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포시 발달장애 예술인 지원방안 모색을 위한 연구모임"
대표의원: 신금자, 연구의원: 장경민, 홍경호, 이우천
협력단체: 사단법인 로아트 

"스튜디오 그리고 무엇이 필요한가"
기록영상 공유합니다.
궁금하기 딱 좋게 앞에 15분은 짤렸습니다.

 

 

 

 

 

 

창작그룹 <비기자>는 해단식 "안 되는 거 알잖아요"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봄부터 준비하던 소식을 전합니다.

현재의 “비기자”는 2010년 “비폐기물생산자연대”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단체도 아니고 모임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 당시 같이 활동하던 사람들과의 공식적 이름이 필요했습니다. 효율적인 운영방식은 잘 몰랐고 긴 이름을 선택해 이런저런 활동을 했습니다. 폐교 주변에서 자연물들을 주워 와 운동장에 거대한 보드게임을 만들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말없이 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이게 예술이 안 될 건 또 뭐야, 그런 마음으로 예술계 주변을 기웃거렸지만 적절하고 훌륭한 창작으로 해석된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활동을 위한 ‘이름’이 필요했습니다.

2016년, 이름을 “비기자”로 정리했습니다. 무한경쟁시대에 비겨보자는 의미를 담아 그동안의 작업도 정리해서 홈페이지를 만들었습니다. 보이지 않던 현장이 한눈에 정리되고 나니 쌓인 시간만큼 다양한 작업을 활성화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아졌습니다. 작업공간도 생기면서 큰 규모의 프로젝트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변 사람들과 함께 활동의 기회를 나누고자 했던 오래된 의도가 감사하게도 충족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의미나 키워드로 “비기자”가 외부에 소개되면서 작업을 하려는 이유보다 “비기자”라는 이름을 지켜내고 싶은 욕구가 더 커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해단식을 갖고자 합니다. 2021년 2월부터 “비기자” 이름으로의 활동은 없습니다. “비기자 라는 이름이 필요한 상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겠다, 슬픈 이별을 선언하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필요와 상황 안에 있음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 마음에 대해 공유하고 예의를 갖춰 감사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자 해단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단체를 정리하는 과정을 몇 개월간 모두 공유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건강하고 편안하게 인사를 나누고 싶습니다.

하나의 예술단체가 자립하기를 기대했거나 안정적으로 유지되기를 바라는 이가 있다면 아주 상냥하고 단호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안 되는 거 알잖아요.”

그럼 무엇이 되는지 찾아보려고 하니 사실 매우 설렙니다. 이게 맞는 선택인지 지금은 모르겠지만, 지나야만 알 수 있는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나서라도 알려면 일단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모두, 천천히, 안녕!

 

 

창작그룹 <비기자> 해단식 "안 되는 거 알잖아요"

- 일시 : 2021년 1월 언젠가

- 진행방식 : 생각 중

 

 

*홈페이지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해단식까지 더 많은 기록, 자료, 생각들을 업로드해서 공유하겠습니다.

 

*그림 : Alpha.lee

*손글씨 : 고륜호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 온라인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특강] 코로나시대, 아이들을 위한 부모교육은?

불안함의 반대편에서 놀기 

 

강의 보러가기

www.youtube.com/watch?v=moJJ9xW9pjo&t=2726s

 

 

 

 

 

사단법인 로아트가 운영하는 대야미스튜디오에서 모두를 위한 문화예술공간 ‘큰배미곳아트센터’ 모델링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대야미스튜디오에서 작업하고 있는 창작자들과 각자가 상상하는 아트센터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공간을 모형으로 만들어보았습니다. 본 워크숍은 진행과정과 결과물을 구체적으로 정해두지 않고 대화의 흐름, 참여 범위에 따라 운영되었습니다. 오히려 그 과정을 기록자가 꾸준히 기록하였는데 첫번째 시간의 기록을 공유합니다. 첫 날의 대화가 이후 일곱 번의 만남에서 어떤 시간, 공간, 상상으로 이어졌을지는 사진기록을 통해 그려볼 수 있습니다.

 

 

총괄. 이지혜
진행. Alpha.lee, 조영환
사진. 양승욱
기록. 고륜호
자문. 김성화(건축사사무소 연화)
지원. 이설희
협력. 창작그룹 비기자

 

 

 

7월 1일 / 타임라인 만들기

 

 

"각자 몇 장의 카드를 나눠드릴 거예요. 카드에다가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여기, 로아트에 오기까지 어떤 것을 했는지 알려주세요. 아무거나 쓰셔도 돼요. 맘에 드는 펜으로 적어 보세요."

 

"저는 이렇게 썼어요. 어제 있었던 일이긴 한데 매일 이렇게 반복돼요. 제 패턴이에요.

오기 전에 게임을 했어요. 컴퓨터 게임이요. 그림 그리러 오기 전에 게임하고 왔어요."

 

"게임 말고는 뭘 했어요? 게임 밖에 안 했어요?"

 

"점심 먹었어요. 점심.(점심을 먹었다는 내용을 계속 적는다.)

 

"밥 먹고 나서 휴식을 취하고 게임을 해요. 게임. 쉬는 시간에 게임을 해요."

 

“봄이 씨는 뭘 이렇게 많이 했어요? 엄청 많이 썼는데?”

 

"저는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노래도 하고 싶었어요. 어린이 노래. 제목은 … <어린이 노래>. 집에서 잘 놀고 있었어요. 재미있었어요. 병원에도 가요."

 

“노래는 집에서 부르는 거예요?”

 

"집에서 노래를 해요.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노래를 불러요. 두 팔 벌려 하늘 높이 …. 잠을 잡니다. 마무리입니다."

 

 

 

 

“제가 카드를 하나 뽑았어요. 읽어볼 게요. 강아지의 쉬를 발견했다. 휴지로 닦았다. 이 카드의 내용이 기준이 되는 거예요. 다음 카드는 ‘조동광 님을 발견했다.’ 그럼 강아지에 관련된 게 먼저일까요 조동광 님을 발견했다는 게 먼저일까요?”

 

"저는 강아지 쉬를 치운 게 먼저인 것 같아요. 청소를 해놓고 사람을 만나는 게 좋잖아요."

 

“다음 카드는 ‘이창하가 일어났다.’ 이 카드의 내용은 앞에 뽑은 카드랑 비교했을 때 뭐가 먼저일까요?”

 

"이창하가 일어났다가 먼저에요. 잠을 잤잖아요. 나머지는 잠을 깨고 난 이후의 일이에요."

 

“이창하는 누군지 알아요? 이창하는 제 아들이에요. 그러면 쉬를 발견한 거랑 조동광 님을 발견한 거랑 비교했을 때 어디에 있을까요?”

 

"사이에 있어요. 그 둘 사이에."

 

“정답은 일어나고 쉬를 발견하고 조동광 님을 발견한 거예요. 다음 내용은 ‘김성한 님 발견.’ 김성한은 누구일까요? 저분이에요. 그럼 이 내용은 아까 뽑은 카드랑 봤을 때 어디일까요?”

 

"조동광 님 만나기 전, 이창하가 일어난 후에요. 틀렸어요?"

 

"김성한 님을 발견한 건 조동광 님을 발견한 후에요."

 

“정답이에요. 저는 오늘 여기 오기 전까지 이런 순서였어요. 멍멍이 산책도 시켰어요.”

 

"이창하가 일어난 건 언제에요?"

 

“멍멍이 산책을 시키고 난 후에 이창하가 일어났어요. 다음 카드는 ‘비행기가 날아갔다.’ 이건 언제일까요?”

 

"강아지 쉬를 발견하기 전일 것 같아요. 눈을 뜬 이유가 비행기 때문이라서 그래요."

 

“맞아요. 다음 카드는 ‘화장실에 갔다.’ 이건 언제일까요?”

 

"일어난 다음에요. 강아지 쉬를 발견하고 갔어요."

 

"이창하가 일어난 뒤에 화장실에 갔어요. 확실해요."

 

“다음 카드는 ‘고륜호 님을 발견했다.’ 이건 언제일까요?”

 

"비행기가 날아가기 전이요!"

 

"강아지 쉬를 발견하고 난 다음에요!"

 

“'영양제를 챙겨 먹었다.’는 언제일까요?”

 

"눈을 뜨고 나서. 비행기가 날아가기 전에요. 그 전에 영양제를 먹었어요."

 

“아니에요. 저는 비행기가 날아가는 소리 때문에 일어났어요. 자, 마지막. 이창하 밥은 언제 차려줬을까요?”

 

"눈을 뜨자마자!"

 

"저는 잘 모르겠어요."

 

“괜찮아요. 아무렇게나 말해도 돼요. 제가 정리해줄게요. 비행기 소리에 일어나서 쉬를 발견하고 영양제를 먹고 화장실을 갔다가 멍멍이 산책을 하고 나서 고륜호를 발견하고 이창하 밥을 차려줬어요. 이렇게 맞춰나가는 게임이에요.

 이제 봄이 씨 카드를 한번 볼게요. ‘나는 공부를 하고 싶어서 재미있어요.’ 이 카드가 기준이 되는 거예요. ‘보리밥을 먹어요. <구슬비> 노래를 불러요.’ 이 내용은 공부를 하고 싶다는 거 이전일까요 이후일까요?"

 

 

(본 글은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2020년 지역특성화지원사업 <발달장애 보호자를 위한 문화예술워크숍 ‘갈치살롱’> 연구모임의 결과물로 작성되었습니다.)

 

 

 

장애인 자녀의 ‘예술하기’가 앞서나가기 전에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대표

 

 

1. 나의 부모는 나의 ‘예술하기’를 사실상 반대하는데

 

그런데 장애인의 부모는 왜 자녀의 ‘예술하기’를 응원하는 경우가 더 많을까. 이것이 나의 솔직한 질문이다. 예술은 멋지고 환상적인 말이지만 현실에서는 발 디딜 곳 없는 붕 뜬 무엇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예술하기’ 그 자체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데에 어려움이 생길 때도 많다. 그래서 예술인 관련 복지제도나 지원제도의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현장에서 이어지고 있고 불안정한 생계 때문에 창작활동을 그만두는 사람들도 많다. 이것은 인간의 ‘예술하기’가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지속되는 것의 한계 및 어려움을 보여준다. 그런데, (모두는 아니지만) 장애인의 부모는 왜 자녀의 ‘예술하기’를 응원하고 있을까. 하루라도 더 자녀를 취업 프로그램에 참여시키는 것이 시대적 흐름에 맞을 텐데 말이다. 바로 이 순간, 꼭 그렇게 무언가를 생산하거나 돈을 벌기 위해서만 자녀가 예술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답변이 돌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그 외에 어떤 의미에 동의하는 것일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에 동의하느냐와 다르다. 추후 자녀의 ‘예술하기’가 어떤 가치나 상태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는 의미다. 비효율적이거나 미련하게 ‘가능성’보다 ‘의미’를 우선적으로 생각해보는 것이 예술일 수 있기 때문이다.

 

2.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예술하기’의 형태는 어떤 모습으로 전제되는가

 

그 ‘의미’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술하기’가 무엇일 수 있을지 논의가 필요하다. 무엇을 하는 것이 ‘예술하기’로 전제되는가. 그림 그리기? 악기 연주하기? 도자기 만들기? 소설이나 시 쓰기? 무대 위에서 연기하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예술하기’의 형태들 외에 생각해볼 수 있는 상태나 상황, 행위는 무엇이 있을까. 이와 관련한 논의가 풍성하게 이루어져야 그것을 통해 ‘예술하기’의 ‘의미’를 이야기나눌 수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장애인, 장애인 부모, 그리고 장애인의 ‘예술하기’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예술하기’의 다양한 양상을 얼마나 전제하고 있는지, 그 다양성 안에 존재하는 관점의 차이를 얼마나 인정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조금 다르게 질문을 해보고자 한다.

 

3. 만약 나의 자녀가 똥이나 오줌을 10년 넘게 정성스럽게 그리고 만든다면?

 

이것은 ‘예술하기’가 될 수 있을까? 조금 더 나아가 자녀의 탐구 및 실천이 일상화, 구체화되면서 자녀가 자주 똥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오줌 색깔이 잘 나타나는 물감 섞기를 실험하며 이와 관련한 대화를 주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시도한다면 그것 자체도 ‘예술하기’가 될 수 있을까? 이때 가장 중요한 전제는, 이러한 행위가 자본이나 사회적 기회를 생산해내지 못하고 있을 때라는 것이다. 이것은 극단적인 예시 같지만 모든 인간이 아름답거나 깨끗하거나 따뜻한 것에만 집중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매우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예술하기’의 일부로 충분히 언급 가능하다.

