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로 살아가기

 

2019.11.01. (금) 14:30~17:00

청년일자리센터 다목적홀

 

 

 

 

장애-예술-공동체 : 분리된 채로 연결된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예술가(예술 작품을 창작하거나 표현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는 매우 소수라고 생각한다. 시대에 따라 예술가를 정의하는 맥락과 범위가 변하고 있고 요즘은 더욱 ‘당신도 예술가, 모두가 예술가’라는 구호가 퍼지고 있지만 그럴수록 예술가는 더욱 소수가 되어가고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은 그 자체로 유통에 용이한 상품이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술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 사람이 살아나가기 힘든 사회 덕분에 예술가는 소수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나는 예술가는 아니다. 단지 예술프로젝트나 일반적인 작품 발표방식인 전시에 이따금 참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 발제를 할 수 있는 이유는, 오히려 내가 예술가는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예술가들의 삶에 관심이 있는 기획자, 활동가에 가깝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나의 경험을 나누기에 좀 더 수월한 입장에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예술가가, 공동체와 밀접하게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말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덜 사회적이고, 즉흥적이고, 자기세계에 몰입하며, 집단적 활동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캐릭터화된 예술가상에 대해 동의하거나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한국에서의 공동체가 특히 조직화, 집단화를 전제하는 경우에 더욱 예술가의 삶의 방식을 끌어안기 어렵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왜냐하면 예술가가 창작을 하는 과정, 살아가는 방식이 공동체 안에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하는 창작활동은 뚜렷한 하나의 목적을 향해 계획된 일을 해내는 것과 거리가 있다. 그러나 단체나 조직을 지속적으로 운영해야 하는 공동체의 경우는 (그것이 느슨하더라도) 운영 목표를 설정하고 그에 필요한 과정을 설계한다. 그러나 예술가는 살아가며, 해나가며 방향성을 찾는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선택하거나 전제한 목표와 방법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갖고 그 질문 던지기 자체를 통해 참여 혹은 창작의 의미를 찾는다. 공동체를 ‘공통의 가치와 유사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으로 전제할 경우, 예술가는 ‘우리가 공통적일 수 있는가’, ‘유사할 수 있는가’, 혹은 ‘왜 그래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가며 계속해서 ‘공동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고민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공동체와 결합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태도, 혹은 삶의 방식이 공동체의 방해요소가 아닌 다양성의 일부로 인식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쉽지 않다. 보통의 현실 속에서 공동체는 예술가가 질문의 생산자가 아닌 예술적 경험의 생산자로 기능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문을 하긴 하지만 공동체가 바라는 예술적 경험을 기획활동을 통해 어느 정도 수행하고 있는 나는 (언제나 자연스럽고 편안했던 것은 아니지만) 공동체와 연결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의 활동은 예술가의 공동체 활동 사례로 온전히 소개될 수 없다. 나는 예술가적 삶에 관심은 있으나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으며 예술가라고 스스로 소개하기에도 실제 활동과 맞닿지 않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서론이 매우 길었다. 이제부터 나의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나는 공공예술프로젝트나 문화예술교육 등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10년 넘게 이곳저곳에서 만나오고 있다.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켜 보호감시 기관에 있는 청소년들, 가족들의 눈치를 보며 매일 다리 밑에 나와 장기와 바둑을 두는 할아버지들, 경력단절이 된 여성들, 불안감이나 우울감이 큰 청년들, 그리고 장애인과 그 가족들. 그중 장애인과 만나거나 함께 창작활동을 했던 시간이 다른 활동에 비해 많았는데 그것은 비영리예술단체 내에서의 활동이나 특수학교에서의 예술교육으로 설명 가능하다. 그런데 나는 (공동체의 대표적 유형으로 볼 수 있는) 단체 관련 활동을 넘어서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데 그 이유는 결국 모든 활동이 각각의 의미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단체 외의 활동은 공동체에 대한 개인적 문제의식을 재설정할 수 있는 기회로 작동되기 때문에 또 다른 가치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장애와 관련된 활동을, 각각의 무게로 내 삶에 영향을 주고 있는 여러 유형의 공동체, 그것들 간의 상호성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여러 공동체와 연결된 나의 활동 범위

 

 

