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에서는 2012년부터 문화예술교육 비평 웹진 <지지봄봄>을 발행하고 있습니다.

비기자는 2018년 발행된 웹진 <지지봄봄> 24, 25호의 기획, 편집에 참여하였고 그 통합본이 나왔습니다.

 

 

발행일 / 2018년 11월

발행처 /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디자인 / 6699press

인쇄 / 신사고하이테크

주최 / 문화체육관광부, 경기도

주관 /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협력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웹진 보러가기 : http://ggarte.ggcf.kr/?p=23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웹진 [이음] 2호_장애 예술인 역량강화 : 교류와 협력

 

 

 

장애 예술인 창작 역량 강화를 둘러싼 질문들 우리는 만나려 하는가 

 

최선영 / 창작그룹 비기자


 

 

장애 예술이 장애인의 사회참여 또는 직업군 개발을 위주로 활성화되고 있지는 않은가. 

예술이 창작자 또는 그 주변 사람들에게 그러한 목적으로 전제될 때, 그 예술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까. 

우리는 왜 창작을 할까.

 

이것은 내가 올해 초 「장애 예술인 창작 활성화 프로그램 개발 연구」에 공동연구원으로 참여하며 혼자 노트에 적었던 질문들이다. 국내의 장애 예술은 다른 나라에 비해 창작의 시간이 오래 쌓이지 않았기에 이제야 그것의 가치와 방향을 논의하는 시점에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장애 예술인의 창작 활성화는, 장애인의 삶이나 몸의 속도와 어긋날 정도로 활발하게 공식 활동을 하는 것을 전제로 두곤 한다. 대학 교육만 봐도, 비장애 예술인 대부분은 예술 관련 전공자이지만 장애인은 대학 진학도 힘들고 기본적인 예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매우 적다. 따라서 장애 예술인의 창작은 일반적 시각에서의 ‘창작이 활성화되고 있는 상태’가 아닌 여러 차원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특히 그 상태가 ‘장애 예술인의 역량이 강화된 상태’와도 겹쳐서 인식된다는 점에서, 과연 그 상태는 어떤 사회적 기대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지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어떤 장애 예술인이 수차례 문화행사에 참여하고 작품도 유명해졌으나 개별 감각과 표현을 마주할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하고 있다면, 혹은 활발한 공식 활동을 그가 원치 않는다면, 그것은 어떤 상태일까. 장애인의 사회참여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창작활동이 그것의 돌파구로만 작용해서는 안 되며 우리 스스로 창작활동을 그 위험성 안에 놓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 순간 미련하도록 근본적인 질문이 이어지지 못하면 우리는 눈에 띄는 창작의 순간으로 우르르 뱃머리를 돌리고 그 상태를 활성화하기 위한 방법들만 기획 해나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질문을 찾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국내의 사례는 다양할까.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내에는 여러 논의를 끌어낼 만한 개별 시도들이 많지 않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관련 프로그램이 얼마나 여러 곳에서 많이 실행되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다양한 논의점을 담고 있느냐이다. 공공 지원 체계 내에서도 장애 예술인의 장애특성이나 개별 감각을 고려한 창작 프로그램은 다양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특히 장애 예술인의 창작 지원은 조금씩 늘고 있고 장애인의 문화 향수 지원도 이어지고 있지만 개별 창작을 내밀하게 살피거나 전통적인 창작 외의 다른 방식을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부족하다.

이렇듯 장애 예술인 대상의 창작 프로그램이 부족하다 보니, 비장애 예술인과 교류하거나 협업하는 활동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서로 다른 창작자들 간의 네트워크나 창작활동은 각자에게 기존의 자기 작업을 뒤흔들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함에도 말이다. 새로운 시선이나 표현을 경험하거나 배우며 따로 또 같이 무한한 실험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장애 예술인이 참여할 수 있는 창작 프로그램은 ‘다른’ 감각과 표현들 간의 ‘만남’을 다채롭게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장애인의 삶이 일반화된 사회로부터 오랜 시간 격리되고 보호, 관리되어 왔던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이젠 장애와 비장애가 만나는 현장마저도 기획되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예술은 이러한 상황의 부자연스러움, 부조리함을 소재화하거나 비판하는 것을 넘어 장애와 비장애가 만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했던 ‘장애 예술인의 창작 활성화’ 또는 ‘장애 예술인의 역량 강화’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접근해볼 수 있지 않을까.

