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의 문화예술교육 비평웹진
<지지봄봄> 26호가 발행되었습니다.

 

비기자는 이번호에 기획과 편집에 참여했습니다.

 

 

"누구와 무엇으로 어떻게 만날까"

 

http://ggarte.ggcf.kr/?p=23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ggarte.ggcf.kr

 

 

 

 

 

누구와 무엇으로 어떻게 만날까 

 

창작그룹 비기자 최선영

 

 

 

그냥 쉬고 싶은 사람을 만났다면 어떨까.

푸릇푸릇한 에너지로 교실과 운동장을 뛰어놀 초등학생을 기대했는데.

 

‘이름이 뭐야?’라는 질문에 ‘이름이 뭐야?’라고 답하는 사람을 만났다면 어떨까.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예상했는데.

 

자신이 소유한 건물 자랑을 하는 사람을 만났다면 어떨까.

정감 넘치는 인생 이야기를 펼치는 어르신을 기대했는데.

 

사람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기대하고 예상한 모습의 사람만 있지 않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문화예술교육에서는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교육대상’으로 개념화하고 그 대상을 유아, 청소년, 노인, 장애인, 가족 등으로 겨우 세분화한다. 이러한 현상은 문화예술교육이 대상별 교육을 강조하는 정책적 움직임 안에 있을 때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하지만 행정적 서류나 사업 기획안에서 편리하게 분류해 부르는 그 ‘대상’들은, 교육 현장에서 다시 한 명씩 살펴보고 마주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된다.

 

예를 들어 중학생들과의 교육 활동을 한다고 가정했을 때, 그 학생들은 보통 ‘청소년’으로 불리지만 우리는 현장에서 ‘청소년스럽다고 느껴지지 않는 사람’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래서 ‘학생다움’이나 ‘청소년다움’에 대한 사회와 개인의 시선이 현장에서 보기 좋게 미끄러져 버리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결국 교육 현장을 이끌어야 하는 사람들의 고민으로 이어진다.

 

이번 <지지봄봄>에서는 그 고민을 하나씩 뜯어서 살펴보고 함께 나누려고 한다. 가늠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교육 현장의 사람들이 즉흥적인 교육인지 처세인지를 해내고 있는 순간에 말이다.

 

문화예술교육은 무엇이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도화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의 근거가 되는 교육 현장은 정신없이 생성되고 사라진다. 우수한 국내외 사례들이 소개되고 있지만, 그 사례를 다시 새로운 현장에 적용하는 것은 위험하거나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깊이 있는 교육적 성찰이 이루어지기에도 벅찰 만큼, 기획자나 강사, 실무자 등은 계획안을 쓰고 재료를 나르고 참여자들을 다독이고 일지를 작성한다. 문화예술교육이 어떠해야 할지 이전에, 당장의 프로그램을 어떻게 구현하고 정리하고 이어나갈지를 살피는 것도 쉽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번 <지지봄봄>에서는 교육 현장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쪼개어 살펴보고자 한다. 교육 현장의 언어와 주제, 재료의 실험, 현장의 진행, 참여자에 대한 관심, 강사나 기획자의 마음, 활동의 정리나 지속 등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사항들을 중심으로 말이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만나보고 있는 필자들이 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들은 보편화 될 수 있는 방법론을 소개하는 대신 개별화된 경험을 들려준다. 나 역시 그러한데, 이 글에서는 먼저 교육 현장에서의 언어에 대한 경험을 풀어보고자 한다.

 

나는 교육 활동에 있어서 ‘주제’가 있더라도 그것을 하나의 단어나 개념으로 참여자들에게 공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각자의 집을 만들어보는 활동을 실제로 계획했더라도 “집을 만들자”라고 하지 않는다. 그 순간 대부분의 참여자들이 사각형 건물 위에 삼각형 지붕을 얹어 관념화된 집을 그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고나 표현은 생각보다 언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사람’을 그려보자고 하면 졸라맨을 그리고 ‘자동차’를 그리자고 하면 각이 진 몸체에 바퀴가 2개 달린 측면에서 바라본 바로 그 승용차를 그린다. 그래서 나는 단어가 아니라,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속성이나 요소들을 풀어서 이야기하는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몇 가지 예시를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 ‘집’을 풀어서 말하기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이나 장소”

“나에게 익숙한 물건이나 사람이 있는 곳”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가득 채우고 싶은 공간”

“내가 쉬는 곳”

“내가 가끔 숨을 수 있는 곳”

 

· ‘사람’을 풀어서 말하기

“우리와 닮았지만 모두 다른 생명체”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사랑도 하고 질투도 하는 생명체”

“겉과 속이 다른 생명체”

“각기 다른 얼굴과 몸통과 팔과 다리가 달린 것”

“다른 행성에서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모를 존재”

 

· ‘자동차’를 풀어서 말하기

“우리가 주로 타고 다니는 것”

“바퀴와 엔진과 몸체를 가지고 있는 것”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도 태울 수 있는 것”

“갑자기 사라지면 삶의 속도를 느리게 만들 수도 있는 것”

“물건을 멀리까지 운반할 때 편리한 운송수단”

 

이러한 표현방식은 하나의 개념을 떠오르게 하기보다 다른 개념까지도 상상하게 만든다. 문화예술교육이 하나의 개념을 찾아내고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참여자가 반드시 집, 사람, 자동차를 표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과 비슷한 속성을 떠올리며 다양하고 엉뚱한 것을 상상하여 자신의 삶과 연결된 어떤 지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러한 말하기 방식은 더더욱 무궁무진하게 이어져 문학적인 표현으로도 연결될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예시 중에, “다른 행성에서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모를 존재”에 대해 그림을 그린다면 어떤 결과물들이 나올까. 그것이 얼마나 예술적일지 아닐지 따져보기 전에, 그것이 ‘사람’이라는 단어를 듣고 표현한 것과 어떤 차이를 만들어낼지 생각해볼 수 있다.

 

또한 교육 현장에서 교육적 주제는 계획서에 명시된 언어 그대로 참여자에게 전달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도 전반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혹시 강사나 기획자가 정해 놓은 주제를 강조하거나 교육 활동을 효과적으로 이끌어나가기 위해서 선택된 개념 몇 가지가, 참여자의 다양한 접근을 가로막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최근에는 교육 활동이 계획서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보니 분명하고 정리된 언어들이 활동 전반에 공지되어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참여자의 표현 영역에서는 오히려 계획된 언어, 기획된 주제가 흩어지고 확장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참여자의 개별적 관심이 활동 주제와 조금이나마 만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특히 문화예술교육은 비언어적인 과정도 포함하기 때문에 우리가 언어의 밖으로 뛰쳐나가 해볼 수 있는 것들이 더욱 많다. 또한 언어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 혹은 언어를 쓰지 못하거나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동등한 표현 기회가 주어지려면 문화예술교육은 계획서에 나열된 언어가 아니라 계획될 수 없는 감각이나 경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나는 그런 측면에서 나의 언어를 다른 표현이나 반응으로 튕겨내 버리는 사람들을 만날 때 당황하면서도 시원함을 느낀다. 예를 들어 내가 “이건 괴물이야?”라고 물으면 “그냥 그린 건데요”라는 답변을 들을 때가 그렇다. 나 역시 어떤 결과물을 보고 하나의 개념으로 판단하게 되는데 상대방은 그것이 무엇이 되는 것과 무관하게 ‘그저 그려본 것’으로 내버려 둔다. 뭐가 되지 않아도 상관없도록 이름도 의미도 부여하지 말고 그대로 두면 될 것을. 그저 그림 한 장이거나 어떤 순간의 흔적인데.

 

‘지역’을 ‘발견’하고 ‘도시’를 ‘해석’하고 ‘자아’를 ‘실현’하는 등의 문화예술교육 ‘사업’ 내의 개념들은 절대 ‘그냥 해보는 것’의 힘을 이길 수 없지만 언제나 더 중요하게 다뤄진다. 이것은 참여자의 관심, 참여, 표현을 덜 살피게 만드는 함정이 되기도 한다. 그냥 해보는 것이 지역도 발견하고 도시도 해석하고 자아도 실현하다가 심지어 삶 속으로 문화를 침투시킬 수도 있다고 기대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언어가 애써 감싸 안지 않아도 되는 비언어적인 순간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심지어 그것이 의미 이전에 재미를 찾아서 이리저리 스스로 움직이고 있다면 그 원동력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명확한 개념들을 언급하지 않는 활동이 너무 산만하게만 느껴질 때도 있다. 문화예술교육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순간들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될 때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명확한 말들을 하지 않으면서 사실은 명확한 주제를 놓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계획적이고 치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더 어려운 방법이다. 그렇기에 몇 가지 개념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며 그것에 기대어 활동 전반을 끌어가는 방식은 사실은 참여자와의 소통에서 편리한 선택이기도 하다. 이것은 때론 불편하거나 모호하거나 어려운 소통의 여지를 덜 만들기 때문에 참여자에게 일방적인 전달로 비춰질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언어나 개념과 관련된 고민을 하게 된 배경을 언급하자면, 그것은 역시나 어떤 사람들과의 만남 때문이었다. 입으로 소리는 내지만 개념을 언어화해서 문장으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람, 분명 어떤 단어나 문장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의 의미는 모른 채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따라 하듯 말하는 사람, 말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 유창하게 하는 말 속에 자신의 생각보다 강사의 생각이 더 강하게 들어있는 사람 등을 만나면서 왜 많은 활동이 언어에 기대어 이루어져야 할까 생각이 들었다. 문화예술은 그냥 해보는 것, 말없이 따라해 보는 것, 느껴보는 것, 같이 있는 것, 혹은 안 해보는 것도 가능한 영역일 텐데 말이다. 교육 ‘사업’이나 ‘프로그램’ 기획서 작성을 위한 언어에 집중하게 되는 상황 안에서, 우리 스스로 그 언어를 빠져나오기 위한 실천들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누구와 무엇으로 어떻게 만날까.

