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로아트가 운영하는 대야미스튜디오에서 모두를 위한 문화예술공간 ‘큰배미곳아트센터’ 모델링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대야미스튜디오에서 작업하고 있는 창작자들과 각자가 상상하는 아트센터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공간을 모형으로 만들어보았습니다. 본 워크숍은 진행과정과 결과물을 구체적으로 정해두지 않고 대화의 흐름, 참여 범위에 따라 운영되었습니다. 오히려 그 과정을 기록자가 꾸준히 기록하였는데 첫번째 시간의 기록을 공유합니다. 첫 날의 대화가 이후 일곱 번의 만남에서 어떤 시간, 공간, 상상으로 이어졌을지는 사진기록을 통해 그려볼 수 있습니다.
(본 글은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2020년 지역특성화지원사업 <발달장애 보호자를 위한 문화예술워크숍 ‘갈치살롱’> 연구모임의 결과물로 작성되었습니다.)
장애인 자녀의 ‘예술하기’가 앞서나가기 전에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대표
1. 나의 부모는 나의 ‘예술하기’를 사실상 반대하는데
그런데 장애인의 부모는 왜 자녀의 ‘예술하기’를 응원하는 경우가 더 많을까. 이것이 나의 솔직한 질문이다. 예술은 멋지고 환상적인 말이지만 현실에서는 발 디딜 곳 없는 붕 뜬 무엇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예술하기’ 그 자체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데에 어려움이 생길 때도 많다. 그래서 예술인 관련 복지제도나 지원제도의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현장에서 이어지고 있고 불안정한 생계 때문에 창작활동을 그만두는 사람들도 많다. 이것은 인간의 ‘예술하기’가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지속되는 것의 한계 및 어려움을 보여준다. 그런데, (모두는 아니지만) 장애인의 부모는 왜 자녀의 ‘예술하기’를 응원하고 있을까. 하루라도 더 자녀를 취업 프로그램에 참여시키는 것이 시대적 흐름에 맞을 텐데 말이다. 바로 이 순간, 꼭 그렇게 무언가를 생산하거나 돈을 벌기 위해서만 자녀가 예술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답변이 돌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그 외에 어떤 의미에 동의하는 것일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에 동의하느냐와 다르다. 추후 자녀의 ‘예술하기’가 어떤 가치나 상태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는 의미다. 비효율적이거나 미련하게 ‘가능성’보다 ‘의미’를 우선적으로 생각해보는 것이 예술일 수 있기 때문이다.
2.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예술하기’의 형태는 어떤 모습으로 전제되는가
그 ‘의미’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술하기’가 무엇일 수 있을지 논의가 필요하다. 무엇을 하는 것이 ‘예술하기’로 전제되는가. 그림 그리기? 악기 연주하기? 도자기 만들기? 소설이나 시 쓰기? 무대 위에서 연기하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예술하기’의 형태들 외에 생각해볼 수 있는 상태나 상황, 행위는 무엇이 있을까. 이와 관련한 논의가 풍성하게 이루어져야 그것을 통해 ‘예술하기’의 ‘의미’를 이야기나눌 수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장애인, 장애인 부모, 그리고 장애인의 ‘예술하기’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예술하기’의 다양한 양상을 얼마나 전제하고 있는지, 그 다양성 안에 존재하는 관점의 차이를 얼마나 인정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조금 다르게 질문을 해보고자 한다.
3. 만약 나의 자녀가 똥이나 오줌을 10년 넘게 정성스럽게 그리고 만든다면?
이것은 ‘예술하기’가 될 수 있을까? 조금 더 나아가 자녀의 탐구 및 실천이 일상화, 구체화되면서 자녀가 자주 똥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오줌 색깔이 잘 나타나는 물감 섞기를 실험하며 이와 관련한 대화를 주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시도한다면 그것 자체도 ‘예술하기’가 될 수 있을까? 이때 가장 중요한 전제는, 이러한 행위가 자본이나 사회적 기회를 생산해내지 못하고 있을 때라는 것이다. 이것은 극단적인 예시 같지만 모든 인간이 아름답거나 깨끗하거나 따뜻한 것에만 집중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매우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예술하기’의 일부로 충분히 언급 가능하다.
