하는 것이 가능할까. 내가 나를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프로젝트 중반부터 내게 이런 질문들이 확장됐던 것은,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동시에 솔직해질까 말까 고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프로젝트는 어떤 삶 속의 내가, 예술과 사람 사이의 ‘나’와 얼마나 자연스럽게 매개하게 되는지를 살피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장애인이라는 타자를 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우리에게는 결국 (쉽지 않더라도) 본인 스스로를 발견하고 만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실천연구’도 낯설고 어려웠던 것이다. 결국 나의 자발적 고민, 능동적 실천, 일상적 연결이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이 실천연구에 관심이 있는가, 내가 정말 이것을 하려고 하는가, 내가 스스로 이것을 고민하고 있는가.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스스로를 외면했다가도 다시 마주해야 했다. 게다가 멘토들은 그 만남, 혹은 매개의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이거 하고 싶으세요?” 라는 질문을 주로 했다.

이렇게 낯설고 미련한 멘토링, 혹은 프로젝트는 참여자들에게도 익숙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장애인 예술 관련이라면 장애 유형별 교육 방법, 매개 방식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줘도 모자랄 것 같은데, 열심히 실천연구 계획서를 써온 사람에게 그 사람을 향하는 질문만 이어갔으니 참여자들은 대체 이게 무엇을 염두에 둔 매개인지 모호했을 것이다.

 

 

그러나 프로젝트의 후반부로 갈수록 나에게 ‘실천연구’는 나름의 구체적 의미로 해석되었다. 참여자 각자의 ‘삶’이 경험적 근거로 작동하는 연구. 스스로를 마주하려는 과정 없이 부지런히 실행만 하는 것과는 다른 실천. 매개의 방법을 상상하기 위해 각자의 삶의 흔적을 찾는 시간.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자의 삶이었다. 프로젝트 과정에서 장애인과 예술에 대한 여러 강의가 있었지만 그것은 단지 우리 삶 속에 숨어있던 의미나 문제의식을 끄집어내는 연결고리였다. 강의 내용에 따라 나를 바꾸거나, 내 삶과 별개로 ‘장애인 예술 매개’라는 영역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이 사회적으로 불평등한 상황 안에 놓인다는 것을 자주 발견할 때, 누군가는 우선적으로 선하고 따뜻한 조력자가 되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러나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우리는 사람에 대한 접근이 다양할 수 있음을 전제해야 한다. 그것을 상상하는 데에는 각자의 삶이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삶을 스스로 마주할 용기도 필요하다. 실천은 그 용기를 드러내는 어떤 시작점일지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렛잇비’는 실천을 해보거나 망설이는 시간을 응원했다고 생각했다. 어서 빨리 실천하라며 재촉하지 않고 같이 더듬어나가보자고. 참여자들에게 이 방식이 좀 어색했더라도 고민의 기회로 작동되었기를 바란다.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당연히 명쾌할리 없으니까. 앞으로 우리가 예술과 사람을, 혹은 사람과 사람을 매개하는 순간이 온다면, 너무 따뜻하지만은 않기를 기대하며, 끝까지 각자의 속도로 함께 해주신 참여자분들께 깊은 감사를 전한다.

 

 

 

 

2019 장애인 예술 매개자 양성과정 프로젝트 <렛잇비 : Let it be> 자세히 보기

http://www.cbfc.or.kr/mobile/sub.php?menukey=115&mod=view&no=5265&search=Y&kwd=%EB%A0%9B%EC%9E%87%EB%B9%84

 

충북문화재단 모바일 > 재단소식 > 공지/공고

 

www.cbfc.or.kr

 

공동체로 살아가기

 

2019.11.01. (금) 14:30~17:00

청년일자리센터 다목적홀

 

 

 

 