이것은 사실 누구와 어쩌다 만나게 될 때 그 다음의 만남을 어떻게 이어갈지 상상하며 내뱉어보는 혼잣말일지 모른다.

 

수원시평생학습관 웹진 [와] 166호_일본의 사회문화예술교육 사례

 

 

장소를 만드는 사람들 ① 일본 야마나미 공방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여기가 누구나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아틀리에입니다.”

 

13평짜리 작은 공간의 한 쪽에 놓인 책상을 가리키며 일본인 스태프가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 학교 교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그 작은 책상이 아틀리에라니.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사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책상의 의미를 설명하던 스태프와 그 공간의 느낌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이것은 2008년 방문했던 요코하마의 공간 ‘아트 랩 오바(Art Lab Ova)’에 대한 이야기다. 이곳은 1996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비영리그룹으로 ‘13평의 아트센터’라고 불리며 장애인, 홈리스, 노인 등 다양한 사람들과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곳이다.

 

최근까지 일본의 사회문화예술교육 관련 현장을 답사하며 연구해오고 있는 나는, 일본의 쾌적하고 거대한 아트센터보다 그 13평의 공간을 기억하게 된 맥락을 이번 연재를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은 소박한 것의 아름다움 이전에 누군가의 태도를 전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태도는 사회 혹은 사회적인 것과 연결되고자 하는 문화예술교육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 사례들이 사람에 대한 관심과 태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내가 특히 장애예술과 관련한 일본의 사례를 연구해오긴 했으나 그것은 다양한 감각과 특징을 가진 사람들과의 활동으로 의미가 깊다. 그래서 앞으로의 글에서 장애에 대한 언급이 많겠지만 그것은 ‘다양한 존재’에 대한 맥락으로 읽히기를 기대한다. 또한 국내와 일본의 복지제도1), 문화정책, 교육, 역사적 문화적 차이가 크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우리가 함께 눈여겨 보아야할 부분은 사례 속 내용 이전에 철학이나 방향성일 것이다.

 

시가현에 위치한 ‘야마나미 공방’(이하 공방)은 1986년에 '산맥 공동 작업소'로 시작되었고 2008년도에 사회복지법인 산맥위원회가 운영하는 공간으로 변화하였다. 즉, 이곳은 예술 관련 단체가 아니라 장애인복지시설이며 현재 79명의 장애인(이용자)과 22명의 스태프가 있다. 그래서 수급자 증을 가지고 있는 장애인이 주요 이용자이며 이들은 일상적인 활동 외에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창작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이곳은 장애인이 여러 표현활동을 통해서 마음이 넉넉하게 성장하는 것, 그 사람이 그 사람답게 건강하고 활기차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공방은 평일 오전 8시 45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운영하며, 장애인이 활동하는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45분이다. 이러한 운영형태로 보았을 때에는 국내의 장애인자립생활센터나 보호작업장과 비슷한 구조라고 볼 수 있다.

이곳에 오는 장애인들은 아틀리에에서 매일 창작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산책을 하거나 드라이브 또는 운동을 하고 노래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하는 가운데 각자의 속도와 의욕에 맞게 생활하고 있다. 공방의 운영자는 장애인이 만들거나 전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끌어내어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흐름과 공간을 개개인에 맞게 만들어내려고 한다. 그리고 ‘무엇이 하고 싶은지,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같은 개개인의 생각과 서로의 관계를 소중히 하고 있다2).

이런 맥락으로 아래와 같은 5가지의 그룹 활동이 공방에서 이루어진다.

 

1) Atelier : 코로봇쿠루 점토와 회화를 중심으로 각자 하고 싶은 일이나 잘하는 일을 살린 다양한 창작 활동을 한다. 여러 가지 경험을 쌓기 때문에, 조리 실습이나 외출 행사 등도 한다.

2) Studio : 코튼 자수와 회화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과자 만들기와 요리 실습에도 매월 노력한다.

3) 프렌댐 : 기계 아키라 훈련을 중심으로 체력 만들기를 적극적으로 하고 다른 그림과 취향을 살린 제품 제작에 임한다.

4) 모락 모락 : 다양한 재료를 사용한 창작 활동을 중심으로 공공시설 등의 유지 보수 작업도 실시한다.

5) 타이어 : 차를 타고 지역을 떠나 폐지 회수나 페트병 뚜껑 회수를 실시한다. 또한 점토와 회화 작업, 과자 만들기 작업에도 노력한다.

 

이러한 활동들은 최소한의 형식을 갖춘 프로그램으로 해석 가능하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프로그램의 구체적인 내용보다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 그들의 표현활동을 바라보는 시선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원래 시설을 아트화하려는 생각도 없었고 시설에서 아트를 도입하겠다는 생각도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누가 시키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본인들의 자발성을 존중해서 풍부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들의 혼네(진짜 속마음)를 제대로 보는 것이다. 어떤 작품을 만드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말과 태도 그대로 자신을 표현하고 즐겁게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의 여러 표현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희망의 모양이다. “지금 저 분이 뭘 하고 싶을까?” “오늘 어떻게 지내고 싶은 걸까?” 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미 하고 싶은 것이 있을 텐데, 그것에 반하는 것을 스텝들이 시키면 안 된다. 스태프의 입장이 그들보다 더 위에 있다고 인식시키는 관계라면, 그들의 진짜 마음이 보이지 않게 된다. 자기표현의 의욕도 닫혀버리게 된다3).”

 

“알기 쉬운 그림과 도예만이 작품인 것은 아니다. 우리의 개념으로는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것 중에도 그 사람만의 것, 유일무이하게 빛나는 것이 있다. 표현활동이라는 것은 누구의 왜곡 없이 자신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야마나미 공방’의 전체 이용자에게는 각자의 표현이 존재한다. 그들의 표현은 여러 가지다. 하루 종일 어떤 특정한 일을 계속 하는 사람도 있고, 특정한 말을 계속 하는 사람도 있고, 그 중에 종이를 계속 찢는 것이나, 아무것도 안하는 것도 표현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들의 대다수는 일상의 행위나 표현이 아트인지 아닌지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중에서도 사회적인 가치나 칭찬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다. 모두 자신만을 위한 행위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가치나 개념을 가지고 그들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독특한 발상과 가치관의 곁에서 그 행위나 표현을 긍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책임이 아닐까 싶다. 틀려도 그들의 행위나 표현에 손대거나 말 걸거나, 자신의 가치를 강요해야 한다는 입장이 아닌 것임은 명확하다. 이용자 모두는 각자의 풍부한 표현과 가능성이 있다. 그들의 표현이 사회 속에서 예술로 평가되는지 아닌지, 비싼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 자기의 취향에 맞는지 아닌지, 그들 자신의 목적과 관계가 없는 가치 기준으로 우열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그들의 표현에 대한 존중이 있는가 없는가가 어떤 것보다도 더 중요하다4).”

 

 

noname00.jpg

야마나미 공방의 장애예술인 작품 (출처 : 야마나미 공방 홈페이지)

 

이곳이 예술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곳이 아님에도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장애인들의 작품은 국제적인 전시를 통해 활발하게 외부에 소개되고 있다. 2018년 1월부터 3월까지 이곳 장애예술인들이 참여하는 전시만 13개이다. 이들의 작품은 홈페이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모두 개별 표현 언어를 다양하게 취하고 있으며 재료나 표현방식, 시각적 완성도에서 예술성도 돋보인다.

그런데 여기에서 특이한 점은 이곳에 예술 관련 전문 인력이 배치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예술적인 교육을 하기 보다는 장애인이 본래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함으로써 그들의 창작이 자연스럽게 지속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야마나미 공방’의 이용자 중에는 원래 표현활동을 특별하게 잘해왔던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은 이곳에 와서 표현활동을 자발적으로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방 관계자들은 일상에서 그림 그리는 도구나 바느질 도구, 점토 등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소재를 충분하게 준비해둘 뿐이다. 하지만 그것을 쓰라고 강요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다. 눈앞에 있는 소재를 쓸지, 쓰지 않을지 어떻게 쓸 건지 모두 장애인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활용한다. 공방의 대표는 이러한 맥락에 대해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지금 이렇게 많은 작품들이 나오는 이유는 대단한 지도(가르침)가 있어서는 아니다. 설비가 좋아서도 아니다. 아티스트 서로와, 그리고 아티스트와 우리들의 강한 신뢰 관계가 생기고 외로워하지 않고 안심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공간이 있어서이다. 신뢰관계가 있기 때문에, 아티스트들은 서로의 존재나 표현에 영향을 받고 자신 안을 돌아보고 그것이 상승효과를 내어 많은 작품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표현활동의 현장에서 핵심적인 역할은 단 하나, 신뢰 관계이다. 아티스트와 스태프, 그리고 아티스트 서로가 어느 한쪽이 우위에 서지 않고 평등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개인의 빛이 열려 나오는 것이다.”

