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원고는 서울문화재단의 '잠실창작스튜디오 전문가 매칭 프로그램' 사전 간담회를 위한 발제문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잠실창작스튜디오에서 바라본 하늘

 

흔들리는 언어를 쌓아 올리는 일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다른 이름을 향하는 질문

 

‘장애예술’이라고 범주화된 개념 자체를 해체하거나 다른 개념으로 재정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강력한 정책용어와 사업명들이 매 순간 작동하고 있으며 에이블아트, 포용적예술, 아르브뤼, 아웃사이더 아트 등의 이름들은 시대에 따라 국내의 상황을 담지 못한채 재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양성이 마련되어야 할 예술 영역에서 ‘장애예술’을 ‘장애예술’로만 도저히 호명할 수 없게 만드는 이유과 사례, 구체적 언어를 만드는 것이다. 비평은 그 지점에서 필요하다. 새로운 이름의 등장이나 명명보다는, 존재했으나 인식되지 않았던 관점의 드러냄과 확장된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한 측면에서 최근 정책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포용적 예술inclusive art’에 대한 비판적 관점도 필요하다. 누가/무엇이 누구를/무엇을 포용/포함한다는 전제에 대한 질문도 요구된다. 이 용어를 대표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영국에서의 장애 창작자에 대한 인식과 국내의 그것이 갖는 교차지점이 과연 넓은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복잡함의 화면

 

국내 장애인이 삶 안에서 경험하거나 마주해야 하는 교육, 복지, 문화 관련 이슈, 혹은 문제는 당연한 말이지만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래서 예술 이외의 영역에서 그것은 ‘복잡함’ 자체로 문제시되거나 장애운동에서 제거의 대상으로 놓인다. 그래서 장애와 관련한 사회적 논의는 차별, 철폐, 가난, 부양, 의무, 책임, 보호, 인권 등으로 이어지곤 한다. 이것은 장애인의 인간다운 삶과 관련성이 높기에 현실적으로 매우 중요한 논의 안에 있다. 그러나 예술 영역에서는 그 ‘복잡함’을 복잡함 자체, 사회적 문제의 드러냄으로만 마주하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예술교육의 기회를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얻을 수 없었던 장애 예술인의 작품은 교육적 차별을 드러내는 근거자료가 아니라 교육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표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서 장애 예술인도, 협력자, 지원기관, 보호자(가족)인 비장애인도 예술적 해석보다 앞서는 사회구조적 문제, 개인의 경험이나 감정에 더욱 집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범하게 함께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든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비장애인은 주로 배려, 보호의 대상으로 인식되어온 장애인에 대한 스스로의 관점도 성찰해야 하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자연스러울 정도로 분리시켜온 사회구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또한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예술 영역에서 집중할 수 있는 표현의 이유/이면, 표현된 표면, 그 표현이 의도하지 않았으나 드러내는 무언가를 향해 멘토링과 비평이 역할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멘토링과 비평이, 장애 예술인에게 따뜻한 다독임이 되지 않을 수 있으며, 장애인이 사용하는 재료와 표현언어에 대한 비장애인의 호기심1)을 넘어설 수 있다. 동시에 차가울 정도의 정확함(명료한 해석이 아닌 멘토, 비평가로서의 역할에의 충실함)이 서로의 활동 지속을 위해 필요할 수 있다.

 

 

감각과 장애특성을 가로지르는 개별성

 

한편, 장애 예술인의 창작과정이나 결과물이 신체적 감각을 중심으로만 해석되거나 비평되는 것은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 역시 비장애인 중심의 사고라고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시각장애인에게 있어서 잘 보지 못함, 볼 수 없음, 혹은 다르게 볼 수 있음이 창작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제, 청각장애인에게 있어서 잘 듣지 못함, 들을 수 없음, 혹은 다르게 들을 수 있음이 창작의 출발점일 것이라는 전제 등이 그러하다. 이것은 특정 장애유형이나 특성이 작품을 구성하는 대표적이거나 핵심적인 요소일 것이라고 보는 것인데 이것은 장애인이라는 존재를 장애 자체와 동일시하는 것과 비슷하다. 또한 복합장애나 넓은 장애 스팩트럼 등을 고려했을 때에도 장애특성을 중심으로 창작을 바라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 물론 장애특성이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창작자 스스로도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장애특성, 그것과 쉽게 연결되는 신체적 감각을 중심에 둔 접근은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는 개별성, 개별적 삶이나 표현에 대한 촘촘한 층위들을 놓치게 만들기도 한다. 또한 매우 현실적으로, 유사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장애인간에도 소득수준, 사회적 지위, 생활환경, 교육수준 등에 따른 삶의 차이가 존재한다. 특히 장애 예술인에 대한 비평의 언어들이 자칫 장애유형별 작품 특성 및 분석으로 재생산될 수 있음2)을 고려할 때, 2020년을 살아가고 있는 존재로서의 창작자의 그 무언가를 개별화된 언어들로 살피는 과정이 필요하다.