여기에서 묻고 싶은 것은 ‘예술하기’를 정의하는 것에 있어서, ‘그래도 이래야 한다’ 혹은 ‘적어도 이것은 안 했으면 좋겠다’는 어떤 시선의 개입 가능성이다. 우리는 이러한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채로 (장애 여부를 떠나) 누군가의 ‘예술하기’를 바라보고 그것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런데 더러운 오물 덩어리에 대한 것이 아니더라도 죽음, 폭력, 혐오, 소외, 차별, 가난, 파괴, 공포 등과 관련한 무겁거나 우울하거나 반갑지 않은 이야기는 예술 안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다뤄지고 있다. 또한 이것을 예술적으로 구체화하는 방식도 익숙하지 않거나 해석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술하기’에 대한 내용적, 과정적, 행위적, 정서적 관점은 다양해질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예술하기’와 낯설거나 버거운 ‘예술하기’가 동등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예술하기’의 의미가 사회적 의미 외에 비사회적 의미, 비효율성의 의미, 무거움의 의미, 해석되기 어려움의 의미 등으로 확장될 수 있고 그 안에서 (장애 여부를 떠나) 다양한 존재가 자기표현의 자리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자녀의 어떤 표현행위 혹은 ‘예술하기’는 부모의 동의나 긍정을 기다리는 수동적 위치에서, 질문을 주고받을 수 있는 능동적 위치로 옮겨갈 수 있다.
4. 능동적* 위치가 전제된 상호적 질문
*능동적 : 더불어 ‘능동적’이라는 표현이 갖는 여러 한계와 더 넓어져야 할 의미를 강조하고 싶다. 누군가는 ‘능동적’인 상태를 갖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매우 적극적이거나 활발한 상태로서의 ‘능동적’ 태도만 전제될 경우 그 범위에 들어오기 어려운 사람도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특히 장애인의 경우, 자신의 욕구가 있는 상태, 그것을 작은 눈빛이나 신체 근육의 일부로 전달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상태 등도 ‘능동적’인 상태 안에 포함될 필요가 있다.
자녀와 부모의 대화가 궁금함으로 시작되기를 바란다. 자녀의 질문이 “나의 부모는 나에게 무엇이 궁금할까?”이기를. 부모의 질문이 “나의 자녀는 왜 그것을 할까?”이기를.
그런데 부모가 “나의 자녀는 왜 그것을 할까?”하고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그 과정도 지난할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이 급해진다. 자녀의 ‘예술하기’를 지지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그렸던 미래의 상(狀)과 점점 멀어지는 게 아닌가 불안해지기도 한다. ‘예술하기’의 다양한 형태와 찰나를 인정해버리면 ‘예술을 함으로써 사회와 오히려 멀어질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도무지 어디로 가야 할지, 혹은 다시 반대로 갈 수는 있을지 걱정도 앞선다.
5. 이제, 장애인 부모는 앞으로의 자녀의 삶을 어떻게 그려볼 수 있을까?
다급함과 불안함, 모호함이 주변을 감쌀 때 이제야 ‘예술하기’의 본모습이 우리 곁에 왔다고 나는 이야기하고 싶다. 그것이 나의 부모가 나의 ‘예술하기’를 사실상 반대하는 이유라고도 말할 수 있다. 자, 그럼 이제, 장애인 부모는 앞으로의 자녀의 삶을 ‘예술하기’와 같이 어떻게 그려볼 것인가. 이 질문은 “장애인이 ‘예술하기’를 통해 미래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아니다. ‘예술하기’는 장애인의 삶 혹은 생활이나 생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으며 혹은 낯설거나 불편한 영향만 미칠 수 있다. 또는 다수가 바라는 것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장애인의 삶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그래서 질문이 다르게 필요하다. “장애인의 삶을 ‘예술하기’와 같이 어떻게 그려볼 것인가”. 역시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하기’에 대한, 그리고 자녀의 삶에 대한 다양한 상(狀)이다. 솔직해져야 하는 순간이다. 그 상(狀)은 자녀의 상(狀)과 비슷한가. 달라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기다렸다는 듯이 현실의 문제들, 안정적이어야 할 미래가 언급될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예술하기’는 그것과 거리가 있는 경우가 오히려 많다. 그래서 더욱 솔직해져야 하는 것이다. 혹은 더욱 냉정해지면서도 치열해져야 하거나.