 

 

 

제목 없음-1.jpg

카메 카즈미의 작품 (출처 : 야마나미 공방 홈페이지)

 

 

사람들 간의 신뢰 관계가 쌓이고 각자 외로워하지 않고 안심할 수 있는 장소. 그 장소의 가치를 채우는 것은 시설이나 규모가 아니라 그 장소를 만들고 지속하려는 사람들의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문득, 그가 말하는 ‘장소’가 내가 10년 전 ‘아트 랩 오바’에서 마주했던 작은 책상과 오버랩되었다. 장소는 어쩌면 공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작거나 혹은 클 수도 있는 ‘자리’가 아닐까. 많은 사람들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 안에서 사실은 모두의 자리가 고려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발견할 때, 우리는 그 자리의 필요성과 의미를 다시 떠올려볼 수 있다.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닌, 자신의 존재 자체로 편안할 수 있는 자리, 혹은 장소. ‘아트 랩 오바’에서 보았던 자리와 ‘야마나미 공방’을 통해 떠올린 자리는 그래서 다른 듯 닮아있었다.

 

그동안 나는 사회문화예술교육과 관련한 일본의 현지 조사에서 여러 형태의 자리이자 장소를 발견했고 동시에 그 의미를 강조하는 운영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어떤 교육프로그램을 하고 있다, 그것의 성과는 무엇이다, 예술은 중요하다’고 강조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장소에 오는 사람들이 편안해야 한다, 존중받고 있다고 느껴야 한다’고 했다. 문화예술은 단지 그런 장소를 만들기 위한 매개체 혹은 촉매제였다. 이를 통해 일본의 관련 사례가, 어떤 예술 활동을 독립된 장르로 성장시키는 것보다 예술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의 지속적인 표현활동 및 사회참여를 모색하고 있다고 느꼈고 그런 측면에서 시민운동과도 연결되어 보였다. 이것은 내가 예술이나 예술교육과 관련해서 일본의 단체나 기관을 방문했을 때 오히려 예술 외의 다른 맥락을 발견했던 것과도 연관이 깊다. 어떤 경우에 단체의 대표는 (심지어 그가 예술가인 경우에도) “예술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말은, 역시나 예술가인 나에게 다시 질문을 던진다.

 

“하나의 의미나 방향성으로 고정시킬 수 없는 예술을 왜 우선순위로 두고 교육해야할까. 예술이나 예술교육이 사람에게 중요할 수 있는 맥락은 무엇일까.”

 

그런 측면에서 사회문화예술교육은 사회에서 자꾸 튕겨져 나가는 가치나 생각들을 놓치지 않기 위한 또 다른 모색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손끝이 가리키는 책상을 바라보기보다 그 책상을 ‘장소’로 만들어나가는 시간을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1) 예를 들어 장애인 연금의 경우, 장애유형이나 정도에 따라 국내는 월 23-30만원, 일본은 60-160만원이 장애인에게 지급되는 등 큰 차이가 있다.

2) 야마나미 공방 홈페이지 (http://a-yamanami.jp)

3) 2016 발제문 “Self-Taught가 태어나는 아틀리에의 일상에서부터야마시타 마사토(야마나미 공방 시설장), ソーシャルアート:障害のあるとアートで社会える, 学芸出版社

4) 2016 발제문 “Self-Taught가 태어나는 아틀리에의 일상에서부터야마시타 마사토(야마나미 공방 시설장), ソーシャルアート:障害のあるとアートで社会える, 学芸出版社

 

 

 

관련 연구

본 연구는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지원을 받아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가 수행하고 있는 <장애예술인 창작활성화 프로그램 개발> 연구의 일부이다. 

 

관련 링크

*‘아트 랩 오바’ 페이스북 페이지 : https://www.facebook.com/artlabova

*‘야마나미 공방’ 홈페이지 : http://a-yamanami.jp

 

 

 

 

*웹진 보러가기 : http://www.wasuwon.net/129293

 

 

수원시평생학습관 웹진 [와] 166호_일본의 사회문화예술교육 사례

 

 

장소를 만드는 사람들 ② Swing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Swing>은 흔든다는 것이다. 흔든다는 것은 변한다는 것이며 변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 변화를 위해서는 아웃당하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안전한 상태나 공간에서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약간 위험한 것이 좋다.

하지만 너무 벗어나면 잡혀간다.

약간 벗어나는 것을 하면서 그 범위를 조금씩 확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Swing>의 대표 키노토 마사유키(이하 마사유키)는 <Swing>의 의미를 어렵지 않으면서도 분명하게 설명했다. 잡혀가지 않을 정도로만 약간 위험하게 무언가를 흔들며 변화를 모색하는 것. 이것은 예술이자 교육이자 운동(movement, campaign)일 수 있지 않을까. 기존의 예술, 교육, 운동을 설명하는 말들과는 차이를 두지만 그것의 의미와 충분히 연결이 되는 그 소개말이 나에게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관심, 흥미, 심지어 재미까지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을 <Swing> 공간 곳곳에서, 그리고 활동내용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동시에 타인의 관심이나 참여를 다각도로 고민하며 실천하고 있는 지점들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떤 장소를 만들고 있을까? ‘무언가를 흔든다’는 운영철학이 어떤 활동으로 이어지고 있는지 들여다보자.


교토에 위치한 <Swing>은 장애인이 문화예술을 매개로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비영리법인단체로 2006년에 설립되었다.


스윙 (1).jpg

비영리법인 <Swing> 간판


이곳은 예술단체가 아니라 장애인종합지원법에 따른 장애인 복지서비스사업을 하는 시민단체이다. 그래서 운영 면에서는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으며 상근직원이 8명 있고, 이 중 창작관련 전문 인력(전공자)은 3명이다.

이곳의 운영철학은 ‘Enjoy! Open !! Swing !!!’이다. 그래서 활동내용이 전반적으로 유머러스하고 지역사회와 소통하는 경향이 많다. 다음은 대표 마사유키가 인터뷰를 통해 소개한 <Swing>의 대표적인 활동 내용이다.



 shiki(박스) olioli(접기접기) : 박스 접기는 전국의 다양한 장애인복지시설에서 하고 있는 주요업무 중 하나인데 <Swing> 역시 공식적인 활동으로 이어가고 있다. <Swing>에서는 이런 활동 자체를 인정하고 재미있는 이름으로 소개하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스윙 (5).jpg

‘shiki(박스) olioli(접기접기)’ 작업공간(좌)과 일상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야외공간(우)



 우리는 표현족 :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그림·시·제조의 예술창작활동이다. 이 이름은 일본의 유명 TV 프로그램 '우리는 익살족'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내부에 작업공간이 있지만 사무실 한 쪽에 의자와 테이블을 마련해두고 작업을 하기도 한다. 메인 멤버(장애인)는 13명이며 이들은 매일 오기도 하고 일주일에 3번 정도 오기도 한다. 일주일에 1번 오거나 가끔 오는 사람도 있다. 9시부터 3시가 기본 활동 시간이며 멤버들은 그 안에서 자유롭게 오간다.



<Swing>은 창작활동을 통해 나온 결과물들을 전시를 통해 외부에 소개하기도 하는데 작품을 고르고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라, 전시장에서 여러 가지를 작업한다. 시를 낭독하고 박스 접기 같은 체험활동을 하거나 아틀리에가 전시장으로 옮겨진 것과 같은 개념으로 전시 공간에서 평소에 하던 창작활동을 하기도 한다. 장애인만 그 공간을 쓰는 것이 아니라 ‘같이 공간을 쓰고 있다’는 개념으로 이러한 활동을 하는 것이다.


스윙 (4).jpg

‘우리는 표현족’ 작업 공간



 Oyss 프로젝트 : 뮤지션 Cocco의 ‘쓰레기 제로 대작전'에서 영감을 받아 2008년 10월부터 시작한 활동이다. "아름다운 교토를 더 아름답게”를 슬로건으로, 겨울이나 여름에도 교토 가모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 활동은 돈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이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모두 파란색 옷을 입고 동네 청소를 한다. 한 달에 1회씩 진행해 현재 115번째 진행되었으며, 약 10년째 해오고 있다.


스윙 (3).jpg

‘Oyss 프로젝트’ 활동모습 (출처 : <Swing> 블로그)


<Swing>은 쓰레기 줍기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재미있어 보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며, 이 활동을 재미있어 보이도록 여러 가지를 하고 있다. 청소부대 명함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눠주거나, 이 활동에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Swing>과 상관없는 사람도 함께 할 수 있다. 예전에는 동네 아이들이 무서워서 울고 도망갔으나 지금은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고 아이들과의 사이도 좋아졌다. 처음에는 이들이 위험한 사람인 줄 알고 경찰이 와서 심문을 했다. 지금은 이 활동에 참여하는 스윙 멤버들이 귀중품을 주워 경찰서에 전달하기도 하기도 해 그들과도 친해졌다. 이들은 경찰이 찾아오는 등의 반응에 대해 ‘균열내기가 진짜 예술인 것 같다’는 맥락으로 이해한다. 또한 이 활동을 다른 지역에 가서 하기도 한다. 기업, 복지시설, 사무실 등에 청소부대 지부가 15개 있으며(2017년 4월 기준) 베트남에도 지부가 생겼다.