 

 

각자의 흔들림으로부터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2007년부터 장애인과의 창작활동을 여러 현장에서 해왔다. 그러나 나의 관점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다. 비장애인 중심으로 당연하게 설계되거나 인식되었던 사회, 예술, 창작, 개념의 전반을 성찰하거나 재배치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의 작업실에 앉아 다음 전시를 준비하는 장애 예술인을 볼 때마다 오래전 특수학교에서 만났던 중증장애인이나 부모가 없는 장애아동을 떠올리며 예술에 대한 논의 이전에 인간의 삶에 대한 우울한 환기를 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더욱 내가 그 과정에서 정확해야만 하는 순간을 만나기도 한다. 내가, 혹은 내 관점이 흔들리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매 순간 (멘토링이든, 기획이든, 해석이든) 정확할 필요성이 동시에 마련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흔들릴 필요 없는 분명함을 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가 장애, 장애인, 장애예술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만이 아니라 평범성, 일반성으로 범주화된 영역에서 오랫동안 사고하고 학습해왔기 때문이다. 그 영역을 만들고 범주화해온 언어들로부터 벗어나는 시도는 우리를 충분히 흔들어 놓는다. 그리고 (별로 논리적이지는 못하지만) 오히려 흔들리는 개인들이 장애예술과 관련한 언어를 마련하는 데에 장기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장애인 중심의) 기존 언어나 인식의 흐름으로부터 예속화되지 않으려는 움직임은 그 자체로 우리를 흔들 수 있는데 그것을 계속 마주하는 과정 자체가 장애예술에 대한 질문을 만드는 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애예술과 관련하여 정책은 흔들림 없는 새로운 이름과 비젼 정도를 원하지만 현장3)에는 확장된 담론과 흔들리는 언어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언어들은 소수의 재능인으로서의 장애 예술인의 사회참여에만 기여하지 않아야 한다.4) 동시에 그 언어들이 장애예술 관련 사회적 성과나 의미를 작동시키는 간편한 장치가 될 수도 있다는 것도 재고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복잡함의 표면을 미련하게 읽어내고 지지하는 시도가 필요하다. 공든 탑은 계속 무너진다. 비장애인이든 장애인이든 우리의 삶과 창작은 그러하다. 그렇기에 튼튼한 탑을 쌓는 대신, 흔들리는 탑의 나약함을 받아들이는 다른 출발이 필요하다.

 

 

 

1) 호기심이 생길 때는 다른 나라의 장애 예술인의 창작물을 살펴볼 필요도 있다. 한편으로 국가, 지역과 상관없이 비슷한 양상이나 표현기법이 발견되기도 한다.

(참고 : http://a-yamanami.jp)

 

2) 특히 이번 전문가 매칭 프로그램은 잠실창작스튜디오의 기획 사업으로 외부에 소개, 공유된다는 점에서 장애예술 관련 현장에 강력한 레퍼런스로 작용할 수 있다.

 

3) 창작활동을 지속하고자 하는 장애인과 그 가족의 일상, 장애 관련 창작 및 기획활동의 시도, 장애 예술인을 지원하는 기관의 사업들, 장애예술 관련 사례를 통해 사회를 재해석하고자 하는 개별화된 시도 등

 

4) "장애 예술인이 ‘창작이 활성화 되는 상태’를 작품발표의 기회 확대 및 전업예술가로서의 자리매김으로만 해석하지 않아야 창작의 지속을 위한 환경과 역량을 스스로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다. 장애인에 대한 기본적인 복지제도가 안정화되어있지 않아 장애 예술인의 생계유지 및 사회참여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는 더욱 ‘창작’ 자체, 혹은 ‘창작이 활성화되는 상태’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들이 장애 예술인과 비장애 예술인의 예술활동 안에서 문제의식으로 작동되고 가시화될 때 장애예술의 의미도 국내 상황과 부합되는 독창적인 맥락으로 나아갈 수 있다.” (주윤정 외, 2018, “장애예술인 창작 활성화 프로그램 개발연구”,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p.119)

지역문화협치 컨퍼런스 '공존 공유  공생'

 

2019.12.12 - 12.13.

