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진행된 '우주보따리' 공연에서는 매회 현장을 함께 하며 기록 및 평가 원고를 남겨주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평가단 배인숙, 유심 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공연 현장 설치물_김지영 작가의 작품

 

 

 

 

 

 평가단 배인숙 님의 글 (기획팀의 질문에 답변을 달아주셨습니다) 

 

1. 평가단님은 어디 출신 위원님이셨나요? (공연 안에서 관객은 임의로 어떤 집단을 대표하는 '우주언어연구회위원'이 됩니다)

저는 태어난 날과 장소가 기억나지 않는 곳에서부터 나왔습니다. 그 뒤로 서울에 계속 살고 있습니다. 가끔씩 상상합니다. 내가 서울이 아니라 시골이나 섬같은데서 태어났다면, 혹은 우리나라가 아니라 좀 더 구경거리가 많은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좋았을까 나빴을까 어쨌든 확실한 것은 계속 보았던 환경이 다닥다닥 주택, 좁은 도로, 여러갈래의 골목길이라서 짧게 다른 곳에(예를 들면 판교같은 새롭게 조성된 도시) 다녀와서 집근처에 도달할 때면 비로소 안정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제가 태어난 날과 장소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부모님께 구두로 전달받았습니다. 그날은 일요일 밤이였습니다. 제가 태어날 징조를 갑자기 보이게 되어 인근 병원으로 황급히 들어가자마자 정확히 5분만에 세상에 나왔다고 합니다. 순조로운 탄생처럼 비교적 별일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  

 

2. 공연장에 찾아온 위원님들의 형태나 기운은 어떠했나요?

저는 관객이 들어오는 모습을 관찰하기 쉬운 곳에 앉아있었습니다. 수요일 저녁이라서 그랬을까요 막 일터에서 마치고 급하게 오신 느낌이 들었습니다. 관객과 출연자가 섞여 있었지만 의상과 그 기운의 다름이 느껴지기 때문에 빨리 알아차릴수 있었습니다. 저녁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빨리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텐테 그러면서도 표정은 매우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관객들이 들어서면 보게 되는 극장이라는 특별한 공간이 주는 영향때문이 아니였을까 싶습니다. 그러한 퇴근 기운을 몰고 온 관객의 모습은 어느덧 자신들도 참여하게 되는, 만드는 공연안에서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거의 의식을 하지 않고 몰입하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였습니다. 아 관객들, 이런 시간이 부족하셨나봅니다.

 

3,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었나요? 당신이 발견한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셔요.

공연중간에 관객이 나와서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 가장 인상적이였습니다. 질문은 말로 하고 그것에 대한 답도 말로 하지만 그 공간에 있는 우리들의 머리속에는 무언가 이미지를 찾아내고자 하는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기억났던 시간은 그날 처음만난 13살 청소년 A와의 심도있는 대화입니다.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준비된 인터뷰이와 인터뷰어와의 대담처럼 느껴질 정도로 진지한 질문과 답이 오갔습니다. 특히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질문은 미국청소년과 한국청소년과의 다른 점에 관한 것이였습니다. A는 의외의 말을 했었는데, 한국의 청소년들이 더 자유로운 거 같다고 했습니다. 의아했지만 이내 설명을 들으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A가 말했던 것은 이동의 자유를 의미하였고 우리나라가 아무래도 땅이 좁다보니 대중교통의 비교적 수월하다는 것이죠. 아 이동의 자유, 정말 중요한 요소이죠. 저는 A에게 이동의 자유말고 생각의 자유에 대해서 질문을 했습니다. A는 미국청소년들이 휠씬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지만 깊숙히 들어가보면 마찬가지다라는 알쏭달송한 답을 주었습니다.  

 

4. 우주보따리를 통해, 답이 더 요원해진 질문이 있다면 간단히 공유해주셔요.

질문 1 :  질문과 답을 계속하다보면 소크라크테스처럼 내 자신을 알게 되는 걸까요?

질문 2 :  만약 그렇다면 내 자신을 알게 되서 이로운 점/ 안좋은 점은 무엇일까요?

질문 3:   다른 사람이 하는 것, 예를 들면 공연을 보는 이유는 정확히 무엇일까요?

질문 4:  우주는 도시의 모습일까요 섬이나 시골, 부락의 모습일까요?