 당신의 목적지를 알려드립니다 : 교토의 교통이 복잡한데 <Swing> 멤버들이 교통 관련 지식을 총동원하여 주로 외국인에게 길 안내를 한다. 한 달에 1회, 2시간~2시간 30분 정도 진행한다. 버스나 지하철 노선을 세세하게 기억하는 것은 일부 발달장애인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한데 <Swing>은 이것을 장애가 아닌 독특한 능력으로 해석해 활동으로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시민이나 관광객들은 자주 “왜 이런 옷을 입고 이런 것을 하고 있냐”고 수상하게 여긴다고 한다. 그 이유나 의미를 설명해도 “아, 그렇구나”하고 이해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한다.



스윙 (2).jpg

‘당신의 목적지를 알려드립니다’ 프로젝트 활동모습 (출처 : <Swing> 블로그)


<Swing>의 활동은 특히 일본의 장애예술 관련 단체를 조사해온 내게 다르게 보이는 지점이 있었다. 그것은 첫째, 장애인의 일상이나 기존 업무와 연결된 활동을 예술적 기획으로 확장한다는 점, 둘째, 전시와 같은 작품 발표의 장소나 길거리에서도 장애인의 일상을 끊임없이 보여주고 자연스럽게 소개한다는 점, 셋째, 활동 전반에 유머와 즐거움의 요소를 잃지 않는다는 점, 넷째, 이러한 활동을 예술이라고 규정하기보다 장애인의 삶을 드러내는 시민운동의 일환으로 지속한다는 점 등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스윙의 대표 마사유키가 설명한 운영철학을 바탕으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장애인 개개인이 자기 자신으로서 편안한 마음으로 있을 수 있는 장소를 만드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것은 이전 글에서 소개한 ‘야마나미 공방’의 운영철학과도 중첩된다. 그러한 장소가 있으면 사람은 알아서 표현하게 된다고 그는 강조한다. 또한 그는 예술 관련 전공자가 장애인의 창작활동에 함께 하고 있지만 예술이라는 말을 <Swing> 안에서 쓰지는 않는다고 한다. 이들의 활동이 그 자체로 존중되기보다 예술이라서 중요해지거나 예술은 대단한 것이라고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술 혹은 예술교육에 대한 연구를 시작으로 만났던 일본의 단체들에서 내가 자주 발견하는 태도이다. 예술보다는 사람, 표현 그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는. 그 순간 나는 다시 오래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예술이 왜 우선시되지 않는가’가 아니라 ‘예술이란 것은 무엇을 위해 있는 걸까’, 그래서 ‘예술은 무엇일까’. 문득 <Swing>의 의미를 다시 떠올려본다.


‘잡혀가지 않을 정도로만 약간 위험하게 무언가를 흔들며 변화를 모색하는 것’


여전히 예술 혹은 예술교육이 무언인지는 모르겠지만 <Swing>이 흔들고자 하는 것, 흔들 수밖에 없는 이유, 그럼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것들을 하나씩 떠올리다보면 우리가 현재 스스로를 흔드는 질문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오히려 자신의 생각이 흔들리지 않도록 애쓰는 이유, 혹은 흔들릴까봐 불안한 마음이 더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누군가는 왜 이러한 강력한 의지들을 조금이라도 움직여보려고 하고 있을까. ‘예술이 중요해서’, ‘장애인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라는 이유들을 우선으로 두지 않을 때, 이들의 활동 맥락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일반적인 사회적 기준과 가치들이 머릿속에서 흔들릴 수 있는 시간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관련 연구

해당 내용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지원을 받아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가 수행하고 있는 <장애예술인 창작활성화 프로그램 개발> 연구의 일부이다. 


관련 링크

*<Swing> 홈페이지 : http://www.swing-npo.com

*<Swing> 블로그 : http://garden.swing-npo.com

 

 

 

 

*웹진 보러가기 : http://www.wasuwon.net/129728

수원시평생학습관 웹진 [와] 166호_일본의 사회문화예술교육 사례

 

 

장소를 만드는 사람들 아틀리에 코나스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일본의 예술단체나 기관을 답사하며 사회문화예술교육 관련 조사를 한 지 10년의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누군가의 문제의식이나 의지를 바탕으로 유지되고 있는 ‘장소’를 발견할수록 나에게 떠올랐던 것은 이전에 방과후학교 수업을 나갔던 국내의 특수학교들이었다. 번듯하게 지어진 그 학교들은 아파트 단지의 끄트머리, 혹은 외진 동네에 위치해 있었고 그래서 같은 지역에 수년간 살고 있던 나도 그 곳이 있었는지 모를 정도였다. 학교 수업을 시작하고 몇 달이 지나서야 동네를 오가던 특수학교 통학버스가 눈에 들어왔다. ‘아, 저기에 OO가 타있겠구나’ 하고 지나가는 버스를 바라보다가, 내가 어떤 사람들의 존재를 그동안은 왜 잘 알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두 발로 길을 걸을 수 있거나 말을 할 수 있거나 앞을 볼 수 있는 소위 ‘일반인’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은 외진 곳에 위치한 학교, 닫힌 건물 안에서만 생활하지 않는다. 그들이 사회 안에서 ‘존재하고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존재하고 있으나 ‘일반인’으로 쉽게 불리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왜 잘 알지 못할까. 그들이 탄 통학버스는 왜 모두의 삶 속이 아닌 닫힌 울타리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을까.

 

길고 긴 질문들이 이어지던 2016년 가을, 나는 다시 일본을 방문했고 그때 답사했던 몇몇 단체 중 하나가 오사카에 위치한 아틀리에 코나스(이하 코나스)였다. 물론 나라마다 사회문화적 차이가 존재하기에 이들 역시 사회적 차별과 나름대로의 운영적 어려움 속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코나스는 사회가 요구하는 거시적인 의미나 목표를 우선으로 두지 않는 듯 했다. 그보다는 주변의 동네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지, 단체에 오는 개개인의 표현활동을 위한 편안한 장소를 어떻게 만들지 고민했다. 코나스의 대표 타카코 시라이와(이하 시라이와)는 그러한 태도가 개인의 삶 속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설명했다.

 

“내 딸이 중증 장애인입니다. 생후 3개월 동안 간질과 발작을 보였고 저는 그러한 상태가 나아질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 딸은 40세가 되었습니다.

일본의 장애인은 예전에는 숲이나 사회 변두리에 가둬져 부모나 할머니에 의해 몰래 키워졌습니다. 그런데 1981년, 내 딸이 4세 때 ‘정상화 원리(principle of normalization)’가 일본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어떤 장애도 사회에서 같이 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새로운 이념으로부터 희망을 얻기도 했지만 내 딸이 나아질 거란 환상이나 기대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딸의 장애는 우리의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삶의 사고방식을 결정하니 오히려 편해졌습니다. 장애인 보호자회를 만들고 아이들이 마을에서 같이 살 수 있는 방향을 모색했습니다. 하지만 곤란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제도나 보호 장치가 없었습니다. 바자회 등으로 지원금과 운영비를 마련하며 12년을 보냈는데 너무 어려워서 다른 사람들은 그만두고 저만 남았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시대가 변하고 이념도 생기면서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왔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1993년에 설립된 코나스는 장애인의 어머니들이 모여 만든 지적 장애인 생활보호 시설로, 현재 20명에 가까운 장애인과 6명의 운영진 및 서포터즈가 함께 활동하고 있다. 이곳은 일반 가정집을 개조한 공간에서 공동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국내의 장애인 그룹홈과 비슷한 부분이 있지만 장애인이 거주 하지는 않고 주 5일 이곳에 나와서 창작활동을 포함한 일상생활을 함께 한다.

80년 된 고가옥을 개조하여 지역 내 장애인을 위한 창작공간을 운영한다는 것만으로도 코나스의 첫인상은 무언가 평화로워보였다. 지역적, 건축적 문화가 쌓인 공간에서의 창작활동이라니, 내심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막연한 인상과 달리, 코나스의 대표 시라이와는 공간에 대한 중요한 의미를 이야기했다.

 

“보통 장애인들은 빌딩 같은 곳에 가두어져 있어 외부에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더 문을 열고 장애인들의 활동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동네 가옥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코나스가 ‘보통의 집’처럼 운영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웃의 소리도 들리는 그런 집 말입니다. 그래서 코나스라는 단체가 아니라 우리 가족이 여기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역에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다른 장애 시설도 ‘열린’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보통 문이 잠겨 있어서 장애인이 나가고 들어가기 힘든데 그런 곳과 차이를 두고자 했습니다.”

 

코나스 (2).jpg

코나스 입구(좌)와 테라스 공간(우)

 

코나스가 처음 설립되었을 때 장애인들은 좁고 어두운 방에서 저임금을 받으며 우산못 조립을 했다. 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간단한 수작업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몇 년이 지났을 무렵, 코나스 운영진은 다른 기관(나라 시 소재, ‘하나아트센터’) 장애인의 회화 작품을 만나 에이블아트에 대해서 접하게 되었고 강한 충격을 받았다. 단순노동 형태의 부업 작업은 장애인 본래의 개성과 감성을 발휘할 수 없었기에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을 표현하는 예술 활동을 시작하고자 했다. 그래서 운영진은 2005년 오래된 가옥을 개축하여 아틀리에를 만들었다. 그곳에서의 작업은 붓으로 좋아하는 것을 그려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 후 아틀리에 공간에서 자유로운 예술 활동이 시작되었다. 놀라운 것은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쉽지 않았던 사람이 조용히 앉아 창작활동에 몰두하는 것이었다. 대표 시라이와는 지금까지의 10년과 다른, 미래의 무언가를 예감했다. 그리고 예술 활동 3년차에 멤버(코나스에 오는 장애인)들의 작품은 대외적으로도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장애인의 창작활동이 외부와 소통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코나스의 운영진은 얼마나 기쁘고 뿌듯했을까. 이후 이러한 상황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창작활동에 집중적 지원을 하지 않았을까 하고 나는 예상했다. 그러나 시라이와가 설명하는 운영철학을 들으며 그 예상이 틀렸다는 것을 확인했다.