 

 

 

 

 

예술의 사회적 가치와 예술가의 역할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모든 것이 허용되는 예술은 이따금 작가의 의도라는 말로 알맹이 없이 그 정당성을 고집부리곤 한다. 그리고 붓을 든 모든 이를 예술가라 부르고 그 사람의 모든 붓질을 의도라 부르는 예술세계에서는 넘쳐나는 해석과 비평이 기꺼이 그것의 날개가 된다. 그리고 누군가는 오늘도 예술의 애매모호함이 '원래 그러한' 것이라 여기며 팔짱을 끼고 눈에 힘을 준 채 무언가를 읽어내려고 한다.

그 이상야릇한 현장에서 어떤 이는 심지어 소통을 '꿈꾼다.' 그리고 적지 않은 관객이 작품 건너편 예술가의 생각을 간결하게 찾아내고 싶어 한다. 다시 팔짱을 끼고. 눈에 힘을 주고. 그리고 예술가는 그 놈의 소통을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요구받고 있으며 그것이 가능하고 의미 있는지를 매순간 고민한다.

소통을 원하는 누군가와 그것의 정당성을 되묻는 누군가, 그 사이에 인쇄된 알 수 없는 문장들이 내가 체험하고 있는 예술세계다. '말'이 되지 않는 문장과 '말'을 기다리는 이의 희망과 '말'에 기대려는 작품 같은 무엇이 파닥거릴 때 슬그머니 걸어 나와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 그것이 예술이다.”

 

미대를 졸업한 내가 10년 전 혼자 끄적인 글 안에는 예술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가 가득하다. 예술이라 불리던 것의 근처 현실속에는, 캔버스 뒤에 숨어 비평 언어에만 집중하던 내가 있었고 후배들을 시켜 자기 작품을 완성하는 선배가 있었으며 포트폴리오와 작가노트 위주로 작품을 이해하는 유통구조가 있었다. 물론 그시절 나는 전시장에 놓인 미술 작품에 한정하여 ‘예술’을 이야기했지만 다양한 형태의 창작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지금도 생각은 크게 다르지않다.

그래서 이 발제문의 시작을 어떻게 해야할지 망설여졌다. 예술은 무엇일까. 그것의 사회적 가치를 이야기 하기에 앞서 나는 이 글에서 전제하는 예술에 대해 매우 개인적인 정의를 먼저 시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내가 경험했던 것들로부터 가능한데, 적어도 예술대학을 나온 사람들의 사회활동으로만 예술을 전제하고 싶지 않은 의도도 있다.

 

‘기존의 관습이나 인식에 질문을 던지는 구체적인 활동, 언어로 설명되기 어려우며 마주함의 경험을 통해서만 전해질 수 있는 현장의 무엇, 학습이 아닌 실험을 통해 스스로에게도 드러나는 삶의 흔적. 혹은 시간과 함께 쌓인 찰나의 결과물

 

