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의 문화예술교육 비평웹진
<지지봄봄> 27호가 발행되었습니다.

 

비기자는 이번호에 기획과 편집에 참여했습니다.

 

"문화예술교육을 둘러싼 기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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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교육을 둘러싼 기준들 / 최선영

 

 

문화예술교육을 하나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지만 우리는 ‘어떤 기준에는 부합하지 않는’, 혹은 ‘이것은 아닌’ 것으로서 문화예술교육의 상을 가지고 있다. 교육서비스는 아닌, 체험프로그램은 아닌, 대중문화는 아닌, 사교육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등등. 이것은 문화예술교육을 정확히 개념화하지 않더라도 다수의 동의를 얻어낼 법한 어떤 기준을 취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기준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촘촘한 근거나 경험은 무엇일까. 문화예술교육 사업 내에서 기획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문화예술교육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때, 사실 교육서비스 같기도 하고 체험프로그램 같기도 한 문화예술교육이라 불리는 현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반대로, 사람과 삶에 대한 다양한 관심과 질문을 품고 있는 사교육 현장이나 대중문화 사례, 혹은 일상 속 창작활동에 대해서는 그 형식만을 근거로 참조의 가능성을 배제할 것인가.


이번 호에는 ‘일반적인 문화예술교육으로 불리지 않는 현장을 이끌고 있거나 관찰하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아래 그림에서의 )를 통해 과연 우리가 갖고 있는 기준들이 다양한 관점을 함의하고 있는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빠르게 변하는 사회 속에서, 어쩌면 ‘문화예술교육은 적어도 이래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모호한 기대나 일반화된 전제가 교육의 다양한 가능성을 차단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질문이 구체화되기 위해서는 문화예술교육으로 불리지 않는 현장이, 문화예술교육을 둘러싼 기준들(아래 그림에서의) 어디쯤에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는 어떤 기준의 밖에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기준의 안에 있기도 하다. 기존의 문화예술교육 상(想)에 약간 겹쳐지는 자리에 있기도 하고 저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의 거리는 멀기도 하고 매우 가깝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불규칙하고 불명확한 을 바라보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지 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이 위치한 곳의 의미와 가능성을 상상함으로써 아래 그림과 같이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확장된 시선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그 과정에는 문화가 무엇인지, 예술이 무엇인지, 교육이 무엇인지 질긴 논의가 존재한다. 혹은 문화예술교육이라는 개념이나 형식이 현재 인간에게 왜 필요한지에 대한 물음도 등장한다. 그래서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확장된 상상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이끄는 질문의 방향성(아래 그림에서의 )이다. 어떤 방향성을 고려하는가, 그리고 그 방향성은 고민의 의지를 얼마나 발생시킬 수 있을 것인가.

 

 

사회나 문화가 변해가면 고민의 방향성과 더불어 문화예술교육의 위치도 변해갈 것이다. 그렇기에 변화는 매 순간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그 변화의 가능성이나 의미를 얼마나 바라보려고 하는지에 따라 오늘의 질문을 미래의 질문으로 이어갈 수 있는 동력이 생기거나 사라진다. 답보다 질문의 다양성을 모색해야 각자의 문화예술교육을 상상하고 실천하는 것에 그야말로 재미도 생길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동력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지지봄봄] 27호는 질문하기의 재미를 발동시키는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이것은 논리적인 질문을 위한 목적 및 전략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문화예술교육의 정책을 설계하고 사업을 기획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이 놓치고 있는 현장에 대한 개별적 관심과 재미를 스스로 찾아나가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문화예술교육은 공공기관의 지원사업 틀로 인식되기 쉽고 비록 우리가 주로 그 안에서 현장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정책으로 호명된 개념이 아니라 바로 나의 해석과 재미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깨를 들썩이게 만드는 순간을 지속시키지는 못해도, 지난한 고민의 끄트머리에 불쑥 찾아오는 탄성 혹은 탄식 같은 순간으로 감지되기도 한다. 그건 얼마나 비효율적이면서도 감사한 순간인가.