 

장애 예술인과 비장애 예술인의 창작이 함께 활성화되는 것, 또는 역량이 함께 강화되는 것.

 

나는 무엇보다 서로가 만나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이것은 누가 누구를 만나주는 것이 아니다. 누가 누군가에게 배우기 위해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일단 서로의 생각이나 감각, 표현, 혹은 존재에 대해 자발적 관심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장애 예술인과 창작을 하는 비장애 예술인의 활동이 ‘착한’ 일로 평가되지 않아야 하며 비장애 예술인과 교류하는 장애 예술인이 ‘의지하는’ 태도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한다. 이러한 상태가 여러 현장에서 발생되고 다양한 장르 안에서 지속된다면 그것이 누구에게든 창작이 활성화되는 상태이자 역량이 강화되는 상태가 아닐까.

이러한 관점에서 국내의 여러 사례를 조사해보았을 때, 장애와 비장애가 만나는 장이 섬세한 기획 안에서 이루어진 사례는 많지 않았다. 그것이 지속되는 곳은 더욱 찾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사례를 언급하자면 ‘인포숍카페별꼴’에서 진행한 <에이아카이브: 소리(a-archive: sound)>(이하 ‘에이아카이브’)를 살펴볼 수 있다. 서울시 성북구에 위치한 인포숍카페별꼴(이하 ‘별꼴’)은 비영리단체 ‘장애인문화예술 판’이 운영하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우러지는 대안 공간으로 2011년에 문을 열었다. 매주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누구나 출입할 수 있는 카페로 운영 중이다. 도서관이나 서점에 두지 않은 책이나 진(ZINE, 개인이나 그룹이 이윤과 관계없이 자신의 힘으로 소규모 인쇄하는 출판물), 전단 등을 모은 아카이브가 있고, 소수 집단과 사회 운동, 서브 컬처에 관련된 전시, 영화 상영, 라이브, 워크숍 등을 하고 있다.

‘에이아카이브’는 2016년 성북문화재단의 문화다양성 사업 지원을 받아 참여자들이 자기를 표현하는 방식을 다 같이 생각해 보고, 자신만의 소리진(ZINE)을 만들어 전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장애인만을 참여대상으로 정해두고 기획하지 않았다는 점, 그렇기 때문에 장애인이 다양한 사람 중 일부로 참여하고 어울릴 수 있었다는 점이 에이아카이브의 큰 특징이다. 그러나 참여하는 사람 중에는 언어가 다른 사람,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을 하는 사람, 언어 장애가 있는 사람, 신체적인 장애로 기존의 악기나 도구를 다루는 것이 어려운 사람 등이 뒤섞여 있었다.

별꼴은 노들장애인야간학교(이하 ‘노들야학’)의 발달장애인 수업과 연계하고 미디어 아티스트 팀 다이애나밴드와 협력하여 에이아카이브를 진행하였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포함되어 13명의 참여자가 2개월 간 10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결과 전시회를 개최하고 영상작품을 상영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장애 예술 자체를 강조하기보다 문화다양성 담론 안에서 활동 맥락을 소개하였다.

자세한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다이애나밴드, 노들야학 교사가 함께 사전 회의를 통해 중증장애인 참여자 수요 조사를 진행했다. 집에서 이동이 쉽지 않은 중증장애인 참여자들을 만나기 위해 노들야학이나 집으로 찾아가 사전 연구 워크숍을 5회 진행했다. 이후 외부 참여자(주로 비장애인, 예술가, 연구자, 지역주민)를 모집했고, 사전 연구 워크숍에 참여한 중증장애인 참여자와 집중 워크숍을 5회 진행하고, 다 함께 전시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참여자들은 각자의 창작물(목소리나 주변의 소리를 녹음한 카세트테이프 작업물, 중증장애인이 연주할 수 있는 신시사이저, 점자를 이용한 사운드 인쇄물 등)을 만들었다.