분명 얼마 후에는 위의 정의가 불충분하거나 과하다고 후회하는 순간이 오겠지만 오늘은 위의 맥락에서 예술의 사회적 가치, 그것을 하고 있는 누군가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예술은 매우 구체적인 행위를 동반한다. 그리는 것, 노래하는 것, 움직이는 것, 만드는 것, 쓰는 것, 소리내는 것, 표현하는 것 등. 이것은 행위 자체로 존재하며 의미를 갖는다. 즉 쓸모나 기능을 최종 목표로 두지 않는 현재의 행위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 벌어지는지도 중요하다. 돈을 버는 것이 필요한 상황에서, 자신을 사회적으로 알리는 것이 다급한 상황에서, 밀린 집안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앞으로의 진로를 계획해야 하는 상황에서, 몹시 피곤한 상황에서, 누군가를 도와줘야 하는 상황에서, 사회적인 이슈가 대두되는 상황에서 등. 그 상황을 모면하거나 해결하는 데에 별 기능을 하지 못하는 행위를 하는 것, 심지어 그것을 계속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그것이 예술의 사회적 가치를 살필 수 있는 힌트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상황과의 팽팽한 싸움이자 자신을 지켜내는 고집 혹은 선택으로도 보인다. 그리고 외부적 요인이나 일반적 기준으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으려 할수록 그것은 두터운 시간과 함께 자신의 삶 자체로 쌓인다. 나는 그런 삶을 버텨내거나 그저 살아가거나 혹은 즐기는 누군가를 아주 가끔 만나는데 그들은 (적어도 나에게는) 분명한 예술가다. 몇장의 포트폴리오로 그들의 활동을 소개할 수 없으며 유명한 철학자들의 말을 빌려와도 그들의 삶을 설명하기 부족하다. 분명하지는 않아도 강력한 힘이 그들의 삶과 창작활동을 채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자발적인 선택이 계속되기를 응원한다. 심지어 그들의 삶이 더 힘들어지더라도 그 과정과 결말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과 같은 주제로 그들의 활동이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되어야 할 때도 있다. 요즘은 사회적 예술, 예술의 사회적 개입, 사회문화운동 등의 표현과 함께 그 순간들을 자주 접한다. 이러한 현상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예술이 사회적 의미로 해석되는 층위가 어떤 관점을 전제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래서 모호한 생각들을 그림으로 표현해보았다. 어떤 기준에 의해 한 개인의 예술 행위, 혹은 삶의 일부가 사회적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더불어 그 기준이 발생된 이유, 기준의 위치, 기준과 연관된 사회적 요소 등도 궁금하다. 예술이 사회를 바꾸고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고 인간을 치유한다는 정책적 주문이 울려퍼지면 대체 왜 그런 기대를 갖는지, 그에 따라 어떤 뉘앙스의 예술을 주로 보려고 하는지 알고 싶어지기도 한다. 명쾌하고 쾌활하고 따듯한 예술도 물론 있지만 불안하고 흐리멍텅하고 우울하고 냉소적인 예술도 있기 때문이다. 예술이 어떤 뉘앙스를 띄든 각기 다른 맥락의 사회적 가치를 가질 수 있다. 그 가치를 폭넓게 살피기 위해서는 다양한 삶의 기준에서 예술을 해석하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예술, 혹은 예술가의 삶을 구체적 활동의 시간, 깊이, 고민의 두께로 읽어내는 과정도 요구된다. 그때 예술의 단면을 향하던 시선은 더 많은 요소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예술의 두께를 바라보게 된다.

 

 

 

예를 들어, <비기자>가 2017년 진행했던 공기청정기 제작 프로젝트 ‘숨정화기 playing Zine & Kit 제작’을 살펴보자. 심지어 이 프로젝트는 서울문화재단의 ‘서울을 바꾸는 예술’ 지원사업 안에서 진행되었다. <비기자>는 시민들이 간편하게 만들 수 있도록 우유박스를 이용한 공기청정기 제작방식을 매뉴얼화하고 워크숍과 책자를 통해 그 과정을 외부에 소개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위 그림에서, 기준면 위에 드러난 특정활동들이다. 예술가가 개발한 공기정청기, 시민들과 문화적 경험을 나누며 진행한 워크숍, 예술가의 실험 과정이 담긴 책자 등이 그안에 포함된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와 연관된 잠재적 활동이 없었다면 이 공식적 프로젝트는 시작조차 될 수 없었다.

 

 

2017 ‘숨정화기 playing Zine & Kit 제작’ 프로젝트에서 소개한 우유박스형 공기청정기(좌)와 시민워크숍 현장(우)

 

 

<비기자>의 멤버인 한 예술가는 어린시절부터 물건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것을 좋아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가전제품을 뜯어보고 버려진 물건을 주워와 작동원리를 탐구했다. 그것이 예술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예술가 역시 그것이 예술이라 주장하지 않으며 예술이 되어야 할 이유를 애써 찾지 않는다. 단지, 관심이 있는 것을 계속 할 뿐이다. 누군가는 뭐하러 그런 행위를 계속하냐고, 현실에 도움이 되냐고, 그런 기술을 생계수단으로 활용해보라고 하지만 그는 그 말에 답변을 하는 대신 나사를 풀고 전동장치의 성능을 실험한다. 그런 시간이 30년 이상 이어지는 가운데 그는 공기청정기의 내부구조가 그리 복잡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중고가구와 환풍기를 이용해 공기청정기를 만들었다. 오렌지 껍질을 그 위에 올려두면 향기가 은은하게 퍼진다는 것도 발견했다. 프로젝트가 기획되기 전부터. 지원사업이 설계되기 전부터. 여전히 이것이 예술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흥미로운 것을 계속 했다.