그 순간들은 우리의 활동을 지속시키는데 가장 불규칙하고도 강력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고 대체 찾아올까 싶지만 그럴 때 문득 사람을 향하는 이상한 마음과 동반하여 찾아온다. 심지어 다음에 그 순간이 또 찾아올 것 같은 희망을 갖게까지 한다. 그래서 확실한 이유가 필요했던 각자의 활동은 모호한 이끌림에 의해 지속되기도 한다. 그러다 그 모호함이 확실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우린 이따금 그 이유에 대해 서로의 안부를 묻듯 왜 문화예술교육을 계속 하고 있는지, 혹은 하려고 하는지 서로의 의견을 구할 뿐이다. 이번 27호의 ‘가봄’에 등장하는 기획자, 강사, 예술가간의 좌담회는 특히 그런 현장이었다. 그런데 어떤 시기의 사람들이 잠시 만나 짧은 질문에 답변을 시도해본 것 치고는 그 대화가 참 길다. 그렇게 말하고 또 말해도 부족하다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각자가 문화예술교육을 하는 이유는, 정리된 문장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리가 가능할지 불확실함에도 스스로에게 질문을 멈추지 않는 그 순간 안에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마치 예술가들의 자신이 서 있는 환경을 마주하는 과정, 혹은 창작으로 풀어보는 과정과도 닮아있기에 역시나 질문의 폭을 확장시킨다. 이번호 ‘더봄’의 이려진, 신민의 글은 그것을 상상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들이 예술가 이전에 표현의 욕구가 있는 한 개인이라고 본다면, 이러한 개개인을 특정 공간이나 상황, 관계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시선도 궁금해진다. 그것은 문화예술교육 강사의 시선과도 닮아있다. ‘곁봄’의 김인규, 서수경의 글은 이 시선을 교육 혹은 만남의 맥락에서 보여준다. 그러다 문득 그 글속에 등장하는 장소를 상상하다가, 모범적인 참여자는 아니더라도 어디에나 있을 법한 개구쟁이의 생각, 혹은 매우 개인적인 회상이 궁금해진다. 그때는 ‘곁봄’ 곽재원의 글을 읽을 수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진 개개인들이 참 많을 텐데 우리가 만나는 교육현장은 다양한 참여의 기회나 방법을 상상하고 있을까 생각이 든다. ‘더봄’에 등장하는 수원시평생학습관의 유투공 사례와 ‘넘봄’의 캐나다 예술 프로젝트 사례가 그것에 작은 참조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의 확장은 개개인의 몫으로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다. 문화예술교육을 주로 사업으로 풀어낼 수밖에 없는 공공기관이 함께 질문을 확장하는 것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공공기관의 기능과 역할. 당연할 수 있는 이야기가, 정말 당연해지기를 바라며 ‘곁봄’ 이지혜의 글을 읽어본다. 그러다 ‘넘봄’에서 유선이 전하는 일본의 예술가이자 활동가 이치무라 미사코의 인터뷰를 통해 문화예술교육을 둘러싼 기준을 뛰어넘어 우리가 어디까지 인식을 확장해야만 할지 다시 고민에 빠진다.


이리저리 들썩이는 사례와 시선들이 섞이는 가운데 우리의 관심이 잠시라도 머무는 이야기, 혹은 애써 외면하고 싶은 이야기를 발견한다면 그때 감지되는 각자의 ‘기준’을 돌이켜보자. 그 기준을 형성하는 데에 영향을 미친 각자의 예술관, 교육관, 그리고 가치관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스스로 설정한 것일까, 혹은 외부에 의한 것일까. 어디서부터가 외부에 의한 설정일까.