6. 처음으로 돌아가
사실 나는 ‘예술하기’를 하고 있다. 단지 나의 부모가 궁금해하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나는 모호한 생각들을 종이에 적고 팔리지 않는 노래를 만들고 흩어져버리는 전시나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나의 활동은 종종 동시대 문화예술 관계자에게도 ‘예술하기’로 해석된다. 그러나 그뿐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나도 그뿐이면 충분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모두 나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와 다른 사람만이 ‘예술하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듯 우리는 ‘예술하기’를 제각각 다르게 전제하거나 상상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점이나 문제는 아니다. 이것은 정의하거나 유형화할 수 없다는 예술의 큰 특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특히 장애인의 ‘예술하기’ 혹은 창작활동은 분명하게 유형화되거나 타인에 의해 정의되곤 한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근대적인 예술가의 상(狀)이 존재한다. (나의 부모가 휴대폰에 나를 ‘피카소’로 저장해두었듯이 말이다.) 개인의 고유성을 바탕으로 자기표현에 몰두하며 이따금 작품 발표회를 통해 결과를 사회적으로 드러내고 인정받는. 그러다 어떤 결과물이 자본의 가치로 환원이 되기도 하고 그러한 일련의 과정이 성사되면 누군가는 그 사람을 ‘예술가’로 부를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동시대 예술가의 삶, 활동방식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는 점에서 장애인의 ‘예술하기’가 몇 가지 유형으로만 전제되는 것에는 관점의 한계가 있다.
또한 부모 개개인별로 전제하는 자녀의 창작활동과 이를 통한 궁극적 삶의 상(狀)이 각기 다름에도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 뜨거운 논의로 이어지는 일은 많지 않다. 예술이나 창작 등이 갖는 모호함에 대해 폭넓은 대화를 하기에는 각자의 경험과 인식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각자의 상(狀)이 적당히 비슷할 것이라는 추측과 기대는 지속되는데 현실 속 대화와 선택들 안에서 그 관점들은 보기 좋게 서로를 빗겨나가곤 한다. 그 엇갈림의 이유, 그리고 엇갈림에도 같이 가기 위한 태도에 대해 부모들과의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엇갈리지 않는 하나의 상(狀)을 도출해내는 것이 대화의 목적은 아니다.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를 인정하면, 언젠가 만나기를 바라는 대신 만나지 못함 사이의 거리가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거리를 만들어낸 각자의 이유, 관계의 이유를 들여다보려고 하면 (서로에게 바라던) 존중이 조금씩 가능할 수 있다.