장애-예술-공동체 : 분리된 채로 연결된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예술가(예술 작품을 창작하거나 표현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는 매우 소수라고 생각한다. 시대에 따라 예술가를 정의하는 맥락과 범위가 변하고 있고 요즘은 더욱 ‘당신도 예술가, 모두가 예술가’라는 구호가 퍼지고 있지만 그럴수록 예술가는 더욱 소수가 되어가고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은 그 자체로 유통에 용이한 상품이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술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 사람이 살아나가기 힘든 사회 덕분에 예술가는 소수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나는 예술가는 아니다. 단지 예술프로젝트나 일반적인 작품 발표방식인 전시에 이따금 참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 발제를 할 수 있는 이유는, 오히려 내가 예술가는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예술가들의 삶에 관심이 있는 기획자, 활동가에 가깝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나의 경험을 나누기에 좀 더 수월한 입장에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예술가가, 공동체와 밀접하게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말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덜 사회적이고, 즉흥적이고, 자기세계에 몰입하며, 집단적 활동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캐릭터화된 예술가상에 대해 동의하거나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한국에서의 공동체가 특히 조직화, 집단화를 전제하는 경우에 더욱 예술가의 삶의 방식을 끌어안기 어렵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왜냐하면 예술가가 창작을 하는 과정, 살아가는 방식이 공동체 안에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하는 창작활동은 뚜렷한 하나의 목적을 향해 계획된 일을 해내는 것과 거리가 있다. 그러나 단체나 조직을 지속적으로 운영해야 하는 공동체의 경우는 (그것이 느슨하더라도) 운영 목표를 설정하고 그에 필요한 과정을 설계한다. 그러나 예술가는 살아가며, 해나가며 방향성을 찾는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선택하거나 전제한 목표와 방법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갖고 그 질문 던지기 자체를 통해 참여 혹은 창작의 의미를 찾는다. 공동체를 ‘공통의 가치와 유사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으로 전제할 경우, 예술가는 ‘우리가 공통적일 수 있는가’, ‘유사할 수 있는가’, 혹은 ‘왜 그래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가며 계속해서 ‘공동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고민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공동체와 결합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태도, 혹은 삶의 방식이 공동체의 방해요소가 아닌 다양성의 일부로 인식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쉽지 않다. 보통의 현실 속에서 공동체는 예술가가 질문의 생산자가 아닌 예술적 경험의 생산자로 기능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문을 하긴 하지만 공동체가 바라는 예술적 경험을 기획활동을 통해 어느 정도 수행하고 있는 나는 (언제나 자연스럽고 편안했던 것은 아니지만) 공동체와 연결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의 활동은 예술가의 공동체 활동 사례로 온전히 소개될 수 없다. 나는 예술가적 삶에 관심은 있으나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으며 예술가라고 스스로 소개하기에도 실제 활동과 맞닿지 않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서론이 매우 길었다. 이제부터 나의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나는 공공예술프로젝트나 문화예술교육 등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10년 넘게 이곳저곳에서 만나오고 있다.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켜 보호감시 기관에 있는 청소년들, 가족들의 눈치를 보며 매일 다리 밑에 나와 장기와 바둑을 두는 할아버지들, 경력단절이 된 여성들, 불안감이나 우울감이 큰 청년들, 그리고 장애인과 그 가족들. 그중 장애인과 만나거나 함께 창작활동을 했던 시간이 다른 활동에 비해 많았는데 그것은 비영리예술단체 내에서의 활동이나 특수학교에서의 예술교육으로 설명 가능하다. 그런데 나는 (공동체의 대표적 유형으로 볼 수 있는) 단체 관련 활동을 넘어서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데 그 이유는 결국 모든 활동이 각각의 의미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단체 외의 활동은 공동체에 대한 개인적 문제의식을 재설정할 수 있는 기회로 작동되기 때문에 또 다른 가치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장애와 관련된 활동을, 각각의 무게로 내 삶에 영향을 주고 있는 여러 유형의 공동체, 그것들 간의 상호성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여러 공동체와 연결된 나의 활동 범위

 

 

 위의 그림처럼 나는 여러 공동체에 관여하거나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그중에는 장애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나는 오랜 시간 다양한 현장이나 사회적 현상을 마주하면서 오히려 이것들이 빈부 격차나 도시생활의 일반화, 불안사회 등과 같은 공통된 이슈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는 장애, 비장애를 떠나, 삶에 대한 다층적인 경험을 나누고자 여러 단체나 모임 혹은 일시적 공동체 등에 참여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내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며 내 주변 사람들, 혹은 구체적인 어떤 공동체의 일원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활동 범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예술가는 아니지만) 나의 예술적 경험이나 과정이 다른 삶과 연결될 때에는 이러한 활동 범위가 갖는 위치와 규모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즉, 예술 자체가 공동체나 구성원의 삶에 구체적인 영향을 준다기보다는, 어떤 가치나 의미를 중심으로 활동의 범위를 기획하고 만들어나가는 개인의 삶이, 그것과 연결된 타인의 삶에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이다. 단지 예술적 경험이 그 활동 범위에서 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질 경우 우리는 예술에 대해 조금 더 집중해서 그 현상을 해석해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술이 장르로서의 예술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고 볼 때, 이것은 미술이나 문학, 연극, 음악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넘어서는 관점을 필요로 한다. 내가 어떤 공동체에 ‘가서’, 혹은 어떤 자리에 ‘참석해서’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기 때문에’ 무언가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삶이 불안정하고 이따금 오락가락한 마음 상태를 가진 사람이기에 타인이나 사회와의 관계를 탐색하기 위해 공동체를 포함한 여러 현장에서 예술적 행위를 시도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좀 더 흥미롭기도 하고 나를 표현하기에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시나 예술을 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내 개인적 활동 범위를 만들어나간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리고 예술가는, 혹은 나와 같은 또 다른 기획자나 활동가는 저마다의 활동 범위가 있을 것이고 그것을 스스로 범주화해나가는 맥락과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 활동 범위가 어느 정도 겹치는 사람, 혹은 동료들을 알고 있다. 이들과의 만남은 나에게 그 무엇보다 편안한 일시적 공동체가 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각자의 관심사를 바탕으로 자발적으로 활동하고 있기에 서로의 적극성을 기대하거나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비슷한 순간에, 같은 장소에 가서 각자의 방향성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서로에게 힘을 준다. 나에게 무언가 도움을 주거나 내가 누군가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비슷한 고민을 놓지 않고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에서 삶에 대한 힘을 얻는다.

  그리고 이들은 (나와는 다른) 예술가인 경우가 많다. (오로지 개인적 경험을 근거로) 나는 이들의 활동 범위가 갖는 의미, 그 안에서 발생되는 힘이 예술적 영향력을 보여줄 수 있다고 여긴다. 동시에 예술 자체가 공동체나 삶에 영향을 준다고 보는 것은, 비현실적인 설정 같기도 하고 예술이 발생되는 전반적인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각자의 삶을 영위하며 살아나가고 있는 사람들의 어떤 실천들이 타인에게도 의미나 가치로 전해지는 것이라고 본다.

 

여러 사람들의 활동 범위가 겹치는 양상

 

 

 

2019년 10월 5일 활동범위가 겹치는 사람들과 대학로에서 만나 일시적 공동체를 이뤘다.

장애인의 삶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목소리를 내며 퍼레이드를 하였다.

장애인을 차별하지 말자고 말하는 대신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이름을 외치고 좋아하는 노래를 불렀다.