여기에서 묻고 싶은 것은 ‘예술하기’를 정의하는 것에 있어서, ‘그래도 이래야 한다’ 혹은 ‘적어도 이것은 안 했으면 좋겠다’는 어떤 시선의 개입 가능성이다. 우리는 이러한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채로 (장애 여부를 떠나) 누군가의 ‘예술하기’를 바라보고 그것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런데 더러운 오물 덩어리에 대한 것이 아니더라도 죽음, 폭력, 혐오, 소외, 차별, 가난, 파괴, 공포 등과 관련한 무겁거나 우울하거나 반갑지 않은 이야기는 예술 안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다뤄지고 있다. 또한 이것을 예술적으로 구체화하는 방식도 익숙하지 않거나 해석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술하기’에 대한 내용적, 과정적, 행위적, 정서적 관점은 다양해질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예술하기’와 낯설거나 버거운 ‘예술하기’가 동등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예술하기’의 의미가 사회적 의미 외에 비사회적 의미, 비효율성의 의미, 무거움의 의미, 해석되기 어려움의 의미 등으로 확장될 수 있고 그 안에서 (장애 여부를 떠나) 다양한 존재가 자기표현의 자리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자녀의 어떤 표현행위 혹은 ‘예술하기’는 부모의 동의나 긍정을 기다리는 수동적 위치에서, 질문을 주고받을 수 있는 능동적 위치로 옮겨갈 수 있다.

 

4. 능동적* 위치가 전제된 상호적 질문

*능동적 : 더불어 능동적이라는 표현이 갖는 여러 한계와 더 넓어져야 할 의미를 강조하고 싶다. 누군가는 능동적인 상태를 갖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매우 적극적이거나 활발한 상태로서의 능동적태도만 전제될 경우 그 범위에 들어오기 어려운 사람도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특히 장애인의 경우, 자신의 욕구가 있는 상태, 그것을 작은 눈빛이나 신체 근육의 일부로 전달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상태 등도 능동적인 상태 안에 포함될 필요가 있다.

 

자녀와 부모의 대화가 궁금함으로 시작되기를 바란다. 자녀의 질문이 “나의 부모는 나에게 무엇이 궁금할까?”이기를. 부모의 질문이 “나의 자녀는 왜 그것을 할까?”이기를.

그런데 부모가 “나의 자녀는 왜 그것을 할까?”하고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그 과정도 지난할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이 급해진다. 자녀의 ‘예술하기’를 지지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그렸던 미래의 상(狀)과 점점 멀어지는 게 아닌가 불안해지기도 한다. ‘예술하기’의 다양한 형태와 찰나를 인정해버리면 ‘예술을 함으로써 사회와 오히려 멀어질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도무지 어디로 가야 할지, 혹은 다시 반대로 갈 수는 있을지 걱정도 앞선다.

 

5. 이제, 장애인 부모는 앞으로의 자녀의 삶을 어떻게 그려볼 수 있을까?

 

다급함과 불안함, 모호함이 주변을 감쌀 때 이제야 ‘예술하기’의 본모습이 우리 곁에 왔다고 나는 이야기하고 싶다. 그것이 나의 부모가 나의 ‘예술하기’를 사실상 반대하는 이유라고도 말할 수 있다. 자, 그럼 이제, 장애인 부모는 앞으로의 자녀의 삶을 ‘예술하기’와 같이 어떻게 그려볼 것인가. 이 질문은 “장애인이 ‘예술하기’를 통해 미래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아니다. ‘예술하기’는 장애인의 삶 혹은 생활이나 생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으며 혹은 낯설거나 불편한 영향만 미칠 수 있다. 또는 다수가 바라는 것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장애인의 삶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그래서 질문이 다르게 필요하다. “장애인의 삶을 ‘예술하기’와 같이 어떻게 그려볼 것인가”. 역시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하기’에 대한, 그리고 자녀의 삶에 대한 다양한 상(狀)이다. 솔직해져야 하는 순간이다. 그 상(狀)은 자녀의 상(狀)과 비슷한가. 달라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기다렸다는 듯이 현실의 문제들, 안정적이어야 할 미래가 언급될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예술하기’는 그것과 거리가 있는 경우가 오히려 많다. 그래서 더욱 솔직해져야 하는 것이다. 혹은 더욱 냉정해지면서도 치열해져야 하거나.

 

6. 처음으로 돌아가

 

사실 나는 ‘예술하기’를 하고 있다. 단지 나의 부모가 궁금해하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나는 모호한 생각들을 종이에 적고 팔리지 않는 노래를 만들고 흩어져버리는 전시나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나의 활동은 종종 동시대 문화예술 관계자에게도 ‘예술하기’로 해석된다. 그러나 그뿐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나도 그뿐이면 충분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모두 나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와 다른 사람만이 ‘예술하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듯 우리는 ‘예술하기’를 제각각 다르게 전제하거나 상상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점이나 문제는 아니다. 이것은 정의하거나 유형화할 수 없다는 예술의 큰 특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특히 장애인의 ‘예술하기’ 혹은 창작활동은 분명하게 유형화되거나 타인에 의해 정의되곤 한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근대적인 예술가의 상(狀)이 존재한다. (나의 부모가 휴대폰에 나를 ‘피카소’로 저장해두었듯이 말이다.) 개인의 고유성을 바탕으로 자기표현에 몰두하며 이따금 작품 발표회를 통해 결과를 사회적으로 드러내고 인정받는. 그러다 어떤 결과물이 자본의 가치로 환원이 되기도 하고 그러한 일련의 과정이 성사되면 누군가는 그 사람을 ‘예술가’로 부를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동시대 예술가의 삶, 활동방식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는 점에서 장애인의 ‘예술하기’가 몇 가지 유형으로만 전제되는 것에는 관점의 한계가 있다.

또한 부모 개개인별로 전제하는 자녀의 창작활동과 이를 통한 궁극적 삶의 상(狀)이 각기 다름에도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 뜨거운 논의로 이어지는 일은 많지 않다. 예술이나 창작 등이 갖는 모호함에 대해 폭넓은 대화를 하기에는 각자의 경험과 인식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각자의 상(狀)이 적당히 비슷할 것이라는 추측과 기대는 지속되는데 현실 속 대화와 선택들 안에서 그 관점들은 보기 좋게 서로를 빗겨나가곤 한다. 그 엇갈림의 이유, 그리고 엇갈림에도 같이 가기 위한 태도에 대해 부모들과의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엇갈리지 않는 하나의 상(狀)을 도출해내는 것이 대화의 목적은 아니다.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를 인정하면, 언젠가 만나기를 바라는 대신 만나지 못함 사이의 거리가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거리를 만들어낸 각자의 이유, 관계의 이유를 들여다보려고 하면 (서로에게 바라던) 존중이 조금씩 가능할 수 있다.

 

7. 그래서, 부모들 간의 거리를 인정한다면

 

서로에게 요구되어야 할 것은 변화가 아니라 공감일 수 있다. 장애인 자녀를 낳고 키워온 부모의 삶이 모두 슬프고 고되게 해석될 필요는 없으나 사회와 가정 안에서 타인이 장애인과 그 가족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장애인의 부모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개인 이전에 장애인의 보호자로서 호명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렇게 10년, 20년 시간이 쌓이고 생활이 이어지고 감정도 생기고 난 이후의 부모에게 이제 자녀의 ‘예술하기’에 대한 동시대적 관점을 익히고 열린 태도와 평안한 마음을 유지하라고 하는 것은 너무 일방적인 태도다. 부모들 간에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장애인의 부모’이기만 한 채로 비슷하게 살아온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더 넉넉하게 살았고 누군가는 더 정신없이 살았고 누군가는 오로지 버티면서 살았다. 그건 그 자체만으로 공감받아야 하고 그 삶 안에서 생성된 경험과 관점과 지식의 차이도 존중되어야 한다. 이제 한 명씩 말해보자. 자녀의 ‘예술하기’에 대해 부모는 무엇을 전제하고 있는지, 혹은 전제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는지. 각자의 삶에서 가능한 ‘예술하기’가 있을 수 있으므로 우리는 모두 나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외면할 수 없는 오늘로서의 ‘삶’에 낯선 ‘예술하기’까지 더해져 모호한 토론이 시작되기 전에 오늘의 내가 자녀와 함께 살아감에 있어서 어떤 상(狀)을 그리고 있는지 이제 이야기를 나눠보자.

제5회 국제예술교육실천가대회
사전프로젝트

 

길을 잃기 위하여

 

 

 

무엇을 할지 안내하지 않고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낯선 질문들을 따라간 자리에
무엇이 남겨졌을까요?

 

 

1차

○ 일정 : 2020. 7. 28
○ 장소 : 인포숍카페 별꼴
○ 기획/진행 : 창작그룹 비기자

 

 

 

 

 

 

 

2차

○ 일정 : 2020. 8. 4
○ 장소 : 띠리리제작소
○ 기획/진행 : 창작그룹 비기자

 

 

 

 

 

- 포스터 이미지 : 이려진 작가의 <타임 머신>

- 포스터 디자인 : 즈즈스

- 사진 : 양승욱

- 영상 : 우에타 지로

 

 

 

* “길을 잃기 위하여”는 9월14일(화) - 9월17일(목) 열리는 제5회 국제예술교육실천가대회(ITAC5)의 사전프로젝트 일환으로 진행됩니다.

* 제5회 국제예술교육실천가대회(ITAC5) 홈페이지 : itac5.org

 

http://itac5.org

 

itac5.org

 

 

 

* 이 글은 제5회 국제예술교육실천가대회(ITAC5)의 세 개의 주제 중 '언러닝unlearning' 파트에서 기획되었던 사전프로젝트 관련 원고입니다.

 

우리는 길을 잃을 수 있다.

창작그룹 비기자 대표 / 최선영

 

 

“이 활동의 목적이 뭐죠?”

아리송한 문장 한 줄이 제시되고 밑도 끝도 없는 수수께끼 놀이가 시작되자, 누군가 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진다.

“일단 한번 해보시죠.”

 

수수께끼를 던진 진행자가 대답한다. 하지만 목표와 방법이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 어떤 놀이에 대해 누군가는 계속해서 불안함, 혹은 의구심을 품는다. <창작그룹 비기자>(이하 <비기자>)는 이런 놀이의 기획과 진행을 자주 해오고 있고 그것의 목적을 묻는 사람들도 자주 만나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위에서 노를 젓는 상황도 아닌데, 그렇게 위험하고 막막한 일이 아니라면 한번 생각의 노를 저어보자고 하고 싶은데, 사람들은 단지 책상에 앉아 질문을 던지는 것에도 불안함, 내지는 불편함을 드러낸다. 일하기도 바쁜 사람들을 불러모아 놓고 알쏭달쏭한 놀이를 제안한다며 불만도 내비치는 이도 있다. 그래도, 혹은 그래서, <비기자>는 일단 한 번 해보자고 제안한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를 개발시키는 것에 익숙한 우리가, 같이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이 불가사의한 놀이, 혹은 무언가에 대해 목적을 확인하기 전에, 그것이 무엇일지 같이 찾아보자고.

 

이러한 생각이 ‘언러닝’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그와 관련한 힌트는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러닝’은 학습된 개념, 관념, 언어, 학습하려는 관성, 학습과정을 지배하는 사회적 구조나 가치관 등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행위와 실천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언러닝’은 낯설고 어렵고 불편하다. 특히 예술교육실천가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안정적이고 안전하게 살고 싶은(혹은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언러닝’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쩌면 그 쉽지 않음을 마주하거나 인정하는 것부터가 ‘언러닝’의 시작일 수 있지 않을까.

 

특히 <비기자>는 코로나19로 인한 재난시대를 경험하며 그동안의 논리성, 합리성, 계획성을 토대로 현재와 미래를 예측하거나 확정하는 데에 한계를 느끼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발빠른 대처능력이나 해결방안을 마련하고 그것을 향해 달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우리 스스로 길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 상황에서 각자 덜 불안해하거나 즐기거나 혹은 방황을 통해 무언가를 찾는 힘을 길러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더욱 적극적으로 ‘길을 잃기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사전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 만나기는 하지만 만나서 무엇을 할지는 이야기하지 않은 채. 오히려 이러한 ‘적극적 방황’에 공감하는 이들을 기다린다는 짧은 멘트를 사전프로젝트의 참여자 모집 포스터에 남겨두었다.

 

사전프로젝트는 워크샵 방식으로 총 2회, 각 3시간씩 다른 장소에서 이뤄졌다. 워크샵마다 7명 정도의 예술교육실천가, 혹은 이 프로젝트에 호기심이 있는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

 

* 첫 번째 사전프로젝트 / 2020.7.28. / 인포숍카페 별꼴 *

 

 

자신이 무엇을 할지 모른채 모인(몰라도 괜찮은) 사람들이 둥그렇게 둘러 앉았다. 진행자(비기자)의 인사와 진행에 따라 목적없고 모호한 ‘그림받아쓰기’(Drawing Dictation)를 시작했다. ‘그림받아쓰기’는 한 명이 한 장의 그림을 혼자만 보면서 5가지의 이야기를 하고 그것을 토대로 나머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토대로 질문을 하며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다. 이 활동의 이름이 ‘그림받아쓰기’이니 더욱 처음의 그림과 비슷하게 그림을 그려야할 것만 같다. 그러나 진행자는 그것만이 목적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야기를 듣고 떠오르는대로, 그릴 수 있는 만큼만, 혹은 자신이 상상하는대로 그려보는 것도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참여자A가 한 장의 그림을 보며 이렇게 5개의 문장을 이야기했다.