이번 호의 제목이 ‘문화예술교육의 기준’이 아니라 ‘문화예술교육을 둘러싼 기준들’인 이유가 그 안에 있다. 결국 스스로가, 혹은 상황이나 구조가 형성한 기준들, 그것이 형성된 맥락을 살피는 시도 안에서, 기준 밖에 위치시켰던 무언가를 바라볼 수 있다. 기준들이 만들어낸 문화예술교육이라는 틀로 인해 들여다보기 어려웠던 이야기들을 들어봄으로써 우리가 현재 질문을 던지는 위치가 어디일지 함께 생각해보자. 이왕이면 더 멀리 질문을 던지고 미련하게 그 흔적을 찾으러 움직여본다면 어떨까. 질문을 튕겨버리는 벽이, 보이지 않는 기준으로 우뚝 서있을 테지만, 그 벽을 투명하게 만들거나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상상이 지금 여기에서는 가능하지 않을까. 벽 앞에서 질문의 방향을 트는 대신 질문이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능청스럽거나 과감한 상상이 필요하다.

 

 

 


최선영

기획자이자 창작그룹 ‘비기자’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비기자’는 무한경쟁시대에, 각기 다른 생각들이 꾸준하게 비길 수 있는 현장을 인문학적 문화예술 활동으로 만드는 창작그룹이다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의 문화예술교육 비평웹진
<지지봄봄> 26호가 발행되었습니다.

 

비기자는 이번호에 기획과 편집에 참여했습니다.

 

 

"누구와 무엇으로 어떻게 만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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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와 무엇으로 어떻게 만날까 

 

창작그룹 비기자 최선영

 

 

 

그냥 쉬고 싶은 사람을 만났다면 어떨까.

푸릇푸릇한 에너지로 교실과 운동장을 뛰어놀 초등학생을 기대했는데.

 

‘이름이 뭐야?’라는 질문에 ‘이름이 뭐야?’라고 답하는 사람을 만났다면 어떨까.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예상했는데.

 

자신이 소유한 건물 자랑을 하는 사람을 만났다면 어떨까.

정감 넘치는 인생 이야기를 펼치는 어르신을 기대했는데.

 

사람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기대하고 예상한 모습의 사람만 있지 않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문화예술교육에서는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교육대상’으로 개념화하고 그 대상을 유아, 청소년, 노인, 장애인, 가족 등으로 겨우 세분화한다. 이러한 현상은 문화예술교육이 대상별 교육을 강조하는 정책적 움직임 안에 있을 때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하지만 행정적 서류나 사업 기획안에서 편리하게 분류해 부르는 그 ‘대상’들은, 교육 현장에서 다시 한 명씩 살펴보고 마주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된다.

 

예를 들어 중학생들과의 교육 활동을 한다고 가정했을 때, 그 학생들은 보통 ‘청소년’으로 불리지만 우리는 현장에서 ‘청소년스럽다고 느껴지지 않는 사람’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래서 ‘학생다움’이나 ‘청소년다움’에 대한 사회와 개인의 시선이 현장에서 보기 좋게 미끄러져 버리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결국 교육 현장을 이끌어야 하는 사람들의 고민으로 이어진다.

 

이번 <지지봄봄>에서는 그 고민을 하나씩 뜯어서 살펴보고 함께 나누려고 한다. 가늠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교육 현장의 사람들이 즉흥적인 교육인지 처세인지를 해내고 있는 순간에 말이다.

 

문화예술교육은 무엇이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도화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의 근거가 되는 교육 현장은 정신없이 생성되고 사라진다. 우수한 국내외 사례들이 소개되고 있지만, 그 사례를 다시 새로운 현장에 적용하는 것은 위험하거나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깊이 있는 교육적 성찰이 이루어지기에도 벅찰 만큼, 기획자나 강사, 실무자 등은 계획안을 쓰고 재료를 나르고 참여자들을 다독이고 일지를 작성한다. 문화예술교육이 어떠해야 할지 이전에, 당장의 프로그램을 어떻게 구현하고 정리하고 이어나갈지를 살피는 것도 쉽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번 <지지봄봄>에서는 교육 현장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쪼개어 살펴보고자 한다. 교육 현장의 언어와 주제, 재료의 실험, 현장의 진행, 참여자에 대한 관심, 강사나 기획자의 마음, 활동의 정리나 지속 등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사항들을 중심으로 말이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만나보고 있는 필자들이 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들은 보편화 될 수 있는 방법론을 소개하는 대신 개별화된 경험을 들려준다. 나 역시 그러한데, 이 글에서는 먼저 교육 현장에서의 언어에 대한 경험을 풀어보고자 한다.