(퍼레이드 진진진 : 중증장애인을 포함한 사회적 소수자들이

스스로를 드러내고 말하기를 예술의 방식으로 보여주려는 프로젝트)

*사진 출처 : 퍼레이드 진진진 페이스북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예술의 힘 이전에 사람의 힘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힘은 누군가에게 치유가 되기도 하고 자극이 되기도 하고 낯설음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예술은 마냥 긍정적인 요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치유든 자극이든 낯설음이든 시기적절한 슬픔이든 혹은 그 무엇이든 그 양상이나 파급력도 다양하다. 중요한 것은 일반적인 효율성이나 성과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예술의 이러한 속성에 관심이 많다. 왜냐하면 그것이 현재의 사회적 흐름과 다른 방향성을 띄기 때문이며 그래서 다수를 설득하기에는 힘들지만 그 자체로 방향전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기능과 쓸모를 끊임없이 개발하고 증명해야 하는 사회는 빠른 속도와 효율적인 생산성을 추구하지만 예술은 쓸모를 알 수 없는 질문, 속도를 늦추는 실험을 지속한다. 적어도 내가 정의하는 예술은 그런 측면에서 관계적 미학,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특히 현실적 운영이 필요한 공동체에서 이러한 예술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나는 공동체 안에서 예술이 어떻게 기능할지보다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어떤 역할을 예술가가 해내는 것은 예술적 삶의 방식과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가가 예술적 효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기능인으로 인식될 경우 예술가로서의 개인적 삶 자체를 존중받는 것은 어려워진다. 그런 측면에서 공동체와 예술의 관계성에 대한 논의는, 예술이 공동체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넘어, 예술가의 삶 혹은 예술적 삶의 방식이 공동체와 공존하기 위해 서로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의 다른 속성, 지향점, 삶의 방식을 존중하거나 학습하려는 태도를 필요로 한다. 이 과정에는 예술가가 얼마나 특이하거나 덜 사회적인지를 확인하려 하지 않는 것, 공동체가 예술가라는 개인에게 어떤 측면에서 필요한지 살피는 것, 다양한 양상의 공동체를 상상하는 것 등이 필요하다.

  공동체도 결국 ‘함께 살아나가려는 구체적 의지’로 읽힌다. 그런데 예술도 다르지 않다. (개인의 정치를 해내기 위한 창작 행위나 결과물은 적어도 나에겐 예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예술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자원을 마련하고 방법을 설계하고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이지 않는 관점이나 의미를 추구한다. 그럼에도 삶에서 효율적 기능을 해내는 것 안에 예술 같은 것이 감지된다면 그것은 예술이라기보다는 예술적 요소가 들어간 어떤 방법론 혹은 콘텐츠일 것이다. 그 차이를 구분해낼 수 있을 때 예술과 함께 살아나가는 방식을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난 예술가가 아니지만 나를 포함한 몇몇 사람을 예술가로 인식하고 존중해주신 분의 글을 마지막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내가 2012년부터 4년간 함께 했던 (여러 공동체 중 하나인) 비영리예술단체에서의 활동을, 장애인 창작자의 부모가 최근에 이렇게 회상하였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예술은 장애와 관련된 현실의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으나 타인의 삶에 어떤 흔적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참 미련하고 답답하지만 나는 언제나 ‘그러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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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젊은 예술가는 이것이야말로 예술가가 꼭 갖추어야 할 것이라며 부러워하였고, 일군의 그들은 지금까지 장애라 써 놓은 것을 미덕이라 읽어 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도 그(장애인 창작자)의 세계에 첨벙 뛰어들 수는 없다. 그저 그의 세계를 기웃거리고, 그의 주변을 서성이며 불현듯 조우하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들의 예술 세계와 그의 미덕 있는 세계가 크로스오버 되는 어느 지점을 찾아 헤매며 우주를 유영하는 막막함. 이 두 아웃사이더 그룹의 만남은 그래서 좀 뿌옇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과연 그들은 만나기나 할까? 만난다면 불꽃이 튀기는 튈까? 어느 세월에? 처음엔 그랬다. 처음에는.

아마도 내가 생각한 예술은 영감이 불꽃처럼 튀어 오르고, 모두가 우러러 마지않는 걸작을 만드는 것이었나 보다. 그러나 이 생각은 그 예술가들을 만나서 같이 기웃거리고 서성이고 대화하면서 바뀌어 갔다. 그들은 조급하지 않았고 아니 조급증을 낼 무슨 결과를 기다리지 않았다. 스파크 따위 안 터지면 뭐 어떤가? 설사 만나지 못하고 이렇게 계속 유영만 한대도 저기 어딘가에는 나처럼 우주를 떠다니는 유목민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 기쁘지 아니한가? 너도나도 이 세상에 태어난 한 인간일 따름이라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고방식과 태도. 예술은 걸작으로 남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예술의 껍데기라는 것. 예술의 알맹이는 지금 우리의 태도에 있다는 것. 이 태도를 나는 중년이 되어 어린 예술가들에게서 배운 것이다. 그것은 행운이었다.

 

2019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웹진 이음 5호

[젊은 예술가의 태도가 일깨운 삶에 관하여 “재미를 보기에 희망을 가진다”]

고혜실 로사이드 정진호 창작자 어머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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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토크

장애 예술,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

magazine.sfac.or.kr

 

 

서울문화재단 월간지 [문화+서울]에 기고했습니다.