 

 

1. 대머리 남자가 승모근이 뻐근한 상태로 걷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이 할 수 있는 기적 중에 하나를 터득했습니다.
3. 남자는 계단을 내려가지도 않았는데, 가고 있는 방향으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4. 대머리 남자는 사실 4명입니다.
5. 한 명은 장님이고 세 명은 눈이 부셨습니다.


참여자들이 질문을 시작했다. 진행자가 어떤 질문을 해도 상관없다고 말했으나 대부분 그림의 시각적 구성을 확인하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진행자는 “예”, “아니오” 혹은 “모르겠습니다” 중 하나로만 답변할 수 있다.

“계단의 경사가 심한가요?”

 

“대머리라고 하면, 머리털이 하나도 없는 건가요?”

“사람 말고 다른 생물체가 있나요?”

“승모근이 많이 솟아있나요?”

“기적을 행할 때 선글라스가 필요한가요?”

“남자들이 티셔츠를 입고 있나요?”

그러다 점점 질문을 더 쪼개어 자세하게 하게 되었다. 혹은 그림을 그리는 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지만 궁금한 것들을 질문하게 되었고 이따금 혼잣말 같은 질문도 하게 되었다.

“그림 속에 계단이 있긴 했어요?”

“남자 4명이 일렬로 서있는데 세 명은 선글라스를 꼈고 한 명은 장님인 것 같다고요? 그게 뭐지?”

“그 남자가 직업이 있다고요? 그건 또 뭐지?”

“예수님이 할 수 있는 기적이 뭐가 있지? 검색해 봐도 돼요?”

 

 

30분 이상 질문과 대화를 주고 받은 후에 각자 그림을 그리고 처음에 참여자A가 혼자 봤던 그림을 모두에게 공개했다. 묘하게 비슷한 그림, 비슷하려고 딱히 애쓰지 않은 그림, 비슷하지 않을까봐 조심조심 그리다 미완성이 된 그림 등이 각자의 눈에 들어왔다. ‘그림받아쓰기’를 하며 느낀 소감을 나눠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만의 생각에 갇혀서 질문을 해요. 각자가 떠올리는 상이 이미 있는 거죠. 그럴 때는 그 상이 맞는지 확인하는 대신 여러 질문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질문해야 할지 난감한 것 같아요.”

“같은 이야기를 듣고도 각자 다른 그림이 나오는 게 흥미로워요.”

 

 

참여자들과 다른 그림을 한 장 골라 ITAC5의 아트프로젝트에서 ‘그림받아쓰기’를 이어가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그림에 대한 5가지 문장은 참여자들과 함께 의논해서 다음과 같이 정했다.

 

1. 나는 어디로 갈지 모르겠어요.
2. 나는 머리가 갈라져있고 팔이 매우 길어요.
3. 나는 의자에 앉아있어요.
4. 내가 키를 쥐고 있어요.
5. 거울에는 나와 다른 모습이 비춰져요.

 

이 5개의 문장을 바탕으로 전세계의 예술교육실천가(Teaching Artist)들은 어떤 그림을 그릴까? 다양한 상상과 표현이 온라인 컨퍼런스 현장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공유될 것이다.

 

- 아트프로젝트 바로가기 : itac5.org/?act=info.page&pcode=project

 

 

‘그림받아쓰기’에 이어서 이번에는 제시된 그림 없이 문장만 제시하고 이 문장 안에 잘 그려지지 않는 전체적인 상황을 질문을 통해 맞춰보기로 했다. 물론 이 문장을 말하는 사람은 그 상황을 모두 알고 있다. ‘그림받아쓰기’와 달리 이 활동에는 정답이 있는 것이다. 이 활동 혹은 놀이의 제목은 ‘이야기의 나머지’이다. 제시된 이야기의 나머지를 상상하고 맞춰보는 것이다. 제시된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그는 연기를 끝낸 후, 큰 박수를 받지는 못했지만 삶이 편안해졌습니다.


그가 어떤 연기를 했기에 큰 박수를 받지 못했지만 삶이 편안해졌을지 참여자들이 알아내기 위해 질문을 시작했다. 답변하는 사람은 역시나 “예”, “아니오” 혹은 “모르겠습니다” 중 하나로만 답변할 수 있다.

 

“그는 죽었나요?”

“몰래카메라인가요?”

“그 편안함은 정서적인 편안함인가요?”

“그가 부유해졌나요?”

“그는 무대 위에서 연기를 했나요?”

“그에게는 가족이 있나요?”

“그 연기는 남이 시켜서 하는 연기인가요?”

 

그림도 없으니 질문이 더욱 구체적이면서도 다양해야 했고 답변하는 사람도 (답이 있음에도) 자신이 그려놓은 상황을 전제로 답변해야 했다. 참여자들의 질문은 더욱 산으로 가기도 했고 뜬금없어 보이는 질문 하나 덕분에 단번에 제자리로 돌아오기도 했다.

이 ‘이야기의 나머지’에 대한 정답은 이 글에서는 공개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가 모호한 것을 계속 궁금해할 때, ‘언러닝’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길을 잃더라도 말이다.

 

첫 번째 사전프로젝트를 마치며 참여자들은 이런 소감을 남겼다.

 

“최근에는 어느 길로 가야할지 고민을 참 많이 했어요. 근데 여기서는 제가 생각하려는 것의 정반대더라고요. 그래서 신선했어요. 적극적으로 방황하자는 말이 좋았어요.”

“오랜만에 머리가 말랑말랑해지는 느낌이에요. 지금껏 갖춰진 생각 속에서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림은 그리는 재미가 있었는데, 문장이 제시되니까 자꾸 맞추려고 하더라고요. 제대로 못 맞췄을 때는 자책하기도 하고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프로그램을 이수한다고 하면 가성비를 따져요. 이걸 들어서 내가 얻는 게 뭐지? 하면서요. 따지고 보면 쓸모없는 건 없잖아요. 어떻게든 도움이 되니까요. 사람들이 그러는 데에는 사회가 한몫하는 것 같아요. 불확실함을 지양하는 세상이니까요. 오늘은 불확실한 것도 괜찮다고 위로받는 시간이었어요.”

“안전하게 길을 헤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 다들 처음 만났는데도 편안했어요.”

“저는 연필, 지우개, 노트가 주는 부드럽고 편안한 느낌이 좋았어요. 맛있는 커피와 다과도, 이런 안전한 느낌의 공간도요. 감성을 자극했다고 해야 할까요. 일반 회의실에서 했으면 뭔가 초조했을 것 같아요.”

 

 

** 두 번째 사전프로젝트 / 2020.8.4. / 띠리리제작소 **

 

역시나 자신이 무엇을 할지 모른채 모인(몰라도 괜찮은) 8명의 사람들이 둥그렇게 둘러 앉았다. 진행자(비기자)의 진행에 따라 몇 가지의 게임 같은 대화를 나눴다. 여기에서는 그 중 세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게임 [너도나도]

 

하나의 주제어를 정하고 그 밑에 그 주제와 관련된 것을 10개 적어보았다. 그 주제어와 관련해서 나만의 관점이라기보다는 다른 참가자들이 썼을 법한 단어를 생각해서 써보았다. 모두가 단어를 쓰고난 후 각자 쓴 것들을 공유했다. 제시한 단어가 다른 참가자들이 쓴 것과 일치하면 인원 수에 따라서 점수를 얻는다. 단,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했을 때 철자가 하나라도 다르면 그건 서로 다른 것이 된다.

 


주제어는 ‘길’이었다. 강아지똥, 나침반, 걷다, 산책, 끝, 배수구, 앞으로, 이정표, 선택, 인생, 신발, 동행 등등 여러 단어가 튀어나온다. 한 가지 주제어에 대해서 단어를 적어 보면, 그 사람이 어떤식으로 사고하거나 언어화하는지에 대해 어림짐작할 수 있다. ‘길’이라는 단어에서 누구는 자연을 떠올렸고 누구는 삶을 떠올렸다. 또한 누군가는 ‘길’을 걸으며 자신이 보거나 경험한 것들을 떠올렸고 누군가는 ‘길’이라는 개념과 연관된 상징적 단어들을 떠올렸다. 본인이 적은 단어들을 말하는 도중에 “나 너무 메말라있나?”라고 누군가가 읊조리기도 했고 다른 사람이 쓴 단어에 “어떻게 그게 떠올라요?”라고 질문하기도 했다.

 


비슷한 방식으로 다른 주제어를 제시하고 ‘너도나도’ 게임을 몇 차례 해보았다. 과연 너도 나도 이걸 떠올리겠지 했던 추측이 여지없이 빗겨나갔다. 누군가는 남들과 너무 다른 자신의 사고방식이나 관점을 확인하며 조용히 웃기도 했다. 서로가 각자의 길 위에서 생각하며 단어를 적어보았지만 그 과정에서도 서로를 만나려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두 번째 게임 [가치게임]

 

조금 전에 적었던 단어들을 빈 카드에 하나씩 적어 카드 더미를 만들었다. 진행자가 카드 더미에서 5장의 카드를 임의로 선택하여 5개의 단어를 모두에게 제시했다. 이 단어에 대해 각자 가치의 우선순위를 머릿속으로 생각해보았다. 그 순위를 공개하지 않은 채 옆 사람과 1:1 대화를 통해 서로 가치의 순서를 맞춰보았다.

서로의 생각을 읽는 이 게임은 상대방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걸 어떤 말이나 질문으로 이끌어낼 수 있을지 스스로 고민하게 만든다. 나와는 다른 상대방의 가치관에 대해서도 궁금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번에 제시된 다음의 단어들로 가치의 순서를 매겨본다면 어떨까?

 

민들레     동네     미래     과정     선택

 

민들레나 동네와 같이 구체적인 단어는 각자가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다. 민들레는 꽃 전체로 전제해도 되고, 오늘 집앞에서 본 한 송이의 민들레로 한정해도 된다. 어쨌든, 각자가 생각하는 가치의 순서대로 단어들을 나열해보면 우리는 어떤 단어와 단어, 가치와 가치 사이에서 특히 고민하게 될까?

 

 

세 번째 게임은 아직 이름이 없다.

이 게임은 미완성으로 참여자들에게 제시되었다. 게임의 규칙이나 진행방법을 ‘비기자’가 완전히 설계하지 않은 채 어떻게 게임 혹은 대화를 다채롭게 이어갈지 함께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소통의 도구는 제시되었다. ‘비기자’와 협력해서 ‘띠리리제작소(DIRIRI Making Studio)’가 최근 만든 낯선 저울 2개가 그것이다. 그 저울을 만든 배경에 대해서만 ‘비기자’의 생각을 공유하였다.

 

 

“가치는 무게로도 치환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단어가 가지고 있는 가치의 무게는 몇 kg이라고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 다른 것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인 무게를 가지지 않을까 생각해봤어요.
말로 전하는 가치의 무게는 굉장히 모호하거든요. 상대적인 것에 대해서 시각화, 개량화는 이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 같은 소통의 과정을 다른 방식으로 시도해보기 위해 ‘가치 저울’을 만들어보았어요.”

 

나무와 버려진 사물들을 이용해 만든 ‘가치 저울’ 주변으로 참여자들이 둘러 모였다. 앞선 게임들에서 나왔던 이야기 중 ‘집’에 대한 이야기가 뜨거웠던 점을 모두 공감하여 ‘집’을 주제어로 저울을 이용한 어떤 대화를 시도해보기로 했다. 참여자들은 저울에 추를 달아보기도 하고 저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며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그러다 알록달록하고 넓직한 판이 있는 저울을 이용해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판에 파여진 홈에 나무 조각을 올려놓으면 판은 기울어진다. ‘집’과 관련하여 각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나무 조각에 단어로 적고 판 곳곳에 올려놓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울의 한 쪽 구석에 ‘대출’이 적힌 나무 조각이 놓였다. 그러자 누군가에 의해 저울의 반대쪽에 ‘대출 없어도 잘 살 수 있는 사람’이 적힌 나무 조각이 놓였다. 이로써 균형은 맞춰졌다. 전세, 사랑, 가족, 눈물, 옥상, 마당, 방수, 환기, 식물, 반려동물 등 여러 단어 각자의 자리에 놓였고 무게를 드러냈다. 안식과 불안함도 뒤따라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누군가는 저울이 한쪽으로 더욱 기울도록 했고 누군가는 계속 균형을 맞추려고 했다. 처음엔 권리, 자유, 독립 쪽으로 무게가 쏠리는 듯했으나 그 반대에 이웃, 안정, 사랑이 위치하면서 균형이 생겼다. 나머지 구석에는 로또, 청약, 대출이 강력한 무게로 버티고 있었다. 층간소음, 담배냄새와 관련한 개인적인 경험담을 나누며 게임은 끝이 났다. 한 바탕 떠들고 나니 이것은 과연 길을 잃은 것일까 생각이 들었다.