7. 그래서, 부모들 간의 거리를 인정한다면
서로에게 요구되어야 할 것은 변화가 아니라 공감일 수 있다. 장애인 자녀를 낳고 키워온 부모의 삶이 모두 슬프고 고되게 해석될 필요는 없으나 사회와 가정 안에서 타인이 장애인과 그 가족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장애인의 부모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개인 이전에 장애인의 보호자로서 호명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렇게 10년, 20년 시간이 쌓이고 생활이 이어지고 감정도 생기고 난 이후의 부모에게 이제 자녀의 ‘예술하기’에 대한 동시대적 관점을 익히고 열린 태도와 평안한 마음을 유지하라고 하는 것은 너무 일방적인 태도다. 부모들 간에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장애인의 부모’이기만 한 채로 비슷하게 살아온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더 넉넉하게 살았고 누군가는 더 정신없이 살았고 누군가는 오로지 버티면서 살았다. 그건 그 자체만으로 공감받아야 하고 그 삶 안에서 생성된 경험과 관점과 지식의 차이도 존중되어야 한다. 이제 한 명씩 말해보자. 자녀의 ‘예술하기’에 대해 부모는 무엇을 전제하고 있는지, 혹은 전제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는지. 각자의 삶에서 가능한 ‘예술하기’가 있을 수 있으므로 우리는 모두 나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외면할 수 없는 오늘로서의 ‘삶’에 낯선 ‘예술하기’까지 더해져 모호한 토론이 시작되기 전에 오늘의 내가 자녀와 함께 살아감에 있어서 어떤 상(狀)을 그리고 있는지 이제 이야기를 나눠보자.
* 이 글은 제5회 국제예술교육실천가대회(ITAC5)의 세 개의 주제 중 '언러닝unlearning' 파트에서 기획되었던 사전프로젝트 관련 원고입니다.
우리는 길을 잃을 수 있다.
창작그룹 비기자 대표 / 최선영
“이 활동의 목적이 뭐죠?”
아리송한 문장 한 줄이 제시되고 밑도 끝도 없는 수수께끼 놀이가 시작되자, 누군가 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진다.
“일단 한번 해보시죠.”
수수께끼를 던진 진행자가 대답한다. 하지만 목표와 방법이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 어떤 놀이에 대해 누군가는 계속해서 불안함, 혹은 의구심을 품는다. <창작그룹 비기자>(이하 <비기자>)는 이런 놀이의 기획과 진행을 자주 해오고 있고 그것의 목적을 묻는 사람들도 자주 만나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위에서 노를 젓는 상황도 아닌데, 그렇게 위험하고 막막한 일이 아니라면 한번 생각의 노를 저어보자고 하고 싶은데, 사람들은 단지 책상에 앉아 질문을 던지는 것에도 불안함, 내지는 불편함을 드러낸다. 일하기도 바쁜 사람들을 불러모아 놓고 알쏭달쏭한 놀이를 제안한다며 불만도 내비치는 이도 있다. 그래도, 혹은 그래서, <비기자>는 일단 한 번 해보자고 제안한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를 개발시키는 것에 익숙한 우리가, 같이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이 불가사의한 놀이, 혹은 무언가에 대해 목적을 확인하기 전에, 그것이 무엇일지 같이 찾아보자고.
이러한 생각이 ‘언러닝’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그와 관련한 힌트는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러닝’은 학습된 개념, 관념, 언어, 학습하려는 관성, 학습과정을 지배하는 사회적 구조나 가치관 등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행위와 실천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언러닝’은 낯설고 어렵고 불편하다. 특히 예술교육실천가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안정적이고 안전하게 살고 싶은(혹은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언러닝’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쩌면 그 쉽지 않음을 마주하거나 인정하는 것부터가 ‘언러닝’의 시작일 수 있지 않을까.
특히 <비기자>는 코로나19로 인한 재난시대를 경험하며 그동안의 논리성, 합리성, 계획성을 토대로 현재와 미래를 예측하거나 확정하는 데에 한계를 느끼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발빠른 대처능력이나 해결방안을 마련하고 그것을 향해 달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우리 스스로 길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 상황에서 각자 덜 불안해하거나 즐기거나 혹은 방황을 통해 무언가를 찾는 힘을 길러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더욱 적극적으로 ‘길을 잃기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사전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 만나기는 하지만 만나서 무엇을 할지는 이야기하지 않은 채. 오히려 이러한 ‘적극적 방황’에 공감하는 이들을 기다린다는 짧은 멘트를 사전프로젝트의 참여자 모집 포스터에 남겨두었다.