 

5.오늘의 이벤트는 다른 행성에 어떤 식으로 번역되어 전달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는 곳에서 내가 처한 상황에서만 이해되는 답들이 생겨난것은 질문없이 습관적으로 행했던 단편적인 답들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글과 말로 하는 질문보다는 공연, 토크를 통한 우주보따리의 무대형 질문형태 그대로 전달하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 평가단 유심 님의 글 (4회의 공연을 모두 함께 하신 후에 쓴 글입니다)

<우주보따리> 공연에서 운석을 하나 받았습니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다각형의 돌. 모서리와 면을 눈으로 살피다 통째로 집어 올려 무게를 어림잡아봅니다. 물 뜨듯이 손을 모아 그 위에서 이리저리 굴려도 보고. 그러다 한 손으로 노트 위에 가만히 내려놓습니다. 편안하게 착지한 돌의 모서리들이 저마다 어딘가를 가리킵니다. 어떤 면은 넓게 빛을 받아 환하고, 또 다른 면은 그늘져 숨어버렸습니다. 다시 데구르 돌려보니 운석은 가운데가 코처럼 솟아오른 가면 모양이 되었습니다. 문득 무대에서 오르골을 연주하던 악사가 떠오르고, 또 한구석에 놓인 채 조수가 튀어나왔던 커다란 상자가 떠올랐습니다. 악사의 가면도, 커다란 상자도 이 운석과 꼭 닮은 모양이었습니다.

 

<우주보따리>를 돌아보면 오색의 크고 작은 빛이 반짝이는 만화경이 떠오릅니다. 그건 오르골에서 쏘아올린 손톱만한 빛이 사방의 벽에 흩어져서이기도 하고, 소리 증폭 위원의 손에 들린 핸드폰이 허공에 네온사인처럼 불을 밝혀서이기도 합니다. 어둠 속에서 객석을 휘젓던 위원들의 흰 가운이, 침묵 속에서 수신호로 부지런히 무대를 전달하던 어느 위원의 손짓이, 눈 안에 잔상으로 남았기 때문입니다. 객석을 향해 외치고 노래하고 제안하던 위원들의 목소리가, 그들이 만든 가상의 상황에 저마다 화답하던 관객들의 수런거림이 모두 마술처럼 매혹적이고 아름다웠습니다.

 

어둠, , 레이저, 흰 가운... 그렇게 연쇄되어 떠오르는 사람은 바로 박사님입니다. 야윈 몸은 흰 가운으로, 눈빛은 선글라스로 가린 채 박사님은 왕왕 울리는 목소리로 열변을 토하셨죠. “우주는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 “우주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는 것이다.” “우주에 대한 질문 찾기가 우리 행보의 첫걸음이다”라고요. 처음에 저는 일방적으로 발신만 하는 박사님의 태도에 놀라 반감이 들었답니다. 계단 너머에서, 쓰레기통 안에서, 어두운 밤길에서 불쑥 튀어나와 자기 할 말만 하는 모습이 영 불편했거든요. 옆에서 가만히 고개만 끄덕이며 앵무새처럼 박사님의 말만 따라하는 조수도 답답했고요. 그러다 별안간 우주 총회가 시작되고 우주여권이 발급되더니 “아시잖아요.” “늘 그래왔듯이”라는 말을 들으며, 저는 랩을 하는 위원들을 따라 박수 치다가 얼렁뚱땅 무슨무슨 위원이 되고 말았죠. 좀전의 긴장과 움츠려들었던 마음은 어느새 가시고 그렇게 저는 저를 그냥 놓아버렸더랬습니다. 

 

오늘 본 <우주보따리>에서 저는 우주와 교신하는 몇 가지 팁을 얻었습니다. 먼저 제일 손쉬운 방법은 전자기기 활용하기였어요. 소리 증폭 위원이 알려준 핸드폰 조작법대로 URL을 잘 찾아가니 악기 화면이 떴고, 조금만 손을 휘저어도 소리와 빛이 발사되었어요. 그들은 춤과 소리와 빛을 연동시켜 여럿이 일정한 동작을 구사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신호가 발신되고, 우주에서도 일정한 답이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이 교신 방법은 언뜻 쉬워 보이지만, 오타를 조심해야 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되돌아오는 답을 해독할 열린 감수성이 필요했습니다. 어떤 낯선 신호도 모두 받아 안을 자세로 귀를 활짝 열고 움직임을 예의주시해야 했지요. 자나 깨나 머리맡에, 손안에 있던 핸드폰이 더 이상 익숙한 도구가 아니게 되었고, 낯선 페이지, 낯선 소리, 낯선 존재와 연결되는 새로운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게 재미있었습니다.