 

***

 

사전프로젝트1을 진행했던 ‘비기자’의 멤버A는 참여자들이 자연스럽게 언러닝을 시도하며 워크샵에 참여할 수 있도록 공간, 재료, 시간, 언어, 활동 그리고 다과까지 고민하고 준비했었다. 한편 이러한 과정을 지켜본 또다른 멤버B는 “길을 잃기 위해서라면 많은 것을 준비하기 보다 같이 만들어나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어도 좋지 않을까”라고 반문하며 사전프로젝트2를 기획했다.

 

많은 것을 미리 준비했던 멤버A는 참여자들이 ‘길을 잘 잃을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설계하는 예술교육실천가라고도 볼 수 있다. 덕분에 참여자들은 현장에서 안전함, 편안함을 느꼈다고 했고 그래서 낯선 사람들과의 대화에도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었다.

 

반면 멤버B는 일종의 열린 구조를 바탕으로 사전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몇 가지 활동은 구체적인 안내를 했지만 일부 활동은 참여자들과의 협력을 통해 만들어나갔다. 멤버B는 우리가 정말 길을 잃을 수 있을지 같이 실험을 해봤다고도 볼 수 있다.

 

이 두 사람 중 누가 맞거나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언러닝에 접근하는 각기 다른 관점을 통해 확장된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앞선 글에서 소개한 사전프로젝트1과 이번에 소개하는 사전프로젝트2의 과정이, 우리를 언러닝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로 이끌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두 번의 사전프로젝트를 통해 멤버A,B가 모두 공감한 부분이 있었다. 실제로 ‘언러닝’을 하기 위해서는 매우 ‘러닝’해야한다는 것. 누군가가 낯설거나 새로운 것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굉장한 노력과 시도를 해야하고 이따금 학습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러닝’은 ‘러닝’을 동반한 끊임없는 사유와 실천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언러닝이다’라는 해석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 ‘비기자’는 우리가 그런 시도를 얼마나 하려고 하고 있는지 함께 질문해보고 싶다.

 

손바닥 문화예술교육 실험실 과정공유회
나 좋자고 해봤더니

 

 


한 번쯤은 '나 좋자고' 해보는 교육도 필요하지 않을까
혼잣말 같던 질문이 만들어낸
다양한 가능성을 공유합니다.

 

○ 일정 : 2020. 09. 24 (목) 오후4시
○ 진행 : 온라인 생중계


○ 참여자
- 진행 : 최선영(창작그룹 비기자 대표)
- 패널 :

김남희, 김지원, 박지후(손바닥 문화예술교육 실험실 참여자)
손한샘(예술장돌뱅이 기획자), 홍승완(손바닥 문화예술교육 실험실 관찰기록자)

 

○ 내용
- 손바닥 문화예술교육 실험실 ‘나 좋자고 해봤니?’ 프로그램 과정 공유
- 참여자 활동사례 소개
- 질의응답 및 자유토론

 

○ 참여방법 : 유튜브창에 ‘성북문화재단’ 검색

 

 

 

 

 

손바닥 문화예술교육 실험실 "나 좋자고 해봤니?" 프로그램 자세히 보러가기 : bigija.tistory.com/158

 

손바닥 문화예술교육 실험실 "나 좋자고 해봤니?" 참여자 모집

손바닥 문화예술교육 실험실 나 좋자고 해봤니? 문화예술교육에서 '나'는 어디쯤 있을까 한 번쯤은 '나 좋자고' 해보는 교육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것은 과연 나에게만 좋을까 우리에게 낯설지만

bigija.tistory.com

 

2020 장애 예술 매개 온라인 포럼
매개자의 자기 질문 "어디서부터 무엇을 할 수 있나?"

 

 

 

◎ 일시 : 2020. 9. 22. 2시
◎ 참여방식 : 온라인 포럼 진행동안 실시간 채팅 참여를 통한 질의응답 및 의견전달
◎ 포럼운영 : 충북문화재단 유튜브

 

온라인 포럼 보기


문의 : 충북문화재단 장애인 문화예술 담당 043)221-5324

 

 

 

📣 비기자 오픈채팅방 📣

open.kakao.com/o/siFrCrYb

 

코로나 상황에서 서로 만나기는 어렵지만

각자의 고민을 나누는 시간을 지속적으로 갖고자 합니다.

 

비기자 활동에 대해 궁금한 점이나

같이 이야기나누고 싶은 내용이 있으시면

카카오톡 "비기자" 오픈채팅방으로 메세지주세요.

 

* 운영시간 : 오전 9시 - 저녁 8시

* 1:1채팅방이라서 타인에게 내용이 공유되지 않습니다.

* 내부사정으로 답변이 늦을 수 있습니다.

 

비기자 멤버가 참여하고 있는 서울청년예술인회의 웹진 [숨은참조] 1호가 발행되었습니다.
많은 발언자를 포섭하는 대신 다양한 목소리를 조직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 1호 보기 : stibee.com/api/v1.0/emails/share/y1OQjOBYcYMmIvuJitRyrj12SVe-BQ==
▶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78436
▶ 홈페이지 : https://seoulartist.tistory.com/

 

 

서울청년예술인회의

 

seoulartist.tistory.com

 

 

*비기자 멤버 MC.mama가 눈썹클럽의 팟캐스트에 참여합니다.

 

 

혼자있는 미술인들의 상호의존 사심토크!
눈썹클럽(신민, MC.mama, 전지)의 팟캐스트 
🚣헤쳐모여🏃

버티면 버텨진다는 
시뻘건 그말을 믿으며
미술하다보니 혼자가 된
예술하다보니 헤치게 된
살아가다보니 모이게 된
바로 당신,
사심 가득한 토크를 들으며
이 시간에 기대보세요.

뭐어때요, 
우린 그저 들쭉날쭉한 사람인걸요.

바로듣기!!

url.kr/8pN6ex

 

헤쳐모여

혼자있는 미술인들의 상호의존 사심토크! 눈썹클럽(신민, MC.mama, 전지)의 팟캐스트 헤쳐모여! 버티면 버텨진다는 시뻘건 그말을 믿으며 미술하다보니 혼자가 된, 예술하다보니 헤치게 된, 살아��

www.podbbang.com

 

*팟빵에서 "헤쳐모여"를 검색하세요!

*5월1일 첫방송, 그리고 쭉 함께 합니다!

 

 

예술가의 JOB소리 

<예비 예술인을 위한 진로콘서트 - 문화예술기획 편>

"이렇게 살 필요는 없다"

 

솔직한 현재를 나누고자 합니다.

유료행사지만 '예술대학생네트워크'의 활동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차원으로

신청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자세히보기 및 신청 :

bit.ly/aun_job

 

<예술가의 JOB 소리> - 문화예술기획편 -

세상의 모든 모임 '온오프믹스'

m.onoffmix.com

 

손바닥 문화예술교육 실험실
나 좋자고 해봤니?

 

 


문화예술교육에서 '나'는 어디쯤 있을까
한 번쯤은 '나 좋자고' 해보는 교육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것은 과연 나에게만 좋을까
우리에게 낯설지만 중요한 질문을 함께 따라가 봅니다.
프로그램 개발을 잠시 멈추고 나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분들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 일정 : 2020. 07. 23. – 08. 27. (매주 목) 16시-18시, 총 6회


○ 장소 : 차라리 낭만(서울 성북구 아리랑로 120-10, 정릉역 1번 출구)


○ 진행 : 남경순(마을온예술), 예술장돌뱅이, 최선영(창작그룹 비기자)


○ 대상 : 문화예술교육에 관심 있는 분 누구나 (15명 내외) *성북구 활동가 우대


○ 내용
- 나의 입장에서 바라본 문화예술교육
- 나만의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기획 및 실험(프로그램 실행비 지원)


○ 신청방법 : 지원서 작성 후 메일로 제출(special@sbculture.or.kr)
- 지원서 양식 다운로드(성북문화재단 홈페이지 www.sbculture.or.kr)

 

○ 신청 마감 : 2020.07.16.(목)

 

○ 수강료 : 무료

 

일정

구분

내용

7/23

OT

[오늘의 모양]

- 오리엔테이션, 인사하기

7/30

토크

[나 좋자고 해봤나 교육]

- 나와 대상 사이에서 고민했던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대화

8/6

토크

[나 좋자고 해보는 교육]

- 예술과 딴짓 사이에서 발견한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대화

- 예술가/예술강사의 삶과 재미를 위한 교육 상상하기

8/13

체험

[예술장돌뱅이] 체험

- 예술가들의 1:1 프로그램 맛보기

8/20

실험

[다른 사람도 좋을까]

- 참여자별 소규모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기획

8/27

결과공유회

[함께 좋을 수 있을까]

- 시민 참여형 결과공유회 및 나만의 프로그램 운영

 

*문의 02-6906-310

2020년 6월에 '함께해서신나는문화예술협동조합 틈'에서 진행한 장애문화예술교육 관련 강의가 '틈teum' 유튜브 채널에 공유되었습니다.

 

 

 

1편_기대하지 않고 표현으로 만나기

www.youtube.com/watch?v=dzqbKPdWESs&t=2327s

 

 

 

2편_보이지 않는 영역에 대해

www.youtube.com/watch?v=fYcAEBh8flg&t=755s

 

 

 

3편_다급함의 문제는 문화나 예술로 해결되지 않는다.(1)

youtu.be/iBi0UPQWC4Q

 

 

 

3편_다급함의 문제는 문화나 예술로 해결되지 않는다.(2)

youtu.be/trzXwXVzgn8

 

 

 

*위의 내용은 아래 연구보고서를 통해 누구나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bigija.tistory.com/96

 

비기자는 "비효율적이고 미련한 실천"에 대해

함께 이야기나눕니다.

 

 

자세히 보기 및 신청서 다운로드 :

m.blog.naver.com/y101777/221987120426

* 본 원고는 서울문화재단의 '잠실창작스튜디오 전문가 매칭 프로그램' 사전 간담회를 위한 발제문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잠실창작스튜디오에서 바라본 하늘

 

흔들리는 언어를 쌓아 올리는 일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다른 이름을 향하는 질문

 

‘장애예술’이라고 범주화된 개념 자체를 해체하거나 다른 개념으로 재정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강력한 정책용어와 사업명들이 매 순간 작동하고 있으며 에이블아트, 포용적예술, 아르브뤼, 아웃사이더 아트 등의 이름들은 시대에 따라 국내의 상황을 담지 못한채 재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양성이 마련되어야 할 예술 영역에서 ‘장애예술’을 ‘장애예술’로만 도저히 호명할 수 없게 만드는 이유과 사례, 구체적 언어를 만드는 것이다. 비평은 그 지점에서 필요하다. 새로운 이름의 등장이나 명명보다는, 존재했으나 인식되지 않았던 관점의 드러냄과 확장된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한 측면에서 최근 정책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포용적 예술inclusive art’에 대한 비판적 관점도 필요하다. 누가/무엇이 누구를/무엇을 포용/포함한다는 전제에 대한 질문도 요구된다. 이 용어를 대표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영국에서의 장애 창작자에 대한 인식과 국내의 그것이 갖는 교차지점이 과연 넓은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복잡함의 화면

 

국내 장애인이 삶 안에서 경험하거나 마주해야 하는 교육, 복지, 문화 관련 이슈, 혹은 문제는 당연한 말이지만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래서 예술 이외의 영역에서 그것은 ‘복잡함’ 자체로 문제시되거나 장애운동에서 제거의 대상으로 놓인다. 그래서 장애와 관련한 사회적 논의는 차별, 철폐, 가난, 부양, 의무, 책임, 보호, 인권 등으로 이어지곤 한다. 이것은 장애인의 인간다운 삶과 관련성이 높기에 현실적으로 매우 중요한 논의 안에 있다. 그러나 예술 영역에서는 그 ‘복잡함’을 복잡함 자체, 사회적 문제의 드러냄으로만 마주하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예술교육의 기회를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얻을 수 없었던 장애 예술인의 작품은 교육적 차별을 드러내는 근거자료가 아니라 교육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표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서 장애 예술인도, 협력자, 지원기관, 보호자(가족)인 비장애인도 예술적 해석보다 앞서는 사회구조적 문제, 개인의 경험이나 감정에 더욱 집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범하게 함께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든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비장애인은 주로 배려, 보호의 대상으로 인식되어온 장애인에 대한 스스로의 관점도 성찰해야 하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자연스러울 정도로 분리시켜온 사회구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또한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예술 영역에서 집중할 수 있는 표현의 이유/이면, 표현된 표면, 그 표현이 의도하지 않았으나 드러내는 무언가를 향해 멘토링과 비평이 역할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멘토링과 비평이, 장애 예술인에게 따뜻한 다독임이 되지 않을 수 있으며, 장애인이 사용하는 재료와 표현언어에 대한 비장애인의 호기심1)을 넘어설 수 있다. 동시에 차가울 정도의 정확함(명료한 해석이 아닌 멘토, 비평가로서의 역할에의 충실함)이 서로의 활동 지속을 위해 필요할 수 있다.

