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협치 컨퍼런스 '공존 공유  공생'

 

2019.12.12 - 12.13.

 

 

 

 

 

예술의 사회적 가치와 예술가의 역할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모든 것이 허용되는 예술은 이따금 작가의 의도라는 말로 알맹이 없이 그 정당성을 고집부리곤 한다. 그리고 붓을 든 모든 이를 예술가라 부르고 그 사람의 모든 붓질을 의도라 부르는 예술세계에서는 넘쳐나는 해석과 비평이 기꺼이 그것의 날개가 된다. 그리고 누군가는 오늘도 예술의 애매모호함이 '원래 그러한' 것이라 여기며 팔짱을 끼고 눈에 힘을 준 채 무언가를 읽어내려고 한다.

그 이상야릇한 현장에서 어떤 이는 심지어 소통을 '꿈꾼다.' 그리고 적지 않은 관객이 작품 건너편 예술가의 생각을 간결하게 찾아내고 싶어 한다. 다시 팔짱을 끼고. 눈에 힘을 주고. 그리고 예술가는 그 놈의 소통을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요구받고 있으며 그것이 가능하고 의미 있는지를 매순간 고민한다.

소통을 원하는 누군가와 그것의 정당성을 되묻는 누군가, 그 사이에 인쇄된 알 수 없는 문장들이 내가 체험하고 있는 예술세계다. '말'이 되지 않는 문장과 '말'을 기다리는 이의 희망과 '말'에 기대려는 작품 같은 무엇이 파닥거릴 때 슬그머니 걸어 나와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 그것이 예술이다.”

 

미대를 졸업한 내가 10년 전 혼자 끄적인 글 안에는 예술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가 가득하다. 예술이라 불리던 것의 근처 현실속에는, 캔버스 뒤에 숨어 비평 언어에만 집중하던 내가 있었고 후배들을 시켜 자기 작품을 완성하는 선배가 있었으며 포트폴리오와 작가노트 위주로 작품을 이해하는 유통구조가 있었다. 물론 그시절 나는 전시장에 놓인 미술 작품에 한정하여 ‘예술’을 이야기했지만 다양한 형태의 창작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지금도 생각은 크게 다르지않다.

그래서 이 발제문의 시작을 어떻게 해야할지 망설여졌다. 예술은 무엇일까. 그것의 사회적 가치를 이야기 하기에 앞서 나는 이 글에서 전제하는 예술에 대해 매우 개인적인 정의를 먼저 시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내가 경험했던 것들로부터 가능한데, 적어도 예술대학을 나온 사람들의 사회활동으로만 예술을 전제하고 싶지 않은 의도도 있다.

 

‘기존의 관습이나 인식에 질문을 던지는 구체적인 활동, 언어로 설명되기 어려우며 마주함의 경험을 통해서만 전해질 수 있는 현장의 무엇, 학습이 아닌 실험을 통해 스스로에게도 드러나는 삶의 흔적. 혹은 시간과 함께 쌓인 찰나의 결과물

 

