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의 문화예술교육 비평웹진
<지지봄봄> 26호가 발행되었습니다.

 

비기자는 이번호에 기획과 편집에 참여했습니다.

 

 

"누구와 무엇으로 어떻게 만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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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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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와 무엇으로 어떻게 만날까 

 

창작그룹 비기자 최선영

 

 

 

그냥 쉬고 싶은 사람을 만났다면 어떨까.

푸릇푸릇한 에너지로 교실과 운동장을 뛰어놀 초등학생을 기대했는데.

 

‘이름이 뭐야?’라는 질문에 ‘이름이 뭐야?’라고 답하는 사람을 만났다면 어떨까.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예상했는데.

 

자신이 소유한 건물 자랑을 하는 사람을 만났다면 어떨까.

정감 넘치는 인생 이야기를 펼치는 어르신을 기대했는데.

 

사람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기대하고 예상한 모습의 사람만 있지 않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문화예술교육에서는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교육대상’으로 개념화하고 그 대상을 유아, 청소년, 노인, 장애인, 가족 등으로 겨우 세분화한다. 이러한 현상은 문화예술교육이 대상별 교육을 강조하는 정책적 움직임 안에 있을 때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하지만 행정적 서류나 사업 기획안에서 편리하게 분류해 부르는 그 ‘대상’들은, 교육 현장에서 다시 한 명씩 살펴보고 마주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된다.

 

예를 들어 중학생들과의 교육 활동을 한다고 가정했을 때, 그 학생들은 보통 ‘청소년’으로 불리지만 우리는 현장에서 ‘청소년스럽다고 느껴지지 않는 사람’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래서 ‘학생다움’이나 ‘청소년다움’에 대한 사회와 개인의 시선이 현장에서 보기 좋게 미끄러져 버리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결국 교육 현장을 이끌어야 하는 사람들의 고민으로 이어진다.

 

이번 <지지봄봄>에서는 그 고민을 하나씩 뜯어서 살펴보고 함께 나누려고 한다. 가늠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교육 현장의 사람들이 즉흥적인 교육인지 처세인지를 해내고 있는 순간에 말이다.

 

문화예술교육은 무엇이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도화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의 근거가 되는 교육 현장은 정신없이 생성되고 사라진다. 우수한 국내외 사례들이 소개되고 있지만, 그 사례를 다시 새로운 현장에 적용하는 것은 위험하거나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깊이 있는 교육적 성찰이 이루어지기에도 벅찰 만큼, 기획자나 강사, 실무자 등은 계획안을 쓰고 재료를 나르고 참여자들을 다독이고 일지를 작성한다. 문화예술교육이 어떠해야 할지 이전에, 당장의 프로그램을 어떻게 구현하고 정리하고 이어나갈지를 살피는 것도 쉽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번 <지지봄봄>에서는 교육 현장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쪼개어 살펴보고자 한다. 교육 현장의 언어와 주제, 재료의 실험, 현장의 진행, 참여자에 대한 관심, 강사나 기획자의 마음, 활동의 정리나 지속 등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사항들을 중심으로 말이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만나보고 있는 필자들이 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들은 보편화 될 수 있는 방법론을 소개하는 대신 개별화된 경험을 들려준다. 나 역시 그러한데, 이 글에서는 먼저 교육 현장에서의 언어에 대한 경험을 풀어보고자 한다.

 

나는 교육 활동에 있어서 ‘주제’가 있더라도 그것을 하나의 단어나 개념으로 참여자들에게 공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각자의 집을 만들어보는 활동을 실제로 계획했더라도 “집을 만들자”라고 하지 않는다. 그 순간 대부분의 참여자들이 사각형 건물 위에 삼각형 지붕을 얹어 관념화된 집을 그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고나 표현은 생각보다 언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사람’을 그려보자고 하면 졸라맨을 그리고 ‘자동차’를 그리자고 하면 각이 진 몸체에 바퀴가 2개 달린 측면에서 바라본 바로 그 승용차를 그린다. 그래서 나는 단어가 아니라,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속성이나 요소들을 풀어서 이야기하는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몇 가지 예시를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 ‘집’을 풀어서 말하기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이나 장소”

“나에게 익숙한 물건이나 사람이 있는 곳”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가득 채우고 싶은 공간”

“내가 쉬는 곳”

“내가 가끔 숨을 수 있는 곳”

 

· ‘사람’을 풀어서 말하기

“우리와 닮았지만 모두 다른 생명체”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사랑도 하고 질투도 하는 생명체”

“겉과 속이 다른 생명체”

“각기 다른 얼굴과 몸통과 팔과 다리가 달린 것”

“다른 행성에서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모를 존재”

 

· ‘자동차’를 풀어서 말하기

“우리가 주로 타고 다니는 것”

“바퀴와 엔진과 몸체를 가지고 있는 것”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도 태울 수 있는 것”

“갑자기 사라지면 삶의 속도를 느리게 만들 수도 있는 것”

“물건을 멀리까지 운반할 때 편리한 운송수단”

 

이러한 표현방식은 하나의 개념을 떠오르게 하기보다 다른 개념까지도 상상하게 만든다. 문화예술교육이 하나의 개념을 찾아내고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참여자가 반드시 집, 사람, 자동차를 표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과 비슷한 속성을 떠올리며 다양하고 엉뚱한 것을 상상하여 자신의 삶과 연결된 어떤 지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러한 말하기 방식은 더더욱 무궁무진하게 이어져 문학적인 표현으로도 연결될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예시 중에, “다른 행성에서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모를 존재”에 대해 그림을 그린다면 어떤 결과물들이 나올까. 그것이 얼마나 예술적일지 아닐지 따져보기 전에, 그것이 ‘사람’이라는 단어를 듣고 표현한 것과 어떤 차이를 만들어낼지 생각해볼 수 있다.