 

 

감각과 장애특성을 가로지르는 개별성

 

한편, 장애 예술인의 창작과정이나 결과물이 신체적 감각을 중심으로만 해석되거나 비평되는 것은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 역시 비장애인 중심의 사고라고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시각장애인에게 있어서 잘 보지 못함, 볼 수 없음, 혹은 다르게 볼 수 있음이 창작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제, 청각장애인에게 있어서 잘 듣지 못함, 들을 수 없음, 혹은 다르게 들을 수 있음이 창작의 출발점일 것이라는 전제 등이 그러하다. 이것은 특정 장애유형이나 특성이 작품을 구성하는 대표적이거나 핵심적인 요소일 것이라고 보는 것인데 이것은 장애인이라는 존재를 장애 자체와 동일시하는 것과 비슷하다. 또한 복합장애나 넓은 장애 스팩트럼 등을 고려했을 때에도 장애특성을 중심으로 창작을 바라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 물론 장애특성이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창작자 스스로도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장애특성, 그것과 쉽게 연결되는 신체적 감각을 중심에 둔 접근은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는 개별성, 개별적 삶이나 표현에 대한 촘촘한 층위들을 놓치게 만들기도 한다. 또한 매우 현실적으로, 유사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장애인간에도 소득수준, 사회적 지위, 생활환경, 교육수준 등에 따른 삶의 차이가 존재한다. 특히 장애 예술인에 대한 비평의 언어들이 자칫 장애유형별 작품 특성 및 분석으로 재생산될 수 있음2)을 고려할 때, 2020년을 살아가고 있는 존재로서의 창작자의 그 무언가를 개별화된 언어들로 살피는 과정이 필요하다.

 

 

각자의 흔들림으로부터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2007년부터 장애인과의 창작활동을 여러 현장에서 해왔다. 그러나 나의 관점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다. 비장애인 중심으로 당연하게 설계되거나 인식되었던 사회, 예술, 창작, 개념의 전반을 성찰하거나 재배치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의 작업실에 앉아 다음 전시를 준비하는 장애 예술인을 볼 때마다 오래전 특수학교에서 만났던 중증장애인이나 부모가 없는 장애아동을 떠올리며 예술에 대한 논의 이전에 인간의 삶에 대한 우울한 환기를 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더욱 내가 그 과정에서 정확해야만 하는 순간을 만나기도 한다. 내가, 혹은 내 관점이 흔들리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매 순간 (멘토링이든, 기획이든, 해석이든) 정확할 필요성이 동시에 마련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흔들릴 필요 없는 분명함을 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가 장애, 장애인, 장애예술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만이 아니라 평범성, 일반성으로 범주화된 영역에서 오랫동안 사고하고 학습해왔기 때문이다. 그 영역을 만들고 범주화해온 언어들로부터 벗어나는 시도는 우리를 충분히 흔들어 놓는다. 그리고 (별로 논리적이지는 못하지만) 오히려 흔들리는 개인들이 장애예술과 관련한 언어를 마련하는 데에 장기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장애인 중심의) 기존 언어나 인식의 흐름으로부터 예속화되지 않으려는 움직임은 그 자체로 우리를 흔들 수 있는데 그것을 계속 마주하는 과정 자체가 장애예술에 대한 질문을 만드는 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애예술과 관련하여 정책은 흔들림 없는 새로운 이름과 비젼 정도를 원하지만 현장3)에는 확장된 담론과 흔들리는 언어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언어들은 소수의 재능인으로서의 장애 예술인의 사회참여에만 기여하지 않아야 한다.4) 동시에 그 언어들이 장애예술 관련 사회적 성과나 의미를 작동시키는 간편한 장치가 될 수도 있다는 것도 재고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복잡함의 표면을 미련하게 읽어내고 지지하는 시도가 필요하다. 공든 탑은 계속 무너진다. 비장애인이든 장애인이든 우리의 삶과 창작은 그러하다. 그렇기에 튼튼한 탑을 쌓는 대신, 흔들리는 탑의 나약함을 받아들이는 다른 출발이 필요하다.

 

 

 

1) 호기심이 생길 때는 다른 나라의 장애 예술인의 창작물을 살펴볼 필요도 있다. 한편으로 국가, 지역과 상관없이 비슷한 양상이나 표현기법이 발견되기도 한다.

(참고 : http://a-yamanami.jp)

 

2) 특히 이번 전문가 매칭 프로그램은 잠실창작스튜디오의 기획 사업으로 외부에 소개, 공유된다는 점에서 장애예술 관련 현장에 강력한 레퍼런스로 작용할 수 있다.

 

3) 창작활동을 지속하고자 하는 장애인과 그 가족의 일상, 장애 관련 창작 및 기획활동의 시도, 장애 예술인을 지원하는 기관의 사업들, 장애예술 관련 사례를 통해 사회를 재해석하고자 하는 개별화된 시도 등

 

4) "장애 예술인이 ‘창작이 활성화 되는 상태’를 작품발표의 기회 확대 및 전업예술가로서의 자리매김으로만 해석하지 않아야 창작의 지속을 위한 환경과 역량을 스스로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다. 장애인에 대한 기본적인 복지제도가 안정화되어있지 않아 장애 예술인의 생계유지 및 사회참여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는 더욱 ‘창작’ 자체, 혹은 ‘창작이 활성화되는 상태’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들이 장애 예술인과 비장애 예술인의 예술활동 안에서 문제의식으로 작동되고 가시화될 때 장애예술의 의미도 국내 상황과 부합되는 독창적인 맥락으로 나아갈 수 있다.” (주윤정 외, 2018, “장애예술인 창작 활성화 프로그램 개발연구”,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p.119)

🖐신종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오프라인 공간에서 진행 예정이었던
비기자 공유회 "내일도 모르는데"를

홈페이지와 오픈채팅방 등 온라인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비기자 온라인 공유회

내일도 모르는데


창작그룹 <비기자>가 "내일도 모르는데" 예술, 여성, 장애, 문화, 제작, 놀이, 청년과 관련하여 해봤던 창작, 프로젝트, 연구의 사례와 결과물을 온라인을 통해 아래와 같이 공유합니다.

 

 


■ 공유회를 열며
불투명한 미래를 향해 분명한 방법과 계획을 설계하는 대신, 현재 가능한 것을 해보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동시대 창작자이자 생활인인 창작그룹 <비기자>는 내일도 미래도 확신하지 못한 채 해봤던 것들을 비슷한 입장의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예술, 문화운동, 놀이, 연구의 경계를 오가며 해봤던 활동과 그 결과물을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합니다. 이를 통해 <비기자>의 활동을 고유한 콘텐츠로 보호, 개발하지 않고 공동의 논의주제로 확장하고자 합니다. 동시에 우수 사례의 확산보다 치열하고 지지부진한 사례의 지속이 주는 힘을 실험하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비기자>의 활동은 경험적 정보가 되어 타인의 삶으로 연결되기를 바랍니다.

 

 

 

■ 공유방식
- 홈페이지 게시물을 통해 자료 및 세부내용 공유

-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비기자'를 통해 1:1 대화 (상시 대화 가능하나 내부일정으로 답변이 늦을 수 있음)

 

- 그외, 이메일 voslss@hanmail.net 을 통해 대화 가능

 

 

 

■ 공유내용

 

(1) 하고 싶어서 해본 것들 : 어릴 때부터 좋아해서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만들고 있는 놀잇감, 오락기, 보드게임, 도구 등

 

- 공유링크 1 : 비기자 포트폴리오

 

비기자 포트폴리오_20200222.pdf

 

drive.google.com

- 공유링크 2 : 제작물

 

'작업/제작' 카테고리의 글 목록

무한경쟁시대에 각기 다른 생각들이 꾸준하게 비길 수 있는 현장을 예술프로젝트, 전시, 공연, 영화, 교육의 방식으로 만듭니다.

bigija.tistory.com

 

 

 

 

(2) 같이 살면서 해본 것들 : 출산과 육아를 경험하면서 만들었던 음악 (비기자 멤버가 기획, 작사, 작곡, 프로듀싱 등 참여)

 

- 공유링크 1 : MC.mama 1,2집 음원 듣기

 

MC.mama

http://choisunyoung.tistory.com

soundcloud.com

- 공유링크 2 : MC.mama 1집 가사집

 

2013_MC MAMA_1집_가사집.pdf

 

drive.google.com

- 공유링크 3 : MC.mama 1집 수록곡 <밤바라밤> 뮤직비디오

 

- 공유링크 4 : MC.mama 2집 가사집

 

2017_MC MAMA_2집_가사집.pdf

 

drive.google.com

 

 

 

 

(3) 먹고 살려고 해본 것들 : 창작활동을 비즈니스 모델로 만들어나간 경험

 

- 공유링크 1 : 2019 안티카페 손과얼굴 워크숍 '작업과생업: 수작의 기술' <창작그룹 비기자: 생존의 모양>

 

2019 작업과생업: 수작의 기술 <창작그룹 비기자: 생존이 모양>

​​작업이 생업으로 연장되고 생업이 작업으로 되는 하나의 직업적 경계에 머무르지 않고 생계를 유지하는...

blog.naver.com

 

 

 


(4) 정리하면서 해본 것들 : 연구하며 정리했던 장애+창작 관련 내용

 

- 공유링크 1 :  장애+창작, 예술교육 관련 원고 및 자료

 

#장애예술 #장애인예술교육 #장애문화예술교육 자료 공유합니다 (20200214업데이트)

안녕하세요. 창작그룹 비기자입니다. 비기자는 최근 몇년간 장애 예술, 장애인 예술교육, 장애문화예술교육 과 관련하여 강의, 자문, 교육, 연구 등의 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공공기관에서 발행하는 웹진, 월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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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그룹 비기자의 2010년도부터 현재까지의 활동을 담은 포트폴리오를 공유합니다.

관심있으신 분은 누구나 아래 링크를 통해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https://tuney.kr/AkIN4I

 

 

 

 

'소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기자 소개  (0) 2018.02.03

*본 원고는 서울시 '2019 꿈틔움 예술창작소 1:1멘토링지원사업' 결과자료집에 실린 글입니다.

 

*본 사업은 <장애인문화예술판>이 총괄 운영하였습니다.

 

*예술창작소는 서울시에 거주하는 장애청년(만19세이상에서 만29세이하)들의 창작역량을 강화하고 창작활동을 모색할 수 있도록 문화예술 전문가를 1:1로 매칭하는 사업입니다. 20명의 장애청년과 20명의 문화예술전문가가 멘티와 멘토가 되어 서로의 성장을 돕고 지원하는 관계맺음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멘토의 20%는 장애예술인이 참여했습니다.

 

*사업공고문 자세히보기 :

 

장애청년을 위한 꿈틔움 예술 창작소 1:1멘토링 지원사업 멘토 및 멘티 모집 공고

사업개요    사 업 명 : 장애청년을 위한 꿈틔움 예술 창작소    사업기간 : 선정 일부터 ~ 11월30일까지          지원자격 : *멘티 : 서울에 거주하는 만19세 이상, 만29세 이하의 장애청년 중 문화예술교육 및 활동에 경험이 있으면서 예술창작활동(연극, 무용, 영화, 미술, 음악)에 욕구가 있는 사람. (5월~11월까지의 창작활동에 성실히 참여 가능한 사람) *멘토 : 장애청년예술가 양성에 관심이 있는 전문예술인으로서 문화예술 활

www.artpan.net

 

*결과자료집 및 사업 관련 문의 : <장애인문화예술판> / 420pan@naver.com / 02-745-4208  

 

 

 

 

 

 

 

 

 

 

 

해석의 근거, 참조의 흔적

 

창작그룹 비기자 / 최선영

 

 

1.

경력의 많고 적음을 떠나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두 사람이 몇 개월간 스물다섯 번을 만난다는 것은 서로에게 어떤 경험으로 남을까. 멘토, 멘티로 참여한 40명의 인터뷰를 정리한 나는, 이들이 집중된 만남 안에서 타인에 대한 각자의 관점을 어떻게 발견해나가는지 들어보고자 했다. 사업공고문에 등장하는 ‘장애’ 혹은 ‘장애인’이라는 개념, 관념, 혹은 존재는 여러 만남 안에서 변하거나 사라지거나 도드라지기도 했는데 그 과정을 이끄는 각자의 생각들도 궁금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이 사업의 이야기를 기록, 정리했던 것은, ‘장애’에 집중되는 사업적 관점을 흐트러트리고자 했던 개인적인 의지와도 관련이 깊다. 나는 공동창작 혹은 멘토링에 대한 다른 해석의 여지를 찾고 싶었다. 멘티의 장애특성에만 집중하지 않는 멘토의 관점, 각자의 개인성을 발견해나가는 창작활동, 사람과 사람의 관계 자체로 해석 가능한 시간들. 이러한 것들이 사업 참여자, 실무자, 관찰자 그리고 제3자에게까지 공동의 질문으로 확장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장애유형의 사람에게는 어떤 멘토링 방식이 효과적인지 분석하기 위한 자료를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2.