분명 얼마 후에는 위의 정의가 불충분하거나 과하다고 후회하는 순간이 오겠지만 오늘은 위의 맥락에서 예술의 사회적 가치, 그것을 하고 있는 누군가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예술은 매우 구체적인 행위를 동반한다. 그리는 것, 노래하는 것, 움직이는 것, 만드는 것, 쓰는 것, 소리내는 것, 표현하는 것 등. 이것은 행위 자체로 존재하며 의미를 갖는다. 즉 쓸모나 기능을 최종 목표로 두지 않는 현재의 행위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 벌어지는지도 중요하다. 돈을 버는 것이 필요한 상황에서, 자신을 사회적으로 알리는 것이 다급한 상황에서, 밀린 집안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앞으로의 진로를 계획해야 하는 상황에서, 몹시 피곤한 상황에서, 누군가를 도와줘야 하는 상황에서, 사회적인 이슈가 대두되는 상황에서 등. 그 상황을 모면하거나 해결하는 데에 별 기능을 하지 못하는 행위를 하는 것, 심지어 그것을 계속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그것이 예술의 사회적 가치를 살필 수 있는 힌트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상황과의 팽팽한 싸움이자 자신을 지켜내는 고집 혹은 선택으로도 보인다. 그리고 외부적 요인이나 일반적 기준으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으려 할수록 그것은 두터운 시간과 함께 자신의 삶 자체로 쌓인다. 나는 그런 삶을 버텨내거나 그저 살아가거나 혹은 즐기는 누군가를 아주 가끔 만나는데 그들은 (적어도 나에게는) 분명한 예술가다. 몇장의 포트폴리오로 그들의 활동을 소개할 수 없으며 유명한 철학자들의 말을 빌려와도 그들의 삶을 설명하기 부족하다. 분명하지는 않아도 강력한 힘이 그들의 삶과 창작활동을 채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자발적인 선택이 계속되기를 응원한다. 심지어 그들의 삶이 더 힘들어지더라도 그 과정과 결말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과 같은 주제로 그들의 활동이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되어야 할 때도 있다. 요즘은 사회적 예술, 예술의 사회적 개입, 사회문화운동 등의 표현과 함께 그 순간들을 자주 접한다. 이러한 현상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예술이 사회적 의미로 해석되는 층위가 어떤 관점을 전제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래서 모호한 생각들을 그림으로 표현해보았다. 어떤 기준에 의해 한 개인의 예술 행위, 혹은 삶의 일부가 사회적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더불어 그 기준이 발생된 이유, 기준의 위치, 기준과 연관된 사회적 요소 등도 궁금하다. 예술이 사회를 바꾸고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고 인간을 치유한다는 정책적 주문이 울려퍼지면 대체 왜 그런 기대를 갖는지, 그에 따라 어떤 뉘앙스의 예술을 주로 보려고 하는지 알고 싶어지기도 한다. 명쾌하고 쾌활하고 따듯한 예술도 물론 있지만 불안하고 흐리멍텅하고 우울하고 냉소적인 예술도 있기 때문이다. 예술이 어떤 뉘앙스를 띄든 각기 다른 맥락의 사회적 가치를 가질 수 있다. 그 가치를 폭넓게 살피기 위해서는 다양한 삶의 기준에서 예술을 해석하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예술, 혹은 예술가의 삶을 구체적 활동의 시간, 깊이, 고민의 두께로 읽어내는 과정도 요구된다. 그때 예술의 단면을 향하던 시선은 더 많은 요소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예술의 두께를 바라보게 된다.

 

 

 

예를 들어, <비기자>가 2017년 진행했던 공기청정기 제작 프로젝트 ‘숨정화기 playing Zine & Kit 제작’을 살펴보자. 심지어 이 프로젝트는 서울문화재단의 ‘서울을 바꾸는 예술’ 지원사업 안에서 진행되었다. <비기자>는 시민들이 간편하게 만들 수 있도록 우유박스를 이용한 공기청정기 제작방식을 매뉴얼화하고 워크숍과 책자를 통해 그 과정을 외부에 소개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위 그림에서, 기준면 위에 드러난 특정활동들이다. 예술가가 개발한 공기정청기, 시민들과 문화적 경험을 나누며 진행한 워크숍, 예술가의 실험 과정이 담긴 책자 등이 그안에 포함된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와 연관된 잠재적 활동이 없었다면 이 공식적 프로젝트는 시작조차 될 수 없었다.

 

 

2017 ‘숨정화기 playing Zine & Kit 제작’ 프로젝트에서 소개한 우유박스형 공기청정기(좌)와 시민워크숍 현장(우)

 

 

<비기자>의 멤버인 한 예술가는 어린시절부터 물건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것을 좋아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가전제품을 뜯어보고 버려진 물건을 주워와 작동원리를 탐구했다. 그것이 예술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예술가 역시 그것이 예술이라 주장하지 않으며 예술이 되어야 할 이유를 애써 찾지 않는다. 단지, 관심이 있는 것을 계속 할 뿐이다. 누군가는 뭐하러 그런 행위를 계속하냐고, 현실에 도움이 되냐고, 그런 기술을 생계수단으로 활용해보라고 하지만 그는 그 말에 답변을 하는 대신 나사를 풀고 전동장치의 성능을 실험한다. 그런 시간이 30년 이상 이어지는 가운데 그는 공기청정기의 내부구조가 그리 복잡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중고가구와 환풍기를 이용해 공기청정기를 만들었다. 오렌지 껍질을 그 위에 올려두면 향기가 은은하게 퍼진다는 것도 발견했다. 프로젝트가 기획되기 전부터. 지원사업이 설계되기 전부터. 여전히 이것이 예술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흥미로운 것을 계속 했다.