 

또한 교육 현장에서 교육적 주제는 계획서에 명시된 언어 그대로 참여자에게 전달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도 전반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혹시 강사나 기획자가 정해 놓은 주제를 강조하거나 교육 활동을 효과적으로 이끌어나가기 위해서 선택된 개념 몇 가지가, 참여자의 다양한 접근을 가로막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최근에는 교육 활동이 계획서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보니 분명하고 정리된 언어들이 활동 전반에 공지되어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참여자의 표현 영역에서는 오히려 계획된 언어, 기획된 주제가 흩어지고 확장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참여자의 개별적 관심이 활동 주제와 조금이나마 만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특히 문화예술교육은 비언어적인 과정도 포함하기 때문에 우리가 언어의 밖으로 뛰쳐나가 해볼 수 있는 것들이 더욱 많다. 또한 언어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 혹은 언어를 쓰지 못하거나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동등한 표현 기회가 주어지려면 문화예술교육은 계획서에 나열된 언어가 아니라 계획될 수 없는 감각이나 경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나는 그런 측면에서 나의 언어를 다른 표현이나 반응으로 튕겨내 버리는 사람들을 만날 때 당황하면서도 시원함을 느낀다. 예를 들어 내가 “이건 괴물이야?”라고 물으면 “그냥 그린 건데요”라는 답변을 들을 때가 그렇다. 나 역시 어떤 결과물을 보고 하나의 개념으로 판단하게 되는데 상대방은 그것이 무엇이 되는 것과 무관하게 ‘그저 그려본 것’으로 내버려 둔다. 뭐가 되지 않아도 상관없도록 이름도 의미도 부여하지 말고 그대로 두면 될 것을. 그저 그림 한 장이거나 어떤 순간의 흔적인데.

 

‘지역’을 ‘발견’하고 ‘도시’를 ‘해석’하고 ‘자아’를 ‘실현’하는 등의 문화예술교육 ‘사업’ 내의 개념들은 절대 ‘그냥 해보는 것’의 힘을 이길 수 없지만 언제나 더 중요하게 다뤄진다. 이것은 참여자의 관심, 참여, 표현을 덜 살피게 만드는 함정이 되기도 한다. 그냥 해보는 것이 지역도 발견하고 도시도 해석하고 자아도 실현하다가 심지어 삶 속으로 문화를 침투시킬 수도 있다고 기대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언어가 애써 감싸 안지 않아도 되는 비언어적인 순간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심지어 그것이 의미 이전에 재미를 찾아서 이리저리 스스로 움직이고 있다면 그 원동력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명확한 개념들을 언급하지 않는 활동이 너무 산만하게만 느껴질 때도 있다. 문화예술교육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순간들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될 때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명확한 말들을 하지 않으면서 사실은 명확한 주제를 놓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계획적이고 치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더 어려운 방법이다. 그렇기에 몇 가지 개념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며 그것에 기대어 활동 전반을 끌어가는 방식은 사실은 참여자와의 소통에서 편리한 선택이기도 하다. 이것은 때론 불편하거나 모호하거나 어려운 소통의 여지를 덜 만들기 때문에 참여자에게 일방적인 전달로 비춰질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언어나 개념과 관련된 고민을 하게 된 배경을 언급하자면, 그것은 역시나 어떤 사람들과의 만남 때문이었다. 입으로 소리는 내지만 개념을 언어화해서 문장으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람, 분명 어떤 단어나 문장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의 의미는 모른 채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따라 하듯 말하는 사람, 말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 유창하게 하는 말 속에 자신의 생각보다 강사의 생각이 더 강하게 들어있는 사람 등을 만나면서 왜 많은 활동이 언어에 기대어 이루어져야 할까 생각이 들었다. 문화예술은 그냥 해보는 것, 말없이 따라해 보는 것, 느껴보는 것, 같이 있는 것, 혹은 안 해보는 것도 가능한 영역일 텐데 말이다. 교육 ‘사업’이나 ‘프로그램’ 기획서 작성을 위한 언어에 집중하게 되는 상황 안에서, 우리 스스로 그 언어를 빠져나오기 위한 실천들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누구와 무엇으로 어떻게 만날까.

이것은 사실 누구와 어쩌다 만나게 될 때 그 다음의 만남을 어떻게 이어갈지 상상하며 내뱉어보는 혼잣말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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