실제로 인터뷰를 정리하고 중간워크숍 등에서 멘토들을 만나면서 멘토와 멘티의 만남에 영향을 주는 몇 가지 요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 글에서는 그것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첫 번째, 멘토의 예술관이다. 이 사업은 협업보다는 멘토링의 방식으로 창작자간 만남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멘토가 전반적인 흐름을 끌고 가거나 설계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멘토가 예술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창작자라는 존재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가 멘토링 방향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창작자의 주체적인 표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멘토는, 멘티의 평소 관심사에 기반을 두고 그가 표현을 더욱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환경을 고민하였다. 한편 창작자의 역량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멘토는, 멘티가 다양한 것을 배우고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과정을 설계하였다. 물론 멘토들이 이러한 두 가지 방향으로만 나뉘어 멘토링을 했던 것은 아니나, 예술에 대한 각자의 상(想)을 토대로 멘티의 활동 방식을 고민하곤 했다. 이것은 멘토가 가지고 있는 예술에 대한 학습의 경험, 삶의 기억 등과도 연관되어 보였다.

 

두 번째, 멘티의 적극성이다. 몇몇 멘토들은 멘티가 적극적이지 않았다면 사업이 전반적으로 매우 힘들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것은 결국 멘티라는 창작자가 자신의 창작적 근거, 주제, 동기를 스스로 고민하거나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멘토링이 자칫 멘토의 적극성, 전문성에 기대어 이루어질 수 있는데 그보다 먼저 멘티의 태도 혹은 관심사가 멘토링 전반에서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멘티가 자신이 원래 하던 것만 하는 경우는 그것을 적극적 태도로 해석해야 할지 논의의 여지가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멘티의 적극성을 받아들이거나, 반대로 파고드는 멘토의 또 다른 적극성이 요구되기도 했다.

 

세 번째, 1:1 만남의 구조적 특성이다. 많은 멘토, 멘티들이 1:1 만남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을 보였지만 활동 전반을 멘토가 끌고 가야 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도 언급했다. 장애인 창작활동에 대한 전문적인 의견을 들어봐야 하는 것인지, 멘토링이나 예술교육에 대한 방법론을 더 알아야 하는 것인지 등에 대한 개인적인 고민을 하고 있었다. 특히 멘티가 멘토의 제안이나 행동에 많은 부분 의지하게 되는 상황에서는 멘토들의 고민이 가중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이것은 개별 창작자들의 특성에 집중할 수 있는 1:1 멘토링의 장점과 달리 현실적으로 보완책이 필요한 부분으로 읽히기도 했다. 상황에 따라서는 멘티가 다수 안에 묻어가기도 하고 여러 관계 안에서 자극을 받는 등의 기회가 필요해 보였다. 1:1 만남이 사업적 특성으로만 부각되지 않고 창작자들의 상황과 장르적 특성에 따라 변동 가능한 형식 중 일부로 기획될 필요도 있어 보인다.

 

네 번째, 만남의 시기다. 사실 대부분의 멘토, 멘티들은 이번 사업을 통해 처음 관계를 형성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떤 장애유형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을 집중적으로 만났기 때문에 서로에게 호기심이나 관심을 가지기 수월한 상황에 있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궁금함, 창작방식에 대한 관심으로도 이어져 멘토링 과정에 더욱 상호적인 영향을 미쳤다. 반면, 이미 오래전부터 1:1 만남을 이어온 멘토, 멘티의 경우는 호기심과는 다른 관심을 기반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이 사업을 앞으로도 이어질 만남 중 일부의 시간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한편, 사업 이후에는 자연스러운 만남이 쉽지 않다는 것을 예감한 멘토, 멘티의 경우, 어떻게 이번 만남을 의미 있게 마무리 지을지 고심하기도 했다. 결국, 만남 자체도 중요하지만, 각기 다른 만남의 시기가 멘토링의 에너지를 여러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게 했다고 볼 수 있다.

 

다섯 번째, 창작의 확장 가능성이다. 이와 관련하여 인터뷰에서는 “멘티와의 만남이 멘토에게 어떤 영감이나 자극을 주는지” 공통적으로 질문을 했었다. 이것은, 멘토가 멘티만을 위해 기능하는 사람으로 전제되지 않기를 바라며 던진 질문이었다. 결국 멘토도 창작자,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멘토가 이 사업에서 본인의 창작에 대한 확장 가능성을 발견해야 스스로 참여의 의미를 고민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대부분의 멘토들이 각자 발견한 창작적 자극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한 부분이 특히 흥미로웠다. 멘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계속 생각하다 보니 정작 멘토 본인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생각하게 되었다는 답변도 기억에 남는다. 예술적 행위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더라도 결국 사람에 대한 내밀한 관심이 다른 창작을 발생시킬 수 있을 거란 생각도 할 수 있었다.

 

 

3.

멘토, 멘티의 비언어적 교감의 순간들을 대화 안에 모두 담을 수는 없지만 이 기록들이 장애를 빗겨 가거나 관통하는, 사람에 대한 다양한 접근들로 읽히기를 바란다. 장애특성을 넘어서는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개개인에 대한 관심으로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그 스펙트럼의 폭을 (분명하지 않은) 일반성, 정상성을 전제로 매우 좁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이 사업을 매우 다양한 사람들간의 만남으로 전제한다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더 보일까. 어긋나는 대화, 쉽게 전달되지 못하는 표현기법, 불쑥 튀어나온 솔직함, 변함없는 고집스러움도 만남의 일부로 해석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 해석적 근거는 전문적인 자료도 논리적인 연구결과도 아닌, 다양한 사람들의 등장과 구체적인 대화들로 가능할 것이다.

 

여러 멘토들이 ‘내가 이렇게 멘토링을 하는게 맞는지 모르겠다’는 불안감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에 대해 우리가 당연히 알 수 없다, 그래서 만나보고 함께 시간을 보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했다면, 그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들도 불확실하지만 더듬어보려 했던 시간들이 오히려 구체적인 참조가 되어 다음의 만남을 상상하게 하고 각자의 창작으로 뻗어 나가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참조들은 결코 표준값을 마련하기 위해 기록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수도 없이 개별화된 참조들은 ‘사람에 대해서 쉽게 알 수 없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미련한 근거들로 남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방법 대신 참조의 흔적을 남긴 멘토, 멘티의 대화를 통해, 사람과 사람이 효율적으로, 혹은 효과적으로 만나지 않는 것에 대한 의미까지도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

 

 

비기자가 운영하는 '짓거리연구소' 이름으로 참여했던 서울문화재단의 [2019  장애인의 생활예술 활동지원 및 FA 역량 개발방안 연구] 보고서가 발간되었습니다.

서울시 생활문화 활성화 사업을 중심으로 장애인의 참여가능성을 조사하고

활동지원을 위한 단계적 방안을 연구했습니다.

더불어 장애인의 활동지원 및 참여를 위한

생활예술매개자(FA)의 역량 개발방안을 모델화하여 제시했습니다.

 

현장 조사, 인터뷰 등 연구에 참여해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연구진 : 강유선, 권은영, 성연주, 최선영


*연구보고서 다운받기 : (게시물 237번)

www.sfac.or.kr/business/policy/sfac_policy.do

 

서울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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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sfac.or.kr

 

서울연극센터 웹진 연극in 에 얼마전 참여한 "성평등 예술지원정책 제3차 오픈 테이블" 관련 글이 실렸습니다.

 

서울연극센터 연극인 - 연극인

 

www.sfac.or.kr

 

 

경력단절을 읽는 새로운 시선_성평등 예술지원정책 제3차 오픈 테이블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7년 전 젖먹이 아들을 재우고 새벽마다 화장실에서 목소리를 녹음해 MC.mama라는 이름으로 출산, 육아에 대한 음악을 만들었다. 집 안에 앉아 집 밖을 향해 정리되지 못한 말들을 토해내던 그때, 나는 내 안에서도 예술계 안에서도 사라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슬픈 서사로 재생산하고 싶지는 않았다. 개인의 이야기를 너무 개인적이지만은 않게 공유해야겠다고 다짐하며, 그렇게 오픈 테이블에 참여했다.

지난 1월 9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의 ‘예술가의 집’에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예술위) 성평등예술지원소위원회 주관으로 성평등 예술지원정책 제3차 오픈 테이블 “경력단절을 읽는 새로운 시선”이 열렸다. 출산과 육아, 그리고 경력단절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여성 예술인 4명이 각자의 사례를 공유하였고, 이어서 한국여성과학기술지원센터의 차은지 팀장이 과학기술분야의 경력단절 여성들을 위한 ‘여성과학기술인 R&D 경력복귀 지원사업’ 사례에 대해 발제하였다. 마지막으로는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최유진 실장이 ‘여성예술인, 경력 유지와 복귀 활성화를 위해 고려해봐야 하는 것들’을 주제로 발제하였고 이어 객석에 있던 참여자들과도 자유토론을 진행하였다. 4시간 동안 진행된 이번 오픈 테이블에서, 나는 경력단절에 대한 개인적 경험과 의견을 말하는 여성 예술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였다.

 

 

출산 전, 나는 시각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며 전시나 프로젝트에 참여해왔다. 같은 분야의 예술인과 20대 중반에 결혼을 했고, 3년 후 출산을 했다. 육아에 대한 정보나 지식이 전혀 없던 상태에서 삶의 변화를 맞이하게 되면서 사람을 키워내는 게 이 정도로 힘들고 외로운 일인지 매일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만의 시간을 갖거나 기존에 내가 해오던 작업방식을 지속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체감했다.

오픈 테이블에서는 영상, 연극, 시각 분야의 여성 예술인들이 이러한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결코 즐겁고 희망적인 경험들은 아니었다. 나를 포함하여 모두가 지금까지도 무리를 하고 있었다. 창작 현장에 아이를 업고 가서 작업을 하거나 친정, 시댁을 오가며 도움을 요청하고 여기저기 죄송하다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들로 살고 있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노트에 적으며 나의 발제를 준비하던 그 시각에도, 내 아들에게서는 엄마 언제오냐는 문자가 오고 있었다. 여느 자리에서처럼 한쪽 신경은 ‘엄마’라는 역할이 잡아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날 강조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출산으로 인한 여성 예술인의 활동에서 오는 어려움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 어려움이 이 사회/세계에 대한 확장된 시선을 지속적으로 발생시킨다는 것에 큰 감사함이 있다. 내가 대학에서 공부한 예술이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출산 전에는 체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고 할 수 없게 된 창작활동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던 생계활동도 있었다. 남편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술이고 뭐고 일단 매일 매일의 밥값을 마련하고 사계절을 보내는 데 주력했다. 그러고 나서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삶이 보였다. 동시에 그들의 삶을 이용하거나 비판하기에 급급한 예술의 사례도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기존의 예술관과 창작방식을 바꿔야 했다. 무엇이 옳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현재 우리가 마주한 세계를 외면하지 않는 탐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림을 그렸던 내가 가사를 썼고, 함께 그림을 그렸던 남편이 음악을 만들었다. 새로운 예술을 구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흘러내리는 삶을 야무지게 기억하기 위해서. 생활은 힘들었지만 여전히 무리해가면 그 돈도 안 되는 작업을 했던 경험이, 우리 부부에게는 창작자로서의 큰 전환점이었다. 기존의 관점과 방식을 버릴 수 있었던 기회였기 때문이다.

경력단절의 경험을 말하는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애써 했던 이유는, 우리가 활동하고 발언하고 있는 자리가 창작과 예술의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힘든 시기를 잘 버텨낸 후 전공했던 예술을 활용하여 사회참여 기회를 마련하거나 일자리를 갖는 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할까. 그것은 ‘예술이 무엇인가’라는 논의와 이어질 수밖에 없다.

삶의 변화를 극복하고 장르 중심의 작품 제작 및 발표의 기회를 지속하는 것만이 예술인의 삶으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공부하고 연마했던 작품 제작 방식을 우선으로 두지 않고 현재의 관점을 담아 표현행위를 하는 것, 혹을 할 수밖에 없는 것도 예술일 수 있다. 이것은 예술 이전에 삶 자체, 혹은 그 안에서의 실천으로도 해석된다.