 

 

한 예술가가 중고가구를 잘라 공기청정기를 만들었던 과정

 

 

그러다 <비기자>가 지원사업에 참여하면서 그가 만들었던 공기청정기의 재료와 제작방식을 보다 간편하게 정리해 프로젝트로 소개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프로젝트에서 드러나지 않는, 드러날 수 없는 누군가의 경험 혹은 행위를 우리는 어떻게 읽어낼 수 있을까. 물론 그것을 모두 드러내 예술의 사회적 가치로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꼭 그럴 필요도 없다. 단지, 개인 삶의 일부처럼 보이는 순간들을 예술의 사회적 가치와 연결해 총체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시선을 갖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많은 것을,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예술의 사회적 가치가 발생되는 상황과 층위에 대해 폭넓은 접근이 필요하다.

그러나 예술이 더욱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 차별화된 아이디어와 추진력을 갖추기를 기대하는 시선도 있다. 위의 프로젝트를 예로 들자면 “공기청정기의 종류를 다양하게 제작해보면 좋겠다”, “환경단체와 협력해서 프로젝트를 확장하면 좋겠다”, “공기청정기 외에 미세먼지와 관련한 시리즈 작업을 이어가면 좋겠다” 등의 의견으로 그 시선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마치 아래 두 그림과 같은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말들은 분명 애정을 담고 있지만, 예술의 보이지 않는 속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아이디어들로 읽히곤 한다. 그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가늠할 수 없는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혹은 이기적인 선택이나 비효율적인 실천도.

그렇다면 누군가는, 혹은 사회는 왜 예술가들이 창작의 시간을 쌓도록 응원하는 것보다, 드러난 성과나 결과를 확대해나가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예술가라는 개인의 삶, 혹은 예술의 지난한 과정보다 예술이 사회적 가치를 증명해내는 다양한 현장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예술을 이해해보려는 질긴 질문이 그리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나는 질문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답답함을 마주하지 않은 채 명쾌한 예술활동의 유형들로 예술의 사회적 의미와 관련한 논의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 나는 여전히 예술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그 모르겠음이 예술가들의 삶에 대한 궁금함으로 이어지지 못함이 더 아쉽다.

그렇다면 이 예술가들의 역할은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요즘은 정책화된 기획사업 안에서 예술가의 역할을 몇가지 문장들로 만난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지역의 이슈를 발굴하고 커뮤니티를 활성화하는. 하지만 인간을 향해 명시된 그 구체적인 기대들의 오히려 반대편에서 예술가의 역할을 상상하게 된다. 사회가 무엇을 문제화하는 관점에 질문을 던지는 것, 무언가가 사회적 이슈로 가시화되는 과정을 살피는 것, 커뮤니티에서 소외되는 개인성을 들여다보는 것, 그리고 미련하게 자신의 선택을 해나가는 것. 현실적 상황들이 그 선택을 방해하거나 망설이게 만들더라도. 교육기관에서 학습한 예술로 사회적 이슈와 관련한 해결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앞선 프로젝트 사례에서라면, 예술가의 역할은, 공기청정기를 시리즈로 만들어 환경문제와 메이커스 문화를 연결하는 활동을 가속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공기청정기가 되든 아무것도 되지 않든 계속 물건을 줍고 해체하고 다시 조립해보는 것이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어떤 가치인지,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함께 해보기 위해서는 어떤 장치와 과정이 설계되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실행해야 하는 것은 기획자나 매개자의 역할이다.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이 자신의 태도이자 일상을 지켜내는 구체적인 행위 외에 다른 것이라고 나는 기대하지 않는다. 자신의 목소리를 삼킨 채 번뜩이는 아이디어나 경력을 증명해내는 것이 다급한 사회 안에서, 자발적 관점과 재미를 지속시키려는 개개인들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사회적이다. 예술가로 불리기 이전의 개인, 그들이 각자의 관심과 의지를 지속시키며 존재하는 것 자체가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삶의 방식과는 다른 방향성으로 그들이 팽팽한 힘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술가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것과 다르다. 예술가는 사회적 변화를 위한 기능인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방향성을 지속하는 존재로서 중요하다. 사회가 급하게만 나아가지 않게, 누군가가 소외되는 인식구조가 익숙해지지 않게 그들은 각자의 개인성을 놓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소리를 모으고 쓸모없는 무언가를 만들고 흩어지기 좋은 이야기를 애써 주워담으며. 그것을 하고싶어 하는 본인 스스로에게 생활의 속도도 맞추며.