 위의 그림처럼 나는 여러 공동체에 관여하거나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그중에는 장애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나는 오랜 시간 다양한 현장이나 사회적 현상을 마주하면서 오히려 이것들이 빈부 격차나 도시생활의 일반화, 불안사회 등과 같은 공통된 이슈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는 장애, 비장애를 떠나, 삶에 대한 다층적인 경험을 나누고자 여러 단체나 모임 혹은 일시적 공동체 등에 참여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내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며 내 주변 사람들, 혹은 구체적인 어떤 공동체의 일원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활동 범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예술가는 아니지만) 나의 예술적 경험이나 과정이 다른 삶과 연결될 때에는 이러한 활동 범위가 갖는 위치와 규모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즉, 예술 자체가 공동체나 구성원의 삶에 구체적인 영향을 준다기보다는, 어떤 가치나 의미를 중심으로 활동의 범위를 기획하고 만들어나가는 개인의 삶이, 그것과 연결된 타인의 삶에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이다. 단지 예술적 경험이 그 활동 범위에서 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질 경우 우리는 예술에 대해 조금 더 집중해서 그 현상을 해석해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술이 장르로서의 예술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고 볼 때, 이것은 미술이나 문학, 연극, 음악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넘어서는 관점을 필요로 한다. 내가 어떤 공동체에 ‘가서’, 혹은 어떤 자리에 ‘참석해서’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기 때문에’ 무언가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삶이 불안정하고 이따금 오락가락한 마음 상태를 가진 사람이기에 타인이나 사회와의 관계를 탐색하기 위해 공동체를 포함한 여러 현장에서 예술적 행위를 시도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좀 더 흥미롭기도 하고 나를 표현하기에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시나 예술을 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내 개인적 활동 범위를 만들어나간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리고 예술가는, 혹은 나와 같은 또 다른 기획자나 활동가는 저마다의 활동 범위가 있을 것이고 그것을 스스로 범주화해나가는 맥락과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 활동 범위가 어느 정도 겹치는 사람, 혹은 동료들을 알고 있다. 이들과의 만남은 나에게 그 무엇보다 편안한 일시적 공동체가 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각자의 관심사를 바탕으로 자발적으로 활동하고 있기에 서로의 적극성을 기대하거나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비슷한 순간에, 같은 장소에 가서 각자의 방향성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서로에게 힘을 준다. 나에게 무언가 도움을 주거나 내가 누군가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비슷한 고민을 놓지 않고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에서 삶에 대한 힘을 얻는다.

  그리고 이들은 (나와는 다른) 예술가인 경우가 많다. (오로지 개인적 경험을 근거로) 나는 이들의 활동 범위가 갖는 의미, 그 안에서 발생되는 힘이 예술적 영향력을 보여줄 수 있다고 여긴다. 동시에 예술 자체가 공동체나 삶에 영향을 준다고 보는 것은, 비현실적인 설정 같기도 하고 예술이 발생되는 전반적인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각자의 삶을 영위하며 살아나가고 있는 사람들의 어떤 실천들이 타인에게도 의미나 가치로 전해지는 것이라고 본다.

 

여러 사람들의 활동 범위가 겹치는 양상

 

 

 

2019년 10월 5일 활동범위가 겹치는 사람들과 대학로에서 만나 일시적 공동체를 이뤘다.

장애인의 삶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목소리를 내며 퍼레이드를 하였다.

장애인을 차별하지 말자고 말하는 대신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이름을 외치고 좋아하는 노래를 불렀다.

(퍼레이드 진진진 : 중증장애인을 포함한 사회적 소수자들이

스스로를 드러내고 말하기를 예술의 방식으로 보여주려는 프로젝트)