 

 

한 예술가가 중고가구를 잘라 공기청정기를 만들었던 과정

 

 

그러다 <비기자>가 지원사업에 참여하면서 그가 만들었던 공기청정기의 재료와 제작방식을 보다 간편하게 정리해 프로젝트로 소개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프로젝트에서 드러나지 않는, 드러날 수 없는 누군가의 경험 혹은 행위를 우리는 어떻게 읽어낼 수 있을까. 물론 그것을 모두 드러내 예술의 사회적 가치로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꼭 그럴 필요도 없다. 단지, 개인 삶의 일부처럼 보이는 순간들을 예술의 사회적 가치와 연결해 총체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시선을 갖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많은 것을,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예술의 사회적 가치가 발생되는 상황과 층위에 대해 폭넓은 접근이 필요하다.

그러나 예술이 더욱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 차별화된 아이디어와 추진력을 갖추기를 기대하는 시선도 있다. 위의 프로젝트를 예로 들자면 “공기청정기의 종류를 다양하게 제작해보면 좋겠다”, “환경단체와 협력해서 프로젝트를 확장하면 좋겠다”, “공기청정기 외에 미세먼지와 관련한 시리즈 작업을 이어가면 좋겠다” 등의 의견으로 그 시선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마치 아래 두 그림과 같은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말들은 분명 애정을 담고 있지만, 예술의 보이지 않는 속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아이디어들로 읽히곤 한다. 그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가늠할 수 없는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혹은 이기적인 선택이나 비효율적인 실천도.

그렇다면 누군가는, 혹은 사회는 왜 예술가들이 창작의 시간을 쌓도록 응원하는 것보다, 드러난 성과나 결과를 확대해나가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예술가라는 개인의 삶, 혹은 예술의 지난한 과정보다 예술이 사회적 가치를 증명해내는 다양한 현장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예술을 이해해보려는 질긴 질문이 그리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나는 질문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답답함을 마주하지 않은 채 명쾌한 예술활동의 유형들로 예술의 사회적 의미와 관련한 논의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 나는 여전히 예술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그 모르겠음이 예술가들의 삶에 대한 궁금함으로 이어지지 못함이 더 아쉽다.

그렇다면 이 예술가들의 역할은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요즘은 정책화된 기획사업 안에서 예술가의 역할을 몇가지 문장들로 만난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지역의 이슈를 발굴하고 커뮤니티를 활성화하는. 하지만 인간을 향해 명시된 그 구체적인 기대들의 오히려 반대편에서 예술가의 역할을 상상하게 된다. 사회가 무엇을 문제화하는 관점에 질문을 던지는 것, 무언가가 사회적 이슈로 가시화되는 과정을 살피는 것, 커뮤니티에서 소외되는 개인성을 들여다보는 것, 그리고 미련하게 자신의 선택을 해나가는 것. 현실적 상황들이 그 선택을 방해하거나 망설이게 만들더라도. 교육기관에서 학습한 예술로 사회적 이슈와 관련한 해결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앞선 프로젝트 사례에서라면, 예술가의 역할은, 공기청정기를 시리즈로 만들어 환경문제와 메이커스 문화를 연결하는 활동을 가속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공기청정기가 되든 아무것도 되지 않든 계속 물건을 줍고 해체하고 다시 조립해보는 것이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어떤 가치인지,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함께 해보기 위해서는 어떤 장치와 과정이 설계되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실행해야 하는 것은 기획자나 매개자의 역할이다.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이 자신의 태도이자 일상을 지켜내는 구체적인 행위 외에 다른 것이라고 나는 기대하지 않는다. 자신의 목소리를 삼킨 채 번뜩이는 아이디어나 경력을 증명해내는 것이 다급한 사회 안에서, 자발적 관점과 재미를 지속시키려는 개개인들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사회적이다. 예술가로 불리기 이전의 개인, 그들이 각자의 관심과 의지를 지속시키며 존재하는 것 자체가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삶의 방식과는 다른 방향성으로 그들이 팽팽한 힘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술가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것과 다르다. 예술가는 사회적 변화를 위한 기능인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방향성을 지속하는 존재로서 중요하다. 사회가 급하게만 나아가지 않게, 누군가가 소외되는 인식구조가 익숙해지지 않게 그들은 각자의 개인성을 놓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소리를 모으고 쓸모없는 무언가를 만들고 흩어지기 좋은 이야기를 애써 주워담으며. 그것을 하고싶어 하는 본인 스스로에게 생활의 속도도 맞추며.