사전프로젝트는 워크샵 방식으로 총 2회, 각 3시간씩 다른 장소에서 이뤄졌다. 워크샵마다 7명 정도의 예술교육실천가, 혹은 이 프로젝트에 호기심이 있는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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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사전프로젝트 / 2020.7.28. / 인포숍카페 별꼴 *
자신이 무엇을 할지 모른채 모인(몰라도 괜찮은) 사람들이 둥그렇게 둘러 앉았다. 진행자(비기자)의 인사와 진행에 따라 목적없고 모호한 ‘그림받아쓰기’(Drawing Dictation)를 시작했다. ‘그림받아쓰기’는 한 명이 한 장의 그림을 혼자만 보면서 5가지의 이야기를 하고 그것을 토대로 나머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토대로 질문을 하며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다. 이 활동의 이름이 ‘그림받아쓰기’이니 더욱 처음의 그림과 비슷하게 그림을 그려야할 것만 같다. 그러나 진행자는 그것만이 목적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야기를 듣고 떠오르는대로, 그릴 수 있는 만큼만, 혹은 자신이 상상하는대로 그려보는 것도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참여자A가 한 장의 그림을 보며 이렇게 5개의 문장을 이야기했다.
1. 대머리 남자가 승모근이 뻐근한 상태로 걷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이 할 수 있는 기적 중에 하나를 터득했습니다. 3. 남자는 계단을 내려가지도 않았는데, 가고 있는 방향으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4. 대머리 남자는 사실 4명입니다. 5. 한 명은 장님이고 세 명은 눈이 부셨습니다.
참여자들이 질문을 시작했다. 진행자가 어떤 질문을 해도 상관없다고 말했으나 대부분 그림의 시각적 구성을 확인하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진행자는 “예”, “아니오” 혹은 “모르겠습니다” 중 하나로만 답변할 수 있다.
“계단의 경사가 심한가요?”
“대머리라고 하면, 머리털이 하나도 없는 건가요?”
“사람 말고 다른 생물체가 있나요?”
“승모근이 많이 솟아있나요?”
“기적을 행할 때 선글라스가 필요한가요?”
“남자들이 티셔츠를 입고 있나요?”
그러다 점점 질문을 더 쪼개어 자세하게 하게 되었다. 혹은 그림을 그리는 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지만 궁금한 것들을 질문하게 되었고 이따금 혼잣말 같은 질문도 하게 되었다.
“그림 속에 계단이 있긴 했어요?”
“남자 4명이 일렬로 서있는데 세 명은 선글라스를 꼈고 한 명은 장님인 것 같다고요? 그게 뭐지?”
“그 남자가 직업이 있다고요? 그건 또 뭐지?”
“예수님이 할 수 있는 기적이 뭐가 있지? 검색해 봐도 돼요?”
30분 이상 질문과 대화를 주고 받은 후에 각자 그림을 그리고 처음에 참여자A가 혼자 봤던 그림을 모두에게 공개했다. 묘하게 비슷한 그림, 비슷하려고 딱히 애쓰지 않은 그림, 비슷하지 않을까봐 조심조심 그리다 미완성이 된 그림 등이 각자의 눈에 들어왔다. ‘그림받아쓰기’를 하며 느낀 소감을 나눠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만의 생각에 갇혀서 질문을 해요. 각자가 떠올리는 상이 이미 있는 거죠. 그럴 때는 그 상이 맞는지 확인하는 대신 여러 질문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질문해야 할지 난감한 것 같아요.”
“같은 이야기를 듣고도 각자 다른 그림이 나오는 게 흥미로워요.”
참여자들과 다른 그림을 한 장 골라 ITAC5의 아트프로젝트에서 ‘그림받아쓰기’를 이어가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그림에 대한 5가지 문장은 참여자들과 함께 의논해서 다음과 같이 정했다.
1. 나는 어디로 갈지 모르겠어요. 2. 나는 머리가 갈라져있고 팔이 매우 길어요. 3. 나는 의자에 앉아있어요. 4. 내가 키를 쥐고 있어요. 5. 거울에는 나와 다른 모습이 비춰져요.