*사진 출처 : 퍼레이드 진진진 페이스북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예술의 힘 이전에 사람의 힘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힘은 누군가에게 치유가 되기도 하고 자극이 되기도 하고 낯설음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예술은 마냥 긍정적인 요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치유든 자극이든 낯설음이든 시기적절한 슬픔이든 혹은 그 무엇이든 그 양상이나 파급력도 다양하다. 중요한 것은 일반적인 효율성이나 성과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예술의 이러한 속성에 관심이 많다. 왜냐하면 그것이 현재의 사회적 흐름과 다른 방향성을 띄기 때문이며 그래서 다수를 설득하기에는 힘들지만 그 자체로 방향전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기능과 쓸모를 끊임없이 개발하고 증명해야 하는 사회는 빠른 속도와 효율적인 생산성을 추구하지만 예술은 쓸모를 알 수 없는 질문, 속도를 늦추는 실험을 지속한다. 적어도 내가 정의하는 예술은 그런 측면에서 관계적 미학,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특히 현실적 운영이 필요한 공동체에서 이러한 예술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나는 공동체 안에서 예술이 어떻게 기능할지보다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어떤 역할을 예술가가 해내는 것은 예술적 삶의 방식과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가가 예술적 효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기능인으로 인식될 경우 예술가로서의 개인적 삶 자체를 존중받는 것은 어려워진다. 그런 측면에서 공동체와 예술의 관계성에 대한 논의는, 예술이 공동체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넘어, 예술가의 삶 혹은 예술적 삶의 방식이 공동체와 공존하기 위해 서로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의 다른 속성, 지향점, 삶의 방식을 존중하거나 학습하려는 태도를 필요로 한다. 이 과정에는 예술가가 얼마나 특이하거나 덜 사회적인지를 확인하려 하지 않는 것, 공동체가 예술가라는 개인에게 어떤 측면에서 필요한지 살피는 것, 다양한 양상의 공동체를 상상하는 것 등이 필요하다.

  공동체도 결국 ‘함께 살아나가려는 구체적 의지’로 읽힌다. 그런데 예술도 다르지 않다. (개인의 정치를 해내기 위한 창작 행위나 결과물은 적어도 나에겐 예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예술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자원을 마련하고 방법을 설계하고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이지 않는 관점이나 의미를 추구한다. 그럼에도 삶에서 효율적 기능을 해내는 것 안에 예술 같은 것이 감지된다면 그것은 예술이라기보다는 예술적 요소가 들어간 어떤 방법론 혹은 콘텐츠일 것이다. 그 차이를 구분해낼 수 있을 때 예술과 함께 살아나가는 방식을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난 예술가가 아니지만 나를 포함한 몇몇 사람을 예술가로 인식하고 존중해주신 분의 글을 마지막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내가 2012년부터 4년간 함께 했던 (여러 공동체 중 하나인) 비영리예술단체에서의 활동을, 장애인 창작자의 부모가 최근에 이렇게 회상하였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예술은 장애와 관련된 현실의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으나 타인의 삶에 어떤 흔적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참 미련하고 답답하지만 나는 언제나 ‘그러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

...어느 젊은 예술가는 이것이야말로 예술가가 꼭 갖추어야 할 것이라며 부러워하였고, 일군의 그들은 지금까지 장애라 써 놓은 것을 미덕이라 읽어 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도 그(장애인 창작자)의 세계에 첨벙 뛰어들 수는 없다. 그저 그의 세계를 기웃거리고, 그의 주변을 서성이며 불현듯 조우하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들의 예술 세계와 그의 미덕 있는 세계가 크로스오버 되는 어느 지점을 찾아 헤매며 우주를 유영하는 막막함. 이 두 아웃사이더 그룹의 만남은 그래서 좀 뿌옇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과연 그들은 만나기나 할까? 만난다면 불꽃이 튀기는 튈까? 어느 세월에? 처음엔 그랬다. 처음에는.

아마도 내가 생각한 예술은 영감이 불꽃처럼 튀어 오르고, 모두가 우러러 마지않는 걸작을 만드는 것이었나 보다. 그러나 이 생각은 그 예술가들을 만나서 같이 기웃거리고 서성이고 대화하면서 바뀌어 갔다. 그들은 조급하지 않았고 아니 조급증을 낼 무슨 결과를 기다리지 않았다. 스파크 따위 안 터지면 뭐 어떤가? 설사 만나지 못하고 이렇게 계속 유영만 한대도 저기 어딘가에는 나처럼 우주를 떠다니는 유목민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 기쁘지 아니한가? 너도나도 이 세상에 태어난 한 인간일 따름이라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고방식과 태도. 예술은 걸작으로 남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예술의 껍데기라는 것. 예술의 알맹이는 지금 우리의 태도에 있다는 것. 이 태도를 나는 중년이 되어 어린 예술가들에게서 배운 것이다. 그것은 행운이었다.

 

2019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웹진 이음 5호

[젊은 예술가의 태도가 일깨운 삶에 관하여 “재미를 보기에 희망을 가진다”]

고혜실 로사이드 정진호 창작자 어머니, 작가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