이 활동은 장애 예술인이라고 불리거나 그러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참여했던 사례는 아니다. 장애 예술인만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기획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소리를 발견하고 표현해보려 했던 지점은 충분히 예술적 가능성을 갖는다. 오히려 이러한 사례가 장애 예술을 폭넓게 상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사례는 이러한 활동을 여러 형태로 지속하고 있는 별꼴의 활동 전반과 연결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별꼴은 2011년부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경계 없이 어울릴 수 있는 현장을 일상적, 문화적, 예술적, 사회적으로 만들어나가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와 맞물려 문화나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장애인이 보다 편하게 이곳을 방문하고 있으며 장애 여부를 떠나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만나고 소통하고 있다.

또한 이 사례는 장애와 비장애가 서로를 만날 수 있는 현장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장애 예술인과 비장애 예술인의 창작이 함께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만남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전의 장애 예술인 대상 역량강화 프로그램들이, 대부분 비장애 예술인의 예술 언어를 학습하고 경험하는 것으로 진행되었지만 이와는 다른 관점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언급했듯, 장애 예술인과 비장애 예술인 모두의 창작을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특히 장애 예술을 사회적으로 특별한 위치에 두지 않기 위해 이러한 모색은 더욱 필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왜 창작을 할까’라는 질문은 스스로이자 서로를 향한 질문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우리는 왜 함께 창작을 해야 할까.

 

그리고 ‘다른’ 감각들이 만나 함께 창작을 하기 위해서는 질문을 조금 바꿔볼 수 있다.

 

우리가 함께 창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함께 창작하고 싶어 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이 부족한 것일까.

어쩌면 창작 활성화 프로그램이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관심을 기획된 자리로라도 촉발시켜야만 하는 상황 때문이 아닐까.

 

우연한 만남이든 기획된 만남이든 우리는 그 자리에서 누군가의 창작역량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해볼 수 있는 것을 찾아보아야 한다. 창작, 혹은 예술은 기대했던 답을 찾게 된 상태. 그래서 사회적 존재 증명을 하게 된 상태. 예술가라고 불리게 된 상태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태가 될지 모른 채로 현재 가능한 것, 혹은 할 수밖에 없는 것을 해보는 그 순간에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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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아카이브: 소리> 전시 ⓒ 우에타 지로

 

 

 

* 「장애 예술인 창작 활성화 프로그램 개발 연구」(2018,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는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가 수행하였다.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의 문화예술교육 비평웹진
<지지봄봄> 25호가 발행되었습니다.

 

비기자는 이번호에 기획과 편집에 참여했습니다.
"문화예술교육과 연결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읽어보세요^^

 

http://ggarte.ggcf.kr/?p=23

 

 

 

 

 

 

25호 곁봄 
쉽게 달라지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해보고 있는 것들

 

 

“가위바위보에서 졌어요.”

얼마 전 진행한 한 중학교 문화예술교육 첫 시간, 학생들에게 어떻게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물었더니 곳곳에서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자신의 관심사나 참여의지와는 상관없이 가위바위보에 져서 이 프로그램에 ‘배정’된 학생들. 언제부턴가 이런 학생들을 다른 수업에서도 종종 만나게 되어 수업 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혹시 가위바위보에서 졌나요?”라고 물어보면 학생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 순간, 교육 현장을 당장 이끌어가야 하는 사람은 학생들의 개별 의지가 교육 참여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된 이유, 그 이유와 연관된 여러 문제들, 그것들 간의 복잡하고도 유기적인 연관성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이 준비해온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애써 힘을 내야 한다. 