 

침묵 속 수화도 누군가와 소통하는 한 방법임을 배웠습니다. 수어 통역을 하는 위원의 몸짓 덕에 저는 음이 소거된 무대를, 소리 없는 세상을, 농인의 존재를 떠올렸어요. 내친 김에 시종 빛이 잠식된 무대도 상상해보았지요. 그렇게 내가 사는 세상에서 청각과 시각을 하나씩 제거하다보니... 이게 제대로 된 접근인지 회의가 들더군요. 그러한 세계에선 과연 눈과 귀가 적막하기만 할까요? 저는 오히려 일상 속에서 크고 작은 목소리와 신호음과 소음에 노출된 저를 반추할 수 있었어요. 밤낮으로 불 밝히며 쏟아지는 글자와 화면에 끊임없이 노출된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었지요. 수어를 구사하는 세계의 풍부함이 더 잘 보였고, 청인으로 사는 제가 왜소하게까지 느껴졌어요. 그들 감각의 결핍보다는 내가 사는 세계의 결핍이 더 크게 느껴진 거죠. 이렇게 제가 놓치고 지나가는 세계가 얼마나 많을까요? 수어 통역 우주위원 덕분에 다양한 감각을 일깨우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저마다의 몸짓과 소리와 논리로 우주와 교신하고, 함께 자리 메운 이들과 교신하려는 위원들의 모습을 보며 저는 고대의 철학자들을 떠올렸습니다. 기원전 3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테네에서 옮겨온 고대 도시 알렉산드리아.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의 접점인 이 도시에서는 귀족과 시민과 노예가, 그리고 세계 방방곡곡의 상인들이 오늘날의 서울이나 뉴욕보다 더 어지러이 어울려 다녔다고 해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중심으로 천문학자, 철학자, 예술가, 의사가 저마다의 지식을 교류했고, 그렇게 소리와 빛과 별의 운행에 대한 원초적 관심에서 항해술과 의술과 예술이 꽃폈다고 하죠. 당시 완성된 달력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양력이라 하니, 그리 멀거나 단절된 세계 같지는 않습니다.

 

제가 이렇게 설명을 늘어뜨린 것은 <우주보따리>에서 박사님이 외친 ‘유레카’ 때문입니다. 당시 알렉산드로스 도서관에서 교류한 철학자 아르키메데스가 바로 왕관에 담긴 금의 질량 측정법을 고심하다 헐벗은 몸으로 ‘유레카’를 외친 당사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 아르키메데스가 젊은 시절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그 숨은 비밀을 해독하려 별자리 투영기를 만들었기 때문에... 천장에 별빛을 쏘아 올리던 오르골 연주자가, ‘유레카’를 외치던 박사님이, 그리고 저마다의 방법으로 우주와 교신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제안하던 흰 가운의 우주위원 모두가,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고대 철학자와 같은 호기심의 지평 위에서 교감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우주가 드러내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들을 우리는 얼마나 건져 올리고 알아채며 살까요? 세상에 대한 순전한 호기심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생동하게 할까요? 기원전이나 지금이나 그러한 물음과 추동력은 공연 <우주보따리>가 보여주듯 퍽이나 일관되게 꺼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주뿐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 자체도 참 알쏭달쏭하고도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제가 옆에 둔 잿빛 돌이, 조개처럼 앙다문 입에서 사람이 튀어나오던 박스가, 악기를 연주하며 빈 벽에 빛을 쏘아 올리던 오르골 위원이, 우주를 품은 보따리였음을 뒤늦게야 깨닫습니다. ‘질문 행성’에서 왔다는 돌이, 거짓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톨 먼지에도 사방세계가 들어 있다는 경전이 더 이상 고색창연하게만 들리지 않습니다. “항상 일어나는 사건 속에서 관심 갖겠다.” 객석에 모인 이들이 놀듯이 외친 노래가 머릿속을 맴돕니다. 낯선 장소, 처음 보는 이들, 알 수 없는 어울림 속에서 내 안에 이는 공감과 반감을 벗 삼아 무언가 간신히 교신하는 법을, 그리고 그것이 꽤나 재미있었던 경험을 <우주보따리>를 통해 얻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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