 

 

 

 

 

 

장애 예술,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 :
다급함의 문제는 문화나 예술로 해결되지 않는다

 

 

 

해결하려는 욕구로부터 멀어지기

장애 예술가의 창작 및 향유지원에 관해 발언의 기회가 생길 때마다 효율적인 방법을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한 망설임이 있다. 이미 장애 관련 이슈는 차별과 소외의 맥락으로 전제되어 사회적인 ‘문제’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결’을 효율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장애인이 차별받고 있다’는 문제로 현재 상황을 바라볼 경우, 그것은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는’ 해결 방안을 마련하는 것으로 논의가 진행된다. 그런데 이것은 ‘다름’을 ‘다양성’으로 수용하고 재발견할 수 있는 문화나 예술 영역에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관점인지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아름답지는 않더라도 조금 다른 방향성, 혹은 조금 다른 공존을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장애 관련 이슈나 상황을 문제로 전제하고 해결된 상태를 목표로 두기보다 오히려 문화예술적인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것으로 예술의 사회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호한 해결점을 목표로 우수한 국내외 사례를 참고하는 것에 앞서, 현재 국내의 상황을 우리가 얼마나 알고자 하는지 되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장애를 바라보는 관념화된 시선의 파악

장애인은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이유로 사회적으로 격리, 보호되기보다 사회적 생산성을 높이기 힘든 존재로 전제되어 비장애인과 다른 공간, 환경에서 생활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단지 숨을 쉬고 있는 사람, 일을 하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 천천히 일을 하는 사람은 일반화된 몸을 움직여 일반화된 속도로 일반화된 생산력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과 분리되어 살아간다. 이에 따라 삶의 기회에 있어서 비장애인과의 차이가 존재한다. 그 안에는 교육 참여나 문화향유의 기회도 포함된다. 그리고 일반적인 생산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사회 안에서 함께 살아가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인식 속에서 그들은 보통 보호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사회적 시스템 일부를 개선한다고 해도 쉽게 바뀔 수 없는 사안이지만 우리가 이런 인식을 얼마나 당연하게 갖게 되었는지를 살피는 것은 필요하다.
이는 우리가 장애인을 뭉뚱그려진 관념적 존재로 상상하고 있다는데서 출발할 수 있다. 휠체어를 탄 사람, 지팡이를 짚고 걷는 맹인, 영화 <말아톤>의 주인공 정도로 그려지는 장애인은 사실 장애 유형별로 특성이 매우 다르다. 또한 사회적인 요소나 어떤 사건으로 인해 후천적으로 장애를 갖게 된 사람도 많기 때문에 장애는 어떤 면에서 충분히 상상하고 경험 가능한 영역 안에 있기도 하다. 하지만 보통 ‘장애’는 관념화된 사회적 이슈로 인식되고, ‘장애인’은 도움이 필요한 소외계층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장애인 당사자나 그 가족, 그리고 비장애인도 장애, 비장애가 구분된 삶의 환경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장애-비장애의 공존을 문화예술이 해낼 수 있을지는 여전히 모호하지만, 먼저 우리가 얼마나 분리된 삶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는 있다. 그리고 ‘대체 왜 그럴까’라는 물음이 지속적으로 제기될 때,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현재 우리가 시도 가능한 공존 방식을 상상할 수 있다.

 

현재 가능하지 않은 목표나 방식에 대한 의심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파악 없이 장애인이 차별받거나 소외받는 상황을 오로지 해결하기 위해 문화나 예술을 활용할 경우, 어떤 차원의 공존도 불가능하다. 오히려 차별의 문제를 해결할 것만 같은, 혹은 부분적으로 해결의 순간을 만드는 소수만이 그 성과를 가져가게 된다. 그럼에도 구체적 근거 없이 모호한 목표나 방식을 공식화하고 그것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존재한다. 왜냐하면 사회적 약자로 전제되어 있던 장애인의 삶에 그것은 반가운 ‘희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더욱 쉬운 논리의 사회적 인식이 우리들 일상에도 작동되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업이나 활동이 정말 가능한 목표나 방식을 취하고 있는지, 혹시 그것이 다른 목적을 위해 작동되고 있거나 (누군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렇게 작동될 여지가 있는지를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그리고 공공기관일수록 이러한 태도를 더욱 공식화된 언어로 고민해야한다.

 

모호한 희망 대신 가능한 시도부터

그런 맥락으로 서울문화재단이 올해 시도하고 있는 사업이나 행사의 방향성도 살펴볼 수 있다. 5월 31일부터 6월 1일까지 양일간 동대문디자인플라자 크레아(DDP CREA)에서 진행된 ‘장애와 비장애가 공존하는 문화예술의 미래 포럼 <같이 잇는 가치>’의 경우 장애인의 창작 활동과 관련한 우수 사례를 콘텐츠 중심으로 열거하지 않고 다양한 현장의 목소리를 장애인 당사자 중심으로 소개했다. 이러한 공론의 장이 지속될 경우 장애인을 ‘위한’ 제도의 설계를 넘어 장애-비장애의 공존 방식을 다채롭게 모색하는 시도가 힘을 얻을 것이다.
잠실창작스튜디오는 ‘서울형 장애아동·청소년 예술교육 운영단체지원사업’을 새롭게 진행했는데, 6월 3일 참여단체를 선정, 발표했다. 이 사업은 교육 대상자를 장애아동·청소년으로 한정지었다. 이러한 시도가 장애, 비장애를 구분 짓지 않으면서도 예술교육에 대한 생산적 논의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선정된 단체뿐만 아니라 재단의 역할도 중요할 것이다.
또한 잠실창작스튜디오, 금천예술공장, 신당창작아케이드의 입주 작가들이 참여하는 상호티칭워크숍도 진행되고 있다. 장애 예술가를 위한 지원이 아니라 다른 감각 간의 교류와 만남을 지원하는 이러한 시도가 사업적 성과를 넘어 문화예술 분야에 확장된 질문을 던지기를 바란다.
예술 현장에서는 비장애인 관람객 중심으로 발표되던 공연을 배리어프리 방식으로 진행하는 시도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구체적인 사업이나 행사를 단체나 기관이 주도할 경우 사회적 파급력이 커지고 정치적으로 활용될 여지가 많다. 따라서 불편하지 않은 목표를 설정하고 익숙한 방식을 선택하기보다 재단이나 개별 단체, 기획자들이 낯설더라도 ‘현재 가능한 시도’가 무엇일지를 지속적으로 살펴야 할 것이다.