이 5개의 문장을 바탕으로 전세계의 예술교육실천가(Teaching Artist)들은 어떤 그림을 그릴까? 다양한 상상과 표현이 온라인 컨퍼런스 현장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공유될 것이다.
‘그림받아쓰기’에 이어서 이번에는 제시된 그림 없이 문장만 제시하고 이 문장 안에 잘 그려지지 않는 전체적인 상황을 질문을 통해 맞춰보기로 했다. 물론 이 문장을 말하는 사람은 그 상황을 모두 알고 있다. ‘그림받아쓰기’와 달리 이 활동에는 정답이 있는 것이다. 이 활동 혹은 놀이의 제목은 ‘이야기의 나머지’이다. 제시된 이야기의 나머지를 상상하고 맞춰보는 것이다. 제시된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그는 연기를 끝낸 후, 큰 박수를 받지는 못했지만 삶이 편안해졌습니다.
그가 어떤 연기를 했기에 큰 박수를 받지 못했지만 삶이 편안해졌을지 참여자들이 알아내기 위해 질문을 시작했다. 답변하는 사람은 역시나 “예”, “아니오” 혹은 “모르겠습니다” 중 하나로만 답변할 수 있다.
“그는 죽었나요?”
“몰래카메라인가요?”
“그 편안함은 정서적인 편안함인가요?”
“그가 부유해졌나요?”
“그는 무대 위에서 연기를 했나요?”
“그에게는 가족이 있나요?”
“그 연기는 남이 시켜서 하는 연기인가요?”
그림도 없으니 질문이 더욱 구체적이면서도 다양해야 했고 답변하는 사람도 (답이 있음에도) 자신이 그려놓은 상황을 전제로 답변해야 했다. 참여자들의 질문은 더욱 산으로 가기도 했고 뜬금없어 보이는 질문 하나 덕분에 단번에 제자리로 돌아오기도 했다.
이 ‘이야기의 나머지’에 대한 정답은 이 글에서는 공개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가 모호한 것을 계속 궁금해할 때, ‘언러닝’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길을 잃더라도 말이다.
첫 번째 사전프로젝트를 마치며 참여자들은 이런 소감을 남겼다.
“최근에는 어느 길로 가야할지 고민을 참 많이 했어요. 근데 여기서는 제가 생각하려는 것의 정반대더라고요. 그래서 신선했어요. 적극적으로 방황하자는 말이 좋았어요.”
“오랜만에 머리가 말랑말랑해지는 느낌이에요. 지금껏 갖춰진 생각 속에서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림은 그리는 재미가 있었는데, 문장이 제시되니까 자꾸 맞추려고 하더라고요. 제대로 못 맞췄을 때는 자책하기도 하고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프로그램을 이수한다고 하면 가성비를 따져요. 이걸 들어서 내가 얻는 게 뭐지? 하면서요. 따지고 보면 쓸모없는 건 없잖아요. 어떻게든 도움이 되니까요. 사람들이 그러는 데에는 사회가 한몫하는 것 같아요. 불확실함을 지양하는 세상이니까요. 오늘은 불확실한 것도 괜찮다고 위로받는 시간이었어요.”
“안전하게 길을 헤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 다들 처음 만났는데도 편안했어요.”
“저는 연필, 지우개, 노트가 주는 부드럽고 편안한 느낌이 좋았어요. 맛있는 커피와 다과도, 이런 안전한 느낌의 공간도요. 감성을 자극했다고 해야 할까요. 일반 회의실에서 했으면 뭔가 초조했을 것 같아요.”
** 두 번째 사전프로젝트 / 2020.8.4. / 띠리리제작소 **
역시나 자신이 무엇을 할지 모른채 모인(몰라도 괜찮은) 8명의 사람들이 둥그렇게 둘러 앉았다. 진행자(비기자)의 진행에 따라 몇 가지의 게임 같은 대화를 나눴다. 여기에서는 그 중 세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게임 [너도나도]
하나의 주제어를 정하고 그 밑에 그 주제와 관련된 것을 10개 적어보았다. 그 주제어와 관련해서 나만의 관점이라기보다는 다른 참가자들이 썼을 법한 단어를 생각해서 써보았다. 모두가 단어를 쓰고난 후 각자 쓴 것들을 공유했다. 제시한 단어가 다른 참가자들이 쓴 것과 일치하면 인원 수에 따라서 점수를 얻는다. 단,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했을 때 철자가 하나라도 다르면 그건 서로 다른 것이 된다.