 

“코나스에서는 장애인에게 창작활동에 대해 칭찬하지 않습니다. 칭찬받는 그림을 그리겠다는 가치관이 창작자에게 생기기 때문입니다. 코나스의 스태프들은 장애인이 현재 하고 있는 행위를 인정할 뿐입니다. ‘그리고 있구나, 그 모습이 좋아 보인다.’와 같은 말들로 말입니다. 그 외에 작품의 우수함이나 부족함에 대해 평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장애인들은 그동안 행동하는 것에 있어서 제약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하는 행위 자체가 그대로 수용되는 경우가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애인을 존재 자체로 인정, 수용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변화 이후, 오히려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는 장애인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코나스의 운영진은 장애인이 특별히 창작을 잘 하도록 가르치기보다 사람마다의 속도와 특징을 존중하려고 한다. 그래서 1년에 한 작품을 완성하는 사람도 있고 하루에 두 작품을 완성하는 사람도 있다. 그림을 그리다가 멍하니 앉아있는 사람도 있고 재료의 냄새를 하나씩 맡아보는 사람도 있다. 코나스의 운영진은 그런 시간과 방식을 그대로 둔다.

 

코나스 (1).jpg

창작자 마코토 오카와가 2005년부터 지금까지 만든 170개의 마코토 인형 <출처 : 코나스 페이스북>

 

이러한 활동은 예술 자체에 목적을 두기보다 참여자 개개인의 표현 또는 편안함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로 보인다. 이것은 이전 글에서 소개했던 야마나미 공방이나 스윙의 사례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이다. 이들은 새롭거나 독특한 예술작품을 위해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인정받는 ‘장소’를 만들기 위해 창작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코나스에서 이러한 활동이 가능한 것은, 이곳이 케어의 역할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운영진들이 오랜 시간 장애인과 함께 생활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재료를 잘 쓸 수 있을지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창작공간 구성에 있어서도 드러난다. 자신의 작업에 집중해야 안정감을 찾는 자폐성 장애인의 경우, 칸막이로 개인공간을 만들어 자리를 마련해준다. 혹은 돌아다니거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작업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넓은 테이블에서 다른 사람과 같이 앉아서 작업하도록 한다. 작업을 하다가 잠시 바람을 쐬거나 돌아다녀야 스스로 진정이 되는 사람도 있어서 오래된 가옥의 옛날식 테라스 공간을 그대로 살려서 사용하기도 한다. 코나스는 창작활동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곳은 아니지만 개개인의 편안함을 위해서 창작환경을 세심하게 만들고 있었다.

 

코나스 (3).jpg

코나스의 창작공간

 

그렇다면 창작 외에 코나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지역사회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대표 시라이와는 “중요한 것은 예술 자체가 아니라 이 지역에 이러한 활동을 알리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예술 작업은 코나스 활동의 30%라고 한다. 그 외에는 동네 청소도 하고 쿠키를 만들어서 주변에 판매하기도 한다. 다른 지역을 다녀오면 이웃사람들에게 꼭 선물을 사서 나누어주기도 한다. 그리고 코나스의 활동이 소개된 잡지를 카피해서 동네에 나누어주기도 하는데 지역 사람들이 그런 활동을 알게 된 후 격려를 해주기도 한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삶에서 필요한 활동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코나스의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일본의 사례를 살피다 다시 우리 동네 변두리에 위치한 특수학교를 떠올려보았다. 모든 특수학교가 도심과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것은 아니지만, 그 위치와 상관없이 학교 안과 밖의 거리감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결국 교육제도나 사회정책과 같은 시스템을 바꾸자고 외쳐야하는 문제인가, 나는 문화예술교육을 주제로 조사를 하다가 고민이 더 커졌다. 그런데 문득 코나스 운영진의 실천들은 그런 시스템과 별개로 시도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장애인의 작품에 대해 칭찬을 하지 않고 현재 하고 있는 행위 자체를 인정하는 것, 1년 동안 그림을 한 장 그리는 사람의 속도를 존중하는 것, 정기적으로 동네 청소를 함께 하는 것 등. 이것은 안정된 사회제도 안에서만 가능한 실천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혹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해외 사례를 언급하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럽지만 그 활동을 국내에서도 실행 가능한지 판단하는 것보다, 그 사례가 발생될 수 있는 태도가 우리에게도 있는지 되돌아보는 것이 더욱 중요해 보인다.

 

 

 

관련 연구

해당 내용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지원을 받아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가 수행하고 있는 <장애예술인 창작활성화 프로그램 개발> 연구의 일부이다. 

 

관련 링크

<아틀리에 코나스> 페이지 : http://corners-net.com

수원시평생학습관 웹진 [와] 166호_일본의 사회문화예술교육 사례

 

 

장소를 만드는 사람들 ④ 코코룸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이렇게 운영이 어려워지는데 왜 이런 활동을 계속하려고 하나요?”

 

나에게 매순간 하고 있는 질문을 코코룸 대표 카나요 우에다(이하 우에다)에게 물었다. 그녀는 단단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마을은 변하고 사회는 변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빈곤이나 사람들이 싫어하는 동네, 그 안에 살았던 사람들이 원래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것들을 원래부터 없었던 것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지금의 활동은 그 안의 한명 한명과의 만남이기도 하다. 어떤 순간에는 없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때 있었던 무엇, 사람, 기억, 시간 때문에 내가 다시 힘을 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녀의 대답은 긴 시간 속에서 쌓인 힘을 표현하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어떤 대안이 필요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외치지 않고 스스로로 하여금 이렇게 살아보려 한다고 다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시민활동이나 문화예술교육 관련 활동가의 자기 태도에 대해 내가 최근 들은 답변 중 가장 솔직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나는 힘이 났다. 그래, 우리는 지금 이순간의 활동이 미래에 어떤 쓸모나 목적을 위해 작동되기를 기대하는 것 외에, 그것의 다른 의미를 찾아볼 수도 있겠구나. 지금 힘들지만 나아질 앞날을 위해 버텨보자는 말보다 그것은 더 큰 힘을 주었다. 그런 생각들 때문에 내가 코코룸을 2016년에 이어 올해 다시 방문했던 것은 아닐까.

나는 2년 전에 일본의 사회문화예술교육을 조사하기 위해 비영리법인단체 코코룸을 방문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후에 다시 그곳을 찾아갔는데 이유는 연구 사업 외에 꼭 다시 가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단체가 우수하거나 독특한 활동 사례를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2년 전 나에게 푸짐한 밥상을 차려주던 스태프와, 단체의 운영이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활동에서의 재미도 느낀다고 말하던 스태프가, 바로 그 사람들이 아직도 그곳에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그들이 여전히 그곳에 있어주기를 바랐다.

다시 간 코코룸에 누군가는 있고 누군가는 없었다. 그 현장에 없는 이는 또 다른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 힘을 발휘하고 있지 않을까. 나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코코룸 마당에 앉아 그곳에 오는 사람들을 관찰하였다. 그곳의 프로그램을 분석하기보다 평소의 분위기나 지역과의 소통방식을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코코룸 01.jpg

코코룸 입구(좌)와 카페, 마당 공간(우)

 

 

코코룸은 가마가사키라는 오사카의 빈민지역에서 홈리스, 일용직노동자 등 사회적으로 배제된 사람들과 시를 매개로 문화예술활동을 이어가는 단체다. 현재 게스트하우스, 카페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2002년 오사카시는 신세카이 Arts Park 사업을 시행하며, 지상 8층, 점포면적 57,000㎡의 빌딩 내부의 빈 점포를 활용한 예술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이 때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세 개의 비영리민간단체 중 하나가 지금의 코코룸이다. 그러나 2008년 건물의 매각과 동시에 사업도 중단되었다. 이후 코코룸은 근처의 상점가에 공간을 마련하고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코코룸이 위치한 지역은 치안이 좋지 않아 일본인이나 관광객이 드나들기를 꺼려하는 곳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코코룸 반경 300미터 내 지역 주민 3만 명 중 5천여 명이 노숙자라고 추측하는 시선도 있다. 정확한 수치가 아니라 추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주소부정의 일용직 노동자가 많고, 그 이유는 일본의 고도성장기인 1970년대 이곳에 간사이 최대의 인력시장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건설경기의 악화와 급격한 수요 감소로 일용직 노동자들이 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지방에서 일을 찾아 오사카로 온 사람들은 저렴한 숙소를 전전하다 노숙자가 되기도 했다.