 

 

 

 

예술이 사회적 의미로 해석되는 기준 아래에 묵직하게 자리잡고 있는 어떤 시간들을 보자. 이것은 어떤 관점에서 포착되지 못하는 개개인의 삶이자 예술적 가능성이 아닐까. 이것은 사회를 알록달록하게 꾸미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기 다른 삶의 두께를 보여주기 위해 존재한다. 예술의 사회적 가치는 이 시간들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축적될 수 있는 환경 안에서 불쑥 혹은 필연적으로 솟아오를 수 있다. 그러나 솟아오르기를 기대하지 않는 어떤 시간도 있다. 그것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깊은 흐름을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일반적인 기준 위로 솟아올라 모두에게 보이는 가치로움이 아니라 가늠할 수 없을만큼 두꺼워진 누군가의 시간이다. 그곳에 예술의 또 다른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가 그곳을 바라보는 이유는, 그것을 알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공동체로 살아가기

 

2019.11.01. (금) 14:30~17:00

청년일자리센터 다목적홀

 

 

 

 

장애-예술-공동체 : 분리된 채로 연결된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예술가(예술 작품을 창작하거나 표현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는 매우 소수라고 생각한다. 시대에 따라 예술가를 정의하는 맥락과 범위가 변하고 있고 요즘은 더욱 ‘당신도 예술가, 모두가 예술가’라는 구호가 퍼지고 있지만 그럴수록 예술가는 더욱 소수가 되어가고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은 그 자체로 유통에 용이한 상품이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술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 사람이 살아나가기 힘든 사회 덕분에 예술가는 소수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나는 예술가는 아니다. 단지 예술프로젝트나 일반적인 작품 발표방식인 전시에 이따금 참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 발제를 할 수 있는 이유는, 오히려 내가 예술가는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예술가들의 삶에 관심이 있는 기획자, 활동가에 가깝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나의 경험을 나누기에 좀 더 수월한 입장에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예술가가, 공동체와 밀접하게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말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덜 사회적이고, 즉흥적이고, 자기세계에 몰입하며, 집단적 활동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캐릭터화된 예술가상에 대해 동의하거나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한국에서의 공동체가 특히 조직화, 집단화를 전제하는 경우에 더욱 예술가의 삶의 방식을 끌어안기 어렵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왜냐하면 예술가가 창작을 하는 과정, 살아가는 방식이 공동체 안에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하는 창작활동은 뚜렷한 하나의 목적을 향해 계획된 일을 해내는 것과 거리가 있다. 그러나 단체나 조직을 지속적으로 운영해야 하는 공동체의 경우는 (그것이 느슨하더라도) 운영 목표를 설정하고 그에 필요한 과정을 설계한다. 그러나 예술가는 살아가며, 해나가며 방향성을 찾는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선택하거나 전제한 목표와 방법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갖고 그 질문 던지기 자체를 통해 참여 혹은 창작의 의미를 찾는다. 공동체를 ‘공통의 가치와 유사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으로 전제할 경우, 예술가는 ‘우리가 공통적일 수 있는가’, ‘유사할 수 있는가’, 혹은 ‘왜 그래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가며 계속해서 ‘공동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고민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공동체와 결합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태도, 혹은 삶의 방식이 공동체의 방해요소가 아닌 다양성의 일부로 인식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쉽지 않다. 보통의 현실 속에서 공동체는 예술가가 질문의 생산자가 아닌 예술적 경험의 생산자로 기능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문을 하긴 하지만 공동체가 바라는 예술적 경험을 기획활동을 통해 어느 정도 수행하고 있는 나는 (언제나 자연스럽고 편안했던 것은 아니지만) 공동체와 연결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의 활동은 예술가의 공동체 활동 사례로 온전히 소개될 수 없다. 나는 예술가적 삶에 관심은 있으나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으며 예술가라고 스스로 소개하기에도 실제 활동과 맞닿지 않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서론이 매우 길었다. 이제부터 나의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나는 공공예술프로젝트나 문화예술교육 등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10년 넘게 이곳저곳에서 만나오고 있다.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켜 보호감시 기관에 있는 청소년들, 가족들의 눈치를 보며 매일 다리 밑에 나와 장기와 바둑을 두는 할아버지들, 경력단절이 된 여성들, 불안감이나 우울감이 큰 청년들, 그리고 장애인과 그 가족들. 그중 장애인과 만나거나 함께 창작활동을 했던 시간이 다른 활동에 비해 많았는데 그것은 비영리예술단체 내에서의 활동이나 특수학교에서의 예술교육으로 설명 가능하다. 그런데 나는 (공동체의 대표적 유형으로 볼 수 있는) 단체 관련 활동을 넘어서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데 그 이유는 결국 모든 활동이 각각의 의미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단체 외의 활동은 공동체에 대한 개인적 문제의식을 재설정할 수 있는 기회로 작동되기 때문에 또 다른 가치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장애와 관련된 활동을, 각각의 무게로 내 삶에 영향을 주고 있는 여러 유형의 공동체, 그것들 간의 상호성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여러 공동체와 연결된 나의 활동 범위