 

장애 예술가의 창작에 대해

한편으로 공공과 민간 영역에서 장애 예술가의 활동을 다양화하고 장애-비장애인의 경계를 줄이는 문화예술 현장을 만들려면 어떤 방향성을 추구해야 할까. 이 광범위한 질문에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술이 장애 예술가의 사회 참여 기회로만 기능하지 않아야한다. 장애인이 사회적으로 소외된 채 살아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힘든 삶에 대한 해결책으로 예술이 기능할 경우, 장애인은 예술 영역 안에서 더욱 고립되거나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머물 것이며 비장애인 중심의 예술 영역은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또한 예술에 대한 확장된 의미와 가치를 실험해보는 기회가 더욱 축소될 것이다.
둘째, 장애 예술가의 창작 활동이 몇 가지 유형으로만 고정되지 않아야 한다. 특히 최근 장애 예술가의 창작은 사회나 타인과의 관계성보다 개인의 고유성에 집중하거나, 몇 가지 매체를 주로 다루는 방식으로 유형화되고 있다. 타 분야와의 컬래버레이션이나 새로운 매체에의 탐구가 지속되는 동시대 예술 안에서 이러한 현상은 자칫 누군가의 창작을 장애의 관점으로만 해석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셋째, 장애-비장애, 장애인-창작 활동, 장애-사회 등을 매개하는 사람들의 활동이 단절되지 않아야 한다. 기존에 이러한 역할을 해왔거나 현재 하고 있는 사람들의 활동은 ‘장애인이나 사회를 위해 필요한 활동’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이들의 활동이 예술적 실험으로 나아가거나 전문화될수록 오히려 사회적으로 이것을 설명할 언어가 부족해지기도 한다. 때문에 이들은 스스로의 활동 근거를 마련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개별 경험을 통해 전문적 역량을 보유한 매개자이자 창작자이자 기획자인 이들의 역할은 장기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이들의 기회가 단절되지 않을 공식화된 장치가 필요하다.
넷째, 장애의 요소를 사회적인 주제로 만나는 기회만 마련되지 않아야 한다. 장애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사회적인 주제에 관심을 갖는 것으로 쉽게 해석된다. 그러나 장애는 우리의 일상과 그리 특별하지 않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하기에 장애를 특별한 주제로 부각시키는 문화적 기획을 늘리는 대신 서로의 삶이 얼마나 다층적으로 연결돼 있는지를 살피는 기회가 마련되어야 한다.
앞의 네 가지 의견은 대부분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 이전에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는 어떤 목표를 이룰 것 같은 희망과 더욱 거리를 두기 위함이자,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우리에게 더욱 어렵고도 필요한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장애에 대한 관심을 넘어 문화 다양성의 맥락으로

이 모든 것은 장애인의 창작 및 문화향유 기회를 위해서라기보다 문화 다양성의 실현을 위해 필요하다. 어떤 대상을 위한 문화가 아니라, 문화 자체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장애인‘도’, 장애에 대해 관심을 가진 ‘누구든지’ 각자의 문화적 경험을 만들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예술이 장애인에 대한 사회 참여 기회로 기능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또다시 연결된다.
그리고 문화가 다양해지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전략 수립과 실행 이전에 우리의 인식이나 태도가 더욱 중요함을 발견해야 한다. 이것은 효율성을 전제로 접근 가능한 영역이 아니다. ‘효율적’이라는 것은 ‘들인 노력에 비해 얻는 결과가 큰’ 것을 의미하는데 그렇다면 더욱 문화예술적인 방식과 거리가 있다. 우리는 효율적인 방안이 다급한 상황 안에 있지만 그렇다고 비효율적인 실험을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장애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장애, 비장애,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들이 공존하는 문화적 다양성을 위해 우리는 효율적일 수 없는 방식을 찾아보아야 한다. 문화나 예술은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돌파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렇게 불안하고 바쁜 상황에서도 다른 속도로 서로를 만나며 다른 시선을 찾는 순간에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문화와 예술이 시작될 것이다.

 

장애-비장애가 공존하는 문화예술포럼 <같이 잇는 가치>에서 부스 운영을 통해

장애인의 표현을 활성화하기 위해 연구, 제작한 표현도구들을 소개하였습니다.

 

이 도구들은 2018년 '장애인 문화예술교육 방향성 및 교보재 연구'를 통해 제작하였습니다.

 

*연구 보고서 보러가기 : https://bigija.tistory.com/96

 

2019 장애인 문화예술교육 방향성 및 교보재 연구 보고서 '기대하지 않고 표현으로 만나기'

장애인 문화예술교육 방향성 및 교보재 연구 보고서 기대하지 않고 표현으로 만나기 본 연구는 문화예술교육 안에서 장애인의 표현활동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영역을 다시 바라봅니다. 그 순간이 누구에게, 왜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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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셈판

 

 

 

 

발달장애인법 보드게임

 

 

 

 

 

 그리기와 소리 (신원정 제작)

 

 

 

 

그림카드

 

 

 

 

빛그림판 (띠리리제작소 제작)

 

 

 

 

이야기모양자 (릴리쿰 제작)

 

 

 

 

촉감촉감블록

 

 

 

 

본 포럼은 서울문화재단의 주관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비기자는 포럼에서 부스 외에 발제에도 참여하였습니다.