실제로 내가 코코룸 마당에 하루 종일 앉아있다 보니 지역주민이나 일용직 노동자로 보이는 남성들이 이따금 들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딱히 어떤 프로그램에 참여하려고 온 것이 아니었고 동네의 익숙한 공간에 잠깐 들어와 앉았다 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가마가사키 지역과는 사뭇 다르게 예술적 분위기가 넘치고 타 지역의 사람들이 게스트 하우스의 손님으로 오가는 그 공간에 60대 이상의 남성이 별일 없이 드나들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또한 갈 곳이 없는 낮 시간에, 집을 나서서 잠시 이곳에 들를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배제하지 않았던 코코룸 사람들의 움직임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이곳에서 문화예술교육 관련 어떤 활동을 본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서 반드시 필요한, 인간을 대하는 태도를 느낄 수 있었다.

 

코코룸의 운영진들은 ‘예술’은 너무 추상적이라서 ‘표현’이라는 말을 더 자주 쓴다고 했다. 예술은 유복한 사람만 전문적 교육을 받아서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사람들은 예술보다 하루의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코코룸은 이들이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을 예술 자체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물론 전문가를 초빙하여 예술적 기술을 가르칠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의 힘과 특징을 잃지 않는 것, 기술과 그 특징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코코룸의 대표적 프로그램 ‘가마가사키 예술대학’(이하 예술대학)은 그러한 측면에서 ‘표현’의 의미와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술대학은 위에서 언급한 ‘표현’의 활동을 소소하고 다채롭게 담아내는 프로그램인데 이 프로그램에는 단체의 대표부터 지역사람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다. 예술대학은 코코룸 1층의 카페 공간과 주변의 마을회관, 노숙자 휴게소, 노숙자들을 위한 긴급 보호소, 삼각공원 등에서 이루어지며 노숙자였던 사람이나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 등 다양한 이들이 온다. 또 지역민이나 복지와 예술, 삶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오기도 한다. 한 강좌에 5명~50명 정도 참여하며 큰 발표를 하는 경우에는 300명이 오기도 한다.

올해 4월부터 9월까지 진행되는 예술대학 강좌는 아래와 같은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강사로는 전문가가 오기도 하지만 지역주민이 직접 참여하기도 한다.

 

미학 / 거리걷기 / 맥주캔으로 탑 모형 만들기 / 합창 / 책읽기 / 캘리그라피 / 세미나 / 타코야키 만들기 / 하이쿠 (짧은 시) / 시 / 생각하고 표현하기 / 과학소설 / 죽음 / 라디오 댄스 / 가마카사키 오페라 / 사운드 스케이프(소리와 공간의 디자인) / 천문학 / 남성과 여성의 사랑 / 학생자치, 일반적인 미팅 (학생들이 10년 후 가마가사키 예술대학에 대한 의견이나 아이디어를 말하는 시간)

 

 

코코룸 02.jpg

가마가사키 예술대학, 맥주캔으로 탑 모형 만들기  <출처 : 코코룸 페이스북>

 

 

코코룸 03.gif

가마가사키 예술대학, 가마가사키 오페라  <출처 : 코코룸 페이스북>

 

 

코코룸 04.jpg

가마가사키 페스티벌, 캘리그라피 쓰기  <출처 : 코코룸 페이스북>

 

 

예술대학을 기획할 때 고려하는 지점에 대해 우에다 대표는 3가지의 기준을 언급했다. 첫 번째, 아저씨(일용직 노동자였거나 장애가 있거나 노숙자였던 지역 주민을 우에다는 이렇게 통칭해서 부른다.)가 해달라고 하는 강좌를 만들거나 두 번째, 아저씨가 어떤 선생님을 불러 달라고 해서 강좌를 만들기도 하고 세 번째, 이런 내용이 있으면 여기 사는 사람들이 재미있어 할 것 같은 강좌를 기획한다. 그 외에 계절이나 상황의 밸런스를 생각하며 기획한다.

이렇듯 코코룸은 교육적 효과보다는 지역 사람들과 쌓아온 관계 안에서 발견되는 지점을 바탕으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행해 가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예술보다도 ‘표현’을 강조하면서 ‘장소’의 필요성을 언급하였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표현하는 장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스스로가 여기에 있어도 된다고 느낄 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거부당하는 곳에서는 누구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사람이 안심하고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장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런 측면에서 예술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힘이 중요한 것이다.”

 

그 말에 공감하면서도 사람의 힘이라는 건 쉽게 보이거나 드러나는 것이 아니니 그것의 가치나 의미를 확인하기는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미 보이는 것을 잘 보는 것도 쉽지 않기에 보이지 않던 것을 보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것을 나의 관심과 질문들을 통해 보는 것은 더욱 어렵다. 더 나아가 무언가를 잘 바라보고 나의 기억으로 남겨두었다가 우리의 삶으로 이어가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나도 그 어려움을 잠시 잊기 위해, 다양한 힘을 얻기 위해 다른 나라의 사례를 찾고 현장을 방문하는 것 같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내가 원했고 기대했던 답을 말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날 때 더 마음이 편안해지고 심지어 개운함까지 느껴진다는 것이다. 코코룸의 우에다도 그랬다. 그녀는 “여기는 카페인척 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카페 공간을 매개로 사람들과의 문화예술활동 사례를 물으려던 나는 나도 모르게 “아, 그렇구나!” 라고 외칠 뻔 했다. 카페로 보이지만 카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카페로라도 보일 필요만 있을 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카페든 뭐든 그것으로라도 보이게 하여 지속하고 지켜내려는 장소와 태도인 것이다. 그것은 설명으로 전달하기 힘들고 애써 보여주려 한다고 보이는 것도 아니다. 단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험되고 기억되어 다른 삶으로 퍼져나갈 뿐이다.

 

역시나 질문은 다시 우리에게로 향한다. 우리는 얼마나 보려고 알려고 하고 있을까. 카페인척 하는 장소가 사실은 어떤 장소를 모색하고 있는지, 그 힘은 무엇인지. 과연 그것을 좀 더 잘 들여다보려는 마음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있을까. 마지막으로 사회는 변하지만 그 안에 살았던 사람들이 원래 없었던 것은 아니며 그들을 원래부터 없었던 존재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우에다의 말을 되뇌어 본다.

 

 

 

 

 

관련 연구

해당 내용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지원을 받아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가 수행하고 있는 <장애예술인 창작활성화 프로그램 개발> 연구의 일부이다. 

 

 

관련 링크

-<코코룸> 페이지 : http://cocoroom.org

-<코코룸>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cocoroom

-관련 기사 야쿠자와 노숙자로 쇠락한 거리에 시민 커뮤니티 만든 시인

  http://www.jejusori.net/?mod=news&act=articleView&idxno=193165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소를 만드는 사람들 ② Swing  (0) 2019.01.24
장소를 만드는 사람들 ③ 아틀리에 코나스  (0) 2019.01.24
우리는 만나려 하는가  (0) 2018.12.03
견고한 이름의 곁을 맴도는  (0) 2018.02.24
속도를 늦추는 질문  (0) 2018.02.11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에서는 2012년부터 문화예술교육 비평 웹진 <지지봄봄>을 발행하고 있습니다.

비기자는 2018년 발행된 웹진 <지지봄봄> 24, 25호의 기획, 편집에 참여하였고 그 통합본이 나왔습니다.

 

 

발행일 / 2018년 11월

발행처 /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디자인 / 6699press

인쇄 / 신사고하이테크

주최 / 문화체육관광부, 경기도

주관 /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협력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웹진 보러가기 : http://ggarte.ggcf.kr/?p=23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웹진 [이음] 2호_장애 예술인 역량강화 : 교류와 협력

 

 

 

장애 예술인 창작 역량 강화를 둘러싼 질문들 우리는 만나려 하는가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장애 예술이 장애인의 사회참여 또는 직업군 개발을 위주로 활성화되고 있지는 않은가. 

예술이 창작자 또는 그 주변 사람들에게 그러한 목적으로 전제될 때, 그 예술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까. 

우리는 왜 창작을 할까.

 

이것은 내가 올해 초 「장애 예술인 창작 활성화 프로그램 개발 연구」에 공동연구원으로 참여하며 혼자 노트에 적었던 질문들이다. 국내의 장애 예술은 다른 나라에 비해 창작의 시간이 오래 쌓이지 않았기에 이제야 그것의 가치와 방향을 논의하는 시점에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장애 예술인의 창작 활성화는, 장애인의 삶이나 몸의 속도와 어긋날 정도로 활발하게 공식 활동을 하는 것을 전제로 두곤 한다. 대학 교육만 봐도, 비장애 예술인 대부분은 예술 관련 전공자이지만 장애인은 대학 진학도 힘들고 기본적인 예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매우 적다. 따라서 장애 예술인의 창작은 일반적 시각에서의 ‘창작이 활성화되고 있는 상태’가 아닌 여러 차원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특히 그 상태가 ‘장애 예술인의 역량이 강화된 상태’와도 겹쳐서 인식된다는 점에서, 과연 그 상태는 어떤 사회적 기대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지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어떤 장애 예술인이 수차례 문화행사에 참여하고 작품도 유명해졌으나 개별 감각과 표현을 마주할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하고 있다면, 혹은 활발한 공식 활동을 그가 원치 않는다면, 그것은 어떤 상태일까. 장애인의 사회참여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창작활동이 그것의 돌파구로만 작용해서는 안 되며 우리 스스로 창작활동을 그 위험성 안에 놓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 순간 미련하도록 근본적인 질문이 이어지지 못하면 우리는 눈에 띄는 창작의 순간으로 우르르 뱃머리를 돌리고 그 상태를 활성화하기 위한 방법들만 기획 해나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질문을 찾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국내의 사례는 다양할까.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내에는 여러 논의를 끌어낼 만한 개별 시도들이 많지 않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관련 프로그램이 얼마나 여러 곳에서 많이 실행되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다양한 논의점을 담고 있느냐이다. 공공 지원 체계 내에서도 장애 예술인의 장애특성이나 개별 감각을 고려한 창작 프로그램은 다양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특히 장애 예술인의 창작 지원은 조금씩 늘고 있고 장애인의 문화 향수 지원도 이어지고 있지만 개별 창작을 내밀하게 살피거나 전통적인 창작 외의 다른 방식을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부족하다.