 

 

 

 

예술이 사회적 의미로 해석되는 기준 아래에 묵직하게 자리잡고 있는 어떤 시간들을 보자. 이것은 어떤 관점에서 포착되지 못하는 개개인의 삶이자 예술적 가능성이 아닐까. 이것은 사회를 알록달록하게 꾸미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기 다른 삶의 두께를 보여주기 위해 존재한다. 예술의 사회적 가치는 이 시간들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축적될 수 있는 환경 안에서 불쑥 혹은 필연적으로 솟아오를 수 있다. 그러나 솟아오르기를 기대하지 않는 어떤 시간도 있다. 그것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깊은 흐름을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일반적인 기준 위로 솟아올라 모두에게 보이는 가치로움이 아니라 가늠할 수 없을만큼 두꺼워진 누군가의 시간이다. 그곳에 예술의 또 다른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가 그곳을 바라보는 이유는, 그것을 알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수원청소년진로박람회 진로․직업체험부스에서

최근 제작한 놀잇감을 매개로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할 수 있는 예술가의 진로를 소개하였습니다.

 

 

 

 

 

 

 

 

 

 

 

 

 

 

 

 

안티카페 손과얼굴이 주관한 <작업과 생업> 워크숍에서

비기자의 활동 경험과 고민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 워크숍을 준비하며

 

쓸모와 성과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그 사회를 벗어나거나 모른척하지 않으면서 ‘예술’이라는 것을 하는 것, 그것을 개인과 사회가 ‘가치가 있는 활동’으로 인정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 자체를 굶지 않으며 이어가는 것이 예술가에게는 ‘생존’이다.

<비기자>는 현재는 생존해있으나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그렇기에 현재 <비기자>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이제까지 어떻게 생존해왔는지, 현재 어떤 방식으로 생존하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생존 전략을 계획하고 있는지 정도이다. 그리고 이중에서 가장 목에 핏대를 세우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제까지 어떻게 10년 넘게 생존해왔는지’이다.(<비기자>라는 이름으로 혹은 다른 이름으로) 심지어 이런 것도 해봤다, 해보니까 진짜 힘들더라, 못해먹겠더라, 그럼에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어떤 식으로 찾게 되더라, 가끔은 그런 이유를 찾지 못해도 하게 되더라, 이런 이야기를 경험의 흔적들을 바탕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물론 대안은 없다. 대안은 모른다. 이런 세상에서 대안이 있다고 외치는 건 무책임하다. 그래서 우리가 해봤던 것을 작은 실마리로 던져 같이 나누고자 한다. 어차피 대안이 있든 없든 우린 이 근처에서 살아갈 테니까. 어딘가로 떠나버릴 입장도 아니고 용기도 없다면 삶(혹은 예술)의 태도를 바꿔볼 결단이 각자에게 있을지 함께 생각해보자.

 

 

 

구성

 

① 비즈니스 생산모델을 위한 프로세스

-비공식적 작업을 공식적 프로젝트로 기획하기

-삶의 조건이 변화했을 때 창작도 변화시키기

-기획, 교육, 공연, 전시, 연구, 리서치, 영화, 컨설팅, 강의까지 연결하며 하기

 

② 예술가를 위한 사업계획서

-비언어적인 실험들을 언어로 설득하기

-기획서 작성 경험 나누기

-행정언어에 기죽지 않기

 

 

 

 

사진 : 안티카페 손과얼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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