 

 

 위의 그림처럼 나는 여러 공동체에 관여하거나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그중에는 장애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나는 오랜 시간 다양한 현장이나 사회적 현상을 마주하면서 오히려 이것들이 빈부 격차나 도시생활의 일반화, 불안사회 등과 같은 공통된 이슈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는 장애, 비장애를 떠나, 삶에 대한 다층적인 경험을 나누고자 여러 단체나 모임 혹은 일시적 공동체 등에 참여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내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며 내 주변 사람들, 혹은 구체적인 어떤 공동체의 일원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활동 범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예술가는 아니지만) 나의 예술적 경험이나 과정이 다른 삶과 연결될 때에는 이러한 활동 범위가 갖는 위치와 규모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즉, 예술 자체가 공동체나 구성원의 삶에 구체적인 영향을 준다기보다는, 어떤 가치나 의미를 중심으로 활동의 범위를 기획하고 만들어나가는 개인의 삶이, 그것과 연결된 타인의 삶에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이다. 단지 예술적 경험이 그 활동 범위에서 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질 경우 우리는 예술에 대해 조금 더 집중해서 그 현상을 해석해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술이 장르로서의 예술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고 볼 때, 이것은 미술이나 문학, 연극, 음악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넘어서는 관점을 필요로 한다. 내가 어떤 공동체에 ‘가서’, 혹은 어떤 자리에 ‘참석해서’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기 때문에’ 무언가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삶이 불안정하고 이따금 오락가락한 마음 상태를 가진 사람이기에 타인이나 사회와의 관계를 탐색하기 위해 공동체를 포함한 여러 현장에서 예술적 행위를 시도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좀 더 흥미롭기도 하고 나를 표현하기에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시나 예술을 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내 개인적 활동 범위를 만들어나간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리고 예술가는, 혹은 나와 같은 또 다른 기획자나 활동가는 저마다의 활동 범위가 있을 것이고 그것을 스스로 범주화해나가는 맥락과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 활동 범위가 어느 정도 겹치는 사람, 혹은 동료들을 알고 있다. 이들과의 만남은 나에게 그 무엇보다 편안한 일시적 공동체가 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각자의 관심사를 바탕으로 자발적으로 활동하고 있기에 서로의 적극성을 기대하거나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비슷한 순간에, 같은 장소에 가서 각자의 방향성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서로에게 힘을 준다. 나에게 무언가 도움을 주거나 내가 누군가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비슷한 고민을 놓지 않고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에서 삶에 대한 힘을 얻는다.

  그리고 이들은 (나와는 다른) 예술가인 경우가 많다. (오로지 개인적 경험을 근거로) 나는 이들의 활동 범위가 갖는 의미, 그 안에서 발생되는 힘이 예술적 영향력을 보여줄 수 있다고 여긴다. 동시에 예술 자체가 공동체나 삶에 영향을 준다고 보는 것은, 비현실적인 설정 같기도 하고 예술이 발생되는 전반적인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각자의 삶을 영위하며 살아나가고 있는 사람들의 어떤 실천들이 타인에게도 의미나 가치로 전해지는 것이라고 본다.

 

여러 사람들의 활동 범위가 겹치는 양상

 

 

 

2019년 10월 5일 활동범위가 겹치는 사람들과 대학로에서 만나 일시적 공동체를 이뤘다.

장애인의 삶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목소리를 내며 퍼레이드를 하였다.

장애인을 차별하지 말자고 말하는 대신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이름을 외치고 좋아하는 노래를 불렀다.

(퍼레이드 진진진 : 중증장애인을 포함한 사회적 소수자들이

스스로를 드러내고 말하기를 예술의 방식으로 보여주려는 프로젝트)