그런 차원에서 오픈 테이블에서의 논의가 궁극적으로는 경력단절 여성 예술인을 위한 제도 마련을 넘어, 다양한 삶의 유입을 고려한 정책적 전환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출산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에서는 창작이나 사회적 활동을 단절, 변화시키는 많은 사건과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성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출산과 육아도 남성의 삶에 영향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계에서 일반화된 밀도와 규모, 속도로 작품을 제작하지 못하거나 않는 사람들의 다양한 창작방식도 정책 안에서 고려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예술이 갖고 있는 핵심 요소인 다양성 회복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또한 제도가, 복잡한 삶의 문제, 사회적 이슈를 해결하는 만능 요소로 전제되지 않기를 기대한다. 여성의 경력단절은 오래전부터 축적된 일상적, 사회적 문제와 무관하지 않으며 제도 개선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다양한 제도들의 기획과 실행만큼이나, 삶에서의 실천을 예술의 영역과도 연결하여 이어가는 개개인들을 더욱 만나고 싶다. 이것은 작품 활동도 멋지게 해내는 슈퍼맘들의 등장이 아니라 삶의 질문을 끌어당겨 예술의 질문으로 확장하는 개별자들의 실천이다. 그들의 활동이 다양한 해석의 근거를 마련할 때 제도도 여러 사람의 삶을 함께 살피며 변화해나갈 것이다.

 

 

[사진제공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본 원고는 충북문화재단의 '2019 장애인 예술 매개자 양성과정 프로젝트 <렛잇비 : Let it be>' 결과자료집에 실린 글입니다.

 

 

 

실천을 망설이던 순간에, 나의 삶으로부터

 

창작그룹 비기자 / 최선영



첫날부터 무거운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참여자들이 경험하거나 목격한 장애, 삶 속에서 포착되거나 흘러가는 예술, 슬프거나 답답한 심정, 각자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장애’와 서로가 모르고 있다고 여기는 ‘장애’. 그것은 때론 첨예한 대화로 이어졌고 반복되기도 했다.

멘토인 나는 불안하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살아있는 감정과 표현들이 그 어떤 논의보다 흥미로웠다. 참여자들의 다양한 관점을 발견했고 그것이 뒤섞이는 과정을 함께 해서 의미가 있었다. 때론 멘토링이 무의미한 순간도 있었다. 그럴 때는 다른 각도에서 질문을 추가하는 정도로 역할을 했다. 프로젝트의 결과보다 매회의 대화가 궁금했다. 이렇게 해서는 장애인 예술 매개자가 ‘양성’될지 누구도 쉽게 예측할 수 없었지만 우리는 렛.잇.비. 그대로 두기로 했다. 미리 말해두자면, 사실 이것은 무엇을 가르치고 덧씌우고 개발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적어도 그 점을 잊지 않으려고 했다. 물론 프로젝트 과정을 계획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우리가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는지 내버려 두며 함께 가보고자 했다. 설사, 누군가는 예술이나 사람에 대한 기존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더라도. 멘토링은 부지런한 가이드가 아니라 재촉하지 않는 기다림, 빈틈을 비추는 질문 던지기일지 모르니까.

그리고 질문 던지기는 언제나 나를 포함한 참여자 모두를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프로젝트 이후에 현재까지 나에게 남아있는 질문은 ‘우리가 무엇과 무엇을 매개하려고 하는가’ 이다. 사업명에서 쉽게 답을 찾는다면 예술과 장애인을 매개하려는 것이겠지만 이건 좀 모호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예술이 무엇인지 (여기저기에서 배우고 들었음에도) 여전히 모르겠고 장애인을 어떤 존재로 정의할지도 사회적, 인문학적, 철학적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논의를 프로젝트의 끝까지 계속 이어갔다. 오히려 프로젝트가 끝난 후에 이 고민은 (다행히도) 더욱 커졌다. 그래서 예술도 궁금해지고 장애, 장애인도 불확실해졌다면 반가운 일이다. 그러다 우리가 예술과, ‘다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매개하려는 것은 아닐지 생각도 든다. 또한 장애인을 ‘사람’으로 전제해서 생각하는 데에 애써 여러 이유와 시간을 들여야 했던 것은 아닐지 되돌아보게 된다.

 

 

 

문득, 우리는 장애인 이전에 ‘사람’, ‘나와 다른 사람’, ‘타인’에게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도 생각하게 된다. 혹은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 우리가 예술과 사람을 매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그러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다시 질문이 이어진다. 우리는 혹시 각자가 가지고 있는 예술에 대한 가치나 의미를 타인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이 누군가에게 필요하다고, 그래서 전달 가능하다고 전제하면서. 그렇다면 우리는 매개의 방식을 다양하게 상상하고 있었을까. 혹시 그것을 프로그램이나 사업, 봉사나 나눔으로만 한정한 것은 아닐까. ‘실천연구’의 방식도.

그렇다면 내가 예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내가 ‘사람’에 대해 얼마만큼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가 ‘매개’의 방식도 결정짓게 했던 것은 아닐까. 결국 내가 전제한 ‘예술’과 내가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매개라면, 우리는 과연 이 매개의 중심에 있는 ‘나’에 대해 얼마나 생각해보았을까.

예술에 대해 별로 생각해보지 않은 나, 예술을 하는 나, 예술이 궁금한 나, 예술이 어려운 나, 예술이 친숙한 나, 예술이 삶과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는 나, 예술과 삶은 공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

그리고,

장애인을 잘 돕는 나, 장애인을 잘 모르는 나, 장애인을 싫어하는 나, 장애인이 되고 싶지 않은 나, 장애가 있는 나, 장애인을 만나보지 못한 나, 장애인이 익숙한 나, 장애인에 대해 공부해야겠다고 느끼는 나...

우리는 그런 ‘나’를 얼마나 들여다보려고 했을까. ‘나’라는 ‘사람’을 마주하려 하지 않은 채로 다른 ‘사람’을 무엇과 매개하는 것이 가능할까. 내가 나를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프로젝트 중반부터 내게 이런 질문들이 확장됐던 것은,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동시에 솔직해질까 말까 고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프로젝트는 어떤 삶 속의 내가, 예술과 사람 사이의 ‘나’와 얼마나 자연스럽게 매개하게 되는지를 살피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장애인이라는 타자를 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우리에게는 결국 (쉽지 않더라도) 본인 스스로를 발견하고 만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실천연구’도 낯설고 어려웠던 것이다. 결국 나의 자발적 고민, 능동적 실천, 일상적 연결이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이 실천연구에 관심이 있는가, 내가 정말 이것을 하려고 하는가, 내가 스스로 이것을 고민하고 있는가.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스스로를 외면했다가도 다시 마주해야 했다. 게다가 멘토들은 그 만남, 혹은 매개의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이거 하고 싶으세요?” 라는 질문을 주로 했다.

이렇게 낯설고 미련한 멘토링, 혹은 프로젝트는 참여자들에게도 익숙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장애인 예술 관련이라면 장애 유형별 교육 방법, 매개 방식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줘도 모자랄 것 같은데, 열심히 실천연구 계획서를 써온 사람에게 그 사람을 향하는 질문만 이어갔으니 참여자들은 대체 이게 무엇을 염두에 둔 매개인지 모호했을 것이다.

 

 

그러나 프로젝트의 후반부로 갈수록 나에게 ‘실천연구’는 나름의 구체적 의미로 해석되었다. 참여자 각자의 ‘삶’이 경험적 근거로 작동하는 연구. 스스로를 마주하려는 과정 없이 부지런히 실행만 하는 것과는 다른 실천. 매개의 방법을 상상하기 위해 각자의 삶의 흔적을 찾는 시간.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자의 삶이었다. 프로젝트 과정에서 장애인과 예술에 대한 여러 강의가 있었지만 그것은 단지 우리 삶 속에 숨어있던 의미나 문제의식을 끄집어내는 연결고리였다. 강의 내용에 따라 나를 바꾸거나, 내 삶과 별개로 ‘장애인 예술 매개’라는 영역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이 사회적으로 불평등한 상황 안에 놓인다는 것을 자주 발견할 때, 누군가는 우선적으로 선하고 따뜻한 조력자가 되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러나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우리는 사람에 대한 접근이 다양할 수 있음을 전제해야 한다. 그것을 상상하는 데에는 각자의 삶이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삶을 스스로 마주할 용기도 필요하다. 실천은 그 용기를 드러내는 어떤 시작점일지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렛잇비’는 실천을 해보거나 망설이는 시간을 응원했다고 생각했다. 어서 빨리 실천하라며 재촉하지 않고 같이 더듬어나가보자고. 참여자들에게 이 방식이 좀 어색했더라도 고민의 기회로 작동되었기를 바란다.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당연히 명쾌할리 없으니까. 앞으로 우리가 예술과 사람을, 혹은 사람과 사람을 매개하는 순간이 온다면, 너무 따뜻하지만은 않기를 기대하며, 끝까지 각자의 속도로 함께 해주신 참여자분들께 깊은 감사를 전한다.

 

 

 

 

2019 장애인 예술 매개자 양성과정 프로젝트 <렛잇비 : Let it be> 자세히 보기

http://www.cbfc.or.kr/mobile/sub.php?menukey=115&mod=view&no=5265&search=Y&kwd=%EB%A0%9B%EC%9E%87%EB%B9%84

 

충북문화재단 모바일 > 재단소식 > 공지/공고

 

www.cbfc.or.kr

 

경상남도함양교육지원청과 함께

7-9월 중 6일간 놀이창작 워크숍 <놀이의 모양>을 진행했습니다.

함양의 지역활동가 등 놀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들과

각자의 놀이를 상상, 만들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비기자가 만들었던 놀이를 함께 해보았습니다.

 

 

 

 

 

 

이후에는 버려진 물건들을 활용해서

일상 속에서 시도할 수 있는 놀이를 만들어보았습니다.

 

경기상상캠퍼스 생활문화센터 자유학년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수원 칠보산 자유학교에서 청소년들과 <제작의맛>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학교 주변에서 수집한 물건들을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각자의 물건을 만들어보았습니다.

 

15차시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 <찾아가는 미술감상교실>에 강사로 참여하여 매해 서울시의 10여개 초등학교를 돌며 2개의 프로그램을 진행하였습니다. 1회 수업 당 100-200명의 초등학생이 참여하는 대규모 수업이었지만 모두가 해볼 수 있는 놀이 활동을 통해 소외되는 학생이 많지 않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소망하는 미술, 마음그리기 : 비기자가 개발한 '그림받아쓰기' 활동을 통해 하나의 이미지를 다양하게 해석, 표현해봅니다.

 

 

 

 

 

 

 

 

 

 

 

 

 

 

 

 

 

 

 

 

 

 

 

 

 

 

 

 

 

 

 

 

 

 

 

 

 

 

 

 

 

 

 

 

 

 

 

*울퉁불퉁한 상상력 : 미술재룔가 아닌  일상 속 도구를 활용해 '딴생각놀잇감'을 만들어보며 다듬어지지 않은 상상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다양한 현장에서 1:1로 예술적 경험을 교환하는 '예술장돌뱅이'에 참여했습니다.

비기자는 직접 제작한 놀잇감을 관객들과 함께 해봤습니다.

 

 

예술장돌뱅이 자세히보기 : https://www.facebook.com/artnomadictrader

 

 

 

○ 수원 화성문화제

 

 

 

 

 

 

 

○ 천안 중부농축산물류센터 앞 행사

 

 

 

 

 

 

 

 

 

○ 봉평콧등작은미술관 페스티벌 '키득키득 콧등콧등'

 

 

 

 

 

수원시평생학습관에서 [열두달놀이터] 중 11월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놀이카드, 주사위, 일상물건 등을 이용해 아이와 어른이 각자, 또는 함께 놀이를 만들었습니다.

비기자는 그동안 해봤던 놀이, 만들기의 현장을 소개하며

참여자들이 자유롭게 놀이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자세히보기 : 
https://learning.suwon.go.kr/lmth/02_pro/view.asp?idx=1253

 

평생학습관 강좌 - 수원시 평생학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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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문화협치 컨퍼런스 '공존 공유  공생'

 

2019.12.12 - 12.13.

 

 

 

 

 

예술의 사회적 가치와 예술가의 역할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모든 것이 허용되는 예술은 이따금 작가의 의도라는 말로 알맹이 없이 그 정당성을 고집부리곤 한다. 그리고 붓을 든 모든 이를 예술가라 부르고 그 사람의 모든 붓질을 의도라 부르는 예술세계에서는 넘쳐나는 해석과 비평이 기꺼이 그것의 날개가 된다. 그리고 누군가는 오늘도 예술의 애매모호함이 '원래 그러한' 것이라 여기며 팔짱을 끼고 눈에 힘을 준 채 무언가를 읽어내려고 한다.

그 이상야릇한 현장에서 어떤 이는 심지어 소통을 '꿈꾼다.' 그리고 적지 않은 관객이 작품 건너편 예술가의 생각을 간결하게 찾아내고 싶어 한다. 다시 팔짱을 끼고. 눈에 힘을 주고. 그리고 예술가는 그 놈의 소통을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요구받고 있으며 그것이 가능하고 의미 있는지를 매순간 고민한다.

소통을 원하는 누군가와 그것의 정당성을 되묻는 누군가, 그 사이에 인쇄된 알 수 없는 문장들이 내가 체험하고 있는 예술세계다. '말'이 되지 않는 문장과 '말'을 기다리는 이의 희망과 '말'에 기대려는 작품 같은 무엇이 파닥거릴 때 슬그머니 걸어 나와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 그것이 예술이다.”