강사뿐만 아니라 문화예술교육에 관여하는 실무자, 기획자, 예술가, 자문위원 등 많은 사람들이 현장의 문제를 모르지 않는다. 큰 사업들은 교육 참여자의 욕구나 변화에 상관없이 상위 조직으로부터 기획되어 내려오고 단체나 강사는 개별 고민을 실험할 여유나 여력이 사라지고 교육 참여자는 자발적 관심보다는 다른 이유들로 문화예술교육에 참여하게 되곤 한다. 지원기관, 단체, 교육 참여자의 입장과 상황은 10년 사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 강사비도 제자리걸음이다. 어쩌면 큰 변화를 기대했던 것이 애초에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야기는 지원사업 관련 간담회, 좌담회, 자문회의, 결과워크숍, 인터뷰 등에서 반복적으로 흘러나온다. 어쨌든 이제 무엇이 얼마나 문제인지 말하는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지쳐가고 있다. 그리고 과연 그 내용을 총체적으로 듣고 현장을 위한 개선책을 마련할 누군가가 있는지, 바로 그 부분에서 다시 한 번 무기력해진다. 사업 담당자마저도 다음 해에 그 자리에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 사람이 자의든 타의든 자리를 떠나게 되는 복잡하고 현실적인 원인들도 안다. 그렇게 쉽게 달라지지 않는 것들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사안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에 대한 진단이나 비판만큼, 각자의 교육 현장에서 해보고 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도 필요해 보인다. 왜냐하면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겠으나) 제도나 시스템은 쉽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육 안에서 한 사람 한 사람 소중히 만나고 함께 경험을 만들어가려는 사람들에게는 그 거시적인 문제의 해결만큼이나, 개별적이고 일상적인 문제에 대한 ‘다른’ 접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다른’ 접근, 혹은 시도는 주로 거시적인 문제보다 덜 중요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정말 덜 중요할까? 사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이번 [지지봄봄]은 무엇의 중요도를 강조하기보다, 문화예술교육과 연결된 각자에게 덜 중요하게 ‘여겨졌던’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우리는 이렇게 쉽게 달라지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무엇을 해보고 있을까. 도저히 무엇도 할 수 없을까. 거시적인 문제가 달라지지 않는 상황에서 개별적인 접근이나 시도는 큰 의미가 없을까. 


다시 가위바위보에 져서 어쩔 수 없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들과의 만남으로 돌아가 보자. 하고 싶었던 프로그램에서 탈락된 아쉬움 혹은 짜증 때문에 몇몇 학생들의 표정이 좋지 않다. 어서 이 시간이 끝나길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 학생들에게 강사는 며칠 동안 준비해 온 무언가를 어떻게 같이 해보자고 해야 할까. 첫 시간부터 너무 솔직한 학생들 덕분에 담당자 혹은 담임 선생님은 조금 난감하지만 프로그램 별로 정해진 인원은 맞춰야 하고, 이 프로그램도 몇 개월간의 활동을 바탕으로 ‘뭐라도’ 성과를 내야 한다.


그 순간 우린, 교육의 기획과정이 얼마나 섬세하지 못했는지 비판하는 것을 할 수 있으나 그것이 당장의 교육 현장을 해결해줄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고 적당히 각자의 시간을 때우다 헤어지는 것은 최선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때 강사나 기획자, 담당자가 해보게 ‘되는’ 것들이 매번 탁월한 선택이 되지 못하기도 한다. 미봉책과 임기응변이 지속되다가 교육 기간의 절반이 지나가기도 한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봤는데 역시나 잘 안 되는구나 느끼며 수업이 끝날 때마다 좌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지지봄봄]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성공한 사례들의 소개로 채워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보다 [지지봄봄]이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어떤 순간들을 들여다볼 수 있기를 바란다. 묘하게도 교육에 참여했거나 관여했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난 후에 오히려 성공적이었던 어떤 선택이나 해법보다 누군가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려 했던 의지를 기억할 때도 많기 때문이다. 잘 해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던, 그러다 잘 되기도 했지만 참 어설프고도 힘들었던, 그래서 잘 된 결과보다 지난하고 미련했던 과정이 자꾸 생각나는, 바로 그것을 여러 현장에서 듣고 싶다. 이것은 교육 현장에서 오늘도 어김없이 이어질 고민들에 대한 기대이기도 하다. 문화예술교육과 관련한 제도나 시스템이 현장 중심으로 싹 다 개선되면 정말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 날이 결코 금방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많은 이들이 예상하고 있다. 그렇다면 질문을 좀 달리하여,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각자 해보고 있는 여러 시도들이 힘을 잃지 않고 지속될 수 있다면 어떨까. 그 지속을 위해 역시나 제도나 시스템이 개선될 필요도 있겠지만, 오로지 그것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렇게 많은 문제들이 쉽게 달라지지 않고 있음에도 무언가를 여전히 해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쯤에서, 문화예술교육 강사이기도 하고 교육 관련 기획자이기도 하고 예술가이기도 하고 이따금 자문위원이기도 한 내가 ‘쉽게 달라지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해보고 있는 것들’을 풀어놓고자 한다. 