*사진 출처 : 퍼레이드 진진진 페이스북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예술의 힘 이전에 사람의 힘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힘은 누군가에게 치유가 되기도 하고 자극이 되기도 하고 낯설음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예술은 마냥 긍정적인 요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치유든 자극이든 낯설음이든 시기적절한 슬픔이든 혹은 그 무엇이든 그 양상이나 파급력도 다양하다. 중요한 것은 일반적인 효율성이나 성과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예술의 이러한 속성에 관심이 많다. 왜냐하면 그것이 현재의 사회적 흐름과 다른 방향성을 띄기 때문이며 그래서 다수를 설득하기에는 힘들지만 그 자체로 방향전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기능과 쓸모를 끊임없이 개발하고 증명해야 하는 사회는 빠른 속도와 효율적인 생산성을 추구하지만 예술은 쓸모를 알 수 없는 질문, 속도를 늦추는 실험을 지속한다. 적어도 내가 정의하는 예술은 그런 측면에서 관계적 미학,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특히 현실적 운영이 필요한 공동체에서 이러한 예술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나는 공동체 안에서 예술이 어떻게 기능할지보다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어떤 역할을 예술가가 해내는 것은 예술적 삶의 방식과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가가 예술적 효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기능인으로 인식될 경우 예술가로서의 개인적 삶 자체를 존중받는 것은 어려워진다. 그런 측면에서 공동체와 예술의 관계성에 대한 논의는, 예술이 공동체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넘어, 예술가의 삶 혹은 예술적 삶의 방식이 공동체와 공존하기 위해 서로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의 다른 속성, 지향점, 삶의 방식을 존중하거나 학습하려는 태도를 필요로 한다. 이 과정에는 예술가가 얼마나 특이하거나 덜 사회적인지를 확인하려 하지 않는 것, 공동체가 예술가라는 개인에게 어떤 측면에서 필요한지 살피는 것, 다양한 양상의 공동체를 상상하는 것 등이 필요하다.

  공동체도 결국 ‘함께 살아나가려는 구체적 의지’로 읽힌다. 그런데 예술도 다르지 않다. (개인의 정치를 해내기 위한 창작 행위나 결과물은 적어도 나에겐 예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예술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자원을 마련하고 방법을 설계하고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이지 않는 관점이나 의미를 추구한다. 그럼에도 삶에서 효율적 기능을 해내는 것 안에 예술 같은 것이 감지된다면 그것은 예술이라기보다는 예술적 요소가 들어간 어떤 방법론 혹은 콘텐츠일 것이다. 그 차이를 구분해낼 수 있을 때 예술과 함께 살아나가는 방식을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난 예술가가 아니지만 나를 포함한 몇몇 사람을 예술가로 인식하고 존중해주신 분의 글을 마지막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내가 2012년부터 4년간 함께 했던 (여러 공동체 중 하나인) 비영리예술단체에서의 활동을, 장애인 창작자의 부모가 최근에 이렇게 회상하였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예술은 장애와 관련된 현실의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으나 타인의 삶에 어떤 흔적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참 미련하고 답답하지만 나는 언제나 ‘그러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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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젊은 예술가는 이것이야말로 예술가가 꼭 갖추어야 할 것이라며 부러워하였고, 일군의 그들은 지금까지 장애라 써 놓은 것을 미덕이라 읽어 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도 그(장애인 창작자)의 세계에 첨벙 뛰어들 수는 없다. 그저 그의 세계를 기웃거리고, 그의 주변을 서성이며 불현듯 조우하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들의 예술 세계와 그의 미덕 있는 세계가 크로스오버 되는 어느 지점을 찾아 헤매며 우주를 유영하는 막막함. 이 두 아웃사이더 그룹의 만남은 그래서 좀 뿌옇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과연 그들은 만나기나 할까? 만난다면 불꽃이 튀기는 튈까? 어느 세월에? 처음엔 그랬다. 처음에는.

아마도 내가 생각한 예술은 영감이 불꽃처럼 튀어 오르고, 모두가 우러러 마지않는 걸작을 만드는 것이었나 보다. 그러나 이 생각은 그 예술가들을 만나서 같이 기웃거리고 서성이고 대화하면서 바뀌어 갔다. 그들은 조급하지 않았고 아니 조급증을 낼 무슨 결과를 기다리지 않았다. 스파크 따위 안 터지면 뭐 어떤가? 설사 만나지 못하고 이렇게 계속 유영만 한대도 저기 어딘가에는 나처럼 우주를 떠다니는 유목민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 기쁘지 아니한가? 너도나도 이 세상에 태어난 한 인간일 따름이라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고방식과 태도. 예술은 걸작으로 남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예술의 껍데기라는 것. 예술의 알맹이는 지금 우리의 태도에 있다는 것. 이 태도를 나는 중년이 되어 어린 예술가들에게서 배운 것이다. 그것은 행운이었다.

 

2019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웹진 이음 5호

[젊은 예술가의 태도가 일깨운 삶에 관하여 “재미를 보기에 희망을 가진다”]

고혜실 로사이드 정진호 창작자 어머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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