주제어는 ‘길’이었다. 강아지똥, 나침반, 걷다, 산책, 끝, 배수구, 앞으로, 이정표, 선택, 인생, 신발, 동행 등등 여러 단어가 튀어나온다. 한 가지 주제어에 대해서 단어를 적어 보면, 그 사람이 어떤식으로 사고하거나 언어화하는지에 대해 어림짐작할 수 있다. ‘길’이라는 단어에서 누구는 자연을 떠올렸고 누구는 삶을 떠올렸다. 또한 누군가는 ‘길’을 걸으며 자신이 보거나 경험한 것들을 떠올렸고 누군가는 ‘길’이라는 개념과 연관된 상징적 단어들을 떠올렸다. 본인이 적은 단어들을 말하는 도중에 “나 너무 메말라있나?”라고 누군가가 읊조리기도 했고 다른 사람이 쓴 단어에 “어떻게 그게 떠올라요?”라고 질문하기도 했다.
비슷한 방식으로 다른 주제어를 제시하고 ‘너도나도’ 게임을 몇 차례 해보았다. 과연 너도 나도 이걸 떠올리겠지 했던 추측이 여지없이 빗겨나갔다. 누군가는 남들과 너무 다른 자신의 사고방식이나 관점을 확인하며 조용히 웃기도 했다. 서로가 각자의 길 위에서 생각하며 단어를 적어보았지만 그 과정에서도 서로를 만나려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두 번째 게임 [가치게임]
조금 전에 적었던 단어들을 빈 카드에 하나씩 적어 카드 더미를 만들었다. 진행자가 카드 더미에서 5장의 카드를 임의로 선택하여 5개의 단어를 모두에게 제시했다. 이 단어에 대해 각자 가치의 우선순위를 머릿속으로 생각해보았다. 그 순위를 공개하지 않은 채 옆 사람과 1:1 대화를 통해 서로 가치의 순서를 맞춰보았다.
서로의 생각을 읽는 이 게임은 상대방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걸 어떤 말이나 질문으로 이끌어낼 수 있을지 스스로 고민하게 만든다. 나와는 다른 상대방의 가치관에 대해서도 궁금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번에 제시된 다음의 단어들로 가치의 순서를 매겨본다면 어떨까?
민들레 동네 미래 과정 선택
민들레나 동네와 같이 구체적인 단어는 각자가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다. 민들레는 꽃 전체로 전제해도 되고, 오늘 집앞에서 본 한 송이의 민들레로 한정해도 된다. 어쨌든, 각자가 생각하는 가치의 순서대로 단어들을 나열해보면 우리는 어떤 단어와 단어, 가치와 가치 사이에서 특히 고민하게 될까?
세 번째 게임은 아직 이름이 없다.
이 게임은 미완성으로 참여자들에게 제시되었다. 게임의 규칙이나 진행방법을 ‘비기자’가 완전히 설계하지 않은 채 어떻게 게임 혹은 대화를 다채롭게 이어갈지 함께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소통의 도구는 제시되었다. ‘비기자’와 협력해서 ‘띠리리제작소(DIRIRI Making Studio)’가 최근 만든 낯선 저울 2개가 그것이다. 그 저울을 만든 배경에 대해서만 ‘비기자’의 생각을 공유하였다.
“가치는 무게로도 치환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단어가 가지고 있는 가치의 무게는 몇 kg이라고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 다른 것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인 무게를 가지지 않을까 생각해봤어요. 말로 전하는 가치의 무게는 굉장히 모호하거든요. 상대적인 것에 대해서 시각화, 개량화는 이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 같은 소통의 과정을 다른 방식으로 시도해보기 위해 ‘가치 저울’을 만들어보았어요.”