나는 일반적으로 문제라고 상정된 것들을, 내가 이끌어야 하는 상황/만남/교육/활동 안에서 문제가 아니라 상태(condition)로 두려고 노력한다. 가위바위보에 져서 내 수업에 온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다른 예를 들자면 참여 인원수에 비해 넓지 않은 교육 공간, 프로그램에는 관심 없는 담당자나 보조자, 자기표현을 하는 데에 다른 사람들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한 교육 참여자, 넉넉하지 않은 예산이나 시간 등. 그동안 마주했던 문제, 아니 ‘상태’는 참으로 다양하고도 복합적이었다. 하지만 사실 나도 매번 마음의 평정을 찾고 모든 상황을 ‘상태’로만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불과 두 달 전 자유학년제 수업에서도 단 두 시간 만나는 중학생들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이런 태도를 보이면 수업을 할 수 없다고 혼자 열을 올렸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나를 화나게 했던 것은 학생이 아니라, 교육 참여자의 관심사와 무관하게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그 안에 학생들을 배정해 넣은 어떤 운영구조 혹은 누군가의 욕심이었다. 사실 학생들의 낮은 참여 의지만을 문제로 두는 것은 나의 가장 편한 논리가 아니었을까. 요즘 학생들은 어떻더라, 그래서 문제더라 하는 일반적인 말들이 더욱 쉽게 내 머릿속을 채워 어떤 ‘상태’를 더 문제로 견고히 만들었을 것이다. 


다시 한 달이 지나, 비록 다른 중학생들이었지만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었을 때, 나는 학생들이 얼마나 이 프로그램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기 힘든 ‘상태’인지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였다. 그래서 활동의 내용과 방식을 완전히 바꿔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위바위보에 져서 왔나요?”라고 묻는 여유도 부려보았는데 역시나 그렇다는 답변을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아이고, 오늘 또!’이러고 화를 가라앉히느라 애를 먹었을 텐데, 마음을 달리 먹으니 학생들이 딱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래, 그럼 오늘 한 번 너희들의 예상을 뛰어넘게 재미있게 놀아보자’ 다짐하고 이런 저런 재료를 꺼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활동은 이렇게 저렇게 마무리되었고 나는 지난번과는 다른 힘을 얻었다. 프로그램 진행이 잘 되고 안 되고를 떠나, 나의 태도가 교육 현장과 앞으로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함께 그 시간을 보낸 사람들에게도 전해질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나는 또 다른 ‘상태’를 계속 만나게 될 것이다. 어느 순간 또 이건 진짜 문제다! 하며 분노하고 있을지 모른다. 어찌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은 그렇게 쉽게 달라지지 않은 채로 우리에게 계속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지치지 않고 각자의 고민을 지켜내는 힘은 ‘그럼에도 해보고 있는 것들’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이것은, 교육 현장의 어려움을 강사나 기획자, 담당자의 개별적 시도로만 풀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이들이 각자의 경험과 태도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기를 응원하고 싶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활동의 의미를 각자가 찾기에 어렵지 않을까. 더불어 교육 현장의 현실적 어려움, 구조적 문제에 대해서 거시적인 관점에서 발언해야 하는 것이 사업적, 공식적 역할인 사람들이 보다 좀 더 적극성을 띄기를 기대한다. 변화를 기대하기 힘든 상황 속에서 누군가는 오늘도 교육이라는 것을 이렇게 저렇게 해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하는 여러 사람들의 입장, 그와 관련된 상황들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누군가는 지치지 않고 교육 현장에서 무언가를 해보고 있어야 하고, 누군가는 그러한 시도들이 담아내는 의미와 어려움을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이번 [지지봄봄]은 이중 전자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사실은 후자의 누군가가 이러한 내용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해보려는 사람, 그것을 보고 들으려는 사람들의 시도는 당장 어떤 결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그것과 연관된 사람들에게 여러 방식으로든 기억될 것이다. 이건 쉽게 달라지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버텨보자는 것과 다르다. 스스로에게도 기억될 만한 시도를 이어가보자는 것이다. 우수하거나 우수하지 않은 시도는 없다. 가치를 판단할 수 없다는 그 가능성을 안고, 각자의 자리에서 가능한 것을 해보자. 날선 눈으로 여기저기의 사례나 사업구조를 평가하고 비판하는 시간만큼. 

 

 

 

 

최선영

예술가이자 창작그룹 ‘비기자’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비기자’는 무한경쟁시대에, 각기 다른 생각들이 꾸준하게 비길 수 있는 현장을 인문학적 문화예술 활동으로 만드는 창작그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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