이렇듯 장애 예술인 대상의 창작 프로그램이 부족하다 보니, 비장애 예술인과 교류하거나 협업하는 활동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서로 다른 창작자들 간의 네트워크나 창작활동은 각자에게 기존의 자기 작업을 뒤흔들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함에도 말이다. 새로운 시선이나 표현을 경험하거나 배우며 따로 또 같이 무한한 실험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장애 예술인이 참여할 수 있는 창작 프로그램은 ‘다른’ 감각과 표현들 간의 ‘만남’을 다채롭게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장애인의 삶이 일반화된 사회로부터 오랜 시간 격리되고 보호, 관리되어 왔던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이젠 장애와 비장애가 만나는 현장마저도 기획되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예술은 이러한 상황의 부자연스러움, 부조리함을 소재화하거나 비판하는 것을 넘어 장애와 비장애가 만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했던 ‘장애 예술인의 창작 활성화’ 또는 ‘장애 예술인의 역량 강화’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접근해볼 수 있지 않을까.

 

장애 예술인과 비장애 예술인의 창작이 함께 활성화되는 것, 또는 역량이 함께 강화되는 것.

 

나는 무엇보다 서로가 만나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이것은 누가 누구를 만나주는 것이 아니다. 누가 누군가에게 배우기 위해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일단 서로의 생각이나 감각, 표현, 혹은 존재에 대해 자발적 관심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장애 예술인과 창작을 하는 비장애 예술인의 활동이 ‘착한’ 일로 평가되지 않아야 하며 비장애 예술인과 교류하는 장애 예술인이 ‘의지하는’ 태도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한다. 이러한 상태가 여러 현장에서 발생되고 다양한 장르 안에서 지속된다면 그것이 누구에게든 창작이 활성화되는 상태이자 역량이 강화되는 상태가 아닐까.

이러한 관점에서 국내의 여러 사례를 조사해보았을 때, 장애와 비장애가 만나는 장이 섬세한 기획 안에서 이루어진 사례는 많지 않았다. 그것이 지속되는 곳은 더욱 찾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사례를 언급하자면 ‘인포숍카페별꼴’에서 진행한 <에이아카이브: 소리(a-archive: sound)>(이하 ‘에이아카이브’)를 살펴볼 수 있다. 서울시 성북구에 위치한 인포숍카페별꼴(이하 ‘별꼴’)은 비영리단체 ‘장애인문화예술 판’이 운영하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우러지는 대안 공간으로 2011년에 문을 열었다. 매주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누구나 출입할 수 있는 카페로 운영 중이다. 도서관이나 서점에 두지 않은 책이나 진(ZINE, 개인이나 그룹이 이윤과 관계없이 자신의 힘으로 소규모 인쇄하는 출판물), 전단 등을 모은 아카이브가 있고, 소수 집단과 사회 운동, 서브 컬처에 관련된 전시, 영화 상영, 라이브, 워크숍 등을 하고 있다.

‘에이아카이브’는 2016년 성북문화재단의 문화다양성 사업 지원을 받아 참여자들이 자기를 표현하는 방식을 다 같이 생각해 보고, 자신만의 소리진(ZINE)을 만들어 전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장애인만을 참여대상으로 정해두고 기획하지 않았다는 점, 그렇기 때문에 장애인이 다양한 사람 중 일부로 참여하고 어울릴 수 있었다는 점이 에이아카이브의 큰 특징이다. 그러나 참여하는 사람 중에는 언어가 다른 사람,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을 하는 사람, 언어 장애가 있는 사람, 신체적인 장애로 기존의 악기나 도구를 다루는 것이 어려운 사람 등이 뒤섞여 있었다.

별꼴은 노들장애인야간학교(이하 ‘노들야학’)의 발달장애인 수업과 연계하고 미디어 아티스트 팀 다이애나밴드와 협력하여 에이아카이브를 진행하였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포함되어 13명의 참여자가 2개월 간 10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결과 전시회를 개최하고 영상작품을 상영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장애 예술 자체를 강조하기보다 문화다양성 담론 안에서 활동 맥락을 소개하였다.

자세한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다이애나밴드, 노들야학 교사가 함께 사전 회의를 통해 중증장애인 참여자 수요 조사를 진행했다. 집에서 이동이 쉽지 않은 중증장애인 참여자들을 만나기 위해 노들야학이나 집으로 찾아가 사전 연구 워크숍을 5회 진행했다. 이후 외부 참여자(주로 비장애인, 예술가, 연구자, 지역주민)를 모집했고, 사전 연구 워크숍에 참여한 중증장애인 참여자와 집중 워크숍을 5회 진행하고, 다 함께 전시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참여자들은 각자의 창작물(목소리나 주변의 소리를 녹음한 카세트테이프 작업물, 중증장애인이 연주할 수 있는 신시사이저, 점자를 이용한 사운드 인쇄물 등)을 만들었다.

이 활동은 장애 예술인이라고 불리거나 그러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참여했던 사례는 아니다. 장애 예술인만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기획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소리를 발견하고 표현해보려 했던 지점은 충분히 예술적 가능성을 갖는다. 오히려 이러한 사례가 장애 예술을 폭넓게 상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사례는 이러한 활동을 여러 형태로 지속하고 있는 별꼴의 활동 전반과 연결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별꼴은 2011년부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경계 없이 어울릴 수 있는 현장을 일상적, 문화적, 예술적, 사회적으로 만들어나가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와 맞물려 문화나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장애인이 보다 편하게 이곳을 방문하고 있으며 장애 여부를 떠나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만나고 소통하고 있다.

또한 이 사례는 장애와 비장애가 서로를 만날 수 있는 현장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장애 예술인과 비장애 예술인의 창작이 함께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만남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전의 장애 예술인 대상 역량강화 프로그램들이, 대부분 비장애 예술인의 예술 언어를 학습하고 경험하는 것으로 진행되었지만 이와는 다른 관점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언급했듯, 장애 예술인과 비장애 예술인 모두의 창작을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특히 장애 예술을 사회적으로 특별한 위치에 두지 않기 위해 이러한 모색은 더욱 필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왜 창작을 할까’라는 질문은 스스로이자 서로를 향한 질문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우리는 왜 함께 창작을 해야 할까.

 

그리고 ‘다른’ 감각들이 만나 함께 창작을 하기 위해서는 질문을 조금 바꿔볼 수 있다.

 

우리가 함께 창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함께 창작하고 싶어 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이 부족한 것일까.

어쩌면 창작 활성화 프로그램이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관심을 기획된 자리로라도 촉발시켜야만 하는 상황 때문이 아닐까.

 

우연한 만남이든 기획된 만남이든 우리는 그 자리에서 누군가의 창작역량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해볼 수 있는 것을 찾아보아야 한다. 창작, 혹은 예술은 기대했던 답을 찾게 된 상태. 그래서 사회적 존재 증명을 하게 된 상태. 예술가라고 불리게 된 상태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태가 될지 모른 채로 현재 가능한 것, 혹은 할 수밖에 없는 것을 해보는 그 순간에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issue_3_image 

 

<에이아카이브: 소리> 전시 ⓒ 우에타 지로

 

 

 

* 「장애 예술인 창작 활성화 프로그램 개발 연구」(2018,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는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가 수행하였다.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의 문화예술교육 비평웹진
<지지봄봄> 25호가 발행되었습니다.

 

비기자는 이번호에 기획과 편집에 참여했습니다.
"문화예술교육과 연결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읽어보세요^^

 

http://ggarte.ggcf.kr/?p=23

 

 

 

 

 

 

25호 곁봄 
쉽게 달라지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해보고 있는 것들

 

 

“가위바위보에서 졌어요.”

얼마 전 진행한 한 중학교 문화예술교육 첫 시간, 학생들에게 어떻게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물었더니 곳곳에서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자신의 관심사나 참여의지와는 상관없이 가위바위보에 져서 이 프로그램에 ‘배정’된 학생들. 언제부턴가 이런 학생들을 다른 수업에서도 종종 만나게 되어 수업 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혹시 가위바위보에서 졌나요?”라고 물어보면 학생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 순간, 교육 현장을 당장 이끌어가야 하는 사람은 학생들의 개별 의지가 교육 참여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된 이유, 그 이유와 연관된 여러 문제들, 그것들 간의 복잡하고도 유기적인 연관성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이 준비해온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애써 힘을 내야 한다. 