나무와 버려진 사물들을 이용해 만든 ‘가치 저울’ 주변으로 참여자들이 둘러 모였다. 앞선 게임들에서 나왔던 이야기 중 ‘집’에 대한 이야기가 뜨거웠던 점을 모두 공감하여 ‘집’을 주제어로 저울을 이용한 어떤 대화를 시도해보기로 했다. 참여자들은 저울에 추를 달아보기도 하고 저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며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그러다 알록달록하고 넓직한 판이 있는 저울을 이용해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판에 파여진 홈에 나무 조각을 올려놓으면 판은 기울어진다. ‘집’과 관련하여 각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나무 조각에 단어로 적고 판 곳곳에 올려놓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울의 한 쪽 구석에 ‘대출’이 적힌 나무 조각이 놓였다. 그러자 누군가에 의해 저울의 반대쪽에 ‘대출 없어도 잘 살 수 있는 사람’이 적힌 나무 조각이 놓였다. 이로써 균형은 맞춰졌다. 전세, 사랑, 가족, 눈물, 옥상, 마당, 방수, 환기, 식물, 반려동물 등 여러 단어 각자의 자리에 놓였고 무게를 드러냈다. 안식과 불안함도 뒤따라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누군가는 저울이 한쪽으로 더욱 기울도록 했고 누군가는 계속 균형을 맞추려고 했다. 처음엔 권리, 자유, 독립 쪽으로 무게가 쏠리는 듯했으나 그 반대에 이웃, 안정, 사랑이 위치하면서 균형이 생겼다. 나머지 구석에는 로또, 청약, 대출이 강력한 무게로 버티고 있었다. 층간소음, 담배냄새와 관련한 개인적인 경험담을 나누며 게임은 끝이 났다. 한 바탕 떠들고 나니 이것은 과연 길을 잃은 것일까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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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프로젝트1을 진행했던 ‘비기자’의 멤버A는 참여자들이 자연스럽게 언러닝을 시도하며 워크샵에 참여할 수 있도록 공간, 재료, 시간, 언어, 활동 그리고 다과까지 고민하고 준비했었다. 한편 이러한 과정을 지켜본 또다른 멤버B는 “길을 잃기 위해서라면 많은 것을 준비하기 보다 같이 만들어나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어도 좋지 않을까”라고 반문하며 사전프로젝트2를 기획했다.
많은 것을 미리 준비했던 멤버A는 참여자들이 ‘길을 잘 잃을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설계하는 예술교육실천가라고도 볼 수 있다. 덕분에 참여자들은 현장에서 안전함, 편안함을 느꼈다고 했고 그래서 낯선 사람들과의 대화에도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었다.
반면 멤버B는 일종의 열린 구조를 바탕으로 사전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몇 가지 활동은 구체적인 안내를 했지만 일부 활동은 참여자들과의 협력을 통해 만들어나갔다. 멤버B는 우리가 정말 길을 잃을 수 있을지 같이 실험을 해봤다고도 볼 수 있다.
이 두 사람 중 누가 맞거나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언러닝에 접근하는 각기 다른 관점을 통해 확장된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앞선 글에서 소개한 사전프로젝트1과 이번에 소개하는 사전프로젝트2의 과정이, 우리를 언러닝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로 이끌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두 번의 사전프로젝트를 통해 멤버A,B가 모두 공감한 부분이 있었다. 실제로 ‘언러닝’을 하기 위해서는 매우 ‘러닝’해야한다는 것. 누군가가 낯설거나 새로운 것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굉장한 노력과 시도를 해야하고 이따금 학습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러닝’은 ‘러닝’을 동반한 끊임없는 사유와 실천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언러닝이다’라는 해석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 ‘비기자’는 우리가 그런 시도를 얼마나 하려고 하고 있는지 함께 질문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