 

*포럼 발제문 '장애예술이라는 영역을 어떻게 만날지 고민하는 분들에게' 보러가기 : https://bigija.tistory.com/120

 

2019 장애-비장애가 공존하는 문화예술포럼 <같이 잇는 가치> 발제문

2019 장애-비장애가 공존하는 문화예술포럼 <같이 잇는 가치> 발제문 장애예술이라는 영역을 어떻게 만날지 고민하는 분들에게 / 창작그룹 비기자 최선영 사례 소개를 위한 긴 서론 장애예술이라는 타이틀은 그..

bigija.tistory.com

장애인 문화예술교육 방향성 및 교보재 연구 보고서
기대하지 않고 표현으로 만나기

 

 

본 연구는 문화예술교육 안에서 장애인의 표현활동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영역을 다시 바라봅니. 그 순간이 누구에게, 왜 정체된 시간으로 인식되었는지 생각해보고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표현이 이루어지고 있는 영역을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감각과 속도에 대해 어울림을 기대하지 않고 그 자체로 만날 수 있는 장치들을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본 연구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것보다 교육의 방향성과 관련한 논의 확장을 목적으로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민에 공감하거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들에게 본 연구보고서가 낯설지 않은 질문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 보고서는 아래 링크를 통해 누구나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https://drive.google.com/file/d/1GDuBqH7UjrdytxUx6qlPOHKqyMJHv2GU/view

 

 

 

목차

 

1. 장애인의 표현 바라보기

(1) 장애인의 표현을 바라볼 때 고려해야 하는 요소들

(2) 장애인의 표현, 보이지 않는 영역에 대해

(3) 장애인의 표현을 바라보는 시선들

 

2. 장애인의 표현을 활성화하기 위해 시도 가능한 방법들

(1) 표현과 관련된 요소들을 중심으로

(2) 교육 현장을 반영한 방법의 재구성

 

3. 장애인의 표현을 고려한 교보재 개발

(1) 표현의 관점을 확장하는 도구

(2) 관계적 도구

 

 

 

*  이 책자는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장애인 문화예술 지원사업’에 선정된 <성인 장애인의 자기표현 활성화를 위한 프로그램 및 교보재 연구‧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발간되었습니다.

*  이 책자에는 2018년 12월 5일에 이음센터에서 진행된 장애인 문화예술교육 방향성 및 교보재 연구 오픈테이블의 발제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픈테이블 소개 : https://bigija.tistory.com/74)

 

 

 

펴낸 날   2019년 1월
펴낸 곳   창작그룹 비기자
연구원    김지영 신원정 신재 유선 최선영
디자인    사만키로미터

 

 

 


* 인쇄본 배송을 원하시는 분은 아래 연락처로 성함/주소/신청 권수를 보내주세요.

010-8504-1077

 

 

*  배송비 : 착불(우체국택배)
*  개인정보는 우편물 발송 용도로만 사용 후 폐기합니다.

장애인 문화예술교육 방향성 및 교보재 연구 오픈테이블
기대하지 않고 표현으로 만나기

 

 

문화예술교육 안에서 장애인의 표현활동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영역을 다시 바라봅니다. 그 순간이 누구에게, 왜 정체된 시간으로 인식되었는지 생각해보고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표현이 이루어지고 있는 영역을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감각과 속도에 대해 어울림을 기대하지 않고 그 자체로 만날 수 있는 장치들을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우리는 방법을 이것저것 고민하고 시도해보지만 그것은 방법 자체를 고안해내는 것을 목적으로 두지 않습니다. 따라서 본 연구는 방법보다는 방향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민에 공감하시거나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오픈테이블에 함께 하길 바랍니다.

 

 

 

 

 

□ 일시 : 2018.12.5 (수) 2-4시
□ 장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12 이음센터 5층 이음아트홀
 참여대상 : 장애인 문화예술교육에 관심이 있는 누구나
 참가신청 : 온라인 사전신청과 현장신청 모두 가능 (
https://bit.ly/2Dn5C2C )

 

 

 

*선착순 50명 마감
*문의 : voslss@hanmail.net / 010.8504.1077 (비기자)
*본 행사는 문자통역이 지원됩니다.

 

 

 

*세부구성
1. 발제 : 유선(노들장애인야간학교 낮수업 교사) / 장애인의 표현을 바라볼 때 고려해야하는 요소들
2. 발제 : 최선영(창작그룹 비기자 대표) / 장애인의 표현, 보이지 않는 영역에 대해
3. 발제 : 김지영(예술가) / 장애인의 표현을 활성화하기 위해 시도 가능한 방법들
4. 발제 : 신재(0set프로젝트, 공연 연출) / 장애인의 표현을 바라보는 시선들
5. 발제 : 신원정(미디어아티스트) / 관계적 도구
6. 오픈 토론

 

 

 

*발제자 소개

1. 발제 : 장애인의 표현을 바라볼 때 고려해야 하는 요소들

유선 / 노들장애인야학 <발달장애인낮수업> 교사

2018 <진숍 턱걸이>, 턱걸이마을 공동체 아카이브 프로젝트 공동기획, 경기문화재단

2018 <함께 먹는다는 행위에 대하여> 참여작가, 공공예찬, 안양파빌리온

2016 더 빌리지 프로그램 <모두의 식탁> 참여작가, 미디어시티서울2016, 서울시립미술관

2011-2018 장애인문화예술판 <인포숍카페별꼴> 매니저

 

2. 발제 : 장애인의 표현, 보이지 않는 영역에 대해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대표

2018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비평웹진 <지지봄봄> 편집장

2018 <장애예술인 창작 활성화 프로그램 개발> 공동연구원

2016 <동아시아 장애인 문화예술 일자리와 창의적 사회통합 연구> 공동연구원

2014 장애문화예술교육 실태조사 <장애문화예술교육, 정형과 비정형의 교차> 공동연구원

 

