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와 비장애가 공존하는 문화예술 오픈포럼 "2020 같이잇는가치"에 함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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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비장애 동행 프로젝트 <같이 잇는 가치> 소개 같이 잇는 가치 문화예술 오픈포럼 10.16.(금) 오후 5시 / 10.17.(토) 오후 6시 ※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하여 온라인 사전 신청자에 한해 입장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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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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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같이 잇는가치] 오픈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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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문

 

 

같이 좀 모르자

 

창작그룹 비기자 대표 최선영

 

 

내가 왜 지금까지 장애인의 창작활동이나 삶을 궁금해하며 이야기를 듣고 정리하고 다시 말하고 있는지 나도 모르겠다. 장애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장애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데 그럼 무엇을 더 말하고 싶은지 나도 정확하지는 않다. 그런데 내가 하고 있는 말, 혹은 내가 하는 활동은 타인에 의해 분명하게 해석되기도 한다. 사회적이거나 정의롭거나 선한 것으로 말이다. 누군가는 나의 활동을 이야기할 때 기특하다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나에게도 분명하지 않은 동기와 의지, 혹은 목적이 ‘장애’라는 이름과 만나 누군가에게 분명해질 때 나는 의아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판단하기 전에 같이 궁금해할 수는 없을까. 어쩌면 그 단서는 장애라는 주제 밖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13년 전, 장애인 문화예술교육을 우연히 접한 후로 궁금한 것, 모르는 것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어쩌면 그 범위가 점점 커져 가기만 해서 기획도 해보고 워크샵도 해보고 해외사례도 찾아보고 낯선 형태의 연구보고서도 써보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서 내가 인식하기 어려운 이야기나 삶, 그리고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는 그 과정의 끝에서 구체적인 무언가를 알고 싶지 않다. 오히려 누군가가 함부로 ‘안다고 할 수 없는 어려움과 복잡함’을 더 자주 만나왔기 때문이다. 장애, 거기다 예술까지 덧붙여진 무언가에 있어서. 그래서 이 끝없는 어둠인지 공기인지 시간인지, 그것이 가득찬 터널을 같이 갈 사람을 만나고 싶다. 불확실한 길의 끝을 또렷하게 그려내는 사람 대신 그 길을 나와는 다른 방식과 속도로 걸어가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내가 해결사가 되고 싶은 것도, 해결사들을 조직하고 싶은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반듯한 길을 가다가도 가파른 동굴 속으로 때굴때굴 굴러가버리는 예술도 함께 쫓고 싶으니까.

 

 

 

낯선 형태의 연구보고서로 마무리된 질문들

(2018 장애인 문화예술교육 방향성 및 교보재 연구보고서

⌜기대하지 않고 표현으로 만나기⌟ 연구원_김지영, 신원정, 신재, 유선, 최선영)

 

 

 

여기에 내가 아직도 알지 못하는 것들을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고자 한다. 모르는 것들이 이렇게 많으니 앞으로만 나아가지 말고 같이 좀 뒤로도 가고 옆으로도 가고 바닥 깊숙이도 내려가 보자. 외롭지 않게 같이 좀 모르자. 이것은 장애에 대해 알아가자는 주장이 아니라 장애를 포함한 어떤 세계, 그러나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세계에 대해 같이 궁금해하자는 외침이다.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는 왜 장애인의 예술하기를 기대하거나 지원하고 있을까”

 

“정책적 대상으로서의 장애인이라는 용어가 일반화되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멀어져 다른 말과 관점을 마련하고자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

 

“우리는 장애인의 특수성이 아닌 인간의 개별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사람들의 창작활동을 살펴보려는 시도를 충분히 해봤을까”

 

“누가 누군가를, 혹은 사회가 누군가를 포용하기 위해 예술을 활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술은 정말 그것을 가능하게 할까. 가능 여부를 고려할 때 전제된 ‘예술’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 양상, 모습을 띄고 있을까”

 

“(인간의 삶이 아름답지만은 않은데) 나는 왜 장애인의 어둡거나 기괴하거나 더럽거나 모호하거나 처참하거나 우울한 창작활동은 충분히 만나지 못하고 있을까. 또한 그러한 창작활동을 이어가는 장애인의 삶을 지지할 수 있는 관점과 언어는 마련되어 있을까”

 

“내가 장애인의 창작 활성화를 위한 프로그램 개발 연구에 참여했을 때, 왜 10년 전 특수학교에서 만났던 3년간 끈만 흔들던 OOO를 자꾸 떠올리게 되었을까. 나는 왜 곧바로 프로그램 개발에 집중하지 못하고 ‘장애인의 창작이 활성화되는 상태’라는 게 무엇일지 고민하게 되었을까”

 

“긍정적인 삶의 경험을 토대로만 창작활동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장애인에게는 상처받거나 실패할 수 있는 권리가 얼마나 있을까”

 

“장애인의 표현 및 창작활동이 활성화되는 것과 더불어,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은 어떻게 활성화될 수 있을까”

 

“왜 계속 질문을 하다 보면 그 내용이 꼭 장애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까”

 

그리고

“나는 대안을 말해야 할 것 같은 자리에서도 왜 아직도 질문만 하고 있을까”

 

그런데 언제부턴가 대안을 먼저 말하지 않는 것의 필요성, 혹은 대안을 말하는 것의 어려움에 공감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장애인이라고 뭉뚱그려진 존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내가 계속 질문할 수 있으려면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니까. 나는 나를 위한 질문을 찾고 있을 뿐이다. 그런 측면에서 같이 모르자는 말은 (장애인, 비장애인 모두를 포함한) 질문하는 주체들을 위한 제안이다. 각기 다른 사람들은 서로의 삶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다양한 삶이 혼재된 세계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궁금해할 수 있는 것은 넘치고 또 넘친다. 만약 사람 간에 서로 동등하게 모를 수 있다면 궁금함이 전제된 다양한 만남이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예술’이 그 만남의 방식이나 언어가 된다면 궁금함의 영역은 끝도 없이 넓어지거나 혹은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기에 예술 근처에서 서성이며 질문하고자 한다. 예술은 어떤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공식은 되기 어렵지만 우리가 맴맴 돌며 떠나지 않게 만드는 장소는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득 내가 언제부터 여기에서 서성이고 있었나 떠올려보다가 몇 장의 흔적을 발견했다. 10년 전 특수학교 방과후 강사 시절, 산속에 덩그러니 있던 학교 주변으로 공사장 펜스가 쳐졌는데 나는 그 앞을 오가다 혼자 시를 썼었다. 나는 왜 수업준비를 해도 모자를 시간에 펜스 위에 덧씌워진 거짓말 같은 꽃들을 사진으로 찍고 그 위에 글을 쓰고 있었을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혼잣말 같은 질문들이 결국 ‘여전히 모르겠다’는 오늘의 고백과 ‘같이 좀 모르자’는 외침만 남기게 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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