 

나는 교육 활동에 있어서 ‘주제’가 있더라도 그것을 하나의 단어나 개념으로 참여자들에게 공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각자의 집을 만들어보는 활동을 실제로 계획했더라도 “집을 만들자”라고 하지 않는다. 그 순간 대부분의 참여자들이 사각형 건물 위에 삼각형 지붕을 얹어 관념화된 집을 그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고나 표현은 생각보다 언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사람’을 그려보자고 하면 졸라맨을 그리고 ‘자동차’를 그리자고 하면 각이 진 몸체에 바퀴가 2개 달린 측면에서 바라본 바로 그 승용차를 그린다. 그래서 나는 단어가 아니라,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속성이나 요소들을 풀어서 이야기하는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몇 가지 예시를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 ‘집’을 풀어서 말하기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이나 장소”

“나에게 익숙한 물건이나 사람이 있는 곳”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가득 채우고 싶은 공간”

“내가 쉬는 곳”

“내가 가끔 숨을 수 있는 곳”

 

· ‘사람’을 풀어서 말하기

“우리와 닮았지만 모두 다른 생명체”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사랑도 하고 질투도 하는 생명체”

“겉과 속이 다른 생명체”

“각기 다른 얼굴과 몸통과 팔과 다리가 달린 것”

“다른 행성에서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모를 존재”

 

· ‘자동차’를 풀어서 말하기

“우리가 주로 타고 다니는 것”

“바퀴와 엔진과 몸체를 가지고 있는 것”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도 태울 수 있는 것”

“갑자기 사라지면 삶의 속도를 느리게 만들 수도 있는 것”

“물건을 멀리까지 운반할 때 편리한 운송수단”

 

이러한 표현방식은 하나의 개념을 떠오르게 하기보다 다른 개념까지도 상상하게 만든다. 문화예술교육이 하나의 개념을 찾아내고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참여자가 반드시 집, 사람, 자동차를 표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과 비슷한 속성을 떠올리며 다양하고 엉뚱한 것을 상상하여 자신의 삶과 연결된 어떤 지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러한 말하기 방식은 더더욱 무궁무진하게 이어져 문학적인 표현으로도 연결될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예시 중에, “다른 행성에서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모를 존재”에 대해 그림을 그린다면 어떤 결과물들이 나올까. 그것이 얼마나 예술적일지 아닐지 따져보기 전에, 그것이 ‘사람’이라는 단어를 듣고 표현한 것과 어떤 차이를 만들어낼지 생각해볼 수 있다.

 

또한 교육 현장에서 교육적 주제는 계획서에 명시된 언어 그대로 참여자에게 전달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도 전반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혹시 강사나 기획자가 정해 놓은 주제를 강조하거나 교육 활동을 효과적으로 이끌어나가기 위해서 선택된 개념 몇 가지가, 참여자의 다양한 접근을 가로막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최근에는 교육 활동이 계획서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보니 분명하고 정리된 언어들이 활동 전반에 공지되어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참여자의 표현 영역에서는 오히려 계획된 언어, 기획된 주제가 흩어지고 확장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참여자의 개별적 관심이 활동 주제와 조금이나마 만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특히 문화예술교육은 비언어적인 과정도 포함하기 때문에 우리가 언어의 밖으로 뛰쳐나가 해볼 수 있는 것들이 더욱 많다. 또한 언어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 혹은 언어를 쓰지 못하거나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동등한 표현 기회가 주어지려면 문화예술교육은 계획서에 나열된 언어가 아니라 계획될 수 없는 감각이나 경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나는 그런 측면에서 나의 언어를 다른 표현이나 반응으로 튕겨내 버리는 사람들을 만날 때 당황하면서도 시원함을 느낀다. 예를 들어 내가 “이건 괴물이야?”라고 물으면 “그냥 그린 건데요”라는 답변을 들을 때가 그렇다. 나 역시 어떤 결과물을 보고 하나의 개념으로 판단하게 되는데 상대방은 그것이 무엇이 되는 것과 무관하게 ‘그저 그려본 것’으로 내버려 둔다. 뭐가 되지 않아도 상관없도록 이름도 의미도 부여하지 말고 그대로 두면 될 것을. 그저 그림 한 장이거나 어떤 순간의 흔적인데.