3. 발제 : 장애인의 표현을 활성화하기 위해 시도 가능한 방법들

김지영 / 예술가

2016-2018 서부장애인 복지관 틈사이로+로사이드 <링크마켓 잇-> 공동진행 및 손놀이 워크숍 강사

2016 일본 간사이지역 장애인/홈리스 사회문화예술교육 조사연구 참여작가

2014 전시 <자리짜기 좋은 사회> 기획, 시민청 B1, 서울문화재단

2013 장애인분야 문화예술교육 시범사업 <장애인과 예술가 친구 사귀기> 별거아니다 프로젝트 참여작가

 

4. 발제 : 장애인의 표현을 바라보는 시선들

신재 / 0set프로젝트, 공연 연출

2018 참여 워크숍 <없는 사람> 연출

2018 <나는 인간> 연출

2016 무지개다리문화다양성사업 <평등한 입장 턱없는 극장> 프로젝트 매니저

2014-2015 노들장애인야학 현대문화/연극 교사 

 

5. 발제 : 관계적 도구

신원정 / 미디어 아티스트

2016 문화다양성사업 에이아카이브/사운드 진 워크숍' 참여작가, 인포숍카페별꼴

2015 전시 사물학 II: 제작자들의 도시참여작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6-2018 노들장애인야학 <발달장애인낮수업> 교사

2016 서부장애인 복지관 틈사이로+로사이드 <우리 함께 잇-> 손놀이 워크숍 강사

 

 

 

 

 

주관 / 창작그룹 비기자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 (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웹진 [이음] 2호_장애 예술인 역량강화 : 교류와 협력

 

 

 

장애 예술인 창작 역량 강화를 둘러싼 질문들 우리는 만나려 하는가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장애 예술이 장애인의 사회참여 또는 직업군 개발을 위주로 활성화되고 있지는 않은가. 

예술이 창작자 또는 그 주변 사람들에게 그러한 목적으로 전제될 때, 그 예술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까. 

우리는 왜 창작을 할까.

 

이것은 내가 올해 초 「장애 예술인 창작 활성화 프로그램 개발 연구」에 공동연구원으로 참여하며 혼자 노트에 적었던 질문들이다. 국내의 장애 예술은 다른 나라에 비해 창작의 시간이 오래 쌓이지 않았기에 이제야 그것의 가치와 방향을 논의하는 시점에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장애 예술인의 창작 활성화는, 장애인의 삶이나 몸의 속도와 어긋날 정도로 활발하게 공식 활동을 하는 것을 전제로 두곤 한다. 대학 교육만 봐도, 비장애 예술인 대부분은 예술 관련 전공자이지만 장애인은 대학 진학도 힘들고 기본적인 예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매우 적다. 따라서 장애 예술인의 창작은 일반적 시각에서의 ‘창작이 활성화되고 있는 상태’가 아닌 여러 차원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특히 그 상태가 ‘장애 예술인의 역량이 강화된 상태’와도 겹쳐서 인식된다는 점에서, 과연 그 상태는 어떤 사회적 기대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지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어떤 장애 예술인이 수차례 문화행사에 참여하고 작품도 유명해졌으나 개별 감각과 표현을 마주할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하고 있다면, 혹은 활발한 공식 활동을 그가 원치 않는다면, 그것은 어떤 상태일까. 장애인의 사회참여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창작활동이 그것의 돌파구로만 작용해서는 안 되며 우리 스스로 창작활동을 그 위험성 안에 놓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 순간 미련하도록 근본적인 질문이 이어지지 못하면 우리는 눈에 띄는 창작의 순간으로 우르르 뱃머리를 돌리고 그 상태를 활성화하기 위한 방법들만 기획 해나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질문을 찾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국내의 사례는 다양할까.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내에는 여러 논의를 끌어낼 만한 개별 시도들이 많지 않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관련 프로그램이 얼마나 여러 곳에서 많이 실행되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다양한 논의점을 담고 있느냐이다. 공공 지원 체계 내에서도 장애 예술인의 장애특성이나 개별 감각을 고려한 창작 프로그램은 다양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특히 장애 예술인의 창작 지원은 조금씩 늘고 있고 장애인의 문화 향수 지원도 이어지고 있지만 개별 창작을 내밀하게 살피거나 전통적인 창작 외의 다른 방식을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부족하다.

이렇듯 장애 예술인 대상의 창작 프로그램이 부족하다 보니, 비장애 예술인과 교류하거나 협업하는 활동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서로 다른 창작자들 간의 네트워크나 창작활동은 각자에게 기존의 자기 작업을 뒤흔들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함에도 말이다. 새로운 시선이나 표현을 경험하거나 배우며 따로 또 같이 무한한 실험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장애 예술인이 참여할 수 있는 창작 프로그램은 ‘다른’ 감각과 표현들 간의 ‘만남’을 다채롭게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장애인의 삶이 일반화된 사회로부터 오랜 시간 격리되고 보호, 관리되어 왔던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이젠 장애와 비장애가 만나는 현장마저도 기획되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예술은 이러한 상황의 부자연스러움, 부조리함을 소재화하거나 비판하는 것을 넘어 장애와 비장애가 만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했던 ‘장애 예술인의 창작 활성화’ 또는 ‘장애 예술인의 역량 강화’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접근해볼 수 있지 않을까.

 

장애 예술인과 비장애 예술인의 창작이 함께 활성화되는 것, 또는 역량이 함께 강화되는 것.

 

나는 무엇보다 서로가 만나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이것은 누가 누구를 만나주는 것이 아니다. 누가 누군가에게 배우기 위해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일단 서로의 생각이나 감각, 표현, 혹은 존재에 대해 자발적 관심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장애 예술인과 창작을 하는 비장애 예술인의 활동이 ‘착한’ 일로 평가되지 않아야 하며 비장애 예술인과 교류하는 장애 예술인이 ‘의지하는’ 태도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한다. 이러한 상태가 여러 현장에서 발생되고 다양한 장르 안에서 지속된다면 그것이 누구에게든 창작이 활성화되는 상태이자 역량이 강화되는 상태가 아닐까.