 

미대를 졸업한 내가 10년 전 혼자 끄적인 글 안에는 예술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가 가득하다. 예술이라 불리던 것의 근처 현실속에는, 캔버스 뒤에 숨어 비평 언어에만 집중하던 내가 있었고 후배들을 시켜 자기 작품을 완성하는 선배가 있었으며 포트폴리오와 작가노트 위주로 작품을 이해하는 유통구조가 있었다. 물론 그시절 나는 전시장에 놓인 미술 작품에 한정하여 ‘예술’을 이야기했지만 다양한 형태의 창작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지금도 생각은 크게 다르지않다.

그래서 이 발제문의 시작을 어떻게 해야할지 망설여졌다. 예술은 무엇일까. 그것의 사회적 가치를 이야기 하기에 앞서 나는 이 글에서 전제하는 예술에 대해 매우 개인적인 정의를 먼저 시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내가 경험했던 것들로부터 가능한데, 적어도 예술대학을 나온 사람들의 사회활동으로만 예술을 전제하고 싶지 않은 의도도 있다.

 

‘기존의 관습이나 인식에 질문을 던지는 구체적인 활동, 언어로 설명되기 어려우며 마주함의 경험을 통해서만 전해질 수 있는 현장의 무엇, 학습이 아닌 실험을 통해 스스로에게도 드러나는 삶의 흔적. 혹은 시간과 함께 쌓인 찰나의 결과물

 

분명 얼마 후에는 위의 정의가 불충분하거나 과하다고 후회하는 순간이 오겠지만 오늘은 위의 맥락에서 예술의 사회적 가치, 그것을 하고 있는 누군가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예술은 매우 구체적인 행위를 동반한다. 그리는 것, 노래하는 것, 움직이는 것, 만드는 것, 쓰는 것, 소리내는 것, 표현하는 것 등. 이것은 행위 자체로 존재하며 의미를 갖는다. 즉 쓸모나 기능을 최종 목표로 두지 않는 현재의 행위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 벌어지는지도 중요하다. 돈을 버는 것이 필요한 상황에서, 자신을 사회적으로 알리는 것이 다급한 상황에서, 밀린 집안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앞으로의 진로를 계획해야 하는 상황에서, 몹시 피곤한 상황에서, 누군가를 도와줘야 하는 상황에서, 사회적인 이슈가 대두되는 상황에서 등. 그 상황을 모면하거나 해결하는 데에 별 기능을 하지 못하는 행위를 하는 것, 심지어 그것을 계속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그것이 예술의 사회적 가치를 살필 수 있는 힌트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상황과의 팽팽한 싸움이자 자신을 지켜내는 고집 혹은 선택으로도 보인다. 그리고 외부적 요인이나 일반적 기준으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으려 할수록 그것은 두터운 시간과 함께 자신의 삶 자체로 쌓인다. 나는 그런 삶을 버텨내거나 그저 살아가거나 혹은 즐기는 누군가를 아주 가끔 만나는데 그들은 (적어도 나에게는) 분명한 예술가다. 몇장의 포트폴리오로 그들의 활동을 소개할 수 없으며 유명한 철학자들의 말을 빌려와도 그들의 삶을 설명하기 부족하다. 분명하지는 않아도 강력한 힘이 그들의 삶과 창작활동을 채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자발적인 선택이 계속되기를 응원한다. 심지어 그들의 삶이 더 힘들어지더라도 그 과정과 결말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과 같은 주제로 그들의 활동이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되어야 할 때도 있다. 요즘은 사회적 예술, 예술의 사회적 개입, 사회문화운동 등의 표현과 함께 그 순간들을 자주 접한다. 이러한 현상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예술이 사회적 의미로 해석되는 층위가 어떤 관점을 전제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래서 모호한 생각들을 그림으로 표현해보았다. 어떤 기준에 의해 한 개인의 예술 행위, 혹은 삶의 일부가 사회적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더불어 그 기준이 발생된 이유, 기준의 위치, 기준과 연관된 사회적 요소 등도 궁금하다. 예술이 사회를 바꾸고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고 인간을 치유한다는 정책적 주문이 울려퍼지면 대체 왜 그런 기대를 갖는지, 그에 따라 어떤 뉘앙스의 예술을 주로 보려고 하는지 알고 싶어지기도 한다. 명쾌하고 쾌활하고 따듯한 예술도 물론 있지만 불안하고 흐리멍텅하고 우울하고 냉소적인 예술도 있기 때문이다. 예술이 어떤 뉘앙스를 띄든 각기 다른 맥락의 사회적 가치를 가질 수 있다. 그 가치를 폭넓게 살피기 위해서는 다양한 삶의 기준에서 예술을 해석하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예술, 혹은 예술가의 삶을 구체적 활동의 시간, 깊이, 고민의 두께로 읽어내는 과정도 요구된다. 그때 예술의 단면을 향하던 시선은 더 많은 요소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예술의 두께를 바라보게 된다.

 

 

 

예를 들어, <비기자>가 2017년 진행했던 공기청정기 제작 프로젝트 ‘숨정화기 playing Zine & Kit 제작’을 살펴보자. 심지어 이 프로젝트는 서울문화재단의 ‘서울을 바꾸는 예술’ 지원사업 안에서 진행되었다. <비기자>는 시민들이 간편하게 만들 수 있도록 우유박스를 이용한 공기청정기 제작방식을 매뉴얼화하고 워크숍과 책자를 통해 그 과정을 외부에 소개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위 그림에서, 기준면 위에 드러난 특정활동들이다. 예술가가 개발한 공기정청기, 시민들과 문화적 경험을 나누며 진행한 워크숍, 예술가의 실험 과정이 담긴 책자 등이 그안에 포함된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와 연관된 잠재적 활동이 없었다면 이 공식적 프로젝트는 시작조차 될 수 없었다.

 

 

2017 ‘숨정화기 playing Zine & Kit 제작’ 프로젝트에서 소개한 우유박스형 공기청정기(좌)와 시민워크숍 현장(우)

 

 

<비기자>의 멤버인 한 예술가는 어린시절부터 물건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것을 좋아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가전제품을 뜯어보고 버려진 물건을 주워와 작동원리를 탐구했다. 그것이 예술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예술가 역시 그것이 예술이라 주장하지 않으며 예술이 되어야 할 이유를 애써 찾지 않는다. 단지, 관심이 있는 것을 계속 할 뿐이다. 누군가는 뭐하러 그런 행위를 계속하냐고, 현실에 도움이 되냐고, 그런 기술을 생계수단으로 활용해보라고 하지만 그는 그 말에 답변을 하는 대신 나사를 풀고 전동장치의 성능을 실험한다. 그런 시간이 30년 이상 이어지는 가운데 그는 공기청정기의 내부구조가 그리 복잡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중고가구와 환풍기를 이용해 공기청정기를 만들었다. 오렌지 껍질을 그 위에 올려두면 향기가 은은하게 퍼진다는 것도 발견했다. 프로젝트가 기획되기 전부터. 지원사업이 설계되기 전부터. 여전히 이것이 예술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흥미로운 것을 계속 했다.

 

 

한 예술가가 중고가구를 잘라 공기청정기를 만들었던 과정

 

 

그러다 <비기자>가 지원사업에 참여하면서 그가 만들었던 공기청정기의 재료와 제작방식을 보다 간편하게 정리해 프로젝트로 소개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프로젝트에서 드러나지 않는, 드러날 수 없는 누군가의 경험 혹은 행위를 우리는 어떻게 읽어낼 수 있을까. 물론 그것을 모두 드러내 예술의 사회적 가치로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꼭 그럴 필요도 없다. 단지, 개인 삶의 일부처럼 보이는 순간들을 예술의 사회적 가치와 연결해 총체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시선을 갖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많은 것을,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예술의 사회적 가치가 발생되는 상황과 층위에 대해 폭넓은 접근이 필요하다.

그러나 예술이 더욱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 차별화된 아이디어와 추진력을 갖추기를 기대하는 시선도 있다. 위의 프로젝트를 예로 들자면 “공기청정기의 종류를 다양하게 제작해보면 좋겠다”, “환경단체와 협력해서 프로젝트를 확장하면 좋겠다”, “공기청정기 외에 미세먼지와 관련한 시리즈 작업을 이어가면 좋겠다” 등의 의견으로 그 시선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마치 아래 두 그림과 같은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말들은 분명 애정을 담고 있지만, 예술의 보이지 않는 속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아이디어들로 읽히곤 한다. 그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가늠할 수 없는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혹은 이기적인 선택이나 비효율적인 실천도.

그렇다면 누군가는, 혹은 사회는 왜 예술가들이 창작의 시간을 쌓도록 응원하는 것보다, 드러난 성과나 결과를 확대해나가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예술가라는 개인의 삶, 혹은 예술의 지난한 과정보다 예술이 사회적 가치를 증명해내는 다양한 현장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예술을 이해해보려는 질긴 질문이 그리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나는 질문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답답함을 마주하지 않은 채 명쾌한 예술활동의 유형들로 예술의 사회적 의미와 관련한 논의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 나는 여전히 예술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그 모르겠음이 예술가들의 삶에 대한 궁금함으로 이어지지 못함이 더 아쉽다.

그렇다면 이 예술가들의 역할은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요즘은 정책화된 기획사업 안에서 예술가의 역할을 몇가지 문장들로 만난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지역의 이슈를 발굴하고 커뮤니티를 활성화하는. 하지만 인간을 향해 명시된 그 구체적인 기대들의 오히려 반대편에서 예술가의 역할을 상상하게 된다. 사회가 무엇을 문제화하는 관점에 질문을 던지는 것, 무언가가 사회적 이슈로 가시화되는 과정을 살피는 것, 커뮤니티에서 소외되는 개인성을 들여다보는 것, 그리고 미련하게 자신의 선택을 해나가는 것. 현실적 상황들이 그 선택을 방해하거나 망설이게 만들더라도. 교육기관에서 학습한 예술로 사회적 이슈와 관련한 해결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앞선 프로젝트 사례에서라면, 예술가의 역할은, 공기청정기를 시리즈로 만들어 환경문제와 메이커스 문화를 연결하는 활동을 가속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공기청정기가 되든 아무것도 되지 않든 계속 물건을 줍고 해체하고 다시 조립해보는 것이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어떤 가치인지,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함께 해보기 위해서는 어떤 장치와 과정이 설계되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실행해야 하는 것은 기획자나 매개자의 역할이다.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이 자신의 태도이자 일상을 지켜내는 구체적인 행위 외에 다른 것이라고 나는 기대하지 않는다. 자신의 목소리를 삼킨 채 번뜩이는 아이디어나 경력을 증명해내는 것이 다급한 사회 안에서, 자발적 관점과 재미를 지속시키려는 개개인들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사회적이다. 예술가로 불리기 이전의 개인, 그들이 각자의 관심과 의지를 지속시키며 존재하는 것 자체가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삶의 방식과는 다른 방향성으로 그들이 팽팽한 힘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술가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것과 다르다. 예술가는 사회적 변화를 위한 기능인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방향성을 지속하는 존재로서 중요하다. 사회가 급하게만 나아가지 않게, 누군가가 소외되는 인식구조가 익숙해지지 않게 그들은 각자의 개인성을 놓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소리를 모으고 쓸모없는 무언가를 만들고 흩어지기 좋은 이야기를 애써 주워담으며. 그것을 하고싶어 하는 본인 스스로에게 생활의 속도도 맞추며.

 

 

 

 

예술이 사회적 의미로 해석되는 기준 아래에 묵직하게 자리잡고 있는 어떤 시간들을 보자. 이것은 어떤 관점에서 포착되지 못하는 개개인의 삶이자 예술적 가능성이 아닐까. 이것은 사회를 알록달록하게 꾸미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기 다른 삶의 두께를 보여주기 위해 존재한다. 예술의 사회적 가치는 이 시간들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축적될 수 있는 환경 안에서 불쑥 혹은 필연적으로 솟아오를 수 있다. 그러나 솟아오르기를 기대하지 않는 어떤 시간도 있다. 그것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깊은 흐름을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일반적인 기준 위로 솟아올라 모두에게 보이는 가치로움이 아니라 가늠할 수 없을만큼 두꺼워진 누군가의 시간이다. 그곳에 예술의 또 다른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가 그곳을 바라보는 이유는, 그것을 알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수원청소년진로박람회 진로․직업체험부스에서

최근 제작한 놀잇감을 매개로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할 수 있는 예술가의 진로를 소개하였습니다.

 

 

 

 

 

 

 

 

 

 

 

 

 

 

 

 

생태문화축제 '우리의 좋은 시간'에서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비기자는  "생태"를

"인간을 포함한 생물이 살아가는 모양이나 상태"로 해석했습니다.

 

[우리들의 쓸데없이 좋은 시간 : 2019 사포질]

 

참여자들이 모여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쓸모가 정해지지 않은 나무토막을 사포질합니다.

(이게 다입니다.)

이걸 왜할까 싶지만 그래서 바로 그걸 해봅니다!

이 바쁜 시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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