 

‘지역’을 ‘발견’하고 ‘도시’를 ‘해석’하고 ‘자아’를 ‘실현’하는 등의 문화예술교육 ‘사업’ 내의 개념들은 절대 ‘그냥 해보는 것’의 힘을 이길 수 없지만 언제나 더 중요하게 다뤄진다. 이것은 참여자의 관심, 참여, 표현을 덜 살피게 만드는 함정이 되기도 한다. 그냥 해보는 것이 지역도 발견하고 도시도 해석하고 자아도 실현하다가 심지어 삶 속으로 문화를 침투시킬 수도 있다고 기대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언어가 애써 감싸 안지 않아도 되는 비언어적인 순간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심지어 그것이 의미 이전에 재미를 찾아서 이리저리 스스로 움직이고 있다면 그 원동력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명확한 개념들을 언급하지 않는 활동이 너무 산만하게만 느껴질 때도 있다. 문화예술교육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순간들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될 때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명확한 말들을 하지 않으면서 사실은 명확한 주제를 놓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계획적이고 치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더 어려운 방법이다. 그렇기에 몇 가지 개념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며 그것에 기대어 활동 전반을 끌어가는 방식은 사실은 참여자와의 소통에서 편리한 선택이기도 하다. 이것은 때론 불편하거나 모호하거나 어려운 소통의 여지를 덜 만들기 때문에 참여자에게 일방적인 전달로 비춰질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언어나 개념과 관련된 고민을 하게 된 배경을 언급하자면, 그것은 역시나 어떤 사람들과의 만남 때문이었다. 입으로 소리는 내지만 개념을 언어화해서 문장으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람, 분명 어떤 단어나 문장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의 의미는 모른 채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따라 하듯 말하는 사람, 말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 유창하게 하는 말 속에 자신의 생각보다 강사의 생각이 더 강하게 들어있는 사람 등을 만나면서 왜 많은 활동이 언어에 기대어 이루어져야 할까 생각이 들었다. 문화예술은 그냥 해보는 것, 말없이 따라해 보는 것, 느껴보는 것, 같이 있는 것, 혹은 안 해보는 것도 가능한 영역일 텐데 말이다. 교육 ‘사업’이나 ‘프로그램’ 기획서 작성을 위한 언어에 집중하게 되는 상황 안에서, 우리 스스로 그 언어를 빠져나오기 위한 실천들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누구와 무엇으로 어떻게 만날까.

이것은 사실 누구와 어쩌다 만나게 될 때 그 다음의 만남을 어떻게 이어갈지 상상하며 내뱉어보는 혼잣말일지 모른다.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에서는 2012년부터 문화예술교육 비평 웹진 <지지봄봄>을 발행하고 있습니다.

비기자는 2018년 발행된 웹진 <지지봄봄> 24, 25호의 기획, 편집에 참여하였고 그 통합본이 나왔습니다.

 

 

발행일 / 2018년 11월

발행처 /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디자인 / 6699press

인쇄 / 신사고하이테크

주최 / 문화체육관광부, 경기도

주관 /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협력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웹진 보러가기 : http://ggarte.ggcf.kr/?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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