이러한 관점에서 국내의 여러 사례를 조사해보았을 때, 장애와 비장애가 만나는 장이 섬세한 기획 안에서 이루어진 사례는 많지 않았다. 그것이 지속되는 곳은 더욱 찾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사례를 언급하자면 ‘인포숍카페별꼴’에서 진행한 <에이아카이브: 소리(a-archive: sound)>(이하 ‘에이아카이브’)를 살펴볼 수 있다. 서울시 성북구에 위치한 인포숍카페별꼴(이하 ‘별꼴’)은 비영리단체 ‘장애인문화예술 판’이 운영하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우러지는 대안 공간으로 2011년에 문을 열었다. 매주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누구나 출입할 수 있는 카페로 운영 중이다. 도서관이나 서점에 두지 않은 책이나 진(ZINE, 개인이나 그룹이 이윤과 관계없이 자신의 힘으로 소규모 인쇄하는 출판물), 전단 등을 모은 아카이브가 있고, 소수 집단과 사회 운동, 서브 컬처에 관련된 전시, 영화 상영, 라이브, 워크숍 등을 하고 있다.

‘에이아카이브’는 2016년 성북문화재단의 문화다양성 사업 지원을 받아 참여자들이 자기를 표현하는 방식을 다 같이 생각해 보고, 자신만의 소리진(ZINE)을 만들어 전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장애인만을 참여대상으로 정해두고 기획하지 않았다는 점, 그렇기 때문에 장애인이 다양한 사람 중 일부로 참여하고 어울릴 수 있었다는 점이 에이아카이브의 큰 특징이다. 그러나 참여하는 사람 중에는 언어가 다른 사람,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을 하는 사람, 언어 장애가 있는 사람, 신체적인 장애로 기존의 악기나 도구를 다루는 것이 어려운 사람 등이 뒤섞여 있었다.

별꼴은 노들장애인야간학교(이하 ‘노들야학’)의 발달장애인 수업과 연계하고 미디어 아티스트 팀 다이애나밴드와 협력하여 에이아카이브를 진행하였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포함되어 13명의 참여자가 2개월 간 10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결과 전시회를 개최하고 영상작품을 상영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장애 예술 자체를 강조하기보다 문화다양성 담론 안에서 활동 맥락을 소개하였다.

자세한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다이애나밴드, 노들야학 교사가 함께 사전 회의를 통해 중증장애인 참여자 수요 조사를 진행했다. 집에서 이동이 쉽지 않은 중증장애인 참여자들을 만나기 위해 노들야학이나 집으로 찾아가 사전 연구 워크숍을 5회 진행했다. 이후 외부 참여자(주로 비장애인, 예술가, 연구자, 지역주민)를 모집했고, 사전 연구 워크숍에 참여한 중증장애인 참여자와 집중 워크숍을 5회 진행하고, 다 함께 전시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참여자들은 각자의 창작물(목소리나 주변의 소리를 녹음한 카세트테이프 작업물, 중증장애인이 연주할 수 있는 신시사이저, 점자를 이용한 사운드 인쇄물 등)을 만들었다.

이 활동은 장애 예술인이라고 불리거나 그러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참여했던 사례는 아니다. 장애 예술인만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기획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소리를 발견하고 표현해보려 했던 지점은 충분히 예술적 가능성을 갖는다. 오히려 이러한 사례가 장애 예술을 폭넓게 상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사례는 이러한 활동을 여러 형태로 지속하고 있는 별꼴의 활동 전반과 연결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별꼴은 2011년부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경계 없이 어울릴 수 있는 현장을 일상적, 문화적, 예술적, 사회적으로 만들어나가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와 맞물려 문화나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장애인이 보다 편하게 이곳을 방문하고 있으며 장애 여부를 떠나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만나고 소통하고 있다.

또한 이 사례는 장애와 비장애가 서로를 만날 수 있는 현장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장애 예술인과 비장애 예술인의 창작이 함께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만남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전의 장애 예술인 대상 역량강화 프로그램들이, 대부분 비장애 예술인의 예술 언어를 학습하고 경험하는 것으로 진행되었지만 이와는 다른 관점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언급했듯, 장애 예술인과 비장애 예술인 모두의 창작을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특히 장애 예술을 사회적으로 특별한 위치에 두지 않기 위해 이러한 모색은 더욱 필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왜 창작을 할까’라는 질문은 스스로이자 서로를 향한 질문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우리는 왜 함께 창작을 해야 할까.

 

그리고 ‘다른’ 감각들이 만나 함께 창작을 하기 위해서는 질문을 조금 바꿔볼 수 있다.

 

우리가 함께 창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함께 창작하고 싶어 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이 부족한 것일까.

어쩌면 창작 활성화 프로그램이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관심을 기획된 자리로라도 촉발시켜야만 하는 상황 때문이 아닐까.

 

우연한 만남이든 기획된 만남이든 우리는 그 자리에서 누군가의 창작역량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해볼 수 있는 것을 찾아보아야 한다. 창작, 혹은 예술은 기대했던 답을 찾게 된 상태. 그래서 사회적 존재 증명을 하게 된 상태. 예술가라고 불리게 된 상태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태가 될지 모른 채로 현재 가능한 것, 혹은 할 수밖에 없는 것을 해보는 그 순간에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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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아카이브: 소리> 전시 ⓒ 우에타 지로

 

 

 

* 「장애 예술인 창작 활성화 프로그램 개발 연구」(2018,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는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가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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