강사뿐만 아니라 문화예술교육에 관여하는 실무자, 기획자, 예술가, 자문위원 등 많은 사람들이 현장의 문제를 모르지 않는다. 큰 사업들은 교육 참여자의 욕구나 변화에 상관없이 상위 조직으로부터 기획되어 내려오고 단체나 강사는 개별 고민을 실험할 여유나 여력이 사라지고 교육 참여자는 자발적 관심보다는 다른 이유들로 문화예술교육에 참여하게 되곤 한다. 지원기관, 단체, 교육 참여자의 입장과 상황은 10년 사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 강사비도 제자리걸음이다. 어쩌면 큰 변화를 기대했던 것이 애초에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야기는 지원사업 관련 간담회, 좌담회, 자문회의, 결과워크숍, 인터뷰 등에서 반복적으로 흘러나온다. 어쨌든 이제 무엇이 얼마나 문제인지 말하는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지쳐가고 있다. 그리고 과연 그 내용을 총체적으로 듣고 현장을 위한 개선책을 마련할 누군가가 있는지, 바로 그 부분에서 다시 한 번 무기력해진다. 사업 담당자마저도 다음 해에 그 자리에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 사람이 자의든 타의든 자리를 떠나게 되는 복잡하고 현실적인 원인들도 안다. 그렇게 쉽게 달라지지 않는 것들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사안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에 대한 진단이나 비판만큼, 각자의 교육 현장에서 해보고 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도 필요해 보인다. 왜냐하면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겠으나) 제도나 시스템은 쉽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육 안에서 한 사람 한 사람 소중히 만나고 함께 경험을 만들어가려는 사람들에게는 그 거시적인 문제의 해결만큼이나, 개별적이고 일상적인 문제에 대한 ‘다른’ 접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다른’ 접근, 혹은 시도는 주로 거시적인 문제보다 덜 중요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정말 덜 중요할까? 사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이번 [지지봄봄]은 무엇의 중요도를 강조하기보다, 문화예술교육과 연결된 각자에게 덜 중요하게 ‘여겨졌던’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우리는 이렇게 쉽게 달라지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무엇을 해보고 있을까. 도저히 무엇도 할 수 없을까. 거시적인 문제가 달라지지 않는 상황에서 개별적인 접근이나 시도는 큰 의미가 없을까. 


다시 가위바위보에 져서 어쩔 수 없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들과의 만남으로 돌아가 보자. 하고 싶었던 프로그램에서 탈락된 아쉬움 혹은 짜증 때문에 몇몇 학생들의 표정이 좋지 않다. 어서 이 시간이 끝나길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 학생들에게 강사는 며칠 동안 준비해 온 무언가를 어떻게 같이 해보자고 해야 할까. 첫 시간부터 너무 솔직한 학생들 덕분에 담당자 혹은 담임 선생님은 조금 난감하지만 프로그램 별로 정해진 인원은 맞춰야 하고, 이 프로그램도 몇 개월간의 활동을 바탕으로 ‘뭐라도’ 성과를 내야 한다.


그 순간 우린, 교육의 기획과정이 얼마나 섬세하지 못했는지 비판하는 것을 할 수 있으나 그것이 당장의 교육 현장을 해결해줄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고 적당히 각자의 시간을 때우다 헤어지는 것은 최선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때 강사나 기획자, 담당자가 해보게 ‘되는’ 것들이 매번 탁월한 선택이 되지 못하기도 한다. 미봉책과 임기응변이 지속되다가 교육 기간의 절반이 지나가기도 한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봤는데 역시나 잘 안 되는구나 느끼며 수업이 끝날 때마다 좌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지지봄봄]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성공한 사례들의 소개로 채워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보다 [지지봄봄]이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어떤 순간들을 들여다볼 수 있기를 바란다. 묘하게도 교육에 참여했거나 관여했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난 후에 오히려 성공적이었던 어떤 선택이나 해법보다 누군가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려 했던 의지를 기억할 때도 많기 때문이다. 잘 해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던, 그러다 잘 되기도 했지만 참 어설프고도 힘들었던, 그래서 잘 된 결과보다 지난하고 미련했던 과정이 자꾸 생각나는, 바로 그것을 여러 현장에서 듣고 싶다. 이것은 교육 현장에서 오늘도 어김없이 이어질 고민들에 대한 기대이기도 하다. 문화예술교육과 관련한 제도나 시스템이 현장 중심으로 싹 다 개선되면 정말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 날이 결코 금방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많은 이들이 예상하고 있다. 그렇다면 질문을 좀 달리하여,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각자 해보고 있는 여러 시도들이 힘을 잃지 않고 지속될 수 있다면 어떨까. 그 지속을 위해 역시나 제도나 시스템이 개선될 필요도 있겠지만, 오로지 그것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렇게 많은 문제들이 쉽게 달라지지 않고 있음에도 무언가를 여전히 해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쯤에서, 문화예술교육 강사이기도 하고 교육 관련 기획자이기도 하고 예술가이기도 하고 이따금 자문위원이기도 한 내가 ‘쉽게 달라지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해보고 있는 것들’을 풀어놓고자 한다. 


나는 일반적으로 문제라고 상정된 것들을, 내가 이끌어야 하는 상황/만남/교육/활동 안에서 문제가 아니라 상태(condition)로 두려고 노력한다. 가위바위보에 져서 내 수업에 온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다른 예를 들자면 참여 인원수에 비해 넓지 않은 교육 공간, 프로그램에는 관심 없는 담당자나 보조자, 자기표현을 하는 데에 다른 사람들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한 교육 참여자, 넉넉하지 않은 예산이나 시간 등. 그동안 마주했던 문제, 아니 ‘상태’는 참으로 다양하고도 복합적이었다. 하지만 사실 나도 매번 마음의 평정을 찾고 모든 상황을 ‘상태’로만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불과 두 달 전 자유학년제 수업에서도 단 두 시간 만나는 중학생들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이런 태도를 보이면 수업을 할 수 없다고 혼자 열을 올렸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나를 화나게 했던 것은 학생이 아니라, 교육 참여자의 관심사와 무관하게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그 안에 학생들을 배정해 넣은 어떤 운영구조 혹은 누군가의 욕심이었다. 사실 학생들의 낮은 참여 의지만을 문제로 두는 것은 나의 가장 편한 논리가 아니었을까. 요즘 학생들은 어떻더라, 그래서 문제더라 하는 일반적인 말들이 더욱 쉽게 내 머릿속을 채워 어떤 ‘상태’를 더 문제로 견고히 만들었을 것이다. 


다시 한 달이 지나, 비록 다른 중학생들이었지만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었을 때, 나는 학생들이 얼마나 이 프로그램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기 힘든 ‘상태’인지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였다. 그래서 활동의 내용과 방식을 완전히 바꿔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위바위보에 져서 왔나요?”라고 묻는 여유도 부려보았는데 역시나 그렇다는 답변을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아이고, 오늘 또!’이러고 화를 가라앉히느라 애를 먹었을 텐데, 마음을 달리 먹으니 학생들이 딱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래, 그럼 오늘 한 번 너희들의 예상을 뛰어넘게 재미있게 놀아보자’ 다짐하고 이런 저런 재료를 꺼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활동은 이렇게 저렇게 마무리되었고 나는 지난번과는 다른 힘을 얻었다. 프로그램 진행이 잘 되고 안 되고를 떠나, 나의 태도가 교육 현장과 앞으로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함께 그 시간을 보낸 사람들에게도 전해질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나는 또 다른 ‘상태’를 계속 만나게 될 것이다. 어느 순간 또 이건 진짜 문제다! 하며 분노하고 있을지 모른다. 어찌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은 그렇게 쉽게 달라지지 않은 채로 우리에게 계속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지치지 않고 각자의 고민을 지켜내는 힘은 ‘그럼에도 해보고 있는 것들’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이것은, 교육 현장의 어려움을 강사나 기획자, 담당자의 개별적 시도로만 풀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이들이 각자의 경험과 태도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기를 응원하고 싶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활동의 의미를 각자가 찾기에 어렵지 않을까. 더불어 교육 현장의 현실적 어려움, 구조적 문제에 대해서 거시적인 관점에서 발언해야 하는 것이 사업적, 공식적 역할인 사람들이 보다 좀 더 적극성을 띄기를 기대한다. 변화를 기대하기 힘든 상황 속에서 누군가는 오늘도 교육이라는 것을 이렇게 저렇게 해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하는 여러 사람들의 입장, 그와 관련된 상황들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누군가는 지치지 않고 교육 현장에서 무언가를 해보고 있어야 하고, 누군가는 그러한 시도들이 담아내는 의미와 어려움을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이번 [지지봄봄]은 이중 전자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사실은 후자의 누군가가 이러한 내용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해보려는 사람, 그것을 보고 들으려는 사람들의 시도는 당장 어떤 결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그것과 연관된 사람들에게 여러 방식으로든 기억될 것이다. 이건 쉽게 달라지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버텨보자는 것과 다르다. 스스로에게도 기억될 만한 시도를 이어가보자는 것이다. 우수하거나 우수하지 않은 시도는 없다. 가치를 판단할 수 없다는 그 가능성을 안고, 각자의 자리에서 가능한 것을 해보자. 날선 눈으로 여기저기의 사례나 사업구조를 평가하고 비판하는 시간만큼. 

 

 

 

 

최선영

예술가이자 창작그룹 ‘비기자’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비기자’는 무한경쟁시대에, 각기 다른 생각들이 꾸준하게 비길 수 있는 현장을 인문학적 문화예술 활동으로